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사랑을 통한 정복
1) 비자발적이라는 착각
두려워하는 것은 비자발적인 일처럼, 곧 그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미 오직 건설적인 행위만이 비자발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대가 그렇게 선택한다면, 나의 통제는 중요하지 않은 모든 것을 넘겨받을 수 있고, 나의 인도는 중요한 모든 것을 지휘할 수 있다.
두려움은 내가 통제할 수 없지만, 그대는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 두려움은 내가 그대에게 나의 통제를 내어 주지 못하게 막는다.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그대가 육체에 관한 생각을 마음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는 육체에 관한 생각을 나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대가 그 생각에 대해 개인적으로 책임을 느끼게 만든다. 이는 명백한 차원의 혼동이다. 나는 차원의 혼동을 조장하지 않지만, 그대는 그 혼동을 바로잡기로 선택해야 한다.
그대는 자신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미친 행동을 변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미친 생각은 눈감아 주려 하는가? 여기에는 그대가 분명히 살펴보는 것이 좋을 혼동이 있다.
그대는 자신이 행하는 것에는 책임이 있지만 생각하는 것에는 책임이 없다고 믿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실은, 그대가 생각하는 것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오직 이 차원에서만 그대가 선택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행하는 것은 그대가 생각하는 것에서 나온다. 그대는 행동에 자율성을 "부여"함으로써 자신을 진리로부터 떼어 놓을 수 없다.
그대가 생각하는 것을 나의 인도 아래 두는 순간, 그대의 행동은 저절로 내가 통제한다. 그대가 두려워할 때마다, 이는 그대가 자신의 마음이 그릇되게 창조하도록 허락했고 내가 그 마음을 인도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는 확실한 신호다.
그릇된 생각의 결과를 통제하는 것이 치유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대가 두려워할 때, 그대는 잘못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그 선택에 책임을 느낀다.
그대는 자신의 행동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어야 하며, 이는 기꺼이 하려는 마음의 문제다. 그대에게는 마음의 차원 말고는 인도가 필요하지 않다. 교정은 오직 변화가 가능한 차원에만 속한다. 변화는 증상의 차원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차원에서는 변화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바로잡는 것은 그대의 책임이다. 그대가 두려움으로부터의 풀려남을 구할 때, 그대는 그 교정이 그대의 책임이 아니라고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신 그대는 두려움을 불러온 조건들에 대한 도움을 구해야 한다. 이 조건들은 언제나 분리되고자 하는 의지를 동반한다. 바로 그 차원에서 그대는 그 조건들을 도울 수 있다.
그대는 마음이 방황하는 것을 너무 관대하게 대하며, 그대의 마음이 그릇되게 창조하는 것을 수동적으로 눈감아 주고 있다. 특정한 결과는 중요하지 않지만, 근본적인 잘못은 중요하다. 교정은 언제나 동일하다.
무엇을 하기로 선택하기 전에, 그대의 선택이 나의 선택과 일치하는지 나에게 물으라. 그렇다는 확신이 있다면, 두려움은 없을 것이다.
두려움은 언제나 긴장의 표징이며, 그대가 원하는 것과 그대가 행하는 것이 충돌할 때마다 일어난다. 이런 상황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난다.
첫째, 그대는 서로 충돌하는 일들을 동시에 또는 차례로 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이는 갈등하는 행동을 낳는다. 다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의 부분이 격분하기 때문에 그대는 그 갈등하는 행동을 견딜 수 없다.
둘째, 그대는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만, 그것을 온전히 원하지는 않을 수 있다. 이는 일관된 행동을 낳지만 큰 긴장을 동반한다.
두 경우 모두, 마음과 행동이 조화를 이루지 못해 그대가 온전히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는 강요당한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느낌은 대개 분노를 낳고 그 뒤에 투사가 뒤따르기 쉽다.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언제나 그대가 마음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마음은 갈라져 있고, 그대의 행동은 필연적으로 종잡을 수 없게 된다.
행동의 차원에서 바로잡는 것은 잘못을 첫 번째 형태에서 두 번째 형태로 옮길 수는 있어도 두려움을 없애지는 못한다.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그대의 마음을 나의 인도 아래 두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기꺼이 하려는 마음을 전제하는데, 그대는 그 마음을 아직 계발하지 못했다. 성령은 그대가 기꺼이 하려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없다.
행할 힘은 그대의 나뉘지 않은 결정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곧 그대 자신의 뜻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보는 순간, 거기에는 아무런 긴장도 없다.
2) 오직 마음만이 만듦
여기서의 교훈은 매우 단순하지만, 특히 간과되기 쉽다. 그러므로 나는 그 교훈을 되풀이하며, 그대에게 귀 기울이기를 권한다.
오직 그대의 마음만이 두려움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마음은 자신이 원하는 것에서 갈등할 때마다 그렇게 하며,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어긋나기에 필연적인 긴장을 낳는다.
이는 오직 하나로 통합된 목표를 받아들임으로써만 바로잡을 수 있다. 이 잘못을 되돌리는 첫 번째 교정 단계는, 그 갈등이 두려움의 표현임을 먼저 아는 것이다. 그대가 어떤 식으로든 사랑하지 않기로 선택했음이 틀림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라. 그렇지 않다면 두려움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교정의 전체 과정은, 속죄를 치유책으로 받아들이는 더 큰 과정 안에서 일련의 실용적인 단계들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 단계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이것이 두려움임을 알라. 두려움은 사랑의 결핍에서 일어난다. 사랑의 결핍에 대한 유일한 치유책은 완전한 사랑이다. 완전한 사랑이 곧 속죄다.
나는 기적, 곧 속죄의 표현이 언제나 가치 있는 존재가 가치 있는 존재에게 보내는 존중의 표징이라고 강조해 왔다. 이 가치에 대한 알아봄은 속죄를 통해 다시 세워진다.
그렇다면 그대가 두려워할 때, 그대는 자신을 속죄가 필요한 자리에 두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대는 사랑 없이 선택함으로써 사랑 없는 무언가를 행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속죄가 제공된 바로 그 상황이다. 그 치유책에 대한 필요가 그 치유책의 확립을 불러왔다.
그대가 오직 치유책에 대한 필요만을 알아보는 한, 그대는 여전히 두려운 상태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 치유책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대는 두려움을 없앤 것이다. 참된 치유는 이렇게 일어난다.
누구나 두려움을 경험한다. 그러나 두려움이 왜 일어나는지 깨닫는 데는 아주 약간의 올바른 생각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마음의 참된 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고, 그 힘을 언제나 완전히 자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알아야 할 몇 가지가 있으며, 그것도 완전히 알아야 한다.
마음은 매우 강력하며 그 창조력을 결코 잃지 않는다. 마음은 결코 잠들지 않는다. 마음은 매 순간 창조하고 있다. 생각과 믿음이 결합해 산도 말 그대로 옮길 수 있는 힘의 파동을 이룬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어렵다.
언뜻 보면 자신에 대해 그런 힘을 믿는 것이 오만하게 보이지만, 그런 힘을 믿는 것이 그대가 그 힘을 믿지 않는 진짜 이유는 아니다. 그대는 자신의 생각이 실제로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믿기를 더 좋아한다. 이는 그대가 실은 그 생각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는 것은 죄책감에 대한 자각을 누그러뜨릴 수는 있지만, 그 대가로 마음을 무력한 것으로 지각하게 만든다. 그대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아무 효력이 없다고 믿는다면 그 생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수는 있지만, 그 생각을 존중하게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헛된 생각이란 없다. 모든 생각은 어느 차원에서든 형태를 만들어 낸다.
그대는 여전히 두려움에 대해 불평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대는 스스로를 두렵게 만드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나는 이미 그대가 나에게 두려움에서 풀어 달라고 요청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대는 알지 못한다. 만약 내가 그대의 생각과 그 결과 사이에 끼어든다면, 나는 가장 근본적인 법칙인 원인과 결과의 기본 법칙을 훼손하는 셈이 될 것이다. 내가 그대 자신의 생각의 힘을 얕본다면 그대에게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이 과정의 목적과 정면으로 배치될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주의 깊게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그대에게 일깨워 주는 편이 훨씬 더 도움이 된다.
그대는 지금 이 시점에서 그렇게 하려면 기적이 필요하리라고 느낄 수도 있는데, 이는 완전히 맞는 말이다. 그대는 기적적인 생각에 익숙하지 않지만, 그렇게 생각하도록 훈련받을 수는 있다. 기적을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그런 종류의 훈련이 필요하다.
나는 그대가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 않은 채 내버려 두게 둘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나를 도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적을 행하는 일은 그릇된 창조를 피하기 위해 생각의 힘을 온전히 깨닫는 것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 자체를 바로잡기 위해 또 다른 기적이 필요해질 것이다. 이는 기적이 본래 의도한 시간 단축을 촉진하지 못하는 순환 과정이 될 것이다.
기적을 행하는 사람은 기적이 일어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서 참된 원인과 결과에 대한 진정한 존중을 지녀야 한다. 기적과 두려움은 둘 다 생각에서 나온다. 그대가 하나를 선택할 자유가 없다면, 다른 하나를 선택할 자유도 없을 것이다. 기적을 선택함으로써 그대는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두려움을 물리친 것이다.
3) 창조와 그릇된 창조
그대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두려워해 왔다. 그대는 하나님을, 나를, 그리고 그대 자신을 두려워한다. 그대는 우리를 잘못 지각하거나 그릇되게 창조했고, 자신이 만든 것을 믿는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생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그대는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릇되게 창조할 수밖에 없다. 이는 그런 사람이 창조를 잘못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릇되게 창조할 때 그대는 고통 속에 있다.
원인과 결과의 원리는 이제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참된 촉진자가 된다. 실제로 "원인"이라는 말은 본래 하나님에게 속한 용어이며, 그 "결과"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는 그대가 그릇된 창조 안으로 끌어들이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와는 완전히 다른, 원인(Cause)과 결과(Effect)의 관계 한 벌을 동반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근본적인 갈등은 창조와 그릇된 창조 사이의 갈등이다. 모든 두려움은 후자에 내재하고, 모든 사랑은 전자에 내재한다. 그러므로 그 갈등은 사랑과 두려움 사이의 갈등이다.
그대는 이미 이런 말을 들은 바 있다. 곧 그대는 두려움을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에 두려움을 통제할 수 없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또 두려움에 대한 그대의 믿음이 두려움을 그대의 통제 밖에 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을 정복하려 시도함으로써 그 잘못을 풀려는 그 어떤 시도도 소용없다. 실제로 그런 시도는, 두려움이 정복되어야 한다는 바로 그 가정을 통해 두려움의 힘을 오히려 확인해 주는 것이다.
참된 해법은 오직 사랑을 통한 정복에 있다.
그러나 그동안에는, 그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의 힘을 믿는 자리에 자신을 두었으므로 갈등의 느낌이 불가피하다.
아무것도 아닌 것과 모든 것은 함께 존재할 수 없다. 하나를 믿는다는 것은 다른 하나를 부인하는 것이다. 두려움은 실은 아무것도 아니며, 사랑이 곧 모든 것이다.
빛이 어둠 속으로 들어올 때마다 어둠은 사라진다.
그대가 믿는 것은 그대에게는 참이다. 이런 의미에서 분리는 일어났으며, 분리를 부인하는 것은 다만 부인을 부적절하게 쓰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잘못에 집중하는 것은 또 다른 잘못일 뿐이다. 초기의 교정 절차는 일시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지만, 이는 오직 즉각적인 교정이 필요하다는 표시로서만 그러하다.
이는 속죄를 지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세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 사이에는 그 어떤 타협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시간은 본질적으로 이런 점에서 모든 타협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하는 장치다. 시간은 그저 단계적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시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간격들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릇된 창조가 시간을 교정 장치로서 필요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었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다"라는 말은, 이 맥락에서 의미를 지니려면 오직 한 가지 사소한 수정만 필요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자신의 독생자에게 주었다"로 고치면 된다.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에게는 오직 한 아들만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면, 하나님의 아들들 각각은 아들됨(Sonship) 전체의 필수 불가결한 일부여야 한다. 아들됨은 그 하나됨 안에서 그 부분들의 합을 초월한다.
그러나 그 부분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빠져 있는 한 이 온전함은 가려진다. 그래서 아들됨의 모든 부분이 돌아올 때까지는 그 갈등(사랑과 두려움 사이의 갈등)이 궁극적으로 풀릴 수 없다. 그때에야 비로소 참된 의미에서의 온전함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아들됨의 어느 부분이든 원한다면 잘못이나 불완전함을 믿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그 부분은 아무것도 아닌 것의 존재를 믿고 있는 것이다. 이 잘못의 교정이 곧 속죄다.
나는 이미 준비됨에 관해 간략히 말한 바 있지만, 여기서 몇 가지 더 도움이 될 점이 있다. 준비됨은 다만 성취의 전제 조건일 뿐이다.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준비된 상태가 일어나는 즉시 대개 어느 정도 성취하려는 바람이 함께 생기지만, 그 바람이 반드시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상태는 마음이 바뀔 가능성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감은 정복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완전히 자라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두려움을 정복할 수 있다는 근본적인 잘못을 바로잡으려 해 왔으며, 유일한 참된 정복은 사랑을 통한 것임을 강조해 왔다. 준비됨은 다만 자신감의 시작일 뿐이다.
그대는 이것이 준비됨과 정복 사이에 엄청난 시간이 필요함을 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이 나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그대에게 일깨워 주고 싶다.
마법과 기적의 혼동을 바로잡는 한 가지 방법은, 그대가 그대 자신을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대는 자기중심적이 될 때 이것을 잊기 쉬우며, 그렇게 잊으면 그대는 마법에 대한 믿음이 사실상 불가피해지는 자리에 놓인다.
창조하려는 그대의 의지는 그대의 창조주가 그대에게 준 것이며, 창조주는 자신의 창조 안에서 바로 그 같은 의지를 표현하고 있었다. 창조력은 마음 안에 있으므로, 그대가 창조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의지의 문제다.
그렇다면 그대 혼자서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그대 자신의 눈에는 실재이지만, 하나님의 마음(Mind)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결론도 따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