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대체 아닌 행복한 꿈
1) 하나의 오류
대체한다는 것은 대신 받아들이는 것이다. 대체가 정확히 무엇을 동반하는지 다만 고려해 본다면, 그대는 대체가 성령이 그대에게 준, 그리고 그대를 위해 이루고자 하는 그 목표와 얼마나 어긋나 있는지 즉시 지각할 것이다.
대체한다는 것은 아들됨의 한 측면을 포기하고 다른 측면을 택하여, 그 둘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그 둘 가운데 하나는 더 가치 있다고 판단되고 다른 하나는 대체된다.
그렇게 하여 그 대체가 일어난 관계는 조각나며, 그 관계의 목적도 그에 따라 나뉜다.
조각낸다는 것은 배제한다는 것이며, 대체는 분리를 위해 에고가 지닌 가장 강력한 방어다. 성령은 결코 대체물을 쓰지 않는다.
에고가 한 사람을 다른 사람의 대체물로 지각하는 곳에서, 성령은 그들을 결합되어 나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성령은 그들이 하나임을 알기에, 그들 사이에서 판단하지 않는다. 하나로 결합되어 있기에, 그들은 같기 때문에 하나다.
대체는 분명 그들이 다르다고 지각되는 과정이다. 하나는 결합하려 하고, 다른 하나는 분리하려 한다. 하나님이 결합한 것과 성령이 하나로 보는 것 사이에는 그 무엇도 끼어들 수 없다. 그러나 에고가 파괴하려고 후원하는 그 조각난 관계들 사이에는 모든 것이 끼어드는 것처럼 보인다.
대체가 불가능한 유일한 감정은 사랑이다. 두려움은 정의상 대체를 동반한다. 두려움은 사랑의 대체물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조각나 있으면서 동시에 조각내는 감정이다. 두려움은 여러 형태를 취하는 것처럼 보이며, 그 각각은 만족을 위해 서로 다른 형태의 표출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상당히 가변적인 행동을 들여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훨씬 더 심각한 영향은 그 행동이 비롯되는 그 조각난 지각 안에 있다.
그 누구도 완전하게 보이지 않는다. 몸이 강조되며, 특정 부위에 특별히 강조를 두고, 두려움의 특정한 형태를 표출하는 데 있어 받아들임이나 거부를 비교하는 기준으로 쓰인다.
하나님이 두려움이라고 믿는 그대는 다만 하나의 대체만을 만들었다. 그 대체는 여러 형태를 취해 왔다. 진리를 대신한 환영의 대체였고, 온전함을 대신한 조각남의 대체였기 때문이다. 그 오류는 너무나 산산조각 나고 세분되고 또다시 나뉘기를 거듭해 와서, 이제는 한때 하나였으며 여전히 이전 그대로라는 것을 지각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진리를 환영으로, 무한을 시간으로, 생명을 죽음으로 가져온 그 하나의 오류가 그대가 만든 것의 전부였다. 그대의 세상 전체가 그 오류 위에 놓여 있다. 그대가 보는 모든 것이 그 오류를 반영하며, 그대가 지금까지 만든 모든 특별한 관계는 그 오류의 일부다.
실재가 그대가 보는 것과 얼마나 다른지 듣는다면 그대는 놀랄 수도 있다. 그대는 그 하나의 오류의 크기를 깨닫지 못한다. 그 오류는 너무나 거대하고 너무나 완전히 믿기 어려워서, 그 오류로부터 완전히 비실재적인 세상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으로부터 그 밖에 무엇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그 오류의 조각난 측면들은, 그대가 그것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함에 따라, 충분히 두렵다. 그러나 그대가 본 그 무엇도 그 원래의 오류가 얼마나 엄청난지 조금도 보여 주지 못한다. 그 오류는 그대를 천국에서 내쫓고, 앎을 무의미한 조각난 지각의 파편들로 산산조각 내고, 그대로 하여금 더 많은 대체를 하도록 강요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오류가 바깥으로 투사된 첫 번째 투사였다. 세상은 그 오류를 감추기 위해 일어났으며, 그 오류가 투사되어 그대와 진리 사이에 드리워지는 그 스크린이 되었다.
이는 진리가 안으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는 상실이라는 관념이 무의미하며,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증가뿐이다. 모든 것이 거꾸로 되고 뒤집힌 세상이 이 오류의 투사로부터 일어났다는 것이 그대에게 정말로 이상하게 여겨지는가? 이곳으로 가져와진 진리는 다만 고요히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으며, 이 세상이 만들어진 그 모든 미친 투사에 아무 역할도 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오류를 죄가 아니라 광기라고 부르라, 그 오류는 그러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 오류에 죄책감을 투자하지 말라, 죄책감은 그 오류가 실재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오류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를 겁주려고 떠오르는 원래 오류의 어떤 뒤틀린 형태를 보는 것처럼 보일 때, 다만 "하나님은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다"라고만 말하라. 그러면 그 형태는 사라질 것이다. 진리가 그대를 구할 것이다. 진리는 그대를 떠나 그 미친 세상으로 나가 그대에게서 멀어진 적이 없다.
안쪽에는 온전한 정신이 있고, 광기는 그대 바깥에 있다. 그러나 그대는 그 반대라고, 곧 진리는 바깥에 있고 오류와 죄책감은 안에 있다고 믿는다. 광기에 물들어, 바람 속에서 미친 듯이 춤추는 깃털들처럼 미친 행로 위에서 가볍게 소용돌이치는, 그대의 작고 무의미한 대체들은 실체가 없다.
이 대체들은 전혀 판단될 필요가 없는, 바뀌고 완전히 무의미한 무늬 속에서 융합되고 합쳐지고 갈라진다. 그것들을 개별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형태에서의 그것들의 작은 차이는 전혀 진짜 차이가 아니다. 그것들 중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그것들이 공통으로 지닌 것이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두 똑같게 만드는 데 그 밖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것들을 모두 놓아 버리라, 바람 속에서 춤추며, 그대에게서 아주 멀리, 멀리 바깥에서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오르내리며 돌게 두라. 그리고 안에 있는 그 위엄 있는 고요함으로 돌아서라, 그 거룩한 고요함 안에는 그대가 결코 떠난 적 없고 그대를 결코 떠난 적 없는 살아 있는 하나님이 거한다.
성령은 그대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그대와 함께 자기 자신 바깥으로의 그 미친 여정을 되짚어가며, 그대를 부드럽게 안의 진리와 안전으로 다시 이끈다. 그는 그대의 모든 미친 투사와, 그대가 그대 바깥에 두었던 그 격렬한 대체들을 진리에게로 가져간다. 그렇게 하여 그는 광기의 행로를 뒤집고 그대를 이성으로 회복시킨다.
그대와 형제의 관계 안에서는 그대의 요청으로 성령이 모든 것을 맡았다. 성령은 그대들이 함께 나누는 진리를 향해 안으로 향하는 행로를 세워 왔다. 그대 바깥의 그 미친 세상에서는 그 무엇도 나누어질 수 없고 다만 대체될 수 있을 뿐이며, 나눔과 대체는 실재 안에서 아무 공통점도 없다. 그대 자신 안에서 그대는 완전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한다.
그대 자신 안의 이곳은 거룩한 땅이니, 그 안으로는 그 어떤 대체도 들어올 수 없으며, 그곳에는 오직 서로 안의 진리만이 머물 수 있다. 여기서 그대는, 성령과 함께 있는 것만큼이나 함께, 하나님 안에서 결합되어 있다. 원래의 오류는 여기에 들어온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성령이 그대의 관계를 맡긴 그 빛나는 진리가 있다. 성령이 그 진리를, 그대가 진리가 있기를 바라는 이곳으로 가져오게 하라. 그대가 천국을 위해 만든 그 어떤 대체물도 그대를 천국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성령이 그대에게 보여 주는 것을 돕도록, 성령에게 그대의 형제에 대한 다만 작은 믿음이라도 주라.
그대 안에는 분리가 없으며, 그 어떤 대체물도 그대를 형제에게서 떼어 놓을 수 없다. 그대의 실재는 하나님의 창조였으며, 그 어떤 대체물도 없다. 그대는 진리 안에서 너무나 굳게 결합되어 있어서 그곳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코 그대 대신 다른 무언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대들 둘 다를, 똑같이 그리고 하나로서 사랑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대를 사랑하는 그대로, 그대는 그러하다.
그대들은 환영 안에서가 아니라 그 생각(Thought) 안에서 함께 결합되어 있다. 그 생각은 너무나 거룩하고 너무나 완전하여, 환영이 그대들이 함께 서 있는 그 거룩한 자리를 어둡게 하며 남아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그대와 함께 있다, 나의 형제여. 평화와 감사 속에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나누는 우리의 가장 거룩하고 완전한 실재로서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자.
천국은 그대의 관계를 통해 아들됨 전체에게 회복된다. 그 안에는 온전하고 아름다우며 그대의 사랑 안에서 안전한 아들됨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천국은 조용히 들어왔다. 모든 환영이 그대 안의 진리에게로 부드럽게 가져와졌고, 사랑이 그대 위에 빛나 진리로 그대의 관계를 축복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 전체가 그 관계 안으로 함께 들어왔다. 그 위에 진리가 빛나는 그대의 관계는 얼마나 사랑스럽고 얼마나 거룩한가!
천국은 그대의 관계를 바라보며, 그대가 그 관계가 그대에게 오도록 허락했음을 기뻐한다. 그대 안의 우주는 그대와 함께, 나란히 서 있다. 그리고 천국은 그 관계 안에서 결합된 것을, 그 관계의 창조주와 더불어, 사랑으로 바라본다.
하나님이 부른 자는 그 어떤 대체물의 말도 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의 부름은 다만 천국을 산산조각 낸 그 원래의 오류의 메아리일 뿐이다. 그리고 그 부름을 들은 이들 안에서 평화는 어떻게 되었는가?
나와 함께 천국으로 돌아가자, 이 세상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을 지나, 그 다른 세상이 안에 품고 있는 사랑스러움과 기쁨을 향해 함께 걸어가자. 그대는 이미 부서지고 절망적인 것을 여전히 더 약화시키고 부수려는가? 그대가 행복을 찾으려는 곳이 여기인가? 아니면 그대는 부서진 것을 치유하고, 분리와 질병으로 유린된 것을 온전하게 만드는 데 함께하기를 더 원하지 않는가?
그대는 형제와 함께, 이 세상이 담고 있는 가장 거룩한 기능으로 부름받았다. 그 기능은 한계가 없는 유일한 것이며, 아들됨의 모든 부서진 조각에 치유와 결합의 위안을 뻗친다. 이 기능이 그대의 거룩한 관계 안에서 그대에게 제시된다.
이곳에서 그 기능을 받아들이라, 그러면 그대는 받아들인 대로 줄 것이다. 하나님의 평화는 그대가 함께하는 그 빛나는 목적과 더불어 그대에게 주어진다. 그대를 함께 이끈 그 거룩한 빛은, 그대가 그 빛을 받아들인 대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2) 행복한 꿈
상당히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 꿈속에서 일어나지 않는가? 그러나 그 꿈의 세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꿈의 세상은 분명 그대가 잠들기 전에 보았던 그 세상이 아니다. 오히려 꿈의 세상은 오직 그대가 선호했을 법한 것을 중심으로 계획된, 그 세상의 왜곡이다.
꿈속에서 그대는, 그대를 공격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무엇이든 다시 만들어, 그 "공격"에 분개했던 그대의 에고에 대한 공물로 바꿀 "자유"가 있다. 그대가 자기 자신을 에고와 하나로 보지 않는 한 이것은 그대의 소망이 아닐 것이다. 에고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그러므로 그대를, 공격받고 있으며 그것에 심하게 취약한 것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꿈은 그대의 상충하는 소망들이 지배하기에 혼돈스러우며, 그러므로 참된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꿈은 지각이 진리를 대신해 환영을 들여놓는 데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 그대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예다. 그대는 깨어날 때 꿈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니, 그 안에서 실재가 너무나 터무니없이 침해되었다는 사실이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들은 세상을 바라보고, 에고에 더 잘 맞도록 바꾸는 하나의 방식이다. 꿈들은 실재를 견디지 못하는 에고의 무능력과, 에고를 위해 실재를 바꾸려는 그대의 의향 둘 다에 대한 놀라운 예를 제공한다.
그대는 잠들어서 보는 것과 깨어서 보는 것 사이의 차이를 불안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대는 깨어서 보는 것이 꿈속에서는 지워진다는 것을 알아본다. 그러나 깨어날 때, 그대는 깨어서 보던 것이 사라져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꿈속에서 그대는 모든 것을 정돈한다. 사람들은 그대가 바라는 대로의 존재가 되며, 그들이 하는 것을 그대가 지시한다. 대체에 대한 그 어떤 제한도 그대에게 놓여 있지 않다. 한동안 세상은 마치 그대가 원하는 대로 세상을 만들도록 그대에게 주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대는 자신이 세상을 공격하고 있으며, 세상을 이겨 그대를 섬기게 만들려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꿈은 지각적인 짜증 발작이며, 그 안에서 그대는 말 그대로 "나는 그것을 이렇게 원한다!"라고 외친다. 그리고 꿈은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꿈은 자신의 근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분노와 두려움이 꿈에 스며들며, 순식간에 만족의 환영은 공포의 환영에 침입당한다.
이는 그대가 선호하는 세상으로 대체함으로써 실재를 통제할 수 있다는, 그대의 능력에 대한 꿈이 무섭기 때문이다. 실재를 지우려는 그대의 시도는 매우 두렵지만, 그대는 이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대는, 그대가 실재에 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재가 두렵다는 환상으로 대체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죄책감이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어진다.
꿈은 그대에게, 그대가 바라는 대로 세상을 만들 힘이 그대에게 있다는 것과, 그대가 원하기에 그 세상을 본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보는 동안 그대는 그것이 실재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 분명 그대의 마음 안에 있으면서도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 있다. 그대는 자신이 만든 것처럼 그 세상에 반응하지 않으며, 그 꿈이 만들어 내는 감정들이 그대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다.
그 꿈을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꿈속의 형상들과 그들이 하는 일이다. 그대는 자신이 그들로 하여금 그대를 위해 연기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만약 깨닫는다면 그 죄책감은 그들의 것이 아닐 것이고, 만족의 환영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꿈속에서는 이런 특징들이 모호하지 않다.
그대는 깨어나는 것처럼 보이고, 꿈은 사라진다. 그러나 그대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그 꿈을 일으킨 원인이 꿈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또 다른 세상을 만들려는 그대의 소망은 그대와 함께 남는다. 그리고 그대가 깨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그곳은 다만 그대가 꿈속에서 보는 이 똑같은 세상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다.
그대의 모든 시간은 꿈꾸는 데 쓰인다. 그대의 잠자는 꿈과 깨어 있는 꿈은 다른 형태를 지니며, 그것이 전부다. 그것들의 내용은 같다. 그것들은 실재에 맞선 그대의 항의이며, 실재를 바꿀 수 있다는 그대의 고정되고 미친 생각이다.
그대의 깨어 있는 꿈 속에서, 특별한 관계는 비실재에 대한 그대의 집착을 유지하고 자기 자신이 깨어나는 것을 막으려는 그대의 결심이다. 그리고 그대가 깨어 있는 것보다 잠자는 것에서 더 많은 가치를 보는 동안, 그대는 그것을 놓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자신의 지혜 안에서 실용적인 성령은, 그대의 꿈을 받아들여 깨어남을 위한 수단으로 쓴다. 그대는 그 꿈들을 잠든 채로 남으려고 쓰려 했을 것이다. 나는 앞서, 꿈이 사라지기 전 첫 번째 변화는 그대의 두려움의 꿈이 행복한 꿈으로 바뀌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이 특별한 관계 안에서 하는 일이다. 성령은 특별한 관계를 파괴하지도, 그대에게서 빼앗지도 않는다. 특별한 관계는 고통과 죄책감의 근원이 아니라 기쁨과 자유의 근원으로 남을 것이다. 그것은 그대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닐 것이다. 바로 그 점에 그 관계의 비참함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 관계의 불경함이 그 관계를 따로 떨어진 것으로 지켰던 것처럼, 그 거룩함은 모든 이에게 바치는 제물이 될 것이다. 그대의 특별한 관계는, 그대의 거룩한 관계를 통해 축복받는 모든 이 안에서 죄책감을 원상태로 되돌리는 수단이 될 것이다. 그것은 행복한 꿈이 될 것이며, 그대의 시야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이와 그대가 나눌 그런 꿈이 될 것이다. 그 관계를 통해, 성령이 그 위에 둔 축복이 확장될 것이다.
성령이 그대에게 준 그 목적 안에서 그 누구라도 잊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성령이 그 선물을 준 그대를 잊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성령은 자신을 부르는 모든 이를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 쓴다. 그리고 성령은 성령에게 그대의 관계를 바친 그대를 통해 모든 이를 깨울 것이다.
그대가 다만 성령의 감사를 알아본다면! 또는 성령을 통한 나의 감사를! 우리는 성령과 한마음이 되어, 하나의 목적 안에서처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꿈이 그대의 눈을 감기려고 자리 잡게 두지 말라. 꿈이 실재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이상한 것은 그것을 만들려는 소망이다.
그대와 형제의 관계는 이제, 그 목적이 꿈의 목적에서 진리의 목적으로 바뀌었기에, 그 소망, 곧 비실재의 세상을 만들려는 소망이 없어진 관계가 되었다. 그대는 이것이 그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이것을 확신하지 못한다. 그대는 꿈들 사이에서 선택하는 데 너무나 익숙해져서, 자신이 마침내 진리와 모든 환영 사이에서 선택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천국은 확신한다. 이것은 꿈이 아니다. 천국이 왔다는 것은 그대가 진리를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천국은 그대가 그대의 특별한 관계로 하여금 그 조건들을 이루게 하고자 했기에 왔다.
그대의 관계 안에 성령은 실재 세계를 부드럽게 놓아두었으니, 그로부터 깨어나는 것이 너무나 쉽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복한 꿈의 세상이다. 그대의 잠자는 꿈과 깨어 있는 꿈이 그대의 마음 안의 똑같은 소망을 나타내듯이, 실재 세계와 천국의 진리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깨어남의 꿈은 실재 세계로 쉽게 옮겨 간다. 이 꿈은 하나님의 뜻과 결합된 그대의 뜻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려 했던 것은 언제나 이루어졌다.
3) 빛으로 돌아섬
진리를 환영으로, 실재를 환상으로 가져오는 데 자신의 삶을 써 온 그대는, 꿈의 길을 걸어왔다. 그대는 깨어남에서 잠으로, 그리고 계속해서 더 깊은 잠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각각의 꿈은 다른 꿈들로 이어졌으며, 어둠 속으로 빛을 가져오는 것처럼 보였던 모든 환상은 오히려 어둠을 더 깊게 만들었다.
그대의 목표는 어둠이었으니, 그 안으로는 그 어떤 빛줄기도 들어올 수 없었다. 그리고 그대는 완전한 광기 속에서 영원히 진리로부터 숨을 수 있을 만큼 완전한 어둠을 찾았다. 그대가 잊었던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파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빛은 그대 안에 있다. 어둠은 빛을 덮을 수 있지만, 빛을 꺼뜨릴 수는 없다. 빛이 더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대는 진리에서 움츠러들며 어둠으로 달려갈 것이니, 때로는 더 약한 형태의 두려움으로, 때로는 적나라한 공포로 물러날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대의 목표가 두려움에서 진리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받아들인 목표는 앎이라는 목표이며, 그대는 앎에 대한 자신의 의향을 나타냈다. 두려움은 어둠 속에서 사는 것처럼 보이며, 그대가 두려워할 때 그대는 뒤로 물러난 것이다.
그러니 우리 함께 빛의 순간 안에서 빠르게 하나가 되자. 그러면 그 순간만으로도 그대의 목표가 빛이라는 것을 그대에게 상기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대가 진리를 부른 이래로 진리는 그대를 만나러 서둘러 왔다. 그대가 선택한 그 길 위에서 누가 그대 곁을 걷는지 안다면, 두려움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대가 알지 못하는 것은 어둠 속으로의 그 여정이 길고 잔인했으며, 그대가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토록 오래 감겨 있던 그대의 눈꺼풀의 작은 깜박임은, 그토록 오래 경멸받아 온 그대 자신에 대한 확신을 그대에게 주기에는 아직 충분하지 않았다. 그대는 여전히 사랑을 증오하고, 그대에 대한 사랑의 판단을 몹시 두려워하면서 사랑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그대는 자신이 사랑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이 사랑을 무엇으로 만들었는가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대는 사랑의 의미를 향해, 그리고 그대가 사랑을 둘러싼 모든 환영으로부터 멀어져 나아가고 있다. 그대가 그 환영으로 물러날 때 그대의 두려움은 커진다. 그대가 환영이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두렵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려움으로부터 확실히 그리고 아주 빠르게 멀어져 가는 우리에게 두려움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형제의 손을 잡은 그대는 나의 손도 잡고 있다. 그대들이 서로 하나 되었을 때 그대들은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대가 나와 함께 떠나기로 동의한 그 어둠 속에 내가 그대를 남겨 두리라고 그대는 믿는가?
그대의 관계 안에 이 세상의 빛이 있다. 그리고 이제 두려움은 그대 앞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대가 형제에게 바친 그 믿음의 선물을 도로 빼앗으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라.
그대는 다만 자기 자신을 겁주는 데만 성공할 것이다. 그 선물은 영원히 주어졌다. 하나님 자신이 그 선물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 선물을 도로 가져올 수 없다.
그대는 하나님을 받아들였다. 그대의 관계의 거룩함은 천국 안에 확립되어 있다. 그대는 자신이 받아들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대의 이해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라. 필요했던 전부는 다만 이해하려는 소망뿐이었다.
그 소망은 거룩해지려는 갈망이었다. 하나님의 뜻이 그대에게 허락된다. 그대는 자신이 지금까지 가졌던, 또는 지금까지 존재해 온 그 유일한 것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보내는 매 순간은 그대에게 이 목표가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 줄 것이며, 그 목표에 이르려는 그대의 갈망을 강화할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의 성취는 그대의 갈망 안에 놓여 있다. 그대의 갈망은 이제 성령의 뜻의 모든 힘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대가 내디딜 수도 있는 그 어떤 작고 비틀거리는 발걸음도 그대의 갈망을 성령의 뜻과 성령의 힘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 없다. 그대가 형제의 손을 잡기로 동의한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나는 그대의 손을 잡고 있다. 그대는 분리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진리를 향한 그대의 전진 속에서 그대와 함께 서 있고 그대와 함께 걷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는 곳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함께 데려간다. 그대의 관계 안에서 그대는 어둠 속에 숨었던 하나님의 아들에게 천국을 가져오는 데 있어 나와 하나가 되었다. 그대는 어둠을 빛으로 가져오고자 했으며, 이 의향은 어둠 속에 남으려는 모든 이에게 힘을 주어 왔다.
보고자 하는 이들은 볼 것이다. 그리고 그들 안의 어둠이 빛에게 바쳐져 영원히 없어질 때, 그들은 자신의 빛을 어둠 속으로 가져가는 데 있어 나와 하나가 될 것이다. 그대의 관계의 그 거룩한 빛 안에서 나와 하나가 된, 그대에 대한 나의 필요는 곧 구원에 대한 그대의 필요다.
그대가 나에게 준 것을 내가 그대에게 주지 않겠는가? 그대가 형제와 하나가 되었을 때, 그대는 나에게 응답했기 때문이다. 이제 구원을 가져오는 자인 그대는 어둠에게 빛을 가져다주는 기능을 지닌다.
그대 안의 어둠은 빛에게로 가져와졌다. 이제 그 빛을, 그대가 어둠을 가져간 그 거룩한 순간에서부터 도로 어둠에게 가져다주라.
우리는 온전하게 만들려는 우리의 갈망 안에서 온전해진다. 시간이 그대를 걱정시키게 두지 말라, 그대와 그대의 형제가 경험하는 모든 두려움은 실제로는 과거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대들의 분리된 과거들이 방해했을 것을 우리가 함께 이루도록 돕기 위해 재조정되었다.
그대는 두려움을 지나왔다. 두 마음이 사랑에 대한 갈망 안에서 하나가 될 때는 언제나 사랑이 그들을 결합시키기 때문이다. 천국 안의 모든 빛이 그대와 함께 간다. 하나님의 마음(Mind) 안에서 영원히 빛나는 모든 광선(Ray)이 그대 위에 빛난다.
천국은 천국을 향한 그대의 전진 속에서 그대와 하나가 되어 있다. 그토록 위대한 빛들이 그대의 갈망의 그 작은 불꽃에 하나님 자신의 힘을 주려고 그대와 하나가 되었는데, 그대가 어둠 속에 남을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따로 떨어져 시작해 그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았던 그 길고 무의미한 여정 끝에, 함께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그대는 형제를 찾았으며, 그대들은 서로의 길을 밝힐 것이다.
그리고 이 빛으로부터 위대한 광선(Great Rays)이 뒤로는 어둠 속으로, 앞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확장되어, 과거를 빛으로 없앨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이 광선들은 모든 것이 빛 안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presence)를 위한 자리를 마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