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에고의 시간, 거룩한 순간
1) 난이도 없는 기적
이 땅의 그대에게는 한계 없음이라는 개념이 없으니, 그대가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 한계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난이도의 순서 없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기적은 고유한 역할을 지니며, 다른 세상의 법칙을 이 세상으로 가져오는 유일무이한 스승(성령)에 의해 동기 부여된다. 기적은 그대가 할 수 있는 것들 중 순서를 초월하는 유일한 것이니, 차이가 아니라 평등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기적은 서로 경쟁하지 않으며, 그대가 행할 수 있는 기적의 수는 한계가 없다. 기적은 동시에 일어날 수 있고 수없이 많을 수 있다. 일단 그대가 기적을 가능한 것으로 여기기만 하면,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이해하기 더 어려운 것은, 기적을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와야만 하는 것으로 낙인찍는 그 난이도 순서의 부재다.
세상의 관점에서 이 난이도 순서의 부재는 불가능하다. 그대는 아마도 자신의 생각들 사이에 경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려 왔을 것이다 — 그 생각들은 서로 충돌할지라도, 함께, 그리고 수없이 많이 일어날 수 있다. 그대는 실제로 이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거의 놀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는 또한 자신의 생각들 중 일부를 다른 것들보다 더 중요하거나, 더 크거나 더 낫거나, 더 지혜롭거나, 더 생산적이고 가치 있다고 분류하는 데도 익숙하다.
이것은 자신이 따로 떨어져 산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마음을 스쳐 가는 생각들에 해당하는 사실이다. 그런 생각들 중 일부는 천국의 반영이고, 다른 일부는 그저 생각하는 것처럼 보일 뿐인 에고에 의해 동기 부여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결코 쉬지 않고 결코 가만히 있지 않는, 서로 얽히며 변화하는 무늬다. 그것은 그대 마음의 거울을 가로질러 끊임없이 옮겨 가며, 천국의 반영들은 다만 한순간 머물다가, 어둠이 그것들을 지워 버림에 따라 희미해진다. 빛이 있던 곳에서, 어둠은 순식간에 그 빛을 없애 버리며, 빛과 어둠이 번갈아 드는 무늬가 그대의 마음을 가로질러 끊임없이 휩쓸고 지나간다.
그대가 세우는 질서 감각이, 여전히 남아 있는 작은 온전한 정신을 하나로 붙들고 있다.
그러나 그대가 질서를 세울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 곧 혼돈에 어떤 질서든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은, 그대가 에고가 아니며 그대 안에 에고 이상의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대에게 보여 준다. 에고는 혼돈이며, 만약 그대의 전부가 에고라면 그 어떤 질서도 전혀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대의 마음에 부과하는 질서는 에고를 제한하지만, 또한 그대도 제한한다.
질서를 세우는 것은 판단하는 것이며, 판단에 따라 배열하는 것이다. 그대의 생각을 정렬할 그 어떤 근거도 그대에게 전혀 없다는 것을 배우기가 그대에게는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성령은 기적이라는 빛나는 본보기를 그대에게 줌으로써 이 가르침을 가르친다. 그대의 정렬 방식이 틀렸지만 더 나은 방식이 그대에게 주어져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기적은 도움을 향한 모든 부름에 정확히 똑같은 응답을 준다.
기적은 그 부름을 판단하지 않는다. 기적은 다만 그 부름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그에 맞게 응답할 뿐이다. 기적은 어떤 부름이 더 크거나 더 대단하거나 더 중요한지 고려하지 않는다. 그대는 이렇게 의아해할 수도 있다. 여전히 판단에 매여 있는 그대가 어떻게 그대 자신의 판단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일을 하도록 요청받을 수 있는가? 답은 매우 단순하다.
기적을 낳는 것은 그대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이다. 기적 자체는 다만 그대 안에 하나님의 힘이 있다는 증인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기적을 나누는 모든 이가 똑같은 축복을 받는 이유이며, 또한 모든 사람이 기적을 나누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힘은 한계가 없다. 그리고 언제나 최대치이기에 누구로부터의 그 어떤 부름에도 모든 것을 준다. 여기에는 난이도의 순서가 없다.
도움을 향한 부름에는 도움이 주어진다. 여기에 관여하는 유일한 판단은, 성령이 두 범주로 나누는 단 하나의 구분뿐이니, 하나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향한 부름이다. 그대는 이 구분을 안전하게 할 수 없으니, 사랑을 알아보기에도, 그 밖의 모든 것이 다름 아닌 사랑을 향한 부름이라고 믿기에도 너무나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그대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너무 매여 있다. 그대가 내용이라고 여기는 것은 전혀 내용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형식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는 형제가 그대에게 실제로 주는 것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에고가 그의 봉헌을 판단하는 그 특정한 지각에만 반응하기 때문이다.
에고는 내용을 이해할 능력이 없으며, 내용에 전혀 관심이 없다. 에고에게는, 형식이 받아들일 만하면 내용도 그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에고는 그 형식을 공격할 것이다. 그대가 에고의 "역학"에 대해 무언가를 이해한다고 믿는다면, 그대가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내가 그대에게 분명히 말해 주겠다.
이는 그대 스스로는 에고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에 대한 연구는 마음에 대한 연구가 아니다. 사실, 에고는 자기 자신을 연구하는 것을 즐기며, 자신을 "분석"하려는 학생들의 시도를 철저히 승인하여, 그렇게 하여 자신의 중요성을 승인한다. 그러나 그들은 다만 무의미한 내용을 지닌 형식을 연구할 뿐이다.
이는 그 학생들의 스승이 무분별하기 때문이다. 스승은 인상적으로 들리는 말들 뒤에 이 사실을 감추는 데는 조심스럽지만, 그 말들은 함께 놓이면 그 어떤 일관된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이것이 에고의 판단들의 특징이다.
따로 놓으면 그 판단들은 성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함께 놓으면 그 결합에서 생겨나는 사고 체계는 일관성이 없고 완전히 혼돈스럽다. 형식만으로는 의미가 생기지 않으며, 그 밑에 내용이 없으므로 하나로 짜인 체계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리는 에고가 선택한 조건으로 남아 있다. 홀로는 그 누구도 에고를 참되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 이상이 진리를 찾는 데 함께 하나가 되면, 에고는 더 이상 자신에게 내용이 없다는 사실을 방어할 수 없다.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이 에고가 참이 아님을 그들에게 말해 준다. 하나님을 은밀하게 홀로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대가 혼자가 아니며, 그 사실을 기꺼이 기억하고자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대 자신을 위한 생각을 하지 말라, 그대가 지닌 그 어떤 생각도 그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의 아버지를 기억하고자 한다면, 성령이 그대의 생각을 정렬하게 하고, 성령이 그대에게 답하는 그 답만을 주게 하라.
모든 사람이 그대처럼 사랑을 찾지만, 그대와 함께 사랑을 찾는 데 하나가 되지 않는 한 사랑을 알지 못한다. 그대들이 함께 그 찾음을 떠맡는다면, 그대는 그대가 보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만큼 강력한 빛을 함께 가져오게 된다.
외로운 여정은 사랑이 찾고자 하는 것을 배제해 버렸기 때문에 실패한다. 하나님이 그대 안의 성령에게 소통하듯, 성령도 그대를 통해 하나님의 소통을 통역하여, 그대가 그 소통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하나님에게는 은밀한 소통이 없으니, 하나님에게 속한 모든 것은 완전히 열려 있고 모든 이에게 자유로이 다가갈 수 있으며, 모든 이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은밀함 속에 사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대가 성령에게서 숨기고자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가 형제에게 씌우고자 하는 모든 해석은 무분별하다. 성령이 그대에게 형제를 보여 주고, 형제의 사랑과 사랑을 향한 그의 부름 둘 다를 그대에게 가르치게 하라. 형제의 마음에도, 그대의 마음에도 이 두 가지 생각의 질서 이상은 없다. 기적은 이 두 가지뿐이라는 것이 참임을 알아보는 일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사랑의 본성상 그대의 형제는 사랑을 그대에게 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랑을 향한 부름이 있는 곳에서는, 그대가 사랑이기에 그대는 사랑을 주어야 한다.
앞서 나는 이 수업이 그대인 것을 기억하는 법을 가르쳐, 그대의 정체성을 그대에게 회복시켜 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 정체성이 공유된다는 것을 이미 배웠다. 기적은 정체성을 공유하는 수단이 된다. 정체성이 알아보아지지 않는 곳이면 어디든 그대의 정체성을 공급함으로써, 그대는 정체성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과 영원히 함께 있고자 하는 하나님 자신은, 자신이 아들에게 지닌 모든 사랑으로 아들을 알아보는 일 하나하나를 축복할 것이다. 또한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에게 주는 그 어떤 기적에도 하나님의 모든 사랑의 힘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적들 사이에 난이도의 순서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그대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배우는 일이다. 앎은 힘이며, 모든 힘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힘을 자기 자신을 위해 지키려 해 온 그대는 그 힘을 "잃어버렸다." 그대는 여전히 그 힘을 지니고 있지만, 그 힘과 그것에 대한 그대의 알아차림 사이에 너무 많은 것을 끼워 넣어서 그 힘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대가 스스로에게 가르쳐 온 모든 것이 그대의 힘을 점점 더 흐릿하게 만들어 왔다. 그대는 그 힘이 무엇인지도,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대는 너무나 초라해서 반드시 그대를 저버릴 수밖에 없는 힘의 허울과 세기의 겉모습을 만들어 왔다. 힘은 겉으로만 그럴듯한 세기가 아니며, 진리는 그 어떤 종류의 허울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와 그대 안의 하나님의 힘 사이에 가로놓인 모든 것은 다만 거짓에 대한 그대의 배움과, 참된 것을 되돌리려는 그대의 시도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배움과 시도가 되돌려지기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대가 그 거짓에 영원히 매여 있지 않다는 것을 기뻐하라.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을 가두는 법을 스스로에게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그 가르침은 너무나 상상할 수 없는 것이어서, 오직 미친 자만이 가장 깊은 잠 속에서 그 가르침을 꿈꿀 수 있을 정도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닌 법을 배울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모든 힘을 받은 그의 아들이 무력해지는 법을 배울 수 있겠는가?
그대가 가진 것과 그대인 것 대신에 그대가 간직하기를 바랄 만한 그 무엇을 그대는 스스로에게 가르쳐 왔는가? 속죄는 그대가 지금 무엇인지만을 그대에게 보여 줌으로써, 그대가 과거에 스스로에게 가르쳐 온 모든 것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는 법을 그대에게 가르친다. 배움은 그 결과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배움은 과거에 속하지만, 그 영향력은 그 배움이 그대에게 지니는 그 어떤 의미든 현재에 부여함으로써 현재를 결정한다.
그대의 배움은 현재에 아무 의미도 주지 않는다. 그대가 지금껏 배운 그 어떤 것도 그대가 현재를 이해하도록 돕거나 과거를 되돌리는 법을 그대에게 가르쳐 줄 수 없다. 그대의 과거는 그대가 스스로에게 가르쳐 온 것이다. 그 과거를 모두 놓아 버리라.
과거의 "빛" 안에서 그 어떤 사건이나 사물이나 사람도 이해하려 하지 말라, 그대가 보려고 하는 그 어둠은 흐리게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둠이 그대의 이해를 밝혀 줄 것이라는 확신을 전혀 두지 말라, 그렇게 한다면 그대는 빛과 모순되게 되고, 그로써 그대가 어둠을 본다고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둠은 보일 수 없으니, 어둠은 봄이 불가능해지는 상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가 스스로에게 가르쳐 온 모든 어둠을 아직 그대 안의 빛으로 가져오지 않았다면, 그대는 이 수업의 진리와 가치를 거의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대를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대에게는 하나님이 보낸 또 다른 가르침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에게 준 것이며, 성령이 빛의 모든 자녀를 위해 이미 배워 둔 것이다. 이 가르침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니, 그 안에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과 그토록 기꺼이 나누는 그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행복을 배우라, 그 행복은 그대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이루려면, 그대의 모든 어두운 가르침을 기꺼이 진리로 가져와, 움켜쥐려 닫힌 손이 아니라 받아들이려 열린 손으로 기쁘게 내려놓아야 한다. 빛을 가르치는 이인 성령에게 그대가 가져오는 모든 어두운 가르침을, 그대가 원하지 않기에 성령은 그대에게서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성령은 그것 하나하나를, 그대를 위해 배워 둔 밝은 가르침과 기꺼이 맞바꿀 것이다.
성령을 떠나 그대가 배운 그 어떤 가르침도 무언가를 의미한다고 결코 믿지 말라.
그대가 배운 것이 참인지 알아볼 수 있는, 하나님만큼이나 확실한 시험이 그대에게 하나 있다. 그대가 그 어떤 종류의 두려움에서도 완전히 자유롭고, 그대를 만나거나 그대를 생각하기만 하는 모든 이가 그대의 완전한 평화를 함께 나눈다면, 그대는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배웠지 자기 자신의 가르침을 배운 것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 이 두 조건이 다 참인 것이 아니라면, 그대의 마음 안에는 그대와 그대 주위의 모든 이를 해치고 가로막는 어두운 가르침들이 있는 것이다.
완전한 평화의 부재는 오직 한 가지를 의미한다. 곧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을 위해,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해 뜻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모든 어두운 가르침은 어떤 형태로든 이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대가 받아들이지 않는 어두운 가르침들을 성령이 대체할 그 밝은 가르침 하나하나는, 그대가 아버지와 그 아들과 함께 뜻한다는 것을 그대에게 가르친다.
그대가 스스로에게 가르쳐 온 모든 것과 완전히 다른 가르침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지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 그대가 그 가르침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대의 역할은 매우 단순하다. 그대가 배운 모든 것을 그대가 원하지 않는다는 것만 알아보면 된다. 가르쳐지기를 청하고, 그대의 경험을 그대가 배운 것을 확인하는 데 쓰지 말라.
그대의 평화가 어떤 식으로든 위협받거나 흔들릴 때,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라. "이것을 포함하여, 그 무엇이 무슨 뜻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 경험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나를 인도할 빛으로서 나 자신의 과거의 배움을 쓰지 않겠다." 그대가 알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가르치려는 시도를 이렇게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이 그대에게 준 안내자가 그대에게 말할 것이다.
그대가 그 자리를 포기하고 안내자에게 내어 주는 그 순간, 안내자는 그대의 알아차림 안에서 자신의 정당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대는 기적으로 향하는 그대 자신의 안내자가 될 수 없으니, 기적을 필요하게 만든 것이 바로 그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가 그렇게 했기에, 그대가 기적을 위해 의지할 수 있는 수단이 그대에게 마련되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주 조금이라도 아버지에게 돌아서기만 한다면, 아들은 아버지가 채워 주지 않을 필요를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으면서 자신의 아들이 자신에게 돌아서도록 강요할 수 없다.
하나님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 것은 불가능하니,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대도 그대의 정체성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체성이 그대의 정체성이기에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바꿀 수 없으니, 그대의 정체성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기적은 하나님의 아들을 그가 스스로 만들고자 하는 모습이 아니라 언제나 그러했던 모습으로 봄으로써, 하나님의 변함없음을 인정한다. 기적은 오직 결백함만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오며, 그렇게 하여 결백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세운다.
죄책감에 그토록 굳게 매여 그렇게 남아 있기로 그토록 전념해 온 그대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위해 자신의 결백함을 세울 수 있겠는가? 그 결백함의 세움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고 있는지 확실히 하라.
성령의 인도가 제한되는 것은 오직, 그대가 자신의 삶의 어떤 작은 부분을 스스로 운영하거나 특정 측면을 홀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뿐이다. 그렇게 하여 그대는 성령을 의지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고, 이 상상된 의지할 수 없음을 어떤 어두운 가르침들을 성령에게서 숨겨 두는 핑계로 쓴다. 그리고 그대가 받아들이고자 하는 인도를 그렇게 제한함으로써, 그대는 그대의 모든 문제에 답해 줄 기적에 의지할 수 없게 된다.
성령이 그대에게 주기를 바라는 것을 성령이 그대에게서 거두어들일 것이라고 그대는 생각하는가? 성령이 그대에게 기적을 줌으로써 풀지 못할 문제는 그대에게 없다. 기적은 그대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지닌 모든 두려움과 고통과 시련은 이미 되돌려졌다.
성령은 그대 대신 그 두려움과 고통과 시련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결코 있었던 적이 없음을 알아봄으로써, 그것들을 모두 빛으로 가져왔다. 성령이 그대를 위해 이미 밝혀 놓지 않은 어두운 가르침은 없다. 그대가 스스로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그 가르침들을 성령은 이미 바로잡아 두었다. 그 어두운 가르침들은 성령의 마음(Mind) 안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과거가 성령을 묶지 못하며, 그러므로 그대도 묶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그대처럼 시간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성령이 그대에게 주는 기적 하나하나는 시간에 대한 그대의 쓰임을 바로잡아, 그 기적을 성령의 것으로 만든다. 그대를 과거에서 풀어 준 성령은 그대가 과거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그대에게 가르치고자 한다.
성령은 다만 그대가 성령의 성취를 그대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랄 뿐이니, 성령이 그대를 위해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이 그렇게 했기에, 그 성취는 그대의 것이다. 성령은 그대가 만든 것으로부터 그대를 자유롭게 했다. 그대는 성령을 부인할 수 있지만, 성령을 헛되이 부를 수는 없다.
성령은 언제나 그대의 선물 대신 자신의 선물을 준다. 성령은 자신의 밝은 가르침을 그대의 마음 안에 너무나 굳건히 세워, 성령이 자신의 임재로 거룩하게 세워 놓은 그곳에는 그 어떤 죄책감의 어두운 가르침도 머물 수 없게 하고자 한다. 성령이 거기 있어 그대를 통해 일한다는 것에 하나님에게 감사하라. 그리고 성령의 모든 일은 그대의 것이다. 성령이 그대를 통해 행하도록 그대가 허락하는 일 하나하나와 함께, 성령은 그대에게 기적을 준다.
하나님의 아들은 언제나 나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로 붙들려 있듯,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로 배운다. 하나님의 스승은 하나님의 아들만큼이나 자신의 창조주를 닮았으며, 하나님은 자신의 스승을 통해 자신의 하나됨과 자신의 아들의 하나됨을 선포한다.
고요히 귀 기울이고, 성령에 맞서 목소리를 높이지 말라. 성령은 하나됨의 기적을 가르치며, 성령의 가르침 앞에서 분리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령처럼 가르치라, 그러면 그대는 자신이 언제나 아버지처럼 창조해 왔다는 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창조의 기적은 결코 그친 적이 없으니, 그 위에 불멸의 거룩한 낙인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든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며, 모든 창조물이 이것을 뜻하는 데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며 모든 것을 배우고자 기꺼이 하게 된 이들은 그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자신을 신뢰할 때는 언제나, 그들은 배우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이미 안다고 생각함으로써 배움에 대한 자신의 동기를 파괴해 왔다. 완전한 평화의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는 그대가 무언가를 이해한다고 여기지 말라, 평화와 이해는 함께 가며 결코 홀로는 발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평화와 이해는 서로를 함께 데려오니, 이 둘이 분리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서로에게 원인과 결과이니, 그러므로 하나가 없는 곳에는 다른 하나도 있을 수 없다. 이해의 결과가 자신과 함께 있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것을 알아보는 이들만이 진정으로 배울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이 평화여야 하며, 그 밖의 다른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대가 안다고 생각할 때마다, 평화는 그대를 떠날 것이니, 그대가 평화의 스승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그대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완전히 깨달을 때마다, 평화는 돌아올 것이니, 스승을 위해 에고를 저버림으로써 그대가 스승을 그렇게 초대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 무엇을 위해서도 에고를 부르지 말라. 그대가 해야 할 일은 오직 이것뿐이다.
성령은 스스로, 그렇게 자신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모든 마음을 채울 것이다. 평화를 원한다면 그대는 공격의 스승을 저버려야 한다. 평화의 스승은 결코 그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스승을 버릴 수 있지만 스승은 결코 그렇게 되갚지 않을 것이니, 그대에 대한 스승의 믿음이 곧 스승의 이해이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스승이 자신의 창조주에게 지닌 믿음만큼이나 굳건하며, 스승은 자신의 창조주에 대한 믿음이 창조주의 창조물에 대한 믿음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이 일관성 안에 스승이 저버릴 수 없는 그의 거룩함이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은 스승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의 완전함을 언제나 자신의 시야에 두고서, 스승은 평화의 필요를 지각하며 그것을 갖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평화의 선물을 준다. 평화를 위해 길을 내라, 그러면 평화가 올 것이다.
이는 이해가 그대 안에 있고, 그 이해로부터 평화가 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해와 평화, 이 둘이 생겨나는 하나님의 힘은, 스승의 것인 만큼이나 확실하게 그대의 것이다. 그대가 스승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만 홀로는 스승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나 스승이 그대를 통해 행할 그 강력한 일들을 보라, 그러면 그대는 자신이 스승을 통해 그 일들을 해냈다고 확신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대에게서 나올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그 결과들의 근원(Source)을 부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승을 위한 자리를 남겨 두라, 그러면 그대는 자신이 힘으로 너무나 가득 채워져서 그 무엇도 그대의 평화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대가 이해했다는 것을 알아보게 되는 시험이 될 것이다.
2) 죽음으로 가는 시간
아무 근심도, 아무 걱정도, 아무 불안도 없이 다만 언제나 완전히 고요하고 잠잠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대는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 고요함이 바로 시간이 존재하는 이유다. 다만 그것을 배우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나님의 스승(성령)은 자신의 가르침이 그대의 배움 전체를 이룰 때까지는 그 가르침에 만족할 수 없다. 성령은 그대가 오직 성령에게서만 배우는 한결같은 학습자가 될 때까지는 자신의 가르치는 역할을 다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일어나면, 그대는 더 이상 스승도, 배울 시간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겪을 수 있는 지각된 낙담의 한 근원은, 이 배움에 시간이 걸리며 성령의 가르침의 결과가 먼 미래에 있다는 그대의 믿음이다. 그 믿음은 사실이 아니다. 성령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간을 쓰며, 시간에 매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함께 가져오는 것처럼 보이는 그 모든 낭비는 다만 에고와 그대의 동일시 때문이다. 에고는 파괴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뒷받침하기 위해 시간을 쓴다. 성령과 마찬가지로 에고도, 가르침의 목표와 끝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그대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시간을 쓴다. 에고에게 그 목표는 죽음이니, 죽음이 곧 에고의 끝이다. 그러나 성령에게 그 목표는 생명이니, 생명에는 끝이 없다.
에고는 시간의 동맹이지만, 친구는 아니다. 에고는 생명을 불신하는 만큼이나 죽음도 불신하며, 그대를 위해 원하는 것을 스스로는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고는 그대가 죽기를 원하지만, 자기 자신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에고의 기이한 종교의 결과는 필시, 무덤 너머까지 그대를 뒤쫓을 수 있다는 확신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에고는 그대가 죽음 안에서조차 평화를 찾는 것을 꺼리기에, 그대에게 지옥 안의 불멸을 준다.
에고는 그대에게 천국을 말하지만, 천국이 그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그대에게 확언한다. 죄지은 자가 어떻게 천국을 바랄 수 있겠는가? 에고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이들에게 지옥에 대한 믿음은 피할 수 없다. 그들의 악몽과 두려움은 모두 지옥에 대한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 에고는 지옥이 미래에 있다고 가르치니, 이것이 바로 에고의 모든 가르침이 향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옥이 에고의 목표다. 이는 에고가 죽음과 소멸을 끝으로 겨냥하지만, 죽음과 소멸을 믿지는 않기 때문이다. 에고가 그대를 위해 갈망하는 죽음이라는 목표는 에고를 만족시키지 못한 채로 남긴다. 에고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 중 죽음의 두려움이 없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죽음이 다만 고통의 끝으로 여겨진다면, 죽음이 두려워지겠는가? 우리는 에고의 사고 체계 안에서 이 기이한 역설을 전에도 본 적이 있지만, 여기서만큼 명확하게 본 적은 없다. 에고는 그대의 충성을 붙들기 위해 그대에게서 두려움을 막아 주는 것처럼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고는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두려움을 낳아야 한다.
에고는 다시금, 그리고 너무나 자주 성공적으로, 해리를 써서 자신의 모순되는 목적들을 함께 붙들어 화해된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두려움을 막아 주는 일과 두려움을 낳는 일, 이 둘 다를 해내려 한다.
에고는 이렇게 가르친다. 천국에 대한 희망에 관한 한, 죽음이 끝이다. 그러나 그대와 에고는 분리될 수 없고, 에고는 자기 자신의 죽음을 상상할 수 없기에, 죄책감이 영원하다는 이유로 에고는 여전히 그대를 뒤쫓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멸에 대한 에고의 판본이다. 그리고 시간에 대한 에고의 판본이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이 불멸이다.
에고는 미래가 지옥이기에 천국이 지금 여기에 있다고 가르친다. 에고가 너무나 사납게 공격하여 자신이 유일한 음성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이의 생명을 빼앗으려 할 때조차, 에고는 그에게도 지옥을 말한다. 에고는 그에게 지옥이 여기에도 있다고 말하며, 지옥에서 망각으로 뛰어들라고 그에게 청하기 때문이다.
에고가 그 누구에게든 평정심으로 바라보도록 허락하는 유일한 시간은 과거다. 그리고 거기서조차, 과거의 유일한 가치는 과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고의 시간 쓰임은 얼마나 황량하고 절망적인가! 그리고 얼마나 무서운가! 과거와 미래가 같다는 에고의 광적인 주장 밑에는 평화에 대한 훨씬 더 교활한 위협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에고는 자신의 최종적인 위협을 광고하지 않으니, 자신을 숭배하는 자들이 에고가 그들에게 도피를 줄 수 있다고 여전히 믿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책감에 대한 믿음은 지옥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언제나 그렇게 된다.
에고가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경험되도록 허락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옥을 여기로 가져오되 언제나 미래를 미리 맛보는 것으로서 가져오는 것이다. 자신이 지옥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자는 그 누구도 처벌이 평화로 끝날 것이라고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3) 지금의 거룩한 순간
성령은 이렇게 가르친다. 지옥은 없다. 지옥은 다만 에고가 현재를 가지고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지옥에 대한 믿음이 바로 그대가 현재를 이해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그대가 지옥에 대한 믿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에고가 지옥으로 몰아가는 것만큼이나 꾸준히 천국으로 이끈다. 이는 오직 현재만을 아는 성령이, 에고가 현재를 쓸모없게 만들려는 그 두려움을 되돌리기 위해 현재를 쓰기 때문이다.
에고의 시간 쓰임 안에는 두려움으로부터의 도피가 없다. 에고의 가르침에 따르면, 시간은 죄책감이 모든 것을 아우르며 영원히 복수를 요구하게 될 때까지 죄책감을 쌓아 가는 가르침의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은 지금 이 모든 것을 되돌리고자 한다. 두려움은 현재에 속한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과거와 미래에만 속한 것이다.
순간 하나하나가 과거로부터 또렷하고 분리되게 서서, 그 그림자가 미래로 뻗어 나가지 않을 때, 현재에는 두려움이 없다. 순간 하나하나는 깨끗하고 흠 없는 탄생이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과거에서 현재로 나온다. 그리고 현재는 영원히 확장된다.
현재는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깨끗하며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서 거기에는 오직 행복만이 있다. 그 어떤 어둠도 기억되지 않으며, 불멸과 기쁨이 지금 있다.
이 가르침에는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가 없는 시간이란 무엇이겠는가? 그대를 이토록 완전히 잘못 이끄는 데는 시간이 걸렸지만, 그대인 것이 되는 데는 전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행복과 평화를 위한 가르침의 도구로서 성령의 시간 쓰임을 실천하기 시작하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을 붙잡아, 이 순간을 시간의 전부로 여기라. 과거로부터는 그 무엇도 여기서 그대에게 닿을 수 없으며, 바로 여기서 그대는 완전히 사면되고, 완전히 자유로우며, 온전히 정죄에서 벗어나 있다. 거룩함이 다시 태어난 이 거룩한 순간으로부터 그대는 두려움 없이, 그리고 시간에 따른 변화의 감각 없이 시간 속으로 나아갈 것이다.
시간은 변화 없이는 상상할 수 없지만, 거룩함은 변하지 않는다. 지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상을 이 순간에서 배우라. 이 해방의 순간 안에 천국이 있다. 그리고 천국은 변하지 않을 것이니, 거룩한 현재로의 탄생이 곧 변화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변화는 환영이며, 자기 자신을 결백하다고 볼 수 없는 이들이 가르치는 것이다. 천국에는 변화가 없으니, 하나님에게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자기 자신을 자유로 밝게 빛나는 존재로 보는 그 거룩한 순간에, 그대는 하나님을 기억할 것이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곧 자유를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마음을 그토록 완전히 바꾸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릴지 생각하다가 낙담하고 싶은 유혹이 든다면, 자신에게 물으라. "순간은 얼마나 긴가?" 그대의 구원을 위해 그토록 짧은 시간조차 성령에게 줄 수 없겠는가? 성령은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으니, 그 이상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가 이 순간을 성령에게 기꺼이 주도록 그대를 가르치는 데는, 성령이 이 작은 순간을 써서 천국 전체를 그대에게 주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린다. 이 순간과 맞바꾸어 성령은 영원에 대한 기억을 그대에게 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대가 형제들의 해방을 위해 이 거룩한 순간을 그들에게 기꺼이 주려 하지 않는 한, 그대는 자신의 해방을 위해서도 이 거룩한 순간을 결코 성령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 거룩함의 순간은 함께 나누어지는 것이며, 그대만의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제를 공격하고 싶은 유혹이 들 때, 그의 해방의 순간이 곧 그대의 것임을 기억하라. 기적은 그대가 주는, 그리고 받게 될 해방의 순간들이다. 기적은 그대가 해방되고자 하는 그대의 자발성과, 성령이 쓰도록 성령에게 시간을 내어 주려는 그대의 자발성을 증언한다.
순간은 얼마나 긴가? 순간은 그대에게 짧은 것만큼이나 그대의 형제에게도 짧다. 시간에 종속된 모든 이에게 이 축복받은 자유의 순간을 주는 것을 실천하라, 그렇게 하여 그들을 위해 시간을 그들의 친구로 만들라.
성령은 그대가 그들에게 그 축복받은 순간을 줌으로써, 그들의 축복받은 순간을 그대에게 준다. 그대가 그 축복받은 순간을 줄 때, 성령은 그 축복받은 순간을 그대에게 준다. 그대가 성령에게서 받고자 하는 것을 주기를 꺼리지 말라, 그대는 주는 일에서 성령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그대가 주는 해방의 수정처럼 맑은 깨끗함 안에 그대의 즉각적인 죄책감으로부터의 탈출이 있다.
그대가 거룩함을 준다면 그대는 거룩할 수밖에 없다. 순간은 얼마나 긴가? 모든 이를 위한, 하나님을 위한, 그리고 그대 자신을 위한 완전한 온전한 정신과 완전한 평화와 완전한 사랑을 다시 세우는 데 걸리는 만큼. 불멸을 기억하고, 불멸을 그대와 함께 나누는 그대의 불멸하는 창조물들을 기억하는 데 걸리는 만큼. 지옥을 천국과 맞바꾸는 데 걸리는 만큼. 에고가 만든 모든 것을 초월하여 그대의 아버지에게로 올라가기에 충분한 만큼.
그대가 시간을 성령이 쓰도록 맡긴다면, 시간은 그대의 친구다. 성령은 하나님의 힘 전체를 그대에게 회복시키는 데 아주 적은 것만을 필요로 한다. 그대를 위해 시간을 초월하는 성령은 시간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이해한다. 거룩함은 시간이 아니라 영원 안에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순결함을 잃을 수 있었던 순간은 결코 없었다. 그 아들의 변함없는 상태는 시간을 넘어서 있으니, 그의 순결함은 영원히 공격을 넘어서 있고 변동 없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의 거룩함 안에서 멈추어 서고,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므로 시간은 더 이상 전혀 시간이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영원한 신성함이라는 그 단일한 순간 안에 붙잡혀, 시간은 영원으로 변형되기 때문이다.
완전한 해방의 그 빛나는 순간 속에서 영원이 그대를 위해 기억되도록, 그 영원한 순간을 주라. 거룩한 순간의 기적을 성령을 통해 주고, 그 기적을 그대에게 주는 일은 성령에게 맡기라.
속죄는 시간 안에 있지만, 시간을 위한 것은 아니다. 속죄는 그대 안에 있기에, 영원하다.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는 것은 시간에 매일 수 없다. 그대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매이지 않는 한, 그대도 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에게 바쳐진 한 순간은 그대를 대신하여 하나님에게 바쳐진 것이며, 그 순간에 그대는 하나님 안에서 부드럽게 깨어날 것이다. 그 축복받은 순간에 그대는 자신의 모든 과거의 배움을 놓아 버릴 것이고, 성령은 평화의 가르침 전체를 그대에게 신속히 줄 것이다.
평화의 가르침을 배우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장애물이 제거되었을 때, 무엇에 시간이 걸릴 수 있겠는가? 진리는 시간을 너무나 멀리 넘어서 있어서 진리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일어난다. 진리가 하나로 창조되었듯, 그 하나됨은 시간에 전혀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에 마음 쓰지 말고, 모든 두려움을 없애 줄 그 거룩함의 순간을 두려워하지 말라. 평화의 순간은 두려움이 없기에 영원하기 때문이다.
평화의 순간은 올 것이다. 그 순간은 하나님이 시간을 영원으로 통역하도록 임명한 스승을 통해 하나님이 그대에게 주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스승에게 복이 있으니,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에게 그의 거룩함을 가르치는 것이 스승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스승의 기쁨은 시간 안에 담겨 있지 않다. 스승의 기쁨이 그대의 것이기에, 스승의 가르침은 그대를 위한 것이다.
스승을 통해 그대는 하나님의 제단 앞에 서며, 거기서 스승은 지옥을 천국으로 부드럽게 통역한다. 하나님이 그대가 있기를 바라는 곳은 오직 천국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대가 있기를 바라는 곳에 있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릴 수 있겠는가? 그대는 자신이 영원히 있어 왔고 영원히 있을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을, 그대는 영원히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그대를 아우르기 위해 자기 자신을 확장하듯, 그 축복받은 순간은 시간을 아우르기 위해 손을 뻗는다.
그대는 힘의 근원(Source)을 지각하지 못한다. 그대는 에고를 뒷받침하고 에고의 약함을 지탱하려는 시도로 며칠, 몇 시간, 심지어 몇 년을 형제들을 그대의 에고에 묶는 데 써 왔다.
이 거룩한 순간에 그대는 자신의 모든 형제를 풀어 주고, 형제들의 약함이든 그대 자신의 약함이든 뒷받침하기를 거부할 것이다. 그대는 형제들을 에고를 뒷받침하는 근원으로 봄으로써 그들을 얼마나 오용해 왔는지 깨닫지 못한다. 그 결과, 그들은 그대의 지각 안에서 에고를 증언하며, 에고를 놓아 버리지 않을 이유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형제들은 성령을 위한 훨씬 더 강력하고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증인이다. 그리고 형제들은 성령의 힘을 뒷받침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이 그대 안의 에고를 뒷받침할지 성령을 뒷받침할지는 그대의 선택이다. 그리고 그대는 형제들의 반응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선택했는지 알아보게 될 것이다.
형제 안에서 성령을 통해 풀려난 하나님의 아들은 언제나 알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부인될 수 없다. 그대가 여전히 확신하지 못한다면, 의심은 다만 그대가 완전한 해방을 주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그대는 단 한 순간도 성령에게 완전히 주지 않은 것이다. 그대가 그렇게 했을 때는, 그대는 자신이 그렇게 했음을 확신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확신하게 될 것이다. 성령을 증언하는 이가 성령에 대해 너무나 명료하게 말해서 그대가 듣고 이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성령을 통해 온전히 풀어 준 증인 한 사람의 말을 들을 때까지, 그대는 의심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대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 거룩한 순간은 아직 그대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거룩한 순간은 일어날 것이며, 그대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알아볼 것이다. 하나님의 그 어떤 선물도 다른 방식으로는 알아보아지지 않는다.
그대는 거룩한 순간의 방법을 실천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자체의 인식(vision)으로 그대를 이 세상에 문자 그대로 눈멀게 할, 그 빛나고 반짝이는 광휘는 그대가 공급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광휘는 여기, 이 순간 안에 모두, 완전하고 이루어지고 온전히 주어진 채로 있다.
거룩한 순간을 가려내는 그대의 작은 역할을 지금 실천하기 시작하라. 그대는 나아가는 동안 매우 구체적인 지침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단 한 순간을 가려내는 법을 배우고 그 순간을 시간을 벗어난 것으로 경험하는 것은, 그대 자신을 분리되지 않은 존재로 경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일에서 그대가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의 스승과 그의 가르침은 그대의 힘을 뒷받침할 것이다. 이 실천에서 그대를 떠날 것은 오직 그대의 약함뿐이다. 이것이 그대 안의 하나님의 힘을 실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것을 쓰라, 그러면 그대는 다시는 그것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감사와 기쁨 속에서 온 우주가 절하는 그 대상의 임재(Presence)를,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그 임재를 증언하는 우주의 알아봄 앞에서, 그대의 의심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