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진리라는 목표

성령의 목적을 실제로 적용하는 것은 지극히 단순하지만, 명확하다. 사실, 단순하려면 명확할 수밖에 없다. 단순한 것은 다만 쉽게 이해되는 것일 뿐이며, 이를 위해서는 또렷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성령의 목표 설정은 일반적이다. 이제 성령은 그 목표를 구체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대와 함께 일할 것이다. 성령이 그 어떤 상황에도 제공하는 아주 구체적인 지침들이 있지만, 그대가 그 지침들의 보편적인 적용을 아직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지금은, 그대가 지금 지닌 것보다 훨씬 더 넓은 이해 안에서 각 상황을 넘어 더 안전하게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그 지침들을 각 상황에 따로 적용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대가 확신하지 못하는 그 어떤 상황에서든, 아주 간단히 말해, 가장 먼저 고려할 것은 "나는 이것에서 무엇이 나오기를 원하는가? 이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이다. 목표의 명확화는 처음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 목표가 바로 결과를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의 절차에서는 이것이 뒤집힌다. 상황이 결과의 결정자가 되며, 그 결과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이 무질서한 접근법의 이유는 명백하다.

에고는 그 상황에서 무엇이 나오기를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 에고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알아차리지만, 그것뿐이다. 에고에게는 그 어떤 긍정적인 목표도 전혀 없다. 처음부터 세워진 또렷하고 긍정적인 목표가 없이는, 상황은 그저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며, 이미 일어나 버린 뒤에야 비로소 말이 된다.

그런 다음 그대는 그 상황을 돌아보며 무엇을 의미했을지 짜맞추려 한다. 그리고 그대는 틀릴 것이다. 그대의 판단이 과거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대는 무엇이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한 아무 생각도 없다.

그 수단을 나란히 맞출 목표가 세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내려야 할 유일한 판단은 에고가 그 상황을 좋아하는지 아닌지, 곧 그 상황이 받아들일 만한지, 아니면 복수를 요구하는지뿐이다. 미리 세워진 결과에 대한 기준이 없다는 것은 이해를 의심스럽게 만들고 평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무엇이 일어나기를 원하는지 미리 결정하는 것의 가치는 단순히, 그대가 그 상황을 그 일이 일어나게 하는 수단으로 지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의 목적의 성취를 방해하는 것은 눈감아 주고, 그 목적을 이루도록 돕는 모든 것에 집중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이 접근법이 진리와 거짓을 가려내는 성령의 방식에 그대를 더 가까이 데려왔다는 것은 상당히 뚜렷하다.

참된 것은 목표를 이루는 데 쓰일 수 있는 것이 된다. 이 관점에서 거짓된 것은 쓸모없는 것이 된다. 이제 상황은 의미를 지니지만, 다만 목표가 그 상황을 의미 있게 만들었기 때문일 뿐이다. 진리라는 목표는 더 나아가 실용적인 이점들을 지닌다.

상황이 진리와 온전한 정신을 위해 쓰인다면, 그 결과는 평화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그 결과가 무엇인가와는 상당히 별개다. 평화가 진리와 온전한 정신의 조건이며 그것들 없이는 있을 수 없다면, 평화가 있는 곳에는 그것들도 있을 수밖에 없다.

진리는 저절로 온다. 그대가 평화를 경험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그대에게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 결과를 참되게 볼 것이다. 기만이 그대에게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평화 안에 있기에 그 결과를 알아볼 것이다. 여기서 다시 그대는 에고가 바라보는 방식의 정반대를 본다. 에고는 상황이 경험을 가져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성령은 상황이 목표가 결정하는 대로이며, 목표에 따라 경험된다는 것을 안다. 진리라는 목표는 믿음을 요구한다. 믿음은 성령의 목적을 받아들이는 것 안에 담겨 있으며, 이 믿음은 모든 것을 아우른다. 진리라는 목표가 세워진 곳에는, 믿음이 있을 수밖에 없다.

성령은 상황을 전체로서 본다. 그 목표는, 그것에 관련된 모든 이가 그것의 성취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확립한다. 이것은 필연적이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에서도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그대를 넘어서는, 그대가 줄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믿음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에고의 관점에서만 그러하다. 에고는 조각냄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는 것을 믿으며, 상황을 전체로서 지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고는 상황의 조각들을 떼어 내어 그 조각들을 따로 다루려 한다. 에고는 온전함이 아니라 분리에 믿음을 두기 때문이다.

어렵게 보이는 상황의 어떤 측면과 마주하면, 에고는 이 측면을 다른 곳으로 가져가 그곳에서 해결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도는 성공적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다만 이 시도는 하나됨과 충돌하며 진리라는 목표를 흐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평화는 환상 속에서만 경험될 것이다. 진리는 오지 않았다. 믿음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서 보류된 채 부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그대는 진리라는 목표가 가져다줄 그 상황에 대한 이해를 잃는다. 환상적인 해결책은 다만 경험의 환영을 가져다줄 뿐이며, 평화의 환영은 진리가 들어올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상황의 여러 측면에 대한 대체물들은 그대의 믿음 부족에 대한 증인들이다. 그것들은 그대가 그 상황과 그 문제가 같은 자리에 있다고 믿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문제는 믿음의 부족이었으며, 그대가 그 문제를 그 근원에서 떼어 내 다른 곳에 둘 때 증명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 결과, 그대는 그 문제를 보지 못한다. 그 문제가 풀릴 수 있다는 믿음이 부족하지 않았다면, 그 문제는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은 그대에게 의미 있었을 것이다. 이해를 가로막는 그 방해물이 없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은 그것을 간직하는 것이다.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떼어 내어 그것을 풀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믿음이 풀지 못할 문제는 그 어떤 상황 안에도 없다. 문제의 어떤 측면이든 옮겨 놓으면 해결을 불가능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그대가 문제의 일부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면 문제의 의미를 잃을 수밖에 없다. 문제에 대한 해결은 그 의미 안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모든 문제가 이미 풀렸지만, 그대가 자기 자신을 그 해결로부터 떼어 낸 것은 아닐까?

그러나 믿음은 무언가가 이루어진 그곳에, 그리고 그대가 그 일이 이루어진 것을 보는 그곳에 있을 수밖에 없다. 상황은 관계이다. 생각들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지각된다면, 그 문제는 그 생각들이 갈등 안에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표가 진리라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몸에 대한 어떤 관념이 들어왔을 수밖에 없다. 마음은 공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몸에 대한 생각은 믿음 없음의 표징이다. 몸은 그 무엇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몸에 대한 그 생각은 그 관계에 대한 몸의 침입이며, 상황에 대한 그대의 생각 속의 오류이니, 그 오류는 그다음 그대의 믿음 부족에 대한 정당화가 된다.

그대는 이 오류를 저지를 것이지만, 그 오류에 전혀 마음 쓰지 말라. 그 오류는 중요하지 않다. 믿음에게로 가져와진 믿음 없음은 결코 진리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에 맞서 쓰이는 믿음 없음은 언제나 믿음을 파괴할 것이다.

그대에게 믿음이 부족하다면, 그 믿음이 사라진 그곳에서 회복되기를 청하고, 마치 그대가 부당하게 그 믿음을 빼앗긴 것처럼 다른 곳에서 그 믿음을 보상받으려 하지 말라. 그 어떤 상황에서든 부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대가 주지 않은 것뿐이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라. 거룩함이라는 목표는 그대의 관계를 위해 세워진 것이지, 그대가 세운 것이 아니다. 그대가 그 목표를 세우지 않은 것은, 거룩함이 믿음을 통해서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관계가 거룩하지 않았던 것도 그대의 형제에 대한 그대의 믿음이 너무나 제한되고 작았기 때문이다. 그대의 믿음은 세워진 그 목표에 걸맞도록 자라야 한다.

그 목표의 실재성이 이것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대는 평화와 믿음이 따로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 없이 있으면서 그대의 형제에게 신실할 수 있는 그 어떤 상황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대가 처한 모든 상황은 다만 그대의 관계를 위해 세워진 목적을 이루는 수단일 뿐이다.

그 상황을 다른 무언가로 본다면 그대는 믿음이 없는 것이다. 그대의 믿음 없음을 쓰지 말라. 그것이 들어오게 하고 고요히 바라보되, 쓰지는 말라. 믿음 없음은 환영의 종이며, 자신의 주인에게 온전히 충실하다.

그 믿음 없음을 쓰면, 그것은 그대를 곧장 환영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것이 그대에게 제시하는 것에 유혹당하지 말라. 그 믿음 없음은 목표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에게 있어 그 목표의 가치를 방해한다. 믿음 없음이 제시하는 평화의 환영을 받아들이지 말고, 그 제물을 바라보며 그것이 환영임을 알아보라.

환영이라는 목표는 믿음이 진리에 묶여 있는 것만큼이나 믿음 없음에 밀접하게 묶여 있다. 그대가, 미리 진리에 바쳐진 그 어떤 상황에서든 누군가가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다하리라는 믿음이 없다면, 그대의 헌신은 나뉜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형제에게 믿음이 없었던 것이며, 그 믿음 없음을 형제에게 맞서 써 온 것이다.

거룩함이 어디에나 함께 가지 않는 한, 그 어떤 관계도 거룩하지 않다. 거룩함과 믿음이 함께 가듯이, 그 믿음도 거룩함과 함께 어디에나 가야 한다. 그 목표의 실재성은 성취에 필요한 모든 기적을 불러일으키고 이룰 것이다. 너무 작거나 너무 거대한 것, 너무 약하거나 너무 강력한 것 그 무엇이든, 그 목표의 쓰임과 목적으로 부드럽게 돌려진다.

그 목표가 우주를 섬기듯, 우주는 그 목표를 기꺼이 섬길 것이다. 그러나 방해하지 말라.

성령의 목표가 세워진 그대 안에는 힘이 놓여 있다. 그 힘은 무한에 대한 그대의 하찮은 개념을 너무나 멀리 넘어서서, 그대는 그대와 함께 가는 성령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대는 그 힘을 완전히 안전하게 쓸 수 있다.

그러나 그 힘이 별들을 지나 그 너머에 놓인 우주에까지 이를 만큼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그대가 그 믿음 없음을 대신 쓴다면, 그대의 하찮은 믿음 없음이 그 힘을 쓸모없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생각해 보고, 믿음 없음의 원인을 배우라.

그대는 형제가 그대에게 한 것을 그대가 형제에게 불리하게 붙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대가 실제로 형제를 탓하는 것은 그대가 형제에게 한 것이다. 그대가 형제에게 불리하게 붙들고 있는 것은 형제의 과거가 아니라 그대의 과거다. 그리고 그대가 형제에게 믿음이 없는 것은 그대가 무엇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그만큼이나 결백하다. 결코 있었던 적이 없는 것은 원인이 없으며, 진리를 방해하려고 거기 있지 않다. 믿음 없음에 대한 원인은 없지만, 믿음에 대한 원인(Cause)은 있다.

그 원인은 자신의 목적을 나누는 그 어떤 상황에도 들어와 있다. 진리의 빛은 그 상황의 중심에서 빛나며, 그 상황의 목적이 부르는 모든 이에게 닿는다. 그 목적은 모든 이를 부른다.

그대의 관계 전체를, 모든 측면에서 그리고 모든 부분에서 완전하게, 관련시키지 않는 상황은 없다. 그대는 자기 자신의 그 무엇도 진리의 빛 바깥에 남겨 두고서 그 상황을 거룩하게 지킬 수 없다. 그 상황은 그대의 관계 전체의 목적을 나누며, 그로부터 자신의 의미를 얻기 때문이다.

그대가 형제에게 주는 그 믿음을 가지고 각 상황에 들어가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자기 자신의 관계에 믿음이 없는 것이다. 바로 그 목적이 그대 안의 믿음을 불러일으켰듯이, 그대의 믿음은 다른 이들이 그대의 목적을 나누도록 부를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한때 그대를 환영으로 이끄는 데 썼던 그 수단이 진리를 위한 수단으로 변형되는 것을 볼 것이다.

성령이 그대의 목적을 자신의 목적과 맞바꿈으로써 그대의 관계의 목적을 바꾸었을 때, 성령이 그곳에 둔 그 목표는 그대가 들어가는, 또는 앞으로 들어가게 될 모든 상황으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모든 상황은, 그 상황을 목적 없는 것으로 만들었을 과거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그대가 믿음을 구하는 것은 모든 상황 안에서 그대와 함께 걷는 성령 때문이다.

그대는 더는 온전히 미쳐 있지 않으며, 더는 혼자도 아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외로움은 꿈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령의 목표를 나누는 관계를 지닌 그대는, 진리가 왔기에 외로움에서 벗어나 있다. 믿음을 향한 진리의 부름은 강하다. 진리에 맞서 그대의 믿음 없음을 쓰지 말라, 진리는 그대를 구원과 평화로 부르기 때문이다.

거룩한 순간은, 모든 상황이 원래 그러해야 하는 것의 특별한 경우, 곧 극단적인 예일 뿐이다. 성령의 목적이 거룩한 순간에 준 그 의미는 모든 상황에도 똑같이 주어진다.

그 의미는 믿음 없는 태도를 잠시 내려놓게 하여, 믿음이 진리의 부름에 응답하도록 한다. 거룩한 순간은, 전체로서 보인 모든 관계와 모든 상황의 의미에 대한, 빛나는 본보기이자 또렷하고 명확한 증명이다.

믿음은 그 상황의 모든 측면을 받아들였으며, 믿음 없음은 그 상황에 그 어떤 배제도 강요하지 않았다. 거룩한 순간은 완벽한 평화의 상황이다. 이는 다만 그대가 그 순간이 있는 그대로이도록 허락했기 때문이다.

이 단순한 예의가 성령이 그대에게 청하는 전부다. 진리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하라. 진리에 끼어들지 말고, 진리를 공격하지 말고, 진리가 오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

진리가 모든 상황을 아우르며 그대에게 평화를 가져다주게 하라. 믿음조차도 그대에게 요구되지 않는다. 진리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들어오게 하라, 그러면 그것은 평화를 위해 그대에게 필요한 믿음을 불러일으켜 그대를 위해 확보해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맞서 일어나지 말라, 그대의 반대에 맞서서는 그것이 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모든 상황을 거룩한 순간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가? 믿음 없음이 쓰이지 않은 채 옆으로 치워지는 곳이면 어디서든 자유로이 주어지는 것이 바로 믿음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성령의 목적의 힘이 대신 자유로이 쓰일 수 있다. 이 힘은 즉시 모든 상황을, 성령의 목적을 확립하고 그 실재성을 증명하는 하나의 확실하고 지속적인 수단으로 변형시킨다. 증명된 것은 믿음을 요구했으며, 믿음을 받았다. 이제 그것은 사실이 되며, 그로부터 믿음은 더 이상 보류될 수 없다.

진리에게 믿음을 거부하는 데 따르는 긴장은 엄청나며, 그대가 깨닫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그러나 믿음으로 진리에 응답하는 데는 그 어떤 긴장도 전혀 따르지 않는다. 그대의 해방자의 부름을 인정한 그대에게는, 그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 데 따르는 긴장이 전보다 더 큰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그렇지 않다. 전에도 그 긴장은 거기 있었지만, 그대는 다른 무언가의 탓으로 돌리며, 그 "다른 무언가"가 그것을 만들어 냈다고 믿었다. 이것은 결코 참이었던 적이 없다.

그 "다른 무언가"가 만들어 낸 것은 슬픔과 우울, 질병과 고통, 어둠과 공포에 대한 흐릿한 상상, 두려움의 차가운 환상과 지옥의 불타는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다름 아닌, 진리에게 믿음을 주고 그 명백한 실재성을 보기를 거부하는 데 따르는 견딜 수 없는 긴장이었다.

그 긴장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형이었다. 아들의 믿음 없음이 아들 자신에게 이것을 했다. 그대 자신이 그에게 맞서 믿음 없음을 쓰도록 두기 전에 신중히 생각하라.

아들은 부활했으며, 그대는 아들의 깨어남의 원인을 그대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의 해방에서 그대의 역할을 떠맡았으며, 이제 그에게 온전히 책임이 있다. 이제 그를 실망시키지 말라, 그에 대한 그대의 믿음 부족이 그대에게 무엇을 의미할 수밖에 없는지 깨닫는 것이 그대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아들의 구원이 그대의 유일한 목적이다. 모든 상황 안에서 오직 이것만을 보라, 그러면 그 상황은 오직 이것만을 가져오는 수단이 될 것이다. 그대가 진리를 그대의 관계의 목표로 받아들였을 때, 그대의 아버지가 그대에게 평화를 준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그대는 평화를 주는 자가 되었다.

평화라는 목표는 그 조건들과 분리되어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리고 그대는 그 목표에 믿음을 두었다. 그 누구도 실재한다고 믿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의 목적은 바뀌지 않았고,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결코 바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원히 불변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그 무엇도 그대는 이제 그것에게서 보류할 수 없다.

그대의 풀려남은 확실하다. 그대가 받은 대로 주라. 그리고 그대를 붙들어 두고, 그대가 그 부름에 응답한 그(성령)로부터 그대를 분리된 채로 둘 수 있는 그 어떤 상황보다도 그대가 훨씬 더 높이 일어섰다는 것을 증명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