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랑의 환영 해소
특별한 증오 관계를 바라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자유는 증오를 바라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 특별한 증오 관계만 없다면, 그대가 사랑의 의미를 모를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의 의미가 감추어져 있는 특별한 사랑 관계는 오직 증오를 덮기 위해서만 착수되는 것이지, 그것을 놓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가 증오를 바라볼 때 그대의 구원이 그대의 눈앞에 또렷이 떠오를 것이다. 그대는 증오를 제한할 수 없다. 특별한 사랑 관계는 증오를 없애지 않고, 다만 그것을 지하로 몰아넣어 시야에서 사라지게 할 뿐이다. 증오를 시야 안으로 가져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감추려 시도하지 않는 것이 필수적이다. 증오를 사랑으로 균형 잡으려는 시도야말로 그대에게 사랑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증오와 사랑의 균형 시도 안에 놓인 분열의 정도를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그대가 분열을 깨달을 때까지, 분열은 인식되지 않은 채로 남을 것이며, 따라서 치유되지 않은 채로 남을 것이다. 사랑의 상징에 맞선 증오의 상징은 존재하지 않는 갈등을 연출한다. 상징은 다른 무언가를 나타내며, 사랑이 전부라면 사랑의 상징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 마지막 해소를 아무 해도 입지 않고 통과할 것이며, 마침내 그대 자신으로 드러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맞을 준비의 마지막 단계다. 지금 꺼리지 말라. 그대는 너무 가까이 와 있으며, 완전한 안전 속에서 그 다리를 건널 것이니, 전쟁에서 평화로 조용히 옮겨질 것이다. 사랑의 환영은 결코 만족시키지 못하지만, 다리 저편에서 그대를 기다리는 그 실재는 그대에게 모든 것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사랑 관계는 죄책감의 폭풍 속에서 피난처를 찾음으로써 증오의 파괴적 영향을 제한하려는 시도다. 그것은 폭풍 위로 솟아올라 햇빛 속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죄책감에 맞서 방벽을 쌓고 그 방벽 안에 머무르려 함으로써 피난처 바깥의 죄책감을 강조한다.
특별한 사랑 관계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으로 지각되지 않고, 증오가 분리되어 떨어져 있는 안전한 장소로 지각된다. 특별한 사랑의 상대는 이 목적에 이바지하는 한에서만 받아들여진다. 증오는 들어올 수 있으며, 실제로 그 관계의 어떤 측면에서는 반김을 받기도 하지만, 그 관계는 여전히 사랑의 환영으로 함께 묶여 있다. 그 환영이 사라지면, 그 관계는 깨지거나 환멸을 이유로 불만족스러워진다.
사랑은 환영이 아니다. 사랑은 사실이다. 환멸이 가능한 곳에는, 사랑이 아니라 증오가 있었다. 이는 증오가 환영이고, 변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사랑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삶의 어떤 측면에서든 특정한 이들을 상대로 선택하여, 다른 이들과 나누지 않을 어떤 목적을 위해 그들을 이용하는 자들은, 확실히 죄책감으로 죽기보다는 죄책감과 더불어 살려고 애쓰고 있다. 이것이 이런 사람들이 보는 선택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게 사랑은 다만 죽음으로부터의 도피일 뿐이다. 이들은 사랑을 필사적으로 찾지만, 사랑이 이들에게 기꺼이 조용히 찾아올 그 평화 안에서 찾지는 않는다.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이 여전히 이런 사람들에게 있음을 발견할 때, 그 사랑의 관계는 자신이 실제로는 아닌 무엇이라는 환영을 잃는다.
사랑에 맞선 방벽이 무너지면, 두려움이 밀려들고 증오가 승리한다. 사랑의 승리란 없다. 오직 증오만이 "사랑의 승리"에 관심을 둘 뿐이다.
사랑의 환영은 증오의 환영을 이길 수 있지만, 언제나 둘 다를 환영으로 만드는 대가를 치르고서다. 증오의 환영이 지속되는 한, 그만큼 오래 사랑도 그대에게 환영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남는 유일한 선택은 그대가 어느 환영을 선호하는가일 뿐이다.
진리와 환영 사이의 선택에는 갈등이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 누구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이 환영들 사이의 선택처럼 보이는 순간 갈등이 들어오지만, 환영들 사이의 선택은 중요하지 않다. 한 선택이 다른 선택만큼이나 위험한 곳에서는, 그 결정은 절망의 결정일 수밖에 없다.
그대의 과제는 사랑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대가 사랑에 맞서 쌓아 온 그대 안의 모든 장벽을 찾아내는 것이다. 참된 것을 찾을 필요는 없지만, 거짓된 것을 찾을 필요는 있다. 모든 환영은 어떤 형태를 취하든 두려움의 환영이다. 그리고 한 환영에서 다른 환영으로 도피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대가 자기 자신 바깥에서 사랑을 찾는다면, 그대는 자기 안에서 증오를 지각하고 있으며 증오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확신해도 좋다. 그러나 평화는 결코 사랑의 환영에서 오지 않으며, 오직 사랑의 실재에서만 온다. 이것을 알아보라, 이것은 참이며, 진리가 환영과 구별되려면 알아보아져야 하기 때문이다.
특별한 사랑 관계는 사랑을 두려움 안으로 가져와 두려움 안에서 사랑을 실재하게 만들려는 시도다. 사랑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위반하는 가운데, 특별한 사랑 관계는 불가능한 것을 이루려 한다. 이것이 환영 안에서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그대에게 아주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그 딜레마를 풀기 위해 그대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아주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대는 진리에 가까이 와 있으며, 오직 이것만이 그대와, 그대를 진리 안으로 이끄는 그 다리 사이에 놓여 있다.
천국은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며, 그대의 창조물들은 그대가 건너오도록 돕고 그들을 맞이하도록 손을 내밀고 있다. 그대가 찾는 것이 바로 그대의 창조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다만 자신의 완성을 찾을 뿐이며, 그대를 완성시키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특별한 사랑 관계는 다만, 환영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그대를 온전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초라한 대체물일 뿐이다. 그대가 창조물들과 맺는 관계에는 죄책감이 없으며, 이는 그대가 모든 형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니, 그대의 창조물들이 형제들과의 연합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대의 창조물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창조의 하나됨이며, 이것 없이는 그대는 결코 완성될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떤 특별함도 하나님이 준 것, 그리고 그대가 하나님과 함께 주는 것을 그대에게 줄 수 없다.
다리 저편에 그대의 완성이 있으니, 그대는 온전히 하나님 안에 있을 것이며, 그 어떤 특별한 것도 바라지 않고 다만 온전히 하나님을 닮기만을 바랄 것이니, 그대의 완성으로 하나님을 완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와 완전한 거룩함의 처소로 건너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오직 그곳에서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의 완성이 영원히 확립되어 있다.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고 그 무엇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그 삭막한 환영의 세상에서 이것을 찾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환영을 버릴 온전한 의향을 지니라.
그대가 완성을, 오직 이것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하는 그 어떤 관계 안에서든, 그곳에는 완성된 하나님과 하나님과 함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있다.
그대 자신 안의 연합으로 이끄는 그 다리는 앎으로 이끌 수밖에 없다. 그 다리는 하나님이 그대 곁에 있는 채로 지어졌으며, 하나님의 완성과 온전히 조화를 이루는 그대의 완성이 머무는 곳인 하나님을 향해 그대를 곧장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성취 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마음속에 받아들이는 모든 환영은 그대 자신의 완성감을 없애며, 그렇게 하여 그대 아버지의 온전함(Wholeness)을 부인한다. 사랑의 환상이든 증오의 환상이든, 모든 환상은 그대에게서 앎을 빼앗으니, 환상은 진리가 그 뒤에 감추어져 있는 베일이기 때문이다.
그토록 어둡고 무겁게 보이는 그 베일을 걷어 올리려면, 다만 모든 환상을 넘어서 진리를 소중히 여기고, 진리 대신 환영에 안주하기를 전혀 원하지 않기만 하면 된다.
그대는 두려움을 통과하여 사랑에 이르지 않겠는가? 그 여정은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부르지만, 증오는 그대가 머물기를 바란다. 증오의 부름을 듣지 말고, 그 어떤 환상도 보지 말라.
증오의 부름 안에서, 그리고 그대를 지연시키려고 일어나는 모든 환상 안에서, 다만 그대에게서 그대의 창조주에게로 끊임없이 일어나는 도움의 부름만을 보라. 그대의 완성이 곧 창조주의 완성인데, 창조주가 그대에게 응답하지 않겠는가? 창조주는 그대를 온전히 환영 없이 사랑하니, 그대도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온전히 환영이 없으며, 그러므로 온전히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억하는 자는 온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을 온전하게 만드는 것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그대의 완성 안에는 하나님의 온전함에 대한 기억과, 그대에 대한 하나님의 완성을 향한 하나님의 감사가 놓여 있다.
그대와의 하나님의 연결 안에는 하나님이 잊을 수 없다는 무능력과 그대가 기억할 수 있다는 능력이 둘 다 놓여 있다.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고자 하는 그대의 의향과, 그대를 잊지 않은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함께 결합되어 있다. 그대의 아버지가 그대 안의 진리를 잊을 수 없는 것은, 그대가 그 진리를 기억하지 못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성령은 하나님에게로 이르는 다리(Bridge)이며, 하나님과 하나 되고자 하는 그대의 의향으로 지어졌고, 그대와의 연합 안에서 하나님이 느끼는 기쁨으로 창조되었다. 끝없어 보였던 그 여정은 거의 완성되었으니, 끝없는 것이 아주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 끝없는 것을 거의 알아보았다.
이제 나와 함께 모든 환영으로부터 굳건히 돌아서서, 그 무엇도 진리의 길을 가로막지 못하게 하라. 우리는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그 마지막 쓸모없는 여정을 함께할 것이며, 그런 다음 하나님의 완성을 향한 하나님의 부름에 기쁘게 응답하며 함께 하나님을 향해 곧장 나아갈 것이다. 그 어떤 종류든 특별한 관계가 하나님의 완성을 가로막는다면, 그 특별한 관계가 그대에게 무슨 가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방해하는 것은 그대도 방해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완성에 대한 방해는 오직 시간 안에서만 가능해 보인다. 하나님이 그대를 건너게 하려는 그 다리는 그대를 시간에서 영원으로 들어 올린다. 시간에서 깨어나, 그대의 창조 안에서 그대에게 영원을 준 그 존재의 부름에 두려움 없이 응답하라.
무시간성으로 이르는 그 다리의 이쪽 편에서는 그대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무시간성이 떠받쳐 주는 가운데 그대가 가볍게 그 다리를 건너갈 때, 그대는 하나님의 심장으로 곧장 인도된다. 그 중심에서, 오직 그곳에서만, 그대는 영원히 안전하니, 그대가 영원히 완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함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걷어 올릴 수 없는 베일은 없다.
진리로 가는 길이 열려 있다. 나와 함께 그 길을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