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액자 아닌 그림
모든 방어는 자신이 방어하려는 것을 실제로 행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수적이다. 방어의 효력에 대한 근본적인 근거는, 방어가 자신이 방어하는 것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방어가 방어하는 것은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그 방어 안에 놓이며, 방어가 작동함에 따라 그대에게 가져다주어진다.
모든 방어는 선물을 줌으로써 작동하며, 그 선물은 언제나, 방어가 보호하는 그 사고 체계의 축소판으로, 금빛 액자 안에 놓여 있다. 그 액자는 매우 정교하며, 온통 보석으로 장식되고, 깊이 조각되어 광이 나 있다. 액자의 목적은 그 자체로 가치 있게 보이는 것, 그리고 액자가 담고 있는 것으로부터 그대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 없는 액자를 그대는 가질 수 없다. 방어는 그대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려고 작동한다. 특별한 관계는 에고가 쓰는 모든 방어 중 가장 위압적이고 기만적인 액자를 지니고 있다.
특별한 관계의 사고 체계는 여기서 액자에 둘러싸여 제시된다. 그 액자는 너무나 무겁고 정교해서, 위압적인 구조에 그림이 거의 지워지다시피 한다. 그 액자 안에는 온갖 종류의 공상적이고 조각난 사랑의 환영들이 짜여 있으며, 희생과 자기 과시의 꿈들로 장식되고, 자기 파괴라는 금박 실로 엮여 있다. 피의 반짝임은 루비처럼 빛나고, 눈물은 다이아몬드처럼 깎여 그 제물이 바쳐지는 어스름한 빛 속에서 반짝인다.
그림을 보라. 액자가 그대의 주의를 흩트리게 두지 말라. 이 선물은 그대를 저주하려고 그대에게 주어지며, 그대가 그 선물을 받는다면 그대는 자신이 저주받았다고 믿을 것이다. 그대는 그림 없는 액자를 가질 수 없다.
그대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액자다. 그 안에서는 그대가 그 어떤 갈등도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액자는 다만 갈등이라는 선물을 감싸는 포장일 뿐이다. 액자는 선물이 아니다.
이 사고 체계의 가장 피상적인 측면들에 속지 말라, 이 측면들은 모든 면에서 완전한 전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이 반짝이는 선물 안에 놓여 있다. 그대의 시선이 액자의 최면적인 광채에 머물게 하지 말라. 그림을 보고, 죽음이 그대에게 제시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
죽음의 제시가 바로 거룩한 순간이 진리를 방어하는 데 그토록 중요한 이유다. 진리 자체는 그 어떤 방어도 필요로 하지 않지만, 그대는 죽음이라는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맞선 방어를 필요로 한다. 진리인 그대가 진리에 그토록 위험한 생각을 받아들일 때, 그대는 진리를 파괴로 위협한다.
그리고 이제 진리를 온전하게 지키기 위해 그대의 방어가 이루어져야 한다. 천국의 힘,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눈물,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영의 기쁨이 그대 자신의 공격으로부터 그대를 방어하기 위해 소집된다. 그대는 이 모든 것의 일부이면서도 이 모든 것을 공격하며, 이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에 그대를 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거룩한 순간은 천국의 축소판이며, 천국으로부터 그대에게 보내진 것이다. 거룩한 순간 역시 액자 안에 놓인 그림이다. 그러나 그대가 이 선물을 받아들인다면 그대는 액자를 전혀 보지 않을 것이다. 그 선물은 오직 그림에 그대의 모든 주의를 집중하려는 그대의 의향을 통해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거룩한 순간은 영원의 축소판이다.
거룩한 순간은 시간의 액자 안에 놓인 무시간성의 그림이다. 그대가 그림에 집중한다면, 그것을 그림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것은 다만 액자였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액자가 없으면, 그림은 그림이 나타내는 그대로 보인다. 이는 에고의 사고 체계 전체가 그 선물들 안에 놓여 있듯이, 천국 전체도 영원에서 빌려와 그대를 위해 시간 안에 놓인 이 순간 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두 개의 선물이 그대에게 제시된다. 각각은 완전하며,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각각은 그대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그림이며, 아주 다르게 보인다. 그대는 그림을 액자와 비교함으로써 선물들의 가치를 비교할 수 없다. 그대가 비교해야 하는 것은 오직 그림들뿐이며, 그렇지 않으면 그 비교는 완전히 무의미하다.
선물인 것은 바로 그림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오직 이 근거 위에서만 그대는 진정으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그림들을 보라. 그 둘 다를.
하나는 작은 그림이니, 그 거대하고 불균형한 테두리가 드리우는 짙은 그늘 아래에서 전혀 보기 어렵다. 다른 하나는 가볍게 액자에 담겨 빛 속에 걸려 있으니,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에 사랑스럽다. 그대는 더 나은 그림을 잘못된 액자에 끼워 맞추려고, 그렇게 하여 결합될 수 없는 것을 결합하려고 그토록 애써 왔고 지금도 여전히 애쓰고 있다. 그런 그대여, 이것을 받아들이고 기뻐하라.
이 그림들은 각각 자신이 나타내는 것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액자에 담겨 있다. 하나는 초점이 흐려져 보이지 않도록 액자에 담겨 있다. 다른 하나는 완전한 또렷함을 위해 액자에 담겨 있다. 어둠과 죽음의 그림은, 그대가 그 포장들 사이에서 찾아낼수록 점점 설득력을 잃는다.
어둠 속 액자에서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그 무의미한 보석은 하나하나 빛에 노출될 때마다 흐릿하고 생기 없어져, 그림에서 그대의 주의를 더는 흩트리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대는 그림 자체를 바라보며, 액자로 보호받지 못한 그림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마침내 본다. 다른 그림, 곧 천국과 영원의 그림은 가볍게 액자에 담겨 있다. 시간은 영원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는 주의를 흩트릴 것이 없다.
천국과 영원의 그림은 그대가 바라볼수록 점점 더 설득력을 얻는다. 그리고 이제, 진짜 비교를 통해, 마침내 두 그림 모두의 변형이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둘 다가 서로 관련지어 보일 때, 각각은 자신의 정당한 자리를 얻는다. 빛으로 가져와진 그 어두운 그림은 두려운 것으로 지각되지 않고, 다만 그림일 뿐이라는 사실이 마침내 뚜렷이 와닿는다.
그리고 그대는 거기서 보는 것을 있는 그대로, 곧 그대가 실재라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그림일 뿐 그 이상은 아닌 것으로 알아볼 것이다. 이 그림 너머에서는 그대가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빛의 그림은, 또렷하고 틀림없는 대조 속에서, 그 그림 너머에 놓인 것으로 변형된다. 그것을 바라볼 때, 그대는 그림이 아니라 실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은 사고 체계에 대한 형상화된 표현이 아니라, 그 생각(Thought) 자체다. 그것이 나타내는 것이 거기 있다. 액자는 부드럽게 희미해진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대의 기억 속으로 떠오르며, 그대의 그 작은 그림 — 전혀 가치가 없고 완전히 의미를 빼앗긴 그림 — 대신 창조 전체를 그대에게 제시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정당한 자리로, 그리고 그대가 그대의 자리로 오를 때, 그대는 관계의 의미를 다시 경험하고 관계의 의미가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마음 안에서 아버지에게 오름을 드림으로써, 함께 평화 속에서 아버지에게로 오르자. 우리는 아버지에게 그 힘과 영광을 드리고, 그것들이 어디 있는지에 대한 그 어떤 환영도 지니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얻을 것이다. 아버지의 오름을 통해, 그것들은 우리 안에 있다.
아버지가 준 것은 아버지의 것이다. 그것은 전체 안에서처럼 아버지의 모든 부분 안에서 빛난다. 아버지와의 그대의 관계의 실재 전체는 서로에 대한 우리의 관계 안에 놓여 있다. 거룩한 순간은 모든 관계 위에 똑같이 빛난다. 그 안에서 모든 관계들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오직 치유만이 있다. 이미 완전하고 완벽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님이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있는 곳에는 오직 완전하고 완벽한 것만이 있을 수 있다.
거룩한 관계는 이 세상 안에서의 삶 속에서 거룩한 순간이 표현된 것이다. 구원에 대한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거룩한 순간은 자신의 결과로써 증명되는 실용적인 도구다. 거룩한 순간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한 경험은 언제나 느껴진다.
그러나 표현 없이는 거룩한 순간이 기억되지 않는다. 거룩한 관계는, 그 관계가 지금의 모습이 된 그 경험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불경한 관계가 자신을 만든 이를 찬양하는 증오의 계속되는 찬가이듯, 거룩한 관계는 관계의 해방자(Redeemer)를 향한 행복한 찬양의 노래다.
실재 세계에 대한 지각을 향한 커다란 걸음인 거룩한 관계는 배워지는 것이다. 거룩한 관계는 변형되어 새롭게 보이는, 옛 불경한 관계다. 거룩한 관계는 경이로운 가르침의 성취다. 시작되고, 발전하고, 완성되어 가는 그 모든 측면에서, 그것은 불경한 관계의 역전을 나타낸다.
이것에서 위안을 얻으라. 유일하게 어려운 단계는 시작뿐이다. 여기서, 관계의 목표가 이전의 목표와 정확히 정반대로 갑작스레 바뀌기 때문이다.
이 목표의 전환은, 그 관계를 성령에게 제시하여 성령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쓰도록 한 데 따른 첫 번째 결과다. 이 초대는 즉시 받아들여지며, 성령은 자신에게 들어와 달라고 청한 것의 실용적인 결과를 들여오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즉시 성령의 목표가 그대의 목표를 대신한다. 이 목표의 전환은 아주 빠르게 이루어지지만, 그 관계를 혼란스럽고, 단절되고, 심지어 상당히 괴로운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상당히 또렷하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그 관계는 자기 자신의 목표와 어긋나 있으며, 자신을 위해 받아들여진 그 목적에 분명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 관계의 불경한 상태에서, 의미를 주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오직 그대의 목표뿐이었다. 이제 그 관계는 아무 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관계들이 이 지점에서 끊어졌으며, 옛 목표의 추구가 다른 관계 안에서 다시 세워졌다. 일단 불경한 관계가 거룩함이라는 목표를 받아들이면, 그것은 다시는 이전의 관계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목표의 전환과 더불어 에고의 유혹은 극도로 강렬해진다. 그 관계는 이전의 목표를 완전히 매력 없는 것으로 만들 만큼 아직 충분히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관계의 구조가 새로운 목적에 맞지 않는다는 인식으로 "위협받기" 때문이다.
관계의 목표와 구조 사이의 갈등이 너무나 뚜렷해서 그 둘은 공존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그 목표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불경한 관계 안에 굳게 자리 잡은 채로, 그 목표에 맞도록 관계를 바꾸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이 행복한 해결책이 그 갈등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로 보이고 받아들여질 때까지, 그 관계는 심하게 팽팽해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목표를 더 천천히 바꾸는 것이 더 친절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대조가 흐려지고, 에고가 그 느린 걸음 하나하나를 자신의 입맛대로 재해석할 시간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목적의 급진적인 전환만이 그 관계 전체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한 완전한 마음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이 목표의 변화는 발전하여 마침내 이루어짐에 따라 점점 더 유익하고 기쁜 것이 되어 간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 상황이 매우 위태로운 것으로 경험된다. 두 개인이 자신들의 불경한 목적을 위해 시작한 관계가 갑자기 거룩함을 목표로 삼게 된다. 이 두 사람이 이 새로운 목적의 관점에서 자신들의 관계를 숙고할 때, 그들은 필연적으로 소스라친다.
그 관계에 대한 이 두 사람의 지각은 상당히 혼란스러워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지각의 이전 질서는 더 이상 그들이 이루기로 합의한 그 목적에 이바지하지 않는다. 지금이 믿음의 때다.
그대는 이 목표가 그대를 위해 세워지도록 허락했다. 그것은 믿음의 행위였다. 믿음의 보상이 들어오고 있는 지금, 믿음을 저버리지 말라. 그대가 성령이 그 관계를 받아들이려고 거기 있다고 믿었다면, 성령이 자신의 인도 아래 받아들인 것을 정화하려고 거기 있다는 것도 지금 여전히 믿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다만 힘겨워 보이는 이 시기에 그대의 형제를 믿으라. 목표는 세워졌다. 그리고 그대의 관계는 온전한 정신을 그 목적으로 삼는다. 이제 그대는 자신이 미친 관계 안에 있음을 발견한다. 그 목표에 비추어 그렇게 알아보아지기 때문이다.
이제 에고는 이렇게 조언한다. 이 관계 대신, 그대의 이전 목표에 상당히 알맞은 다른 관계로 대체하라고. 그대는 오직 그대의 형제를 없앰으로써만 그대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그렇게 하지 않기로 선택한다면 완전히 갈라설 필요는 없다고. 그러나 그대의 온전한 정신을 지키려면 서로에게서 환상의 주요 영역들을 배제해야 한다고.
지금 이 조언을 듣지 말라! 그대에게 응답한 성령을 믿으라. 성령은 들었다. 성령이 자신의 응답에서 아주 명확하지 않았는가? 그대는 이제 온전히 미쳐 있지 않다. 성령이 그대에게 가장 명확한 말을 주었다는 것을 그대는 부인할 수 있는가?
이제 성령은 당혹감 속에서도 조금 더 오래 믿음을 청한다. 이 혼란은 지나갈 것이며, 그대는 그대의 믿음에 대한 정당성이 떠올라 그대에게 빛나는 확신을 가져다주는 것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성령을 저버리지 말고, 서로도 저버리지 말라. 이 관계는 거룩한 것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라. 그리고 그 관계의 목적이 그 안에서 작용하여 그 관계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을 그대가 지각함에 따라, 이해하지 못했던 그것이 그대에게 설명되게 하라.
그대는 그대의 관계의 "실패"에 대해 형제를 탓할 많은 기회를 찾을 것이다. 그 관계가 때때로 아무 목적도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목적 없다는 느낌이 그대에게 다가와 그대를 괴롭히며, 한때 그대가 만족을 찾았고 그것을 찾았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방식을 그대에게 상기시킬 것이다.
그대가 실제로 찾았던 그 비참함을 지금 잊지 말고, 무너져 가는 그대의 에고에 생명을 불어넣지 말라. 그대의 관계는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원받았다.
그대는 구원의 방식에 아주 새로우며, 자신이 길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그대의 길은 잃어버려졌지만, 이것을 상실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대의 새로움 속에서, 그대가 함께 다시 시작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서로의 손을 잡으라, 지금 그대가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낯익은 길을 함께 걷기 위해.
그대가 영원 내내 변하지 않는 목표를 기억하게 되리라는 것이 확실하지 않은가? 그대는 다만 하나님의 목표를 선택했을 뿐이며, 그대의 참된 의도는 그 목표에서 결코 떠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들됨 전체에 걸쳐, 그대의 선택의 기쁜 메아리 속에서 자유의 노래가 들린다.
그대는 거룩한 순간 안에서 많은 이들과 하나가 되었으며, 그들도 그대와 하나가 되었다. 그대의 선택이 그대를 위로 없이 남겨 두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 자신이 그대의 거룩한 관계를 축복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축복에 함께하고, 그대의 축복을 그 관계에 아끼지 말라. 이제 그 관계에 필요한 것은 다만 그대의 축복뿐이니, 그래야 그대가 그 안에 구원이 머물러 있음을 볼 수 있다.
구원을 단죄하지 말라, 그대에게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맞아들이라, 구원은 아들됨 전체가 함께 축복받는 그런 관계 안에서 그대들을 함께 결합하려고 왔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함께, 성령을 그대들의 관계 안으로 초대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성령은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 그대들이 많은 실수를 저질렀을 수도 있지만, 그대들은 또한 성령이 자신의 일을 하도록 돕기 위해 엄청난 노력도 기울여 왔다. 그리고 성령은 그대들이 자신을 위해 해 온 모든 것에 대한 감사가 부족한 적이 없었다. 성령은 그 실수들을 전혀 보지도 않는다. 그대는 그대의 형제에게도 그와 비슷하게 감사해 왔는가?
그대는 그 좋은 노력들에 꾸준히 감사하고, 실수들은 눈감아 주었는가? 아니면 그대의 감사는, 그 실수들의 빛처럼 보이는 것 속에서 깜박이며 흐려져 왔는가? 어쩌면 그대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의 불편함에 대해 형제를 탓하는 운동에 들어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감사와 고마움의 부족으로 그대는 자기 자신을 거룩한 순간을 표현할 수 없게 만들며, 그렇게 거룩한 순간을 시야에서 잃는다.
한 순간에 대한 경험은, 아무리 강렬하다 해도, 그대가 시간이 덮어 버리게 둔다면 쉽게 잊힌다. 그 순간은 그대의 시간에 대한 알아차림 안에서 빛나고 은혜롭게 간직되어야 하며, 시간 안에 감추어져서는 안 된다. 그 순간은 남아 있다. 그러나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서로에게 감사하는 것은 거룩한 순간에 감사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여 그 순간의 결과가 받아들여지고 나누어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대의 형제를 공격하는 것은 그 순간을 잃는 것이 아니라, 효과 면에서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대는 거룩한 순간을 받았지만, 그것을 쓸 수 없는 상태를 세워 놓았을 수도 있다.
그 결과, 그대는 거룩한 순간이 여전히 그대와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거룩한 순간의 표현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차단함으로써, 그대는 자기 자신에게서 그것의 유익을 거부해 왔다. 그대는 형제를 공격할 때마다 이것을 강화한다. 그 공격은 그대를 자기 자신에게 눈멀게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부인하면서, 그대가 주고받은 것을 알아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와 그대의 형제는 진리 자체의 거룩한 임재(Presence) 안에 함께 서 있다. 여기에 목표가, 그대와 함께 있다. 목표 자체가 그것의 성취를 위한 수단을 기꺼이 마련하리라고 그대는 생각하지 않는가?
받아들여진 그 목적과 지금 있는 그대로의 그 수단 사이의 바로 이 똑같은 불일치가, 그대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천국을 기쁘게 하는 바로 그것이다. 천국이 그대 바깥에 있다면, 그대는 그 기쁨을 나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천국이 안에 있기에, 그 기쁨도 그대의 것이다.
그대들은 목적에서는 하나가 되었지만, 수단에 대해서는 여전히 분리되고 나뉜 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목표는 고정되고, 확고하며, 바뀔 수 없으며, 목표가 확실하기에 수단은 분명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목표가 그러하다는 아들됨의 기쁨을 나눌 것이다.
그대가 형제에게 그토록 자유로이 주어 온 그 선물들을 알아보고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그대는 또한 거룩한 순간의 효과도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 효과들을 써서 그대의 모든 실수를 바로잡고 그 결과로부터 그대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배우면서, 그대는 또한 아들됨 전체를 풀어 주는 법을 배웠을 것이며, 그대에게 그대의 풀려남을 준, 그리고 그 풀려남을 그대를 통해 확장하고자 하는 성령에게 아들됨 전체를 기쁨과 감사로 바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