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희생 없는 그리스도의 때
시간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결합을 늦추는 것은 그대의 힘 안에 있다. 이 세상에서는 죄책감의 이끌림이 실제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서 있기 때문이다. 영원 안에서는 시간도 절기도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간과 절기 둘 다를 쓰는 것이 성령의 역할이다. 다만 에고가 시간과 절기를 쓰는 방식으로 쓰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대가 이 세상으로의 나의 탄생을 기념하고자 하는 절기다. 그러나 그대는 그 절기를 지키는 법을 알지 못한다. 성령이 그대를 가르치게 하고, 성령을 통해 내가 그대의 탄생을 기념하게 하라.
내가 그대에게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은 내가 그대에게 준 해방의 선물이다. 내가 그대 자신의 해방을 선택하듯 나를 풀어 주라. 그리스도의 때를 우리는 함께 기념하니, 우리가 떨어져 있다면 그 기념에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거룩한 순간은 참으로 그리스도의 때다. 이 해방하는 순간에는 그 어떤 죄책감도 하나님의 아들에게 지워지지 않으며, 그렇게 하여 그의 한계 없는 힘이 그에게 회복되기 때문이다. 오직 이 해방만을 내가 그대에게 주기로 선택할 때, 그대가 나에게 줄 수 있는 다른 어떤 선물이 있겠는가?
그리고 나를 보는 것은 모든 이 안에서 나를 보는 것이며, 그대가 나에게 주는 그 선물을 모든 이에게 주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그러하듯 희생을 받을 수 없으며, 그대가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모든 희생은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 어떤 종류의 희생도 주는 것에 부과된 제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배우라. 그리고 이 제한으로 인해 그대는 내가 그대에게 주는 그 선물에 대한 받아들임을 제한해 왔다.
하나인 우리는 따로 줄 수 없다. 그대가 우리의 관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할 때, 죄책감은 그대에게 아무 이끌림도 지니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결합 안에서 그대는 우리의 모든 형제를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결합의 선물이 내가 주기 위해 태어난 유일한 선물이다.
그대가 결합의 선물을 가질 수 있도록, 그 선물을 나에게 주라. 그리스도의 때는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자유의 선물을 위해 정해진 때다. 그리고 자유의 선물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대는 그 선물을 모든 이에게 준다.
이 절기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그대의 힘 안에 있으니, 그리스도의 때를 지금이게 만드는 것이 그대의 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절기를 거룩하게 만드는 일을 한꺼번에 하는 것은 가능하니, 필요한 지각의 전환은 오직 하나뿐이기 때문이며, 그대가 저지른 오류도 오직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저지른 오류는 여럿인 것처럼 보이지만, 전부 같은 것이다. 에고가 여러 형태를 취할지라도, 에고는 언제나 같은 관념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아닌 것은 언제나 두려움이며,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다. 두려움이 땅속으로 파고들어 어둠 속에 숨었다가 자신의 본모습과는 사뭇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그 모든 우회로를 따라갈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대가 두려움의 우회로들 모두를 다스리는 그 원리를 그대로 간직하고자 하는 한, 각각을 살펴보는 것은 필요하다. 그대가 그것들을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대가 원하지 않는 같은 하나의 관념의 서로 다른 나타남으로 여기고자 할 때, 그것들은 함께 사라진다. 그 관념은 단순히 다음과 같다.
그대는 에고를 품은 이가 되거나 하나님의 인질이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것이 바로 그대가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선택이며, 자신이 내려야 한다고 믿는 결정이다.
그대는 그 밖의 다른 대안을 보지 못하니, 희생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희생은 그대의 사고 체계에 너무나 필수적이어서 희생을 떠난 구원은 그대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희생과 사랑에 대한 그대의 혼동은 너무나 깊어서 그대는 희생 없는 사랑을 상상할 수 없다.
그리고 그대가 바라보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희생은 공격이지, 사랑이 아니다. 그대가 다만 이 하나의 관념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사랑에 대한 그대의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희생이라는 관념이 제거되면 죄책감은 지속될 수 없다. 희생이 있다면,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고 누군가는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는 유일한 질문은, 그 대가가 얼마인지, 그리고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인지다.
에고를 품은 이로서, 그대는 원할 때마다 자신의 모든 죄책감을 내던져 버릴 수 있으며, 그렇게 하여 평화를 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대가는 그대가 치르는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에고가 대가를 요구한다는 것은 명백하지만, 에고가 그대에게 요구하는 것처럼은 결코 보이지 않는다.
그대가 초대한 에고가 배신을 저지르는 대상은 오직 자신이 에고를 모신다고 생각하는 이들뿐이다. 그대는 이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에고는 결코 그대가 이것을 지각하게 두지 않을 것이니, 이 알아봄이 에고를 집 없는 존재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알아봄이 또렷이 밝아 올 때, 그대는 에고가 자기 자신을 그대의 시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취하는 그 어떤 형태에도 속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각 형태는 두려움의 형태들 모두 뒤에 숨어 있는 하나의 관념을 위한 덮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알아보아질 것이다. 그 관념은 사랑이 희생을 요구하며 그러므로 공격과 두려움에서 떼어 낼 수 없다는 관념이자, 죄책감이 두려움으로 지불되어야 하는 사랑의 대가라는 관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대에게 얼마나 두려운 존재가 되었으며, 그대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희생을 요구한다고 믿는가!
완전한 사랑은 완전한 희생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고는 하나님보다 그대에게 덜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며, 그 둘 중에서는 더 작은 악으로 판단된다. 에고는 어쩌면 조금 두려워할 대상이고, 하나님은 파괴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대는 사랑을 파괴적인 것으로 보며, 그대의 유일한 질문은 누가 파괴될 것인가 — 그대인가 다른 이인가 — 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그대의 특별한 관계들 안에서 찾으려 한다. 그 안에서 그대는 파괴자이면서 동시에 부분적으로 파괴되는 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둘 중 어느 쪽도 완전히는 될 수 없다. 그리고 그대는 이것이, 완전한 사랑으로 그대를 완전히 파괴할 하나님에게서 그대를 구해 준다고 생각한다.
그대는 그대 자신 밖의 모든 이가 그대의 희생을 요구한다고 생각하지만, 오직 그대만이 희생을 요구하며 오직 그대 자신에게만 요구한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희생의 요구는 너무나 사납고 너무나 두려워서 그대는 그 요구가 있는 그 자리에서 그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진짜 대가는 너무나 커서, 그대는 희생의 요구를 바라보느니 차라리 하나님을 내던져 버렸다. 하나님이 그대에게 완전한 희생을 요구한다면, 하나님을 바깥으로, 그대에게서 멀리 투사하여 하나님을 품지 않는 것이 더 안전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하나님에게 에고의 배신을 씌워, 에고가 하나님에게서 그대를 보호하도록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초대했다.
그리고 그대는, 그대를 파괴하려 하고 실제로 그대에게 완전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그대가 안으로 초대한 에고임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 어떤 부분적인 희생도 이 사나운 손님을 달래지 못할 것이니, 에고는 다만 친절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희생을 완성하려는 침입자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에고에게 부분적인 인질이 되는 데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에고는 그 어떤 약속도 지키지 않으며 그대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속박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니, 이 둘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이 내려야 할 그 하나의 결정을 알아보지 않으려는 시도로 많은 타협을 해 왔다. 그러나 그 결정을 있는 그대로 알아보는 것이야말로 그 결정을 그토록 쉽게 만든다.
구원은 단순하니,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기에 이해하기가 매우 쉽다. 구원을 그대에게서 투사하여 그대 자신 밖에서 보려 하지 말라. 그대 안에는 질문과 답 둘 다가 있으니, 곧 희생에 대한 요구와 하나님의 평화다.
희생이라는 관념 전체가 오로지 그대가 만든 것임을 알아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안전이 없는 곳에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 시도함으로써 안전을 찾지 말라. 그대의 형제들과 그대의 아버지는 그대에게 매우 두려운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대는, 안전의 부스러기 몇 조각을 본다고 생각하는 몇몇 특별한 관계를 위해 그들과 흥정하려 한다.
그대의 생각들과 그대에게 주어진 그 생각(Thought)을 더 이상 떼어 놓으려 하지 말라. 그 생각들이 함께 모아져 있는 그대로 지각될 때, 그 두 생각 사이의 선택은 부드러운 깨어남에 지나지 않으며, 더 이상 잠이 필요 없을 때 낮빛을 향해 눈을 뜨는 것만큼이나 단순하다.
성탄절의 표징은 별이며, 어둠 속의 빛이다. 그 별을 그대 자신 밖에서 보지 말고, 그대 안의 천국에서 빛나는 것으로 보라, 그리고 그 별을 그리스도의 때가 왔다는 표징으로 받아들이라. 그리스도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온다.
그리스도는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종류의 희생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임재(Presence) 안에서 희생이라는 관념 전체는 모든 의미를 잃는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는 다만 이미 거기 있는 그리스도를 안으로 초대하기만 하면 된다. 그 초대는 하나님을 품은 이가 하나(One)라는 것과, 그리스도의 하나됨에 낯선 그 어떤 생각도 거기서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아봄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를 맞아들이려면 사랑이 완전해야 하니, 거룩함의 임재가 자신을 둘러싼 거룩함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때에 하나님을 품어 안은 이를 그 어떤 두려움도 건드릴 수 없으니, 그는 자신이 지키는 완전한 결백함만큼 거룩하며, 그 결백함의 힘이 그를 지키기 때문이다.
이번 성탄절에는 그대를 아프게 할 모든 것을 성령에게 주라. 그대가 성령과 함께 치유하는 데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이 완전히 치유되게 하고, 우리와 함께 모든 이를 풀어 줌으로써 우리의 해방을 함께 기념하자. 그 무엇도 뒤에 남기지 말라, 해방은 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가 나와 함께 그것을 받아들였을 때 그대는 나와 함께 그것을 줄 것이다.
모든 고통과 희생과 작음은 우리의 관계 안에서 사라질 것이니, 그 관계는 우리와 우리 아버지의 관계만큼 결백하고 그만큼 강력하다. 고통은 우리에게 가져와져 우리의 임재 안에서 사라질 것이며, 고통 없이는 희생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희생이 없는 곳에는 사랑이 있을 수밖에 없다.
희생이 사랑이라고 믿는 그대는 희생이 사랑으로부터의 분리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 사랑이 평화를 가져오는 것만큼 확실하게 희생은 죄책감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평화가 하나님과의 그대 관계에 대한 알아차림의 조건이듯, 죄책감은 희생의 조건이다.
죄책감을 통해 그대는 자신의 아버지와 형제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배제한다. 평화를 통해 그대는 그들을 다시 초대하며, 그들이 그대의 초대가 청하는 바로 그곳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대가 자기 자신에게서 배제하는 것은 두렵게 보이니, 그대의 일부인데도 그대가 그것에 두려움을 부여하고 몰아내려 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일부를 혐오스럽다고 지각하면서 자기 자신 안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천국을 몰아내고 그것에 지옥의 속성을 부여함으로써 자기 안의 천국과 지옥의 "갈등"을 해결하려 하면서, 자기 자신을 불완전하고 외로운 존재로 경험하지 않을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대가 육체를 자신의 실재로 지각하는 한, 그만큼 그대는 자기 자신을 외롭고 결핍된 존재로 지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그대는 또한 자기 자신을 희생의 희생자로, 다른 이들을 희생시킬 자격이 있는 자로 지각할 것이다. 희생과 상실의 감각 없이 천국과 그 창조주를 밀쳐 낼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자기 자신을 회복하려 시도하지 않으면서 희생과 상실을 겪을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대의 시도의 근거가 결핍의 실재성에 대한 믿음일 때, 그대가 어떻게 스스로 이것을 이룰 수 있겠는가? 결핍은 공격이 정당하다는 믿음이니, 공격을 낳는다. 그리고 그대가 결핍을 간직하고자 하는 한, 공격은 구원이 되고 희생은 사랑이 된다.
그래서 그대는 사랑을 찾는 그 모든 추구 안에서, 희생을 찾고 그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대는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다. 사랑이 무엇인지 부인하면서도 여전히 사랑을 알아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랑의 의미는 그대가 자기 자신 밖으로 던져 버린 것 안에 있으며, 그것은 그대를 떠나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은 그대가 간직하기를 더 바라는 것이며, 반면 그대가 멀리하고자 하는 그 모든 것은 우주의 모든 의미를 담고 있고, 그 의미 안에서 우주를 함께 붙들고 있다. 우주가 그대 안에서 결합되지 않는다면 우주는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있을 것이며, 하나님 없이 있는 것은 의미 없이 있는 것이다.
거룩한 순간에는 사랑의 조건이 충족되니, 마음들이 육체의 방해 없이 결합되며, 소통이 있는 곳에 평화가 있기 때문이다.
평화의 왕자는, 그대가 육체를 소통의 필수적인 수단으로 보지 않는다면 육체가 파괴되더라도 소통은 깨어지지 않은 채로 남는다는 것을 가르침으로써, 사랑의 조건을 다시 세우기 위해 태어났다. 그리고 그대가 이 가르침을 이해한다면, 육체를 희생하는 것은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는 것이며, 마음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는 소통은 희생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희생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가르치기 위해 태어났고 지금도 나의 모든 형제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가르침은, 희생은 그 어디에도 없고 사랑은 모든 곳에 있다는 것이다. 소통은 모든 것을 감싸안으며, 소통이 다시 세우는 평화 안에서 사랑은 저절로 온다.
그 어떤 절망도 성탄절의 기쁨을 어둡게 하지 못하게 하라, 그리스도의 때는 기쁨을 떠나서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누구에게도 희생을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평화를 기념하는 데 우리가 하나가 되자,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내가 그대에게 주는 그 사랑을 나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무엇도 결핍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지각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 지각이 바로 그리스도의 때의 메시지이니, 나는 그대가 그것을 주고, 또 그것을 나에게 준 아버지에게 되돌릴 수 있도록 그것을 그대에게 준다. 그리스도의 때에 소통이 회복되며,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의 창조를 기념하는 데 우리와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받아들여 품고자 하는 그 거룩한 이에게 감사하며, 자신이 있고자 하는 곳에 들어가 머물게 한다. 그리고 그대가 하나님을 맞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은 그대를 자기 자신 안으로 맞아들이니, 하나님을 맞아들이는 그대 안에 담긴 것이 하나님에게 되돌려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만 하나님을 우리 자신 안으로 맞아들이며 하나님의 온전함을 기념할 뿐이다.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이들은 아버지와 하나이니, 자신을 창조한 아버지를 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들어오도록 허락함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아버지와 함께 들어오며, 아버지와 함께 그들은 자신이 지금까지 가졌고 앞으로도 가지고자 하는 그 유일한 관계를 기억한다. 이것은 새해가 곧 그리스도의 때로부터 태어날 그 시간이다.
나는 그대가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을 그대가 해낼 것이라는 완전한 믿음을 그대에게 지니고 있다.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그대는 파괴하지 않고 완전하게 만들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의 형제에게 이렇게 말하라. 나는 그대를 나 자신의 일부로서 성령에게 준다.
내가 그대를 이용해 나 자신을 가두려 하지 않는 한, 나는 그대가 풀려나리라는 것을 안다. 나의 자유의 이름으로 나는 그대의 해방을 선택하니,
우리가 함께 풀려나리라는 것을 내가 알아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새해는 기쁨과 자유 속에서 시작될 것이다. 할 일이 많으며, 우리는 오랫동안 지체되어 왔다. 이 해가 태어남에 따라 거룩한 순간을 받아들이고, 그토록 오래 채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던 위대한 깨어남 안의 그대의 자리를 차지하라. 이 해를 전부 같게 만듦으로써 다르게 만들라. 그리고 그대의 모든 관계가 그대를 위해 거룩하게 만들어지게 하라. 이것이 우리의 뜻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