4. 용서 너머

여기에 빛의 근원이 있다 — 지각되지도, 용서되지도, 변모되지도 않은 것이. 다만 알려질 뿐인 것이. 이 수업은 앎으로 이끌겠지만, 앎 자체는 여전히 우리 교과 과정의 범위 너머에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영원히 말 너머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 말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다만, 학습이 갈 수 없는 그 너머에 있는 실재 세계에 이르는 자는 누구든지, 실재 세계를 넘어 나아갈 것이나 다른 방식으로 그리할 것이라는 것만을 기억하면 된다.

학습이 끝나는 곳에서 하나님이 시작된다. 학습은 자신이 시작하는 곳에서 완전하며 그 어떤 끝도 없는 하나님 앞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성취될 수 없는 것에 머무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배워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앎에 대한 준비는 여전히 성취되어야 한다. 사랑은 배워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의미는 사랑 자체 안에 있다.

그리고 학습은 그대가 사랑이 아닌 모든 것을 인식했을 때 끝난다. 사랑이 아닌 모든 것이 방해이며, 사랑이 아닌 모든 것이 되돌려져야 하는 것이다. 사랑은 배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사랑을 알지 못한 때는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그대의 창조주의 임재(Presence) 안에서 학습은 쓸모가 없다. 그대에 대한 창조주의 인정과 그에 대한 그대의 인정이 모든 학습을 훨씬 초월하여, 그대가 배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사랑에 대한 앎과 사랑의 하나뿐인 의미로 영원히 대체되기 때문이다.

그대의 형제와의 관계는 그림자의 세상에서 뿌리 뽑혔다. 그 관계의 거룩하지 않은 목적은 죄책감의 장벽을 안전하게 통과해, 용서로 씻기고, 빛의 세상에 빛나며 굳게 뿌리내린 채로 놓였다.

빛의 세상으로부터 그 관계는, 어둠 위로 높이 들어 올려져 천국의 문 앞에 부드럽게 놓인 채로, 자신이 걸어온 그 길을 따르라고 그대를 부른다. 그대가 결합된 그 거룩한 순간은 다만 사랑의 전달자일 뿐이며, 용서 너머로부터 보내져 용서 너머에 놓여 있는 모든 것을 그대에게 상기시킨다.

그러나 그 거룩한 순간이 기억될 것은 바로 용서를 통해서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용서의 거룩한 자리에서 그대에게 왔을 때, 그대는 그 밖의 다른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며, 기억은 학습만큼이나 쓸모없어질 것이다. 그대의 유일한 목적이 창조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모든 지각이 정화되고 순화되어 마침내 영원히 제거될 때까지는 이것을 알 수 없다.

용서는 오직 참되지 않은 것만을 제거하니, 세상에서 그림자를 걷어 내고, 그 부드러움 안에서 안전하고 확실하게 세상을 새롭고 깨끗한 지각의 밝은 세상으로 옮겨 간다. 용서가 지금 그대의 목적이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평화가 그대를 기다린다.

우리는 앞서 어떤 상황이 온전히 진리에 바쳐졌을 때, 평화는 필연적이라고 말했다. 평화의 성취는, 그 헌신의 온전함을 안전하게 가정할 수 있는 기준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믿음 없이는 평화가 결코 성취되지 않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진리를 유일한 목표로 삼아 바쳐진 것을 믿음이 진리로 이끌기 때문이다.

이 믿음은 관련된 모든 이를 아우른다. 오직 그렇게 해야만 그 상황이 의미 있고 온전한 것으로 지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 안에 관련되어야 하니,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믿음은 제한되고 그대의 헌신은 불완전할 것이다.

모든 상황은, 올바르게 지각되면, 하나님의 아들을 치유할 기회가 된다. 그리고 형제는 치유된다. 그대가 그에게 믿음을 내놓아, 그를 성령에게 주고 그대의 에고가 그에게 요구할 모든 것으로부터 그를 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그대는 형제가 자유로운 것을 보며, 성령도 이 인식(vision)을 나눈다. 그리고 형제가 이 인식을 나누기에 그는 이를 준 것이며, 그렇게 하여 그는 그대를 통해 치유한다.

형제와 하나 된 목적 안에서 결합하는 것이야말로 이 목적을 실재하게 만드니, 그대가 목적을 온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치유다. 몸은 그대가 몸 없이 왔고, 모든 치유가 자리한 그 마음(Mind)과 결합했기에 치유된다.

몸은 치유될 수 없으니, 몸은 스스로를 병들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몸에는 치유가 필요 없다. 몸의 건강이나 질병은 전적으로 마음이 몸을 어떻게 지각하는지와, 마음이 몸을 어떤 목적으로 쓰려 하는지에 달려 있다.

마음의 한 조각이 자신을 보편적 목적(Universal Purpose)에서 분리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몸은 마음의 무기가 되어, 분리가 일어났다는 그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이 보편적 목적에 맞서 쓰인다. 그렇게 하여 몸은 환영의 도구가 되어, 그에 따라 행동한다 — 거기 없는 것을 보고, 진리가 결코 말한 적 없는 것을 들으며, 미친 듯이 행동하고, 광기에 갇힌다.

믿음 없음이 곧장 환영으로 이어진다는 우리의 앞선 진술을 간과하지 말라. 믿음 없음은 형제를 몸으로 지각하는 것이며, 몸은 결합의 목적으로 쓰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대가 형제를 몸으로 본다면, 그대는 그와 결합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조건을 세운 것이다.

형제에 대한 그대의 믿음 없음이 그대를 그에게서 분리시켰고, 그대들 둘 다를 치유받는 것에서 떨어뜨려 놓았다. 그렇게 하여 그대의 믿음 없음은 성령의 목적에 맞섰고, 몸을 중심으로 한 환영을 가져와 그대들 사이에 세웠다. 그리고 몸은 병든 것처럼 보일 것이니, 그대가 몸을 치유의 "적"이자 진리의 반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믿음이 믿음 없음의 반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어려울 리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에서 직접 따라 나오는데도, 믿음과 믿음 없음이 작용하는 방식에서의 차이는 덜 명백하다. 믿음 없음은 언제나 제한하고 공격하려 하며, 믿음은 모든 제한을 없애고 온전하게 만들려 한다.

믿음 없음은 하나님의 아들과 그의 창조주 사이에 환영을 끼워 넣으려 하며, 믿음은 그들 사이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장애물을 없애려 한다. 믿음 없음은 온전히 환영에 바쳐져 있고, 믿음은 온전히 진리에 바쳐져 있다. 부분적인 헌신은 불가능하다.

진리는 환영의 부재이고, 환영은 진리의 부재다. 둘은 함께 있을 수 없으며, 같은 자리에서 지각될 수도 없다. 둘 다에 자신을 바치는 것은 영원히 성취할 수 없는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목표의 일부는 몸을 통해 추구되며, 몸은 공격을 통해 실재를 찾아내는 수단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목표의 다른 부분은 치유하려 하며, 그러므로 몸이 아니라 마음을 부른다.

필연적인 타협은 마음이 아니라 몸이 치유되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이 나뉜 목표가 둘 다에게 동등한 실재성을 주었다. 이것은 마음이 몸에 제한되어, 서로 연결되지 않은 채 온전함처럼 보이는 작은 부분들로 나뉘어야만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몸을 해치지는 않겠지만, 망상적인 사고 체계를 마음 안에 유지할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여기에 치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치유가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하나님은 질병과 떨어져 치유를 준 것이 아니며, 질병이 있을 수 없는 곳에 치료법을 세우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치유와 질병은 함께 있다. 둘이 함께 보일 때, 진리와 환영 둘 다를 — 그 둘이 있어야 하는 그 마음 안에 — 붙잡아 두려는 모든 시도는 환영에 대한 헌신으로 인식되며, 진리 앞으로 가져와졌을 때 포기되고, 그 어떤 측면에서도 그 어떤 방식으로도 진리와 완전히 화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진리와 환영은 아무 연결도 없다. 그대가 진리와 환영을 아무리 연결하려 해도, 이 사실은 영원히 참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환영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으며, 진리도 그러하다. 각각은 결합되어 하나의 완결된 사고 체계를 이루지만, 서로에게서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을 지각하는 것이 곧 분리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분리가 어디서 치유되어야 하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관념의 결과는 결코 관념의 근원과 분리되지 않는다.

분리라는 관념이 몸을 낳았으며, 몸과 계속 연결된 채로 남아, 마음이 몸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몸을 병들게 한다. 그대는 이 연결을 숨김으로써 몸을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은폐가 그대의 동일시를 진리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 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기이한 은폐가 그대의 마음을 얼마나 많이 상하게 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그대 자신의 동일시가 얼마나 혼란스러워졌는지 그대가 다만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대는 그대의 믿음 없음이 초래한 파괴가 얼마나 큰지 보지 못한다. 믿음 없음은 그 결과로 정당화되는 것처럼 보이는 공격이기 때문이다. 믿음을 거둠으로써 그대는 믿음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보며, 그대와 결합되어 있는 것을 향해 그 장벽 너머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믿음을 가지는 것이 곧 치유하는 것이다. 믿음은 그대가 자신을 위해 속죄를 받아들였고, 그러므로 그 속죄를 나누려 한다는 표징이다. 믿음으로, 그대는 자신이 받은 그 과거로부터의 자유라는 선물을 내놓는다. 그대는 형제가 이전에 했던 그 어떤 일도 지금 형제를 정죄하는 데 쓰지 않는다.

그대는 자유로이 형제의 오류를 못 본 척하기로 선택하여, 그대 자신과 형제 사이의 모든 장벽 너머를 보고, 그것들을 하나로 본다. 그리고 그 하나 안에서 그대는 자신의 믿음이 온전히 정당화됨을 본다. 믿음 없음에는 정당한 근거가 없지만, 믿음은 언제나 정당하다.

믿음은 두려움의 반대다. 두려움이 공격의 일부인 것만큼이나 믿음은 사랑의 일부다. 믿음은 결합에 대한 인정이다. 믿음은 모든 이를 그대의 가장 사랑 많은 아버지의 아들로, 그대처럼 아버지에게 사랑받으며 그러므로 그대 자신처럼 그대에게 사랑받는 존재로 인정하는 은혜로운 인정이다. 그대를 결합시키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며, 아버지의 사랑을 위해 그대는 그 누구도 그대의 사랑에서 분리된 채로 두지 않으려 한다.

각 사람은 거룩한 순간 안에서 지각되는 그대로, 죄책감에서 풀려나려는 그대의 목적 안에서 결합되어 나타난다. 그대는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며, 그대가 모든 이 안에서 믿음을 영원히 정당하게 만드는 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는 치유된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니, 하나님이 그대에게 준 성령을 통해 온다.

믿음 없음은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며 아들을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은 이미 용서받아, 자신이 스스로에게 지운 모든 죄책감에서 자유로운 것으로 보인다. 믿음은 오직 지금의 형제만을 본다. 그것은 형제를 판단하기 위해 과거를 보지 않고, 다만 그대 안에서 보려는 것만을 형제 안에서 보려 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몸의 눈을 통해 보지 않으며, 자신의 정당함을 위해 몸을 바라보지도 않는다. 믿음은 새로운 지각의 전달자로, 새로운 지각의 도래에 대한 증인들을 모으고 그들의 메시지를 그대에게 돌려주기 위해 보내졌다. 믿음은 실재 세계만큼이나 쉽게 앎과 교환된다.

믿음은 성령의 지각에서 일어나며, 그대가 믿음을 성령과 나눈다는 표징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대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에게 내놓는 선물이며, 성령에게처럼 그의 아버지에게도 온전히 받아들여진다. 그러므로 믿음은 그대에게도 내놓아진 것이다.

그대의 거룩한 관계는, 그 새로운 목적과 더불어, 형제에게 줄 믿음을 그대에게 내놓는다. 그대의 믿음 없음이 그대들을 갈라놓았고, 그래서 그대들은 서로 안에서 구원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믿음은 그대가 보는 그 거룩함 안에서 그대들을 결합시키니, 몸의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대들을 결합시킨 성령의 눈길 안에서, 그리고 그대들이 결합되어 있는 그 안에서다.

은총은 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주어진다. 그리고 은총을 받는 마음은 즉시 몸 너머를 바라보며, 자신이 치유된 그 거룩한 자리를 본다. 그곳에 은총이 주어진 제단이 있으며, 마음은 그 안에 서 있다.

그렇다면 형제에게 은총과 축복을 내놓으라, 그대들 둘 다를 위해 은총이 놓인 바로 그 제단에 그대가 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은총으로 치유받으라, 그러면 그대들은 믿음을 통해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거룩한 순간 안에서, 그대들은 하나님이 자신과 그대들 둘 다를 위해 세운 그 제단 앞에 서 있다.

믿음 없음을 내려놓고, 함께 그곳으로 오라. 그곳에서 그대들은 믿음을 통해 다시 만들어진 그대로의 그대들 관계의 기적을 볼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그대들은 믿음이 용서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 어떤 오류도 믿음의 고요한 눈길을 방해하지 못한다. 그 눈길은 오류들 모두에게 똑같이 쉽게 기적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사랑의 전달자들은 보내진 일을 해내고, 그 일이 이루어졌다는 기쁜 소식을, 자신들이 보내진 바로 그 제단 앞에 함께 서 있는 그대들에게 돌려주기 때문이다.

믿음 없음이 그대의 작은 왕국들을 척박하고 분리된 채로 유지하듯이, 믿음은 성령이 그 왕국들로 만들려는 가장 거룩한 정원을 위해 땅을 준비하는 일을 도울 것이다.

믿음은 평화를 가져오며, 그러므로 사랑스러움을 위해 이미 준비된 것을 진리가 들어와 사랑스럽게 만들도록 부른다. 진리는 믿음과 평화를 뒤따르며, 믿음과 평화가 시작한 사랑스럽게 만드는 과정을 완성한다. 믿음은 여전히 학습의 목표이며, 그 배움이 습득되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는 영원히 머물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의 헌신이 영원한 것을 향하게 하고, 영원한 것을 방해하여 시간의 노예로 만들지 않는 법을 배우라. 그대가 영원한 것에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대는 그대 자신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로 창조한 이는 그 무엇의 노예도 아니며, 자신의 창조주와 더불어 만물의 주인이다. 그대는 몸을 노예로 삼을 수 있지만, 관념은 자유로우며, 그 관념을 생각한 마음 외에는 그 무엇도 그 어떤 식으로도 관념을 감옥에 가두거나 제한할 수 없다. 그 관념은 자신의 근원과 계속 결합되어 있다. 그 근원은, 관념이 자신을 위한 목적으로 무엇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관념의 간수이거나 해방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