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구원이라는 환영
1) 무의미한 의식
특별한 관계를 바라볼 때, 먼저 그것이 상당한 양의 고통을 동반한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불안, 절망, 죄책감, 공격이 모두 그 안으로 들어오며, 그것들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시기가 간간이 끼어든다. 이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들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그것들은 언제나 상대를 죄책감 있게 만들기 위한 자기 자신에 대한 공격이다.
나는 이것에 대해 전에 말한 적이 있지만, 실제로 시도되고 있는 것의 어떤 측면들은 아직 다루어지지 않았다. 아주 간단히 말해, 죄책감 있게 만들려는 시도는 언제나 하나님을 겨냥한다. 에고는 그대가 하나님을, 오직 하나님만을 죄책감 있는 존재로 보기를 바라며, 그렇게 아들됨을 공격에 열려 있고 그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상태로 남겨 둔다.
특별한 사랑 관계는 그대를 천국으로부터 떼어 놓기 위한 에고의 주요 무기다. 그것은 무기처럼 보이지 않지만, 그대가 그것을 어떻게, 왜 소중히 여기는지 생각해 본다면, 그대는 그 특별한 사랑 관계가 무엇일 수밖에 없는지 깨달을 것이다. 특별한 사랑 관계는 에고가 가장 자랑하는 선물이며, 죄책감을 버리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것이다.
에고의 "역학"은 여기서 가장 또렷이 드러나니, 이 선물의 매력에 기대어, 그 선물을 중심으로 한 환상들이 흔히 상당히 노골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환상들은 대개 받아들일 만하며 심지어 자연스럽다고 판단된다. 그 누구도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하는 것을 기이하다고 여기지 않으며, 증오가 죄라고 믿는 이들조차도 다만 죄책감을 느낄 뿐 증오를 바로잡지 않는다.
이것이 분리의 "자연스러운" 상태이며, 그 분열이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배우는 이들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이들처럼 보인다.
이 세상은 천국의 정반대이며, 천국의 정반대가 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니,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참된 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방향을 취한다. 사랑의 의미가 알려져 있는 천국에서는, 사랑이 곧 연합이다. 사랑의 환영이 사랑의 자리에 받아들여진 이 세상에서는, 사랑이 분리와 배제로 지각된다.
에고의 증오가 승리하는 곳은 바로 특별한 관계이며, 이 관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특별한 사랑을 향한 감추어진 소망에서 태어났다. 특별한 관계는 하나님의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부인한 그 특별함을 자기 자신을 위해 확보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이 특별함을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라고 믿는 것은 에고의 보존에 필수적이다.
에고는 결코 그대가, 분리란 오직 상실일 수밖에 없으며 천국이 있을 수 없는 유일한 상태라는 것을 보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이에게 천국은 완성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그 어떤 불일치도 있을 수 없으니, 에고와 성령 둘 다 이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성이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는 그 둘이 완전히 불일치한다. 성령은 완성이 먼저 연합 안에 있고, 그다음 연합의 확장 안에 있다는 것을 안다. 에고에게 완성은 승리 안에,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최종 승리에까지 이르는 그 "승리"의 확장 안에 있다. 이 안에서 에고는 자기 자신의 궁극적 자유를 보니, 에고를 방해할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에고가 생각하는 천국이다. 그러므로 에고가 방해할 수 없는 상태인 연합은 지옥일 수밖에 없다. 특별한 관계는 지옥과 천국을 결합하여 구별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한 에고의 기이하고 부자연스러운 장치다.
그리고 두 세계의 상상된 "최선"을 찾으려는 시도는 다만 둘 다에 대한 환상으로 이어졌을 뿐이며, 그 어느 쪽도 있는 그대로 지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특별한 관계는 이 혼란의 승리다. 특별한 관계는 연합이 배제된 일종의 연합이며, 연합을 시도하는 근거가 배제 위에 놓여 있다. "찾되 찾지 말라"는 에고의 좌우명을 보여 주는 이보다 더 나은 예가 있을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가장 이상한 것은 에고가 특별한 관계 안에서 기르는 자기 개념이다. 이 "자기"는 자기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그 관계를 찾는다. 그러나 이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특별한 관계를 찾으면, 이 "자기"는 자기 자신을 내주며, 자기 자신을 다른 이의 자기와 "교환"하려 한다. 이것은 연합이 아니니, 증가도 확장도 없기 때문이다. 각 상대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자기를 자신이 선호할 것이라 생각하는 자기를 위해 희생시키려 한다.
그리고 각 상대는 취하기만 하고 그 대가로 가치 있는 그 무엇도 주지 않는 "죄"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더 나은" 자기를 얻기 위해 내주려는 자기에게 그가 얼마나 큰 가치를 둘 수 있겠는가?
에고가 찾는 그 "더 나은" 자기는 언제나 더 특별한 자기다. 그리고 특별한 자기를 소유한 것처럼 보이는 이는 누구든, 그 사람에게서 취할 수 있는 것 때문에 "사랑받는다." 양쪽 상대가 서로에게서 이 특별한 자기를 볼 때, 에고는 "천국에서 이루어진 연합"을 본다.
둘 중 누구도 자신이 지옥을 청했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며, 그래서 에고가 천국을 방해하려고 각 상대에게 내민 천국의 환영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환영이 두려움의 환영이며 다른 것일 수 없다면, 천국의 환영은 다만 두려움의 "매력적인" 형태에 지나지 않으니, 그 안에서 죄책감은 깊이 묻혀 "사랑"의 형태로 떠오른다.
지옥의 매력은 오직 죄책감의 그 끔찍한 이끌림에만 있으니, 에고는 죄책감을 하찮음에 자신의 믿음을 두는 이들에게 내민다. 하찮음에 대한 확신은 모든 특별한 관계 안에 놓여 있으니, 오직 결핍된 자만이 특별함을 소중히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함에 대한 요구, 그리고 특별함을 주는 것을 사랑의 행위로 지각하는 것은 사랑을 증오스러운 것으로 만들 것이다.
특별한 관계의 진짜 목적은, 에고의 목표에 엄격히 부합하여, 실재를 파괴하고 그 자리를 환영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에고는 그 자체로 환영이며, 오직 환영만이 그 "실재성"의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특별한 관계를 하나님에 대한 승리로 지각한다면, 그대는 특별한 관계를 원하겠는가? 특별한 관계의 두려운 본성이나, 특별한 관계가 동반할 수밖에 없는 죄책감이나, 슬픔과 외로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자. 이것들은 다만 분리라는 종교 전체의 속성이며, 분리가 일어난다고 생각되는 전체 맥락의 속성일 뿐이기 때문이다.
분리라는 종교가 희생을 향해 읊는 연도의 중심 주제는, 그대가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한 관계 안에서 연출되는 것이 바로 이 주제다. 그대는 자기 자신의 죽음을 통해 다른 자기를 공격하여, 그대가 경멸하는 그 자기를 대체하기 위해 상대에게서 그 다른 자기를 낚아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대는 그대 자신의 자기가 그대가 요구하는 특별함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그 자기를 경멸한다.
그리고 그 자기를 증오하면서 그대는 그 자기를 하찮고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었으니, 그대가 그 자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공격했다고 생각하는 그 자기에 어떻게 무한한 힘을 부여할 수 있겠는가?
진리가 그대에게 너무나 두려운 것이 되어서, 그대는 진리가 약하고 하찮지 않다면 감히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만든 그 하찮은 자기에게, 진리에서 빼앗은 힘을 부여하여 진리를 이기고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이 의식이 특별한 관계 안에서 정확히 어떻게 거행되는지 보라. 두 분리된 사람 사이에 제단이 세워지며, 그 위에서 각자는 자기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자신의 죽음에서 힘을 취할 다른 자기를 자신의 몸 위에 세우려 한다. 이 의식은 거듭거듭 거행된다. 그리고 그 의식은 결코 완성되지 않으며, 앞으로도 결코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완성의 의식은 완성될 수 없으니, 생명은 죽음에서 일어나지 않으며 천국도 지옥에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어떤 형태의 특별한 관계든 그대를 유혹하여 의식 안에서 사랑을 찾게 할 때마다, 사랑은 내용이지 그 어떤 형태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라. 특별한 관계는 형태의 의식이며, 내용을 희생시켜 그 형태를 하나님의 자리에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형태 안에는 의미가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
특별한 관계는 있는 그대로 알아보아져야 한다. 특별한 관계는 무의미한 의식이다. 이 의식에서는 하나님의 죽음에서 힘이 뽑혀 나와, 형태가 내용을 이겼고 사랑이 그 의미를 잃었다는 표징으로서 그 살해자에게 투여된다. 그 의식이 명백히 불가능하다는 것은 제쳐 두더라도, 그대는 이것이 가능하기를 원하겠는가? 그 의식이 가능하다면, 그대는 자기 자신을 무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분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다만 이것이 일어나게 두지 않았을 뿐이다. 그대는 하나님의 마음(Mind)을 바꿀 수 없다. 죽음의 춤이 그대를 기쁘게 하는, 그대가 세운 그 어떤 의식도 영원한 것에 죽음을 가져올 수 없다. 그대가 하나님의 온전함을 대신하여 선택한 그 대체물도 그것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
특별한 관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다른 신들을 세우고 그것들을 숭배함으로써 그것들의 하찮음과 하나님의 위대함을 흐리려는 무의미한 시도 외에는 그 무엇도 보지 말라. 그대의 완성의 이름으로, 그대는 이 대체물을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세우려고 그대가 세우는 모든 우상은 그대 앞에, 그대인 것의 자리에 서 있기 때문이다.
구원은, 환영이 참되지 않기에 두렵지 않다는 단순한 사실 안에 있다. 그 환영들은 다만 그대가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정도만큼 두려워 보일 뿐이며, 그대는 그것들이 참이기를 바라는 정도만큼 그것들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와 똑같은 정도로 그대는 진리를 부인하고 있으며, 그렇게 진리와 환영, 하나님과 환상 사이의 그 단순한 선택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 선택을 기억하라, 그러면 그대는 그 결정을 있는 그대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지각하는 데 아무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분리의 환영의 핵심은 단순히 사랑의 의미를 파괴하는 환상 안에 있다. 그리고 사랑의 의미가 그대에게 회복되지 않는 한, 그대는 그 의미를 함께 나누는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다. 분리는 다만 자기 자신을 알지 않겠다는 결정일 뿐이다. 이 사고 체계 전체는 진리로부터 멀어져 환상 속으로 이끌도록 설계된, 세심하게 꾸며진 학습 경험이다.
그러나 그대를 해칠 모든 배움에 대해, 하나님은 그대에게 교정과, 그 모든 결과로부터의 완전한 벗어남을 제시한다. 이 수업에 귀 기울이고 이 수업을 따를지 말지의 결정은 다만 진리와 환영 사이의 선택일 뿐이다. 여기에 진리가 있으니, 환영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며 환영과 전혀 혼동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선택이 있는 그대로만 지각될 때 그 선택은 얼마나 단순해지는가. 오직 환상만이 선택에서 혼란을 가능하게 하며, 환상은 완전히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올해는 지금까지 그대가 마주한 것 중 가장 쉬운 결정이자 유일한 결정을 내릴 때다. 그대는 다만 하나님이 저편에 있고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볼 것이기에 그 다리를 건너 실재로 들어갈 것이다. 이 사실이 깨달아짐에 따라 그 자연스러운 결정을 내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별한 관계를 찾는 것은 그대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이 아니라 에고와 동일시한다는 표징이다. 특별한 관계는 오직 에고에게만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에고에게는, 어떤 관계가 특별한 가치를 지니지 않는 한 그 관계는 의미가 없으니, 에고는 모든 사랑을 특별한 것으로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스러울 수 없으니, 특별한 관계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의 관계와 다르며, 이 관계와 다른 모든 관계는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랑을 자신이 바라는 그대로 창조했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주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랑의 창조주가 자신의 뜻으로 정의한 대로가 아니면 그 어떤 의미도 없다. 사랑을 달리 정의하면서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랑은 자유다.
그대 자신을 속박 안에 둠으로써 사랑을 찾으려는 것은 그대 자신을 사랑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더는 분리 안에서 연합을 찾지 말고, 속박 안에서 자유를 찾지 말라! 그대가 풀어 주는 대로, 그대도 풀려날 것이다. 이것을 잊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 그대를 찾아 위로할 수 없을 것이다.
2) 죄책감의 미끼
그대가 성령의 도움을 얻고자 한다면, 성령이 그대의 도움을 청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거룩한 순간은, 특별한 관계 안의 진짜 미끼인 죄책감의 이끌림으로부터 그대를 보호하는 데 있어 성령의 가장 유용한 도구다.
그대는 죄책감의 이끌림이 특별한 관계의 진짜 매력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니, 에고가 그대에게 자유가 그 안에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특별한 관계를 더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특별한 관계가 죄책감을 조장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가둘 수밖에 없다는 것이 더 또렷해진다.
특별한 관계는 몸이 없이는 완전히 무의미하다. 그대가 그것을 소중히 여긴다면, 그대는 몸도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대는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간직할 것이다. 특별한 관계는 그대의 자기를 몸으로 제한하고, 다른 이들에 대한 그대의 지각을 그들의 몸으로 제한하기 위한 장치다.
위대한 광선(Great Rays)이 보인다면, 그 광선들은 특별한 관계에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것을 확립할 것이다. 그것들을 보는 가운데 몸은 사라질 것이니, 그 가치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몸을 보는 데 대한 그대의 모든 투자는 몸에서 거두어들여질 것이다.
그대는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세상을 본다. 이 다리 이편에서 그대는 분리된 몸들의 세상을 보니, 그 몸들은 서로 분리된 결합 안에서 하나가 되려 하며, 잃음으로써 하나가 되려 한다.
두 개인이 하나가 되고자 할 때, 그 두 사람은 자신의 위대함(magnitude)을 줄이려 하고 있는 것이다. 각자는 자신의 힘을 부인하려 하니, 분리된 결합은 우주를 배제하기 때문이다.
결합 안으로 받아들여질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결합 바깥에 남으니, 하나님이 바깥에 남고 그 무엇도 안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결합 하나가 완전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면, 우주가 그 결합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에고가 찾는 특별한 관계는 온전한 한 개인조차도 포함하지 않는다. 에고는 다만 그 개인의 일부만을 원하며, 오직 이 부분만을 볼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다리 저편에서는 너무나 다르다! 한동안은 몸이 여전히 보이지만, 이곳에서처럼 오로지 몸만 보이지는 않는다. 그 안에 위대한 광선을 담고 있는 그 작은 불꽃도 보이며, 이 불꽃은 오랫동안 하찮음에 갇혀 있을 수 없다.
일단 그 다리를 건너면, 몸의 가치가 그대의 눈에 너무나 작아져서 그대는 몸을 부풀릴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을 것이다. 몸이 지닌 유일한 가치는 그대가 형제들을 그대와 함께 그 다리로 데려와 그곳에서 함께 풀려나게 하는 것뿐임을 그대가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리 자체는 실재에 대한 관점의 이행일 뿐이다. 이편에서는, 그대가 보는 모든 것이 심하게 왜곡되어 있으며 관점이 완전히 어긋나 있다. 하찮고 사소한 것은 부풀려지고, 강하고 힘 있는 것은 하찮은 것으로 잘려 나간다.
그 이행 안에는 혼란의 시기가 있으며, 그 안에서 실제로 방향 감각을 잃는 느낌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혼란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은 다만, 그대의 세상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처럼 보였던 그 왜곡된 기준 틀을 붙든 손을 그대가 놓고자 했다는 것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기준 틀은 특별한 관계를 중심으로 지어져 있다. 이 환영이 없다면 그대가 여기서 여전히 찾고자 할 만한 의미는 있을 수 없다.
그대가 갑작스레 들어 올려져 실재 속으로 내던져질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시간은 친절하니, 그대가 시간을 실재를 위해 쓴다면, 시간은 그대의 이행 동안 그대와 부드럽게 보조를 맞출 것이다. 긴급함은 다만 그대의 마음을 이곳의 고정된 자리에서 떼어 내는 데만 있다. 이 긴급함이 그대를 거처 없이, 기준 틀도 없이 남겨 두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 이행에 앞서는 방향 감각 상실의 시기는, 그대의 마음을 환영에 그토록 굳게 고정시키는 데 걸린 시간보다 훨씬 더 짧다. 지연은 이제 전보다 더 그대를 아프게 할 것이다. 이는 다만 그대가 그 지연이 지연이라는 것과, 고통으로부터의 탈출이 정말로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절망 대신 이 안에서 희망과 위로를 찾으라. 그대는 이곳의 그 어떤 특별한 관계 안에서도 사랑의 환영조차 오래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그대가 더 이상 온전히 미쳐 있지 않으며, 곧 자기 배반의 죄책감을 있는 그대로 알아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특별한 관계 안에서 강화하려는 그 무엇도 실제로 그대의 일부가 아니다.
그리고 그대는 그대가 강화하려는 그것이 실재라고 그대에게 가르친 그 사고 체계의 일부를 간직한 채로, 그대가 무엇인지 아는 그 생각(Thought)을 이해할 수 없다. 그대는 자신의 실재에 대한 그 생각이 그대의 마음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했으며, 그대가 초대했기에 그 생각은 그대와 함께 머물 것이다.
그 생각에 대한 그대의 사랑은 그대가 자기 자신을 배반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며, 그대는 그 생각이 그대와 함께 갈 수 없는 관계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대가 그 생각과 떨어지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가 그대에게 제시한 그 구원의 조롱에서 벗어났음을 기뻐하고, 에고가 그대의 관계들로 만든 그 왜곡극을 그리움으로 돌아보지 말라. 이제 그 누구도 고통받을 필요가 없다. 그대는 죄책감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이라는 환영에 굴복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기 때문이다.
오직 온전히 미친 자만이 죽음과 고통, 질병과 절망을 바라보며 그것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죄책감이 빚어낸 것은 추하고 두려우며 매우 위험하다. 그 안에서 진리와 아름다움의 환영을 보지 말라. 그리고 진리와 아름다움이 그대를 기다리는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라.
기꺼이 나아가 진리와 아름다움을 맞이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것도 아니기에 내려놓으려는 그 단순한 의향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는지 배우라. 그대가 건너감으로써 얻게 될 새로운 관점은 천국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될 것이다. 이편에서 보면, 천국은 바깥에, 다리 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대가 천국과 하나 되려고 건너갈 때, 천국은 그대와 결합하여 그대와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기쁜 놀라움 속에서, 이 모든 것을 위해 그대가 아무것도 내려놓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한계가 없는 천국의 기쁨은, 그 안에서 자신의 정당한 자리를 되찾는 빛 하나하나와 더불어 늘어난다.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서, 또 그대를 위해서 더는 기다리지 말라. 그리고 거룩한 순간이 그대가 가는 길을 재촉해 주기를 바란다. 그대가 다만 거룩한 순간이 그대에게 오도록 허락하기만 하면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성령은 그대에게 오직 이 작은 도움만을 청한다. 그대의 생각이 여전히 그대를 끌어당기는 특별한 관계로 방황할 때마다, 성령과 함께 거룩한 순간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성령이 그대를 풀어 주게 하라.
성령은 자신의 관점을 그대에게 완전히 주기 위해 다만 그 관점을 나누고자 하는 그대의 의향만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성령의 의향이 완전하기에 그대의 의향은 완전할 필요가 없다.
그대의 꺼림을 자신의 완전한 믿음으로 속죄하는 것이 성령의 과제이며, 그 안에서 그대가 성령과 나누는 것이 바로 성령의 그 믿음이다. 그대의 풀려남에 대한 그대의 꺼림을 그대가 알아보는 데서, 성령의 완전한 의향이 그대에게 주어진다.
성령을 부르라, 천국이 성령의 부름에 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이 그대를 위해 천국을 부르게 하라.
3) 복수의 정반대
특별한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서 과거를 놓아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별한 관계는 과거를 재연하여 과거를 바꾸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상상된 모욕, 기억된 고통, 과거의 실망, 지각된 불의와 박탈이 모두 특별한 관계 안으로 들어오며, 그 관계는 그대가 상처 입은 자존감을 회복하려고 하는 방식이 된다.
과거가 없다면 그대가 특별한 상대를 선택할 어떤 근거를 가지겠는가? 그런 선택은 모두 그대가 매달리는 과거 안의 어떤 "악한" 것 때문에 이루어지며, 그 악한 것에 대해서는 다른 누군가가 속죄해야만 한다.
특별한 관계는 과거에 복수한다. 과거 안의 고통을 없애려 함으로써, 특별한 관계는 과거에 대한 몰두와 그것에 대한 전적인 헌신 속에서 현재를 간과한다.
그 어떤 특별한 관계도 현재 안에서 경험되지 않는다. 과거의 그림자가 특별한 관계를 감싸며, 그것을 지금의 그 모습으로 만든다. 특별한 관계는 현재 안에서 아무 의미가 없으며, 지금 아무 의미가 없다면, 특별한 관계는 그 어떤 진짜 의미도 전혀 가질 수 없다.
환상 안에서가 아니라면 그대가 어떻게 과거를 바꿀 수 있겠는가? 그리고 과거가 그대에게서 빼앗았다고 그대가 생각하는 것을 누가 그대에게 줄 수 있겠는가? 과거는 아무것도 아니다. 박탈에 대한 비난을 과거에 돌리려 하지 말라, 과거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미 사라진 것을 정말로 붙들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는, 과거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환영을 유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대가 과거가 그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어떤 목적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목적은 현재 안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고 오직 과거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이 분명하다.
과거에 대한 복수를 향한 에고의 충동의 강도를 과소평가하지 말라. 그 충동은 완전히 야만적이며 완전히 미쳐 있다. 에고는 그대가 저지른, 에고 자신을 거스른 모든 것을 기억하며, 에고는 그대에게 응징을 구하기 때문이다.
에고는 자신이 선택한 관계들로 환상들을 가져와 그 안에서 자신의 증오를 연기한다. 그 환상들은 그대의 파괴에 대한 환상이다. 에고는 과거를 그대에게 불리하게 붙들고 있으며, 그대가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가운데 에고는 그대가 너무나 정당하게 받아 마땅하다고 자신이 믿는 그 복수를 빼앗겼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의 파괴에 대한 그대의 동맹 없이는, 에고는 그대를 과거에 붙들어 둘 수 없을 것이다. 특별한 관계 안에서 그대는 자신의 파괴가 일어나도록 허락하고 있다. 이것이 미쳤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덜 명백한 것은, 그대가 에고의 동맹으로서 에고의 목표를 좇는 동안 현재는 그대에게 쓸모없다는 것이다. 과거는 사라졌다. 특별한 관계 안에서 과거를 보존하려 하지 말라. 특별한 관계는 그대를 과거에 묶어 두며, 구원이 과거의 것이라서 구원을 찾으려면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고 그대에게 가르치려 든다.
과거에 대한 응징의 꿈을 담고 있지 않은 환상은 없다. 그대는 그 꿈을 연기하겠는가, 아니면 그 꿈을 놓아 버리겠는가?
특별한 관계 안에서, 그대가 찾는 것은 복수를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증오와 야만성이 잠시 뚫고 나올 때조차도, 사랑의 환영은 깊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에고가 결코 알아차림에 이르도록 허락하지 않는 그 한 가지는, 특별한 관계가 그대 자신에 대한 복수를 연기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특별한 관계가 달리 무엇일 수 있겠는가? 특별한 관계를 찾으면서, 그대는 자기 자신 안의 영광을 찾지 않는다. 그대는 영광이 거기 있다는 것을 부인해 왔으며, 특별한 관계는 영광에 대한 그대의 대체물이 된다. 그리고 복수는 속죄(Atonement)에 대한 그대의 대체물이 되며, 복수로부터의 탈출은 그대의 상실이 된다.
에고의 미친 구원 개념에 맞서, 성령은 부드럽게 거룩한 순간을 내놓는다. 우리는 앞서 성령이 비교를 통해 가르칠 수밖에 없으며, 진리를 가리키기 위해 반대되는 것들을 쓴다고 말한 바 있다. 거룩한 순간은, 과거에 대한 복수를 통한 구원이라는 에고의 고정된 믿음의 정반대다. 거룩한 순간 안에서는 과거가 사라졌다는 것이 이해되며, 과거가 지나감과 더불어 복수를 향한 충동은 뿌리 뽑혀 사라졌다.
지금의 고요함과 평화가 완전한 부드러움으로 그대를 감싼다. 진리를 제외한 모든 것이 사라졌다. 한동안 그대는, 진리와 환영에 대한 그대의 경험 사이의 모든 면에서의 완전한 차이를 온전히 알아차리지 못하게 방해하려고, 거룩한 순간 안으로 환영을 끌어들이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는 이것을 오래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거룩한 순간 안에서 성령의 힘이 우세할 것이니, 그대가 성령과 하나 되었기 때문이다. 그대가 함께 가져오는 그 환영들은 한동안 성령에 대한 경험을 약화시킬 것이며, 그대가 그 경험을 마음 안에 간직하는 것을 막을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순간은 영원하며, 시간에 대한 그대의 환영은 무시간적인 것이 있는 그대로 있는 것도, 그대가 그것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것도 막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대에게 준 것은 참되게 주어진 것이며, 참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은 그대가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것과 분리되어서는 실재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이 주는 것이 완성된다.
그대는 받을 것이니,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순간을 그대에게 주어지도록 주었으며, 하나님이 거룩한 순간을 주었기에 그대가 그것을 받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자유롭기를 뜻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은 자유로웠다. 거룩한 순간 안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언제나 창조된 그대로일 것이라는 하나님의 상기시킴이 있다.
그리고 성령이 가르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그대에게 준 것을 그대가 받았다는 것을 그대에게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대가 실재에 불리하게 붙들어 둘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용서되어야 할 모든 것은 그대가 형제들에게 불리하게 붙들어 온 그 환영들이다. 형제들의 실재에는 과거가 없으며, 오직 환영만이 용서될 수 있다.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도 불리하게 붙들지 않으니, 하나님은 그 어떤 종류의 환영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형제들 안에서 지각하는 그 환영들을 용서함으로써 그들을 그들의 환영이라는 노예 상태에서 풀어 주라.
그렇게 하여 그대는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니, 형제들에게 환영을 제시한 것이 바로 그대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순간 안에서 용서는 그대에게 천국의 참된 상태를 가져다주기 위해 시간 안에서 그대를 위해 이루어진다.
그대는 언제나 진리와 환영 사이에서, 치유할 참된 속죄와 파괴할 에고의 "속죄" 사이에서 선택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힘과 하나님의 한계 없는 모든 사랑은, 그대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속죄 계획 안의 그대 자리만을 찾을 때 그대를 지탱해 줄 것이다.
속죄가 그대에게 어떻게 올 수 있는지 찾는 데 있어 에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동맹이 되라. 하나님의 도움으로 충분하니, 하나님의 사자(Messenger)인 성령은 그대에게 왕국을 회복시키는 법과, 구원에 대한 그대의 모든 투자를 그대가 성령과 맺는 관계 안에 두는 법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환영이 용서되는 거룩한 순간 안에서 성령의 메시지를 찾아 발견하라. 그곳에서부터 기적은 모든 이를 축복하고, 크든 작든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지각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도록 확장된다.
모든 것이 성령과 성령의 위엄(Majesty)에 자리를 내줄 것이다. 성령과 가까운 관계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은 관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실재성을 통해 그대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의 실재성을 위해 모든 환영을 내주는 것이다.
성령과의 그대의 관계에만 찬양이 있으라, 다른 그 무엇에도 있지 말라. 진리는 거기에 있으며 다른 그 어디에도 있지 않다. 그대는 진리를 선택하거나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아버지, 저희의 환영을 용서하여 주기를, 그리고 환영이 없고 그 무엇도 결코 들어올 수 없는 당신과의 저희의 참된 관계를 받아들이도록 저희를 도와주기를 청합니다.
저희의 거룩함은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의 것이 완전한데, 저희 안에 용서가 필요한 그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망각의 잠은 다만 당신의 용서와 당신의 사랑을 기억하지 않으려는 의향일 뿐입니다.
저희가 유혹 속으로 헤매지 않게 하여 주기를 청하니, 하나님의 아들의 유혹은 당신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오직 당신이 준 것만을 받아들이고, 당신이 창조했고 당신이 사랑하는 그 마음들 안으로 다만 이것만을 받아들이게 하여 주기를 청합니다. 아멘.
4) 다만 깨어남
하나님의 아들의 배신은 오직 환영 안에만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의 모든 "죄"는 다만 그 자신의 상상일 뿐이다. 아들의 실재는 영원히 죄가 없다. 하나님의 아들은 용서받을 필요가 없으며 다만 깨어나야 할 뿐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의 꿈속에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형제들과 자신의 하나님을 배신해 왔다. 그러나 꿈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꿈꾸는 자에게 이것이 그러하다고 납득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꿈이 지금과 같은 것은 꿈이 실재라는 환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깨어남 안에서만 꿈들로부터의 완전한 벗어남이 있다. 오직 그때에만 그것들이 실재에 그 어떤 영향도 전혀 미치지 않았으며 실재를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 완전히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환상은 실재를 바꾼다. 이것이 환상의 목적이다. 환상은 실재 안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지만, 실재가 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 안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두려운 것은 다만 실재를 바꾸려는 그대의 소망일 뿐이다. 그 소망으로 인해 그대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기이한 입장은, 어떤 의미에서, 그대의 힘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대의 힘을 왜곡하고 "악"에 바침으로써, 이 입장은 또한 그 힘을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든다. 그대는 서로 충돌하는 것을 요구하는 두 주인에게 충실할 수 없다. 그대가 환상 안에서 쓰는 것을 그대는 진리에게는 거부한다. 그러나 그대를 위해 쓰도록 그대가 진리에게 주는 것은 환상으로부터 안전하다.
그대가 기적에 난이도의 순서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대가 의미하는 것은 다만 그대가 진리로부터 보류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는 것뿐이다. 그대가 진리는 그것들을 다룰 수 없다고 믿는 것은, 다만 그대가 그것들을 진리로부터 지키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아주 간단히 말해, 모든 고통을 치유하는 그 힘에 대한 그대의 믿음 부족은, 실재의 어떤 측면들을 환상을 위해 간직하고 싶은 그대의 소망에서 비롯된다.
일부를 그렇게 남겨 두는 일이 전체에 대한 그대의 이해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지 그대가 다만 깨닫는다면! 그대가 자기 자신을 위해 남겨 두는 것을, 그대는 그대를 풀어 주려는 성령에게서 빼앗는 것이다. 남겨 둔 것을 돌려주지 않는 한, 실재에 대한 그대의 관점이 뒤틀린 채 바로잡히지 않은 채로 남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대가 실재에 대한 관점이 그렇게 뒤틀려 있기를 바라는 한, 그만큼 오래 기적에 난이도의 순서가 있다는 환영이 그대와 함께 남을 것이다. 그대가 그 일부는 한 스승에게, 다른 일부는 다른 스승에게 줌으로써 이 순서를 실재 안에 세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대는 진리의 일부는 한 가지 방식으로, 다른 일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다루는 법을 배운다.
진리를 조각내는 것은 무의미하게 만듦으로써 파괴하는 것이다. 실재에 순서를 매기는 것은 이해 없는 관점이며, 실재가 실제로는 전혀 비교될 수 없는 그런 기준 틀이다. 그대는 진리를 환상으로 가져와, 환영의 관점에서 진리가 의미하는 바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진리는 환영 안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
진리의 의미에 대한 기준 틀은 진리 자신일 수밖에 없다. 그대가 진리를 환영으로 가져오려 할 때, 그대는 환영을 실재하게 만들고, 환영에 대한 그대의 믿음을 정당화함으로써 환영을 간직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환영을 진리에게 주는 것은, 진리가 환영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칠 수 있게 하며, 그렇게 하여 그대가 환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 어떤 생각도 진리에서 따로 떼어 간직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그대를 가둘 수밖에 없는 실재의 순서를 세우게 될 것이다. 실재 안에는 그 어떤 순서도 없다. 실재 안의 모든 것이 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진리 바깥에 간직해 온 모든 것을 성령에게 주고자 하라. 성령은 진리를 알며,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진리로 이끌린다.
그렇게 주는 일이 이루어지고자 하는 그대의 의향 외에는 그 무엇에도 마음 쓰지 말라. 성령이 그것을 이룰 것이지, 그대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잊지 말라.
다른 이가 환상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풀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그대가 마음이 흐트러져 평화를 잃을 때, 그대는 바로 이 똑같은 시도에 대해 자기 자신을 용서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대들 둘 다를 진리와 구원으로부터 떼어 놓고 있다. 그대가 그를 용서할 때, 그대는 그대들 둘 다가 부인했던 것을 진리에게 회복시킨다. 그리고 그대는 자신이 용서를 준 그곳에서 용서를 볼 것이다.
그대가 용서하는 이들이 그대에게 얼마나 아름답게 보일지 상상할 수 있는가? 그 어떤 환상 안에서도 그대는 이토록 사랑스러운 것을 본 적이 없다. 잠들어서든 깨어서든, 그대가 이곳에서 보는 그 무엇도 그런 사랑스러움에 가까이 이르지 못한다. 그리고 그대는 이것만큼 소중히 여기거나 이토록 귀하게 간직할 그 무엇도 없을 것이다.
그대의 마음을 기쁨으로 노래하게 만들었던, 그대가 기억하는 그 무엇도, 이 광경이 그대에게 가져다줄 행복의 아주 작은 일부조차도 그대에게 가져다준 적이 없다.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성령이 바라보기를 사랑하며 그것에 대해 아버지에게 감사하는 그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다.
성령은 그대가 스스로 그 아름다움을 보는 법을 배울 때까지 그대를 위해 그 아름다움을 보도록 창조되었다. 그리고 성령의 모든 가르침은 그 아름다움을 보고 성령과 함께 감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사랑스러움은 환상이 아니다. 그 사랑스러움은 실재 세계이니, 밝고 깨끗하고 새로우며, 모든 것이 열린 태양 아래 반짝인다. 실재 세계에는 그 무엇도 감추어져 있지 않다. 모든 것이 용서되었고 진리를 감출 환상이 없기 때문이다.
실재 세계와 이 세상 사이의 다리는 너무나 작고 건너기 너무나 쉬워서, 그대는 그 다리가 그토록 다른 두 세상이 만나는 자리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은 다리는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닿아 있는 것들 중 가장 강한 것이다.
이 작은 걸음은, 너무 작아 그대의 눈에 띄지 않았지만, 시간을 지나 영원 속으로, 모든 추함을 넘어 그대를 매혹할 아름다움 속으로 내딛는 것이며, 그 완전함에 대한 경이로움을 그대 안에 결코 그치지 않고 불러일으킬 것이다.
지금까지 내디뎌진 것 중 가장 작은 이 걸음은, 그럼에도 하나님의 속죄 계획 안에서 가장 위대한 성취다. 다른 모든 것은 배워지는 것이지만, 이 걸음은 주어지는 것이니, 완전하고 온전히 완벽하다. 구원을 계획한 이(성령) 외에는 그 누구도 이 걸음을 이렇게 완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그 사랑스러움 안에서 실재 세계에 이르는 법을 배운다. 환상은 모두 사라지며,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여전히 그것들에 매인 채로 남지 않고, 그대 자신의 용서로 그대는 자유로이 보게 된다. 그러나 그대가 보는 것은 다만 그대가 만든 것에, 그대의 용서라는 축복이 더해진 것일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자신에게 내리는 이 마지막 축복과 더불어, 그가 배운 새로운 관점에서 태어난 그 실재 지각은 자신의 목적을 다한다.
별들은 빛 속으로 사라질 것이며, 세상을 아름다움에 열어 준 그 태양도 사라질 것이다. 지각은 완전해졌을 때 무의미해질 것이다. 배움을 위해 쓰였던 모든 것이 아무 기능도 지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지각을 가능하게 했던 그 어떤 이행도, 음영도, 차이도, 변주도 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실재 세계에 대한 지각은 너무 짧아서 그대는 실재 세계에 대해 하나님에게 감사할 시간조차 거의 갖지 못할 것이다. 그대가 실재 세계에 이르러 하나님을 맞을 준비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 마지막 걸음을 재빨리 내디딜 것이기 때문이다. 실재 세계는 다만 옛 세상, 곧 용서 없이 그대가 보는 그 세상을 완전히 용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지각의 위대한 변형자(성령)는 이 세상을 만든 그 마음을 그대와 함께 세심히 탐색하는 일을 맡을 것이며, 그대가 세상을 만든 그 겉보기 이유들을 그대에게 드러낼 것이다. 성령을 따를 때, 성령이 가져오는 그 참된 이유의 빛 안에서, 성령은 그대에게 여기에는 그 어떤 이유도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성령의 이유가 닿는 자리마다 아름다움으로 생기를 띠며, 그대의 이유 없음이라는 어둠 속에서 추해 보였던 것이 갑자기 사랑스러움으로 풀려난다.
하나님의 아들이 광기 속에서 만든 것조차도, 부드러움이 풀어 줄 수 있는 아름다움의 감추어진 불꽃 없이는 있을 수 없다. 그대가 용서하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이 모든 아름다움이 일어나 그대의 눈을 축복할 것이다. 용서는 말 그대로 시야(vision)를 변형시켜, 그대의 지각을 뒤틀어 과거에 고정시켰던 모든 환영을 없애며 혼돈을 가로질러 조용하고 부드럽게 다가오는 실재 세계를 그대가 보게 하기 때문이다.
가장 작은 나뭇잎이 경이로운 것이 되고, 풀 한 포기가 하나님의 완전함의 표징이 된다. 용서받은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은 쉽게 자신의 집으로 들어 올려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언제나 그곳에서 평화롭게 쉬어 왔다는 것을 안다.
구원조차도 하나의 꿈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의 마음에서 사라질 것이다. 구원은 꿈의 끝이며, 그 꿈이 닫힘과 더불어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깨어 있는 이가 구원의 필요가 있을 수 있으리라고 어찌 꿈꿀 수 있겠는가?
그대는 구원을 얼마나 원하는가? 구원은 그대에게 주어질 준비로 떨고 있는 실재 세계를 그대에게 줄 것이다.
이것을 그대에게 주려는 성령의 열망은 너무나 강렬해서, 성령은 인내로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기다리지 않으려 할 정도다.
성령을 만나는 일이 늦어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그대의 조급함으로 성령의 인내에 응답하라. 기꺼이 나아가 그대의 해방자(Redeemer)를 만나고, 믿음으로 성령과 함께 이 세상에서 나와 아름다움과 용서의 실재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라.
5) 그림자 형상들
용서한다는 것은 다만 그대가 과거에 준 사랑의 생각들과, 그대에게 주어진 그 생각들만을 기억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잊혀야 한다. 용서는 선택적인 기억이지만, 그대의 선택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대가 불멸의 것으로 만들려는 그 그림자 형상들은 실재의 "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을 용서하고자 하라. 그림자 형상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지 않은 것을 그가 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그대가 함께 데려오는 증인들이다. 그대가 그림자 형상들을 데려오기에, 그대는 그것들의 말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선택으로 그것들을 간직하는 그대는, 그림자 형상들이 어떻게 그대의 마음속으로 들어왔는지, 그것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림자 형상들은 그대에게 행해졌다고 그대가 생각하는 악을 나타낸다. 그대는 다만 악을 악으로 갚기 위해 그림자 형상들을 데려오며, 그 증언이 그대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해치지 않으면서 다른 이를 죄책감 있게 생각할 수 있게 해 주기를 바란다.
그림자 형상들은 분리를 위해 너무나 또렷하게 말하기에, 분리를 지키는 데 사로잡힌 이만이 그것들의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림자 형상들은 그대에게, 에고의 목표를 뒷받침하기 위해 불경한 동맹으로 들어가야 하는 "이유들"을 제시하며, 그대의 관계들을 에고의 힘에 대한 증인으로 만든다.
바로 이 그림자 형상들이 그대의 눈에 에고를 거룩하게 만들고, 에고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그대가 하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고 가르친다. 그림자 형상들은 언제나 복수를 위해 말하며, 그것들이 들어가는 모든 관계는 완전히 미쳐 있다. 예외 없이, 이 관계들은 상대에 대한, 그리고 그대 자신에 대한 진리를 배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것이 바로 그대가 둘 다에게서 거기 없는 것을 보고, 둘 다를 복수의 노예로 만드는 이유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의 과거 원한을 상기시키는 것이 무엇이든 그대를 끌어당기며, 그대가 그 연결에 이르는 그 연상이 아무리 왜곡되어 있어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은 그런 모든 관계가 몸을 통한 연합의 시도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직 몸만이 복수의 수단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이 모든 불경한 관계의 중심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대 자신의 경험이 그대에게 이것을 가르쳐 왔다. 그러나 그대가 깨닫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은, 그 관계를 불경하게 만드는 그 모든 이유다. 이는 불경함이, 거룩함이 그러하듯, 자신과 비슷하다고 지각하는 것을 끌어모아 자신을 강화하려 하기 때문이다.
불경한 관계 안에서, 연합이 시도되는 것은 상대의 몸이 아니라, 거기 있지 않은 이들의 몸이다. 이미 상대에 대한 심하게 제한된 지각인 상대의 몸조차도, 있는 그대로나 전체로서는 중심 초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심에 놓여 유일하게 가치 있는 부분으로 따로 떼어지는 것은, 복수의 환상을 위해 쓰일 수 있는 것과, 복수가 실제로 겨냥되는 그 이들과 가장 쉽게 연상될 수 있는 것이다.
불경한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고, 끊어 내는 데서 내디뎌지는 모든 걸음은 더 심한 조각남과 비실재를 향한 움직임이다. 그림자 형상들은 점점 더 많이 들어오고, 그것들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사람은 중요성이 줄어든다. 시간은 참으로 불경한 관계에 불친절하다. 시간은 부드러움을 위해 쓰일 때 친절한 것과 마찬가지로, 에고의 손 안에서는 잔인하기 때문이다.
불경한 관계의 매력은 거의 즉시 희미해지고 의문시되기 시작한다. 일단 그 관계가 형성되면, 의심이 들어올 수밖에 없다. 그 목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불경한 관계의 "이상"은, 상대의 실재가 꿈을 "망치러" 전혀 들어오지 않는 그런 관계가 된다.
그리고 상대가 그 관계에 실제로 가져오는 것이 적을수록, 그 관계는 "더 나은" 것이 된다. 그렇게 하여, 연합의 시도는 연합이 추구되었던 바로 그 상대조차 배제하는 방법이 된다.
이는 그 연합의 시도가 상대를 그 관계에서 빼내고, 끊이지 않는 "지복" 속에서 환상과 결합하기 위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6) 아름다움의 불꽃
성령은 오직 실재로부터의 분리만을 목적으로 삼는 관계들 안으로, 소통의 수단으로서의 몸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어떻게 가져올 수 있겠는가? 용서가 무엇인지가 성령이 그렇게 할 수 있게 한다. 사랑의 생각을 제외한 모든 것이 잊혔다면, 남는 것은 영원한 것이다.
그리고 변형된 과거는 현재와 같아진다. 과거는 더 이상 지금과 충돌하지 않는다. 이 연속성은, 그대의 지각 안에서 현재의 실재성과 가치를 늘림으로써 현재를 확장한다. 이 사랑의 생각들 안에는, 증오가 기억되는 그 불경한 관계의 추함 속에 감추어진 아름다움의 불꽃이 있다. 그러나 그 관계가 생명과 아름다움을 주는 성령에게 주어지면, 그 불꽃은 바로 그곳에서 살아나게 되어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속죄는 과거를 중심으로 삼는다. 과거는 분리의 근원이며, 분리를 원상태로 되돌려야 하는 곳이다. 분리는 만들어진 곳에서 바로잡혀야 하기 때문이다.
에고는 자신의 문제를 그 근원에서가 아니라, 문제가 만들어지지 않은 곳에서 "해결"하려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에고는 그 어떤 해결책도 없으리라는 것을 보장하려 한다.
성령은 다만 자신의 해결을 완전하고 완벽하게 만들고자 할 뿐이며, 그래서 문제의 근원을 있는 그 자리에서 찾아내어 그곳에서 문제를 원상태로 되돌린다.
그리고 성령이 원상태로 되돌리는 걸음마다, 분리는 점점 더 원상태로 되돌려지고, 연합은 더 가까워진다. 성령은 분리에 대한 그 어떤 "이유"에도 전혀 혼란스러워하지 않는다. 성령이 분리 안에서 지각하는 전부는 원상태로 되돌려져야 한다는 것뿐이다.
성령이 그대의 관계들 안에 감추어진 아름다움의 불꽃을 드러내어 그대에게 보여 주게 하라. 그 사랑스러움은 그대를 너무나 강하게 끌어당겨서 그대는 다시는 결코 그 아름다움을 시야에서 잃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이 불꽃이 그 관계를 변형시켜 그대가 그 아름다움을 점점 더 많이 볼 수 있게 하도록 허락할 것이다. 그대는 그 아름다움을 점점 더 많이 원할 것이며, 그 아름다움이 그대에게서 감추어지도록 두는 것을 점점 더 원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는 이 아름다움이 보일 수 있는 그 조건들을 찾아 세우는 법을 배울 것이다. 그대가 다만 성령이 그대의 길을 밝히고 그 아름다움을 그대에게 또렷이 하도록 그 아름다움의 불꽃을 그대 앞에 들고 있게 한다면, 그대는 이 모든 것을 기꺼이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다. 하나님이 하나로 결합한 것을, 에고는 갈라놓을 수 없다. 거룩함의 불꽃은, 아무리 감추어져 있다 해도, 모든 관계 안에서 안전할 수밖에 없다. 그 하나의 관계의 창조주가 그 관계의 그 어떤 부분도 자기 자신 없이 남겨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거룩함의 불꽃이 바로 성령이 그 관계에서 보는 유일한 부분이다. 오직 이것만이 참이라는 것을 성령이 알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 관계를, 있지 않은 곳에서 있지 않은 모습으로 봄으로써 실재하지 않게, 따라서 불경하게 만들어 왔다. 그 관계에 대한 그대의 마음을 그대를 위해 바꿀 수 있는 성령에게 과거를 주라.
그러나 먼저, 그대가 과거로 하여금 무엇을 나타내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했는지 온전히 깨닫도록 하라. 과거는 현재에 맞서 에고와 계속되는 불경한 동맹을 맺는 것에 대한 정당화가 된다. 현재는 용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불경한 동맹이 지시하는 관계들은 지금으로 지각되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현재가 의미를 얻으려고 의지하는 기준 틀은 과거의 환영이다. 그 환영 안에서는 불경한 동맹의 목적에 맞는 요소들만 간직되고 나머지는 모두 놓인다. 그리고 그렇게 놓이는 것은, 과거가 자신의 실재성에 대한 증인으로서 현재에게 줄 수 있었던 그 모든 진리다. 간직되는 것은 다만 꿈의 실재성에 대한 증인일 뿐이다. 진리와 하나 될지 환영과 하나 될지 선택하는 것은 여전히 그대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다른 하나를 놓아 버리는 것임을 기억하라. 그대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대는 그 선택에 아름다움과 실재성을 부여할 것이다. 그 선택은 그대가 어느 쪽을 더 소중히 여기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의 불꽃이든 추함의 베일이든, 실재 세계든 죄책감과 두려움의 세상이든, 진리든 환영이든, 자유든 노예 상태든 — 그 선택은 다 마찬가지다.
그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오직 하나님과 에고 사이의 선택뿐이기 때문이다. 사고 체계는 다만 참이거나 거짓일 뿐이며, 그것들의 모든 속성은 단순히 그것들이 무엇인가에서 비롯된다. 오직 하나님의 생각들(Thoughts)만이 참이다. 그리고 그 생각들로부터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그것들이 무엇인가에서 비롯되며, 그것들이 나온 그 거룩한 근원(Source)만큼이나 참되다.
나의 거룩한 형제여, 나는 그대의 모든 관계 안으로 들어가, 그대와 그대의 환상 사이에 끼어들고자 한다. 그대에 대한 나의 관계가 그대에게 실재하는 것이 되게 하고, 형제들에 대한 그대의 지각에 내가 실재를 가져오게 하라. 그 형제들은 그대가 그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해칠 수 있게 하려고 창조되지 않았다.
그 형제들은 그대와 함께 창조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대와 그대의 광기의 목표 사이에 끼워 넣고자 하는 진리다. 나로부터 분리되지 말고, 속죄의 그 거룩한 목적을 복수의 꿈 속에서 잃지 말라.
그런 꿈들이 소중히 여겨지는 관계는 나를 배제해 왔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들어가 그대에게 평화를 가져다주게 하라, 그러면 그대는 나에게 평화를 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대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그대와의 관계를 세웠으며, 하나님의 목적을 나누지 않는 그대의 그 어떤 행위도 실재할 수 없다. 하나님이 그 무엇에 부여한 목적이 바로 그것의 유일한 기능이다. 하나님이 그대와의 관계를 창조한 그 이유 때문에, 관계의 기능은 영원히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 기능을 다하기 위해 그대는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물들과 관계 맺듯이 그대의 창조물들과 관계 맺는다. 하나님이 창조한 그 무엇도 행복과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하나님이 창조한 것은 모두 창조주가 그러했듯 행복을 확장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 기능을 다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실재할 수 없다. 이 세상에서는 창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
나는 성령이 그대에게서 그대의 특별한 관계들을 빼앗지 않고 그것들을 변형시킬 것이라고 거듭 말해 왔다. 그리고 그 말이 의미하는 전부는, 성령이 그것들에게 하나님이 준 그 기능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것뿐이다. 그대가 그것들에게 준 기능은 분명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거룩한 관계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대체물을 만들려 하기보다는 그 목적을 나눈다.
그대가 만든 모든 특별한 관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대체물이며, 하나님의 뜻과 그대의 뜻이 서로 다르다는 환영 때문에 하나님의 뜻 대신 그대의 뜻을 찬양한다. 그대는 이 세상 안에서조차 아주 실재하는 관계들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그대는 그 관계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는 그대가 그 관계들의 대체물들을 너무나 우세하게 만들어 놓아서, 진리가 끊임없이 그러하듯 그대를 부를 때, 그대는 대체물로 응답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만든 모든 특별한 관계는, 그 근본적인 목적으로서, 그대의 마음을 너무나 완전히 점유하여 그대가 진리의 부름을 듣지 못하게 하려는 목표를 지닌다. 어떤 의미에서, 특별한 관계는 성령의 창조에 대한 에고의 대답이었으며, 성령은 분리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었다. 에고는 무엇이 창조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위협을 알아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령으로부터 분리를 보호하기 위해 에고가 발전시킨 그 방어 체계 전체는, 하나님이 분리를 축복한 그 선물에 대한 반응이었으며, 하나님은 그 축복으로 분리가 치유될 수 있게 했다.
이 축복은 그 자체 안에 모든 것에 대한 진리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진리는, 성령이 그대와 가까운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의 그대의 관계가 그대에게 회복되기 때문이다.
성령과의 그 관계는 결코 깨진 적이 없으니, 성령은 분리 이래로 그 누구로부터도 분리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 그대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그대의 모든 거룩한 관계가 세심히 보존되어 왔다.
에고는 위협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며, 에고가 받아들여진 그대 마음의 그 부분은 자신이 이성이라고 여기는 것을 지키려고 매우 불안해한다. 그 부분은 자신이 완전히 미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그대가 온전한 정신으로 회복되고자 한다면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아야 한다.
미친 자들은 자신의 사고 체계를 보호하지만, 미친 방식으로 보호한다. 그리고 미친 자들의 모든 방어는 그들이 보호하려는 것만큼이나 미쳐 있다. 분리 안에는 미치지 않은 것이 그 어떤 부분도, 그 어떤 "이유"도, 그 어떤 속성도 없다. 그리고 분리의 "보호"도 그것의 일부이며, 전체만큼이나 미쳐 있다.
그러므로 분리의 주된 방어인 특별한 관계도 미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대는 이제 특별한 관계가 보호하는 그 사고 체계가 다만 망상의 체계일 뿐임을 깨닫는 데 거의 어려움이 없다. 그대는, 적어도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에고가 미쳐 있다는 것을 알아본다.
그러나 특별한 관계는 그대에게 여전히 어쩐지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대가 기꺼이 놓아 버리려 했던 에고의 사고 체계의 다른 많은 측면들보다 특별한 관계를 훨씬 더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그것이 남아 있는 한, 그대는 나머지를 놓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간직하면, 그대는 전체를 간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