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특별한 사랑 너머 아버지의 이끌림
1) 판단을 완전히 미룸
거룩한 순간은 사랑의 의미를 그대에게 가르치기 위한 성령의 가장 유용한 배움의 도구다. 거룩한 순간의 목적은 판단을 완전히 미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판단은 언제나 과거에 근거한다. 과거의 경험이 그대가 판단하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과거가 없으면 판단은 불가능해진다. 과거가 없으면 그대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판단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무엇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주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에고 없이는 모든 것이 혼돈일 것이라고 믿기에 판단을 미루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분명히 말하니, 에고 없이는 모든 것이 사랑일 것이다.
과거는 에고의 주된 배움의 도구다. 그대가 자기 자신의 필요를 규정하는 법을 배우고 그 필요를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 충족시키는 방법을 습득한 것이 바로 과거 안에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을 아들됨(Sonship)의 일부로 제한하는 것이 그대의 관계들 안에 죄책감을 가져와 그 관계들을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해 왔다.
그대가 전체 중 특정 측면들을 따로 떼어 내어 그 측면들이 그대의 상상된 필요를 충족시켜 주기를 바란다면, 그대는 분리를 써서 자신을 구하려 시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책감이 어떻게 들어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분리가 죄책감의 근원이며, 구원을 위해 분리에 호소하는 것은 그대가 혼자라고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혼자라는 것은 죄지었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혼자라고 경험하는 것은 아버지와 그 아들의 하나됨을 부인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여 실재를 공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실재의 일부들을 사랑하면서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특별한 사랑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과 다르게 사랑하고자 한다면, 그대가 어떻게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특별한 사랑을 지닌 특별한 관계가 그대에게 구원을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분리가 구원이라는 믿음이다. 구원이 있는 곳은 바로 속죄의 완전한 평등 안이기 때문이다.
아들됨의 특별한 측면들이 다른 측면들보다 그대에게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다고 그대가 어떻게 결정할 수 있겠는가? 과거가 그대에게 특별한 측면들이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왔다. 그러나 거룩한 순간은 그렇지 않음을 그대에게 가르친다.
죄책감 때문에, 모든 특별한 관계에는 두려움의 요소가 있다. 이것이 바로 특별한 관계들이 그토록 자주 옮겨 가고 바뀌는 이유다. 특별한 관계들은 오직 변함없는 사랑에만 근거하지 않는다. 그리고 두려움이 들어온 곳의 사랑은 완전하지 않기에 의지할 수 없다.
성령은 그대가 만든 것의 통역자로서, 그대가 에고를 뒷받침하기 위해 선택해 온 특별한 관계들을 진리를 가리키는 배움의 경험으로 쓴다. 성령의 가르침 아래서, 모든 관계는 사랑에 대한 가르침이 된다.
성령은 그 누구도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성령은 또한 그대가 특별한 관계들을 만들어 왔다는 것을 지각하며, 그 관계들을 정화하고자 하며 그대가 그 관계들을 파괴하도록 두지 않으려 한다. 그대가 특별한 관계들을 만든 이유가 아무리 거룩하지 않다 해도, 그대가 성령에게 허락하는 만큼의 두려움을 제거함으로써 성령은 그 관계들을 거룩함으로 통역할 수 있다.
그대가 그 관계로 하여금 성령의 필요 외에는 그 어떤 필요도 섬기지 않게 하려는 그대의 자발성을 성령에게 바친다면, 그대는 그 어떤 관계든 성령의 돌봄 아래 둘 수 있다. 또한 그 관계가 고통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대의 유일한 필요는 성령의 필요다. 그대가 다른 관계 대신 쓰고자 하는 그 어떤 관계도 성령이 쓰도록 성령에게 바쳐지지 않은 것이다.
사랑을 대신할 것은 없다. 사랑의 한 측면을 다른 측면 대신 쓰려 한다면, 그대는 하나에는 더 적은 가치를, 다른 하나에는 더 많은 가치를 둔 것이다. 그대는 사랑의 측면들을 분리했을 뿐 아니라, 두 측면 모두에 불리하게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먼저 자기 자신에게 불리하게 판단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대는 형제들을 실제의 그들과 다른 모습으로 필요로 한다고 결코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이 없는 존재로 보지 않았다면, 그대는 형제들을 결핍 안에서 그토록 그대와 같다고 판단할 수 없었을 것이다.
관계에 대한 에고의 쓰임은 너무나 파편화되어 있어서 자주 그보다 더 나아가기까지 한다. 한 측면의 한 부분은 에고의 목적에 맞는 반면, 에고는 다른 측면의 다른 부분들을 선호한다.
그렇게 하여 에고는 자기 자신의 변덕스러운 취향에 맞게 실재를 조립하여, 그대의 찾음을 위해 그 형상이 존재하지 않는 그림을 내놓는다. 천국에도 땅에도 그 그림이 닮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대가 그 그림의 실재를 아무리 찾아도, 그림이 실재하지 않기에 찾을 수 없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이 특별한 관계를 형성해 왔으며, 천국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성령은 여기서 특별한 관계들에 천국의 손길을 가져오는 법을 안다. 거룩한 순간에는 그 누구도 특별하지 않으니, 그대의 개인적 필요가 그 누구에게도 끼어들어 형제들을 다르게 보이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에서 온 가치들이 없다면, 그대는 형제들 모두를 똑같이, 그리고 그대 자신과 같이 볼 것이다. 또한 그대는 그대 자신과 형제들 사이에 그 어떤 분리도 보지 않을 것이다. 거룩한 순간에 그대는 각 관계 안에서, 그대가 오직 현재만을 지각할 때 그 관계가 어떻게 될지를 본다.
하나님은 지금의 그대를 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으니, 언제나 지금 아는 그대로 정확히 그대를 알아 왔기 때문이다. 거룩한 순간은 모든 지각을 과거에서 끌어냄으로써 하나님의 앎을 반영하며, 그렇게 하여 그대가 형제들을 판단하기 위해 세운 그 기준 틀을 없앤다.
그 기준 틀이 사라지면, 성령은 자신의 기준 틀을 그 자리에 대신 놓는다. 성령의 기준 틀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다. 성령의 시간을 벗어남은 오직 이 기준 틀 안에만 있다. 이는 과거에서 자유로운 거룩한 순간에, 그대가 사랑이 그대 안에 있음을 보고, 밖을 바라보며 사랑이 있다고 여겼던 곳에서 죄책감을 느끼며 사랑을 낚아챌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의 모든 관계는 거룩한 순간 안에서 축복받으니, 그 축복은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거룩한 순간에 아들됨은 하나로서 이득을 얻으며, 그대의 축복 안에서 하나로 결합되어 그대에게 하나가 된다.
사랑의 의미는 하나님이 사랑에 준 의미다. 하나님의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를 사랑에 부여하면,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그대를 사랑하듯 모든 형제를 사랑하니,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게 사랑한다. 하나님은 형제들 모두를 똑같이 필요로 하며, 그대도 그러하다.
시간 안에서, 그대는 내가 이끄는 대로 기적을 주고, 그대를 찾는 이들을 성령이 그대에게 데려오게 하라는 말을 들어 왔다. 그러나 거룩한 순간에 그대는 하나님과 직접 하나가 되며, 그대의 모든 형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된 이들은 그 어떤 식으로도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는 아들됨이 나누는 참나(Self)이니, 하나님이 자신의 참나를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이 하나님의 참나를 판단할 수 있다고 여기는가? 하나님은 그 참나를, 자신의 사랑을 확장하려는 자신의 필요에서, 판단을 넘어서게 창조했다. 그대 안에 사랑이 있으면, 그대에게는 사랑을 확장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필요도 없다. 거룩한 순간에는 필요들 사이의 갈등이 없으니, 오직 하나의 필요만이 있기 때문이다.
거룩한 순간은 영원에,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Mind)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직 거기서만 사랑은 의미를 지니며, 오직 거기서만 이해될 수 있다.
한 관계를 쓰기 위해 다른 관계를 희생시키면서 죄책감을 겪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관계의 일부를 정죄하면서 그 안에서 평화를 찾는 것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성령의 가르침 아래서 모든 관계는 완전한 헌신으로 보이지만, 그 관계들은 그 어떤 식으로도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각 관계 하나하나가 그대를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다는 완전한 믿음은 오직 그대 자신에 대한 완전한 믿음에서만 생겨난다.
그리고 죄책감이 남아 있는 한 그대는 완전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그리고 그대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형제를 그가 아닌 모습으로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기는 한, 죄책감은 있을 것이다.
그대는 완전한 사랑이 그대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에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그토록 적다. 그래서 그대는 밖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을 밖에서 찾는다.
나는 그대의 모든 의심 대신 그대에 대한 나의 완전한 믿음을 그대에게 준다. 그러나 나의 믿음이 그대 안에서만큼 그대의 모든 형제 안에서도 완전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 믿음은 그대에게 제한된 선물이 될 것이다.
거룩한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나눈다. 우리가 함께, 그가 그 믿음에 온전히 합당하다는 것을 알아보기 때문이며, 그의 가치를 인정하는 가운데 우리는 그의 거룩함을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사랑한다. 거룩함이 나누어짐에 따라 모든 분리는 사라진다. 거룩함은 힘이며, 나눔으로써 그 힘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그대가 지각하는 대로의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서 만족을 찾는다면, 그대는 힘이 다른 이에게서 온다고, 그리고 그대가 얻는 것을 그 형제는 잃는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대가 자기 자신을 약하다고 지각한다면 누군가는 언제나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힘의 상실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초월하는, 관계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있다. 다른 이가 사랑을 위해 하나님을 부를 때 그대의 부름이 여전히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그대는 어렵지 않게 믿는다. 또한 하나님이 그에게 답할 때 그대의 응답에 대한 희망이 줄어든다고도 그대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대는 그의 성공을 그대의 성공의 가능성에 대한 증언으로 여기는 쪽으로 더 기운다. 이는 그대가, 비록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이 하나의 관념이라는 것을 알아보기 때문이며,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그대의 믿음은 나눔으로써 강해진다.
그대가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것은, 그대의 아버지처럼, 그대도 하나의 관념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처럼, 그대도 자기 자신을 완전히 줄 수 있으니, 상실은 전혀 없이 오직 얻음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 평화가 있으니, 여기에는 갈등이 없기 때문이다.
결핍의 세상에서는 사랑에 의미가 없고 평화는 불가능하다. 얻음과 잃음이 둘 다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그 누구도 완전한 사랑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룩한 순간에 그대는 그대 안의 사랑이라는 관념을 알아보고, 이 관념을, 그것을 생각했고 포기할 수 없었던 마음(Mind)과 하나로 결합한다. 그 관념을 자기 자신 안에 붙듦으로써, 상실은 없다. 그렇게 하여 거룩한 순간은, 상실이 아니라 완전함을 경험하며 그대의 모든 형제를 그대의 마음 안에 붙드는 법에 대한 가르침이 된다.
이로부터 그대는 오직 줄 수만 있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 그리고 오직 줄 수만 있는 이것이 사랑이니, 오직 이것만이 하나님의 법칙 아래서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거룩한 순간에는 하나님의 법칙이 우세하며, 오직 그 법칙만이 의미를 지닌다. 이 세상의 법칙은 그 어떤 의미도 전혀 지니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법칙을 자신이 기꺼이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때, 그 아들이 매이거나 그 어떤 식으로든 제한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순간에 그 아들은 하나님이 그가 되기를 바라는 만큼 자유롭다. 그 아들이 매이기를 거부하는 그 순간, 그는 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거룩한 순간에는 언제나 있어 온 것 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실재를 가로질러 드리워져 온 그 베일이 걷힐 뿐이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의 베일이 옆으로 밀쳐짐에 따라 변함없음에 대한 알아차림이 신속하게 온다.
그 베일이 걷히는 것을 아직 경험하지 못하고, 그 뒤의 빛으로 자신이 저항할 수 없이 이끌리는 것을 아직 느끼지 못한 자는, 그 누구도 두려움 없는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은 그대에게 이 믿음을 주니, 성령이 그 믿음을 나에게 주었고 내가 그 믿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거룩한 순간이 그대에게 거부될 것이라고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그 거룩한 순간을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통해 성령은 거룩한 순간을 그대에게 주며, 그대도 그와 같이 그 거룩한 순간을 주게 될 것이다.
그대가 지각하는 그 어떤 필요도 거룩한 순간에 대한 그대의 필요를 흐리지 않게 하라. 거룩한 순간에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똑같이 나누는 그 유일한 필요를 알아보게 될 것이며, 이 알아봄으로써 그대는 필요한 것을 주는 데 있어 나와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가 오는 것은 우리를 통해서다. 평화라는 관념 안에서 나와 하나가 되라, 관념 안에서 마음들은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대의 아버지가 자신의 참나를 주듯 자기 자신을 준다면, 그대는 참나됨(Selfhood)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참나됨 안에서 사랑의 의미가 이해된다.
그러나 이해는 마음에게서 나오며, 오직 마음에게서만 나온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앎도 마음에게서 나오며, 앎의 조건들도 앎과 함께 마음 안에 있다.
그대가 하나의 관념이 아니고, 다만 하나의 관념일 뿐이 아니라면, 그대는 지금까지 있어 온 모든 것과 완전한 소통 안에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다른 무언가가 되기를 더 바라거나, 다른 아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다른 무언가이려고 시도하는 한, 그대는 자신이 완전히 알고 있는 소통의 언어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거룩한 순간에 하나님은 기억되며, 그대의 모든 형제와의 소통의 언어도 하나님과 함께 기억된다. 소통은 진리가 그러하듯 함께 기억되기 때문이다. 거룩한 순간에는 배제가 없으니, 과거가 사라졌고, 과거와 함께 배제의 근거 전체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배제의 근원이 없으면 배제도 사라진다. 그리고 배제가 사라지는 일은 그대의 근원(Source), 그리고 그대의 모든 형제의 근원이 그대의 알아차림 안에서 배제를 대신하도록 허락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힘은 그대 안에서 자신들의 정당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며, 그대는 관념들의 완전한 소통을 경험할 것이다. 이렇게 소통할 수 있는 그대의 능력을 통해 그대는 자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배우게 될 것이다. 그대의 창조주가 무엇인지, 그리고 창조주와 함께 그의 창조물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아버지의 이끌림
특별한 사랑 관계의 초라한 이끌림 너머, 그리고 그것에 의해 언제나 가려진 곳에,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강력한 이끌림이 있다. 그대를 만족시킬 수 있는 다른 사랑은 없으니, 다른 사랑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끌림이야말로 완전히 주어지고 완전히 되돌려지는 유일한 사랑이다. 완전하기에, 그것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온전히 순수하기에, 그 안에서 결합된 모든 이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이 사랑은 에고가 들어가는 그 어떤 관계의 근거도 아니다. 에고가 시작하는 모든 관계는 특별하기 때문이다. 에고는 오직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만 관계를 세운다. 그리고 에고는 주는 자를 죄책감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묶어 두고자 한다.
에고가 분노 없이 그 어떤 관계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니, 에고는 분노가 친구를 만든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믿음은 에고의 진술은 아니지만, 에고의 목적이다. 에고는 죄책감을 지움으로써 얻고 지킬 수 있다고 정말로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에고의 유일한 이끌림이다. 에고의 이끌림은 너무 약해서, 누구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때에만 붙잡는 힘을 지닌다. 에고는 언제나 사랑을 통해 끌어들이는 것처럼 보이며, 자신이 죄책감을 통해 끌어들인다는 것을 지각하는 그 누구에게도 전혀 이끌림을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죄책감의 병든 이끌림은 그 정체를 있는 그대로 알아보아야 한다. 죄책감의 이끌림이 그대에게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어져 온 만큼, 이 이끌림을 또렷이 바라보고, 그 이끌림에 대한 그대의 투자를 거두어들여 놓아 버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 필수적이다.
자신이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을 그 누구도 놓아 버리기로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죄책감의 이끌림이 그대에게 가치를 지니는 것은 다만, 그대가 그 이끌림이 무엇인지 바라보지 않은 채 완전히 어둠 속에서 판단해 왔기 때문일 뿐이다.
우리가 죄책감의 이끌림을 빛으로 가져올 때, 그대의 유일한 질문은 자신이 도대체 왜 그것을 원했는가일 것이다. 눈을 뜨고 바라봄으로써 그대가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이와 같은 추함은 그대의 거룩한 마음 안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품은 그대는 이 추함에 그 어떤 실재하는 투자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앞서 에고가 죄책감을 유지하고 늘리려 시도하지만, 에고가 그대에게 무엇을 하려 하는지 그대가 알아보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고 말했다. 그대가 다른 이들에게 하는 것으로부터 그대는 벗어나 있다는 것이 에고의 근본적인 교리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그 누구도 잘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에고의 생존은, 그대가 에고의 악한 의도에서 면제되어 있다는 그대의 믿음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에고는, 그대가 에고를 모신다면, 에고가 그대로 하여금 자신의 분노를 바깥으로 향하게 하여 그렇게 그대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에고는 끝없고 보람 없는 특별한 관계들의 사슬에 착수한다. 이 사슬은 분노로 벼려지고 오직 한 가지 미친 믿음에 바쳐진다. 그 믿음은 그대 밖으로 더 많은 분노를 투자할수록 그대가 더 안전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죄책감에 묶는 것이 바로 이 사슬이며, 성령이 그의 거룩한 마음에서 없애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사슬이다. 잔혹함의 사슬은 하나님이 자신을 품을 이로 택한 이를 둘러싸는 데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에고를 품은 이로 만들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의 해방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이의 이름으로, 에고가 꾸며 내는 관계들을 더 가까이 들여다보자. 그리고 성령이 그 관계들을 참되게 판단하게 하자. 그대가 에고의 관계들을 바라보기만 한다면 그대는 그것들을 성령에게 기꺼이 바치게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성령이 그 관계들로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 그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대가 먼저 자신이 에고의 관계들로 무엇을 만들었는지 지각하고자 한다면, 그대는 그것을 알아내고자 하게 될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에고가 만드는 모든 관계는 자기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더 커진다는 관념에 근거한다. 에고가 정화라고 여기는 그 "희생"은 실제로는 에고의 쓰라린 원한의 뿌리다. 에고는 직접 공격하기를 더 바라며,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미루는 것을 피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고는 자신이 보는 대로의 "실재"를 인정하며, 그 누구도 직접적인 공격을 사랑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본다. 그러나 죄책감을 지우는 것은,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직접적인 공격이다. 죄지은 자는 공격을 예상하며, 그것을 요청해 왔기에 그것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이런 미친 관계들 안에서, 그대가 원하지 않는 것의 이끌림은 그대가 원하는 것의 이끌림보다 훨씬 더 강한 것처럼 보인다. 각자는 자신이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희생했다고 생각하며, 그 희생 때문에 상대방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그가 자신이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상대방을 전혀 사랑하고 있지 않다. 그는 다만 자신이 희생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을 뿐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이 희생을 위해, 그는 상대방도 죄책감을 받아들이고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희생하기를 요구한다.
용서는 불가능해진다. 에고는 다른 이를 용서하는 것이 그를 잃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에고가 자신의 모든 관계를 함께 붙드는 죄책감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용서 없는 공격을 통해서뿐이다. 그러나 그 관계들은 다만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에고에게 관계란 다만 육체들이 함께 있다는 것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에고가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육체가 함께 있는 것이며, 에고는 마음이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이것은 중요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 희생을 받을 육체가 거기 있는 한, 에고는 만족한다.
에고에게 마음은 사적인 것이며, 오직 육체만이 나누어질 수 있다. 관념은 다른 이의 육체를 더 가깝게 하거나 더 멀게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근본적으로 관심사가 아니다. 그리고 에고가 관념을 좋다거나 나쁘다고 평가하는 것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다.
"다른 이를 죄지은 자로 만들고 죄책감을 통해 그를 붙드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를 죄책감에서 풀어 주는 것"은 "나쁜" 것이니, 그는 더 이상 육체가 소통한다고 믿지 않게 되어 "떠나 버린" 것이 되기 때문이다.
고통과 희생은 에고가 모든 결합을 "축복"하는 데 쓰는 선물이다. 그리고 에고의 제단에서 결합된 이들은 고통과 희생을 결합의 대가로 받아들인다.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에서 태어났지만 외로움의 지속에 바쳐진 그들의 분노 어린 동맹 안에서, 각자는 상대방 안의 죄책감을 늘림으로써 자신의 죄책감으로부터의 안도를 찾는다. 각자는 이것이 자기 안의 죄책감을 줄여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상대방은 언제나 그 사람을 공격하고 상처 입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작은 방식으로,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그러나 희생에 대한 요구 없이는 결코 그러지 않는다.
에고의 제단에서 결합된 이들의 분노는 그대가 알아차리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 에고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그대는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화가 날 때마다, 그대는 에고가 "축복한" 특별한 관계를 형성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분노가 바로 에고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분노는 여러 형태를 취하지만, 다음을 배우게 될 이들을 오래 속일 수는 없다. 곧 사랑은 전혀 죄책감을 가져오지 않으며, 죄책감을 가져오는 것은 사랑일 수 없고 분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든 분노는 누군가가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으며, 이 시도가 바로 에고가 특별한 관계를 위해 받아들이는 유일한 근거다. 죄책감은 에고가 지닌 유일한 필요이며, 그대가 에고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한, 죄책감은 그대에게 계속 매력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라. 육체와 함께 있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그리고 육체와 함께 있는 것이 소통이라고 그대가 생각한다면, 그대는 소통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또한 성령의 음성(Voice) 안에서 소통하려는 그대 자신의 필요를 알아보며 성령의 말을 듣기를 두려워할 것이다. 성령은 두려움을 통해서는 가르칠 수 없다. 그리고 소통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혼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그대가 믿는 동안, 성령이 어떻게 그대와 소통할 수 있겠는가?
소통함으로써 그대가 버려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명백히 미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가 실제로 그것을 믿는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사적으로 지켜야 마음을 잃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육체가 함께 있으면 자신의 마음은 자기 자신의 것으로 남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육체의 결합은 그들이 마음을 서로 떨어뜨려 두는 방식이 된다. 육체는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육체는 다만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만 할 수 있다. 육체의 자율성이라는 환영과 외로움을 극복하는 육체의 능력이라는 환영은, 다만 자기 자신의 자율성을 세우려는 에고의 계획이 작동하는 것일 뿐이다.
육체와 함께 있는 것이 동료애라고 그대가 믿는 한, 그대는 죄책감으로 형제를 그의 육체 안에 붙들어 두려는 시도를 어쩔 수 없이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죄책감 안에서 안전을 보고 소통 안에서 위험을 볼 것이다. 에고는 언제나 외로움이 죄책감으로 해결된다고, 그리고 소통이 외로움의 원인이라고 가르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가르침의 명백한 미친 성질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가 그 가르침을 배워 왔다.
단죄가 죄책감 안에 있는 것만큼 확실하게 용서는 소통 안에 있다. 소통이 단죄라고 믿는 이들에게 소통이 구원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성령의 가르치는 역할이다.
그리고 성령은 그렇게 할 것이니, 성령 안과 그대 안의 하나님의 힘은 너무나 거룩하고 강한 실재하는 관계 안에서 결합되어 있어, 그러한 믿음조차 두려움 없이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거룩한 순간을 통해서이며, 그렇게 하여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만든다.
거룩한 순간에는 죄책감이 아무런 이끌림도 지니지 않으니, 소통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책감의 유일한 목적은 소통을 파괴하는 것인데, 그 죄책감은 여기서 아무 역할도 지니지 못한다.
거룩한 순간에는 은폐도 없고, 사적인 생각도 없다. 소통하려는 자발성은 소통을 자신에게로 끌어들이며, 외로움을 완전히 극복한다. 거룩한 순간에는 완전한 용서가 있으니, 그 누구도 그대의 완전함에서 배제하고자 하는 욕구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 완전함 안에서 형제의 역할이 지닌 가치를 문득 알아본다.
그대의 온전함의 보호 속에서, 모든 이가 초대받고 맞아들여진다. 그리고 그대는 그대의 완전함이 하나님의 것임을 이해한다. 하나님의 유일한 필요는 그대가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완전함이 그대의 알아차림 안에서 그대를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그대는 자신이 창조된 그대로, 그리고 자신인 그대로 자기 자신을 경험한다.
거룩한 순간은 배움에 대한 필요를 대체하지 않는다. 거룩한 순간이 시간을 훨씬 넘어 확장될 때까지 성령은 그대의 스승으로서 그대를 떠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성령의 것과 같은 가르치는 임무를 위해, 성령은 그대의 해방을 위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써야 한다. 성령은 진리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성령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그대의 자발성의 모든 표징이나 징표의 편에 서야 한다. 성령은 이를 위해 그대가 바치는 것이 무엇이든 신속하게 활용한다.
그대에 대한 성령의 관심과 돌봄은 한계가 없다. 성령은 그대의 용서에 대한 두려움을, 용서가 해방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큼이나 또렷이 지각한다. 그 두려움 앞에서 성령은 용서가 상실이 아니라 그대의 구원이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그대를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용서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대가 알아보는 완전한 용서 안에서, 그대가 완전히 사면된다는 것도 가르칠 것이다.
성령의 말을 기쁘게 듣고, 그대에게 특별한 관계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성령에게서 배우라. 그대는 다만 특별한 관계들 안에서 그대가 던져 버린 것을 찾을 뿐이다. 그리고 특별한 관계들을 통해서는, 그대가 버렸지만 여전히 마음을 다해 갈망하는 것의 가치를 결코 배우지 못할 것이다.
거룩한 순간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 되기를 갈망함으로써, 우리가 함께 하나가 되어 거룩한 순간을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만들자.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거룩한 순간을 위해 애쓰려는 그대의 자발성에 대한 필요가 너무나 커서, 그대는 그토록 큰 필요를 상상할 수조차 없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이 나누며 함께 채우고자 뜻하는 그 유일한 필요를 보라.
그대는 이 일에서 혼자가 아니다. 그대의 창조물들의 뜻이 그대를 부르니, 그대의 뜻을 그대의 창조물들과 나누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평화 속에서 죄책감으로부터 하나님과 그대의 창조물들에게로 돌아서라. 그대를 결코 떠나지 않을 것, 그리고 그대가 결코 떠날 수 없는 것과만 관계를 맺으라.
하나님의 아들의 외로움은 그의 아버지의 외로움이다. 그대의 완전함에 대한 알아차림을 거부하지 말고, 완전함을 스스로에게 회복시키려 하지 말라. 그대의 해방자의 사랑에게 해방을 넘겨주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 해방자는 그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니, 그 해방자는 저버릴 수 없는 존재(One)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대의 실패감을 그대가 누구인지에 대한 오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이라. 하나님을 품은 그 거룩한 이는 실패를 넘어서 있으며, 그가 뜻하는 그 무엇도 거부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영원히 너무나 거룩한 관계 안에 있어서, 그 거룩한 관계는 모든 이를 불러 외로움에서 벗어나 그대의 사랑 안에서 그대와 하나가 되게 한다. 그리고 그대가 있는 곳에서 모든 이가 찾을 수밖에 없으며, 거기서 그대를 발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잠시만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그대의 완전한 창조를 확실히 하기 위해 아들됨을 그대에게 주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었으니,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그대에게서 억류하지 않았듯, 자신의 창조물도 억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창조된 모든 것은 그대의 것이다. 그대의 관계는 우주와의 관계다. 그리고 이 우주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기에, 그대가 지각하는 모든 개별적인 육체의 하찮은 총합을 훨씬 넘어서 있다. 우주의 모든 부분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 결합되어 있으며, 거기서 우주의 모든 부분은 자신의 아버지를 닮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의 그 어떤 분리도 알지 못한다. 아버지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관계이며, 그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에게 주듯이 준다. 성령은 하나님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그대를 자유롭게 하려는 하나님의 시도다. 그리고 그 시도의 근원(Source) 때문에, 그 시도는 성공할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이 그러하듯 그대가 응답하기를 청하니, 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그대에게 가르치고자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것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모든 필요에 응답하고자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대에게 보내는 자신의 소통과 하나님에게 보내는 그대의 소통을 받기 위해 이 통로를 열어 둔다.
하나님은 소통에서 그대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니, 하나님은 그대의 문제를 그대와 나누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의 문제가 이해할 만한 것이라고 믿는 것은 오직 그대뿐이다. 성령은 그대의 문제가 이해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대가 그대의 문제를 만들었기에 성령은 그대의 문제를 이해한다. 하나님이 알 수 없는 것과 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알아차림은 오직 성령 안에만 있다.
하나님이 알 수 없는 것과 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이 둘을 모두 받아들이고, 불일치의 모든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이 둘을 하나로 결합하는 것이 성령의 거룩한 역할이다. 성령은 이것이 자신의 역할이기에 이것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내려놓으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나오는 가르침을 지닌 그 스승이 관계의 유일한 의미를 그대에게 가르치게 하라. 하나님은 의미를 지니는 유일한 관계를 창조했으니, 그 유일한 관계가 바로 그대와의 하나님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3) 위대한 광선의 인식
에고가 형제들에 대한 그대의 지각을 육체로 제한하려 하듯, 성령은 그대의 인식(vision)을 풀어 주어, 형제들에게서 빛나는 위대한 광선(Great Rays)을 그대가 보게 하고자 한다. 이 광선은 너무나 한계가 없어 하나님에게까지 이른다.
거룩한 순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이 인식으로의 전환이다. 그러나 이 전환이 정확히 무엇을 동반하는지 그대가 배우는 것이 필요하니, 그렇게 하여 그대가 그 인식을 영구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하게 될 것이다.
이 자발성이 주어지면 그 인식은 그대를 떠나지 않을 것이니, 그것은 영구적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 인식을 자신이 원하는 유일한 지각으로 받아들이면, 속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맡는 역할이 그 인식을 앎으로 통역한다. 그 인식이 속죄 안에서 하나님이 이해하는 유일한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일에서는, 그대가 그 인식을 위한 준비가 되면 지체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준비되어 있지만, 그대는 그렇지 않다. 우리의 과제는 다만, 모든 방해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정확히 보는 그 필요한 과정을 가능한 한 빨리 계속하는 것일 뿐이다. 그대가 자신이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만족이 전혀 없는 것으로 알아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에고가 분리의 상징이듯, 육체는 에고의 상징이다. 그리고 에고와 육체 둘 다는 소통을 제한하여, 그렇게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소통은 의미를 지니기 위해 한계가 없어야 하며, 의미를 빼앗기면 소통은 그대를 완전히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통은 여전히, 하나님이 세웠기에 한계가 없는 실재하는 관계들을 그대가 세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남아 있다. 위대한 광선이 알아차림 안에서 육체를 대신하는 그 거룩한 순간에, 한계 없는 관계들에 대한 알아봄이 그대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이것을 보기 위해서는, 에고가 육체를 위해 지닌 모든 쓰임을 포기하고, 에고에게 그대가 함께 나누고자 할 만한 그 어떤 목적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에고는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모든 이를 육체로 제한하려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대가 에고에게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대는 에고가 자신의 목적을 성취로 바꾸려 시도하는 그 수단을 활용하기로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의 목적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에고가 그 목표를 전혀 이룰 수 없는데도 온 힘을 다해 그 목표를 위해 애쓸 것이며, 그대가 에고에게 준 그 힘으로 그렇게 할 것임을 분명히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대의 힘을 천국과 지옥, 하나님과 에고 사이에 나누면서, 그 힘을 창조를 향해 풀어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창조야말로 그 힘이 그대에게 주어진 유일한 목적이다.
사랑은 언제나 증가를 준다. 한계는 에고가 요구하는 것이며, 작고 무력하게 만들려는 에고의 요구를 나타낸다. 형제에 대한 그대의 시야를 그의 육체로 제한하면, 그대는 그대에게 주는 그의 선물을 부인한 것이다. 그대가 그를 그의 육체에서 풀어 주지 않으려 하는 한, 그대는 그에 대한 시야를 그렇게 제한할 것이다.
형제의 육체는 그 선물을 줄 수 없다. 그리고 그 선물을 그대의 육체를 통해 찾지 말라. 그러나 그대들의 마음은 이미 이어져 있으며, 그대들의 마음의 결합은 다만 받아들여지기만 하면 되고, 그러면 천국 안의 외로움은 사라진다.
그대가 다만 성령이 그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대와 영원히 함께 있고자 하는 그대의 창조물들의 필요에 대해 그대에게 말하게 하기만 한다면, 그대는 영원한 것의 이끌림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성령이 이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오래도록 여기 머물고자 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대가 완전하고 고요하며, 그 어떤 한계도 불가능할 만큼 확실하고 사랑 가득한 관계 안에 있는 천국에 있는 것이 바로 그대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천국과 그대의 작은 관계들을 맞바꾸지 않겠는가? 육체는 작고 제한되어 있으며, 오직 에고가 부과하려는 한계 없이 그대가 보고자 하는 이들만이 자유의 선물을 그대에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이 자신의 지각에 두어 온 한계에 대한 개념이 없으며, 자신이 볼 수 있었던 그 모든 사랑스러움에 대한 관념도 없다. 그러나 이것을 그대는 기억해야 한다. 죄책감의 이끌림은 하나님의 이끌림에 맞선다. 그대를 향한 하나님의 이끌림은 여전히 한계가 없다. 그러나 그대의 힘은 하나님의 힘이어서 하나님의 힘만큼 크기 때문에, 그대는 사랑에게서 돌아설 수 있다.
그대가 죄책감에 투자하는 것을 그대는 하나님에게서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의 시야는 약해지고 흐려지고 제한되니, 그대가 아버지를 아들에게서 분리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소통을 제한하려 시도해 왔기 때문이다. 더 나아간 분리 안에서 속죄를 찾지 말라.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그대의 인식을, 하나님의 아들의 해방을 방해하는 것과, 그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성령이 되돌려야 하는 것으로 제한하지 말라.
한계에 대한 아들의 믿음이 그를 가두어 왔기 때문이다. 육체가 그대를 더 이상 끌어들이지 않고, 그대가 무언가를 얻는 수단으로서 육체에 그 어떤 가치도 두지 않을 때, 그때는 소통에 그 어떤 방해도 없을 것이며 그대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만큼 자유로울 것이다.
성령이 오직 소통의 목적만을 위해 육체를 쓰는 법을 그대에게 가르치게 하고, 에고가 육체 안에서 보는 분리와 공격을 위한 육체의 쓰임을 그대가 포기함에 따라, 그대는 자신에게 육체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거룩한 순간에는 육체가 없으며, 그대는 오직 하나님의 이끌림만을 경험한다. 그 이끌림을 나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대는 한순간에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된다. 하나님과의 이 관계의 실재는 그대가 지금까지 원할 수 있었던 유일한 진리가 된다. 모든 진리가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