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은 의향이면 충분

거룩한 순간은 거룩해지고자 하는 그대의 결심의 결과다. 그것은 답이다. 거룩한 순간이 오게 하려는 열망과 의향이 그 순간이 오는 것보다 앞선다. 그대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그것을 원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정도까지만 마음을 준비한다.

그대가 더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대가 더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성령이 요청하지 않는 것을 성령에게 주려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성령에게 에고를 더하여 둘을 혼동하게 될 것이다.

성령은 다만 작은 것만을 요청한다. 위대함과 힘을 더하는 것은 성령이다. 성령은 그대와 결합하여 거룩한 순간을 그대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게 만든다. 그대가 그토록 적게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성령으로 하여금 그토록 많은 것을 주게 한다.

그대의 선한 의도를 신뢰하지 말라. 선한 의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그 밖에 무엇이 끼어들든, 그대의 의향은 절대적으로 신뢰하라. 다만 이것에만 집중하고, 그림자가 그 의향을 둘러싸고 있다고 해서 동요하지 말라.

바로 그 그림자들 때문에 그대가 온 것이다. 그림자들 없이 올 수 있다면, 그대에게는 거룩한 순간이 필요 없을 것이다. 거룩한 순간이 가져오는 상태를 그대가 성취해야 한다고 여기는 오만함으로 거룩한 순간에 다가가지 말라. 거룩한 순간의 기적은, 거룩한 순간이 있는 그대로이게 하려는 그대의 의향 안에 있다. 그리고 이것을 향한 그대의 의향 안에는, 그대가 원래 그러하도록 의도된 그대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놓여 있다.

겸손은 결코 그대에게 작음에 만족한 채 머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겸손은 그대에게서 비롯되지 않는 위대함보다 못한 것에 만족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거룩한 순간에 대한 그대의 어려움은, 그대가 거룩한 순간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그대의 고정된 확신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대가 스스로 만들고자 하는 대로의 그대이고자 하는 결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은 자신의 처소를 자신에게 걸맞지 않게 창조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이 있고자 하는 곳에 들어갈 수 없다고 그대가 믿는다면, 그대는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의향의 힘이 그대로부터 나올 필요는 없으며, 다만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나오기만 하면 된다. 거룩한 순간은 그대의 작은 의향만으로 오지 않는다.

거룩한 순간은 언제나 그대의 작은 의향이 하나님의 뜻의 무한한 힘과 결합된 결과다.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점에서 그대는 틀렸다. 거룩함을 위해 오만한 준비를 하면, 평화의 조건을 세우는 것이 그대에게 달려 있다고 반드시 믿게 된다. 하나님이 평화의 조건들을 세웠다.

평화의 조건들은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대의 의향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대의 의향은 다만 그 조건들이 무엇인지 그대에게 가르치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만 필요하다. 그대가 이것을 배울 자격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대는 배우는 자를 다르게 만들어야 한다고 믿음으로써 그 배움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배우는 자를 만들지 않았고, 배우는 자를 다르게 만들 수도 없다.

그대는 먼저 스스로 기적을 만들고, 그런 다음 그대를 위해 기적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하려는가? 그대는 다만 질문할 뿐이다. 답은 주어진다. 답하려 하지 말고, 다만 주어진 그대로 답을 받으려 하라.

거룩한 순간을 준비하면서, 거룩한 순간을 받을 준비가 되기 위해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려 하지 말라. 거룩함을 준비하는 것은 다만 그대의 역할을 하나님의 역할과 혼동하는 것일 뿐이다. 속죄는 자신이 먼저 속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올 수 없으며, 다만 속죄에게 길을 내주려는 단순한 의향 외에는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 이들에게만 온다.

정화는 오직 하나님만의 것이며, 그러므로 그대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준비하려 하기보다, 이렇게 생각해 보라: 하나님을 품은 나는 하나님을 받을 자격이 있다.

내 안에 자신의 처소를 세운 이가 그 처소를 그가 원하는 그대로 지었다. 내가 그 처소를 그를 위해 준비할 필요는 없으며, 다만 나의 준비됨에 대한 나 자신의 자각을 나에게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지 않기만 하면 된다, 그 자각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계획에 아무것도 더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계획을 받으려면, 나 자신의 것을 그 자리에 대신 놓지 않으려는 의향이 있어야 한다.

그 의향이 전부다. 더 보태면, 그대는 다만 요구된 그 작은 것마저 없애 버리게 될 것이다. 그대가 죄책감을 만들었다는 것과,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그대의 계획이, 죄책감에 속죄를 가져와 구원을 두려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대가 사랑을 위해 자신을 준비한다면, 그대가 더하게 될 것은 다만 두려움뿐이다.

거룩한 순간을 위한 준비는 거룩한 순간을 주는 이에게 속한다. 풀어 주는 것이 기능인 그에게 그대 자신을 맡기라. 그를 위해 그의 기능을 떠맡지 말라. 다만 그가 요청하는 것만을 그에게 주라, 그러면 그대의 역할이 얼마나 작고 그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배울 것이다.

바로 이것이 거룩한 순간을 그토록 쉽고 그토록 자연스럽게 만든다. 그대는 자신이 해야 할 그 이상의 것이 있어야 한다고 고집하기 때문에 거룩한 순간을 어렵게 만든다. 그리고 그대의 기여와 성령의 기여가 그토록 극단적으로 불균형하다는 것이 그대를 개인적으로 모욕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기가 그대에게는 매우 어렵다. 그대는 여전히 자신의 이해가 진리에 대한 강력한 기여이며, 진리를 진리 그대로 만든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대가 아무것도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강조해 왔다. 구원은 다만 그대가 지금 당장 줄 수 없는 것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쉽다. 자연스럽고 쉬운 모든 것을 그대에게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 그대의 결정이었음을 잊지 말라.

거룩한 순간이 그대에게 어렵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그대가 무엇이 가능한지를 판정하는 자가 되어, 아는 이에게 자리를 내주기를 여전히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적에 난이도의 등급이 있다는 믿음 전체가 바로 이것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하나님이 뜻하는 모든 것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미 일어났다.

그리고 이 사실이 바로 과거가 사라진 이유다. 과거는 실재 안에서 결코 일어난 적이 없다. 과거가 일어났다고 생각한 그대의 마음 안에서만, 그 과거를 되돌리는 것이 필요하다.

결코 일어난 적 없는 것을 되돌릴 준비를 지금 하라. 진리와 환영의 차이를 그대가 이미 이해하고 있다면, 속죄는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거룩한 순간과 거룩한 관계, 성령의 가르침, 그리고 구원이 이루어지는 모든 수단이 아무 목적도 없을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다만 그대의 두려움의 꿈을 행복한 꿈으로 바꾸려는 계획의 측면들일 뿐이며, 그 행복한 꿈으로부터 그대는 쉽게 앎으로 깨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을 그대 자신이 맡지 말라, 그대는 전진과 후퇴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의 가장 큰 전진 중 일부를 그대는 실패로 판단했고, 그대의 가장 깊은 후퇴 중 일부를 그대는 성공으로 평가했다. 그대의 마음에서 모든 두려움과 증오를 제거하려고 시도한 뒤에 거룩한 순간에 다가가지 말라.

두려움과 증오의 제거는 거룩한 순간의 기능이다. 성령의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그대의 죄책감을 못 본 척하려 하지 말라. 그 일은 성령의 기능이다. 그대의 역할은 다만 성령이 모든 두려움과 증오를 제거하고 그대가 용서받게 하도록, 성령에게 작은 의향을 내놓는 것뿐이다. 성령의 이해와 결합된 그대의 작은 믿음을 바탕으로, 성령은 속죄 안에서 그대의 역할을 세울 것이며 그대가 그 역할을 쉽게 완수하도록 확실히 할 것이다.

그리고 성령과 함께, 그대는 믿음의 단단한 바위 위에 세워져 천국에까지 이르는 사다리를 세울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 사다리를 홀로 천국에 오르는 데 쓰지도 않을 것이다. 그대가 마련하지 않은 모든 거룩한 순간 안에서 다시 태어나고 축복받은 그대의 거룩한 관계를 통해, 수천 명이 그대와 함께 천국에 오를 것이다.

그대가 이것을 계획할 수 있겠는가? 또는 그러한 기능을 위해 스스로를 준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이 그 목적을 뜻하기에, 그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목적에 대해 마음을 바꾸지도 않을 것이다.

수단과 목적은 둘 다 하나님에게 속한다. 그대는 하나를 받아들였다. 다른 하나는 마련될 것이다. 이와 같은 목적은 수단 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 하나님의 목적을 나누는 이라면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수단을 마련해 줄 것이다.

행복한 꿈이 실현되는 것은 꿈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꿈은 사랑으로 가득해야 한다. 그 꿈의 메시지는 "당신의 뜻이 이루어진다"이며, "나는 다르게 되기를 원한다"가 아니다.

수단과 목적의 정렬은 그대가 이해하기에는 불가능한 과업이다. 그대는 성령의 목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며, 다만 그 목적을 이루는 데 거룩하지 않은 수단을 가져오려 할 뿐이다. 목적을 바꾸는 데 필요했던 그 작은 믿음이, 수단을 받아들여 쓰는 데 필요한 전부다.

형제를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꿈이 아니다. 그리고 그대의 거룩한 관계도 꿈이 아니다. 그 안에 남아 있는 꿈의 유일한 부분은, 그 관계가 여전히 특별한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특별한 관계는 성령에게 매우 유용하다. 성령은 여기서 특별한 기능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 특별한 관계는 사랑이 행복이 아니라 두려움이라고 믿는 수천수만 명에게 성령이 기쁨을 퍼뜨릴 수 있는 행복한 꿈이 될 것이다. 그대를 위해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성령이 그대의 관계에 준 그 기능을 완수하게 하라. 그러면 성령이 그 관계가 되기를 바라는 그대로 그 관계를 만드는 데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대의 관계의 거룩함이 무언가에 의해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는, 즉시 멈추라. 그리고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위협을 느끼는 이 순간을 그대가 차라리 갖고 싶어 하는 그 거룩한 순간과 바꾸게 하려는 그대의 의향을 성령에게 내놓으라. 성령은 결코 이 일에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관계가 하나라는 것을, 그러므로 한 사람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은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라. 결합의 축복의 힘은, 이제 그대나 형제가 홀로 두려움을 경험하거나 홀로 그 두려움을 다루려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있다.

홀로 두려움을 겪거나 다루는 일이 필요하다고도, 심지어 가능하다고도 결코 믿지 말라.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거룩한 순간이 다른 한쪽 없이 둘 중 한쪽에게만 오는 것도 똑같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거룩한 순간은 둘 중 어느 한쪽의 요청으로도 둘 다에게 올 것이다.

위협이 지각되는 그 순간에 더 제정신인 쪽이, 상대에게 진 빚이 얼마나 깊은지와 상대에게 마땅히 표해야 할 감사가 얼마나 큰지를 기억하고, 둘 다에게 행복을 가져다줌으로써 그 빚을 갚을 수 있음을 기뻐해야 한다.

더 제정신인 쪽은 이것을 기억하고 이렇게 말하게 하라: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이 거룩한 순간을 원한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형제와 그 순간을 나누기 위해서다. 내가 그 거룩한 순간을 형제 없이 가지거나, 형제가 나 없이 갖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거룩한 순간을 나누는 것은 온전히 가능하다.

그러므로 나는 이 순간을, 그 축복이 우리에게 내려와 우리 둘을 평화 안에 있게 해 줄 순간으로서, 성령에게 드리기로 선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