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둠 아닌 빛의 반영

1) 감춤에서 빛으로

우리가 함께 떠나는 이 여정은 어둠을 빛과, 무지를 이해와 맞바꾸는 것이다. 그대가 이해하는 것은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그대가 무서운 것을 지각하고 거기서 움츠러들어 더 깊은 어둠으로 물러나는 것은 오직 어둠과 무지 안에서뿐이다. 그런데도 두려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감추어진 것뿐이니, 그것이 무엇이어서가 아니라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모호한 것이 두려운 까닭은 그대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이해한다면 그 의미는 분명해질 것이고 그대는 더 이상 어둠 속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 무엇도 감추어진 가치를 지니지 않으니, 감추어진 것은 나눌 수 없고 그러므로 그 가치는 알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감추어진 것은 따로 떨어져 있지만, 가치는 언제나 함께 나누는 인정 안에 있다.

숨겨진 것은 사랑받을 수 없으며, 그러므로 반드시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성령이 그대 안에 머무는 그 고요한 빛은 그저 완전한 열려 있음일 뿐이며, 거기서는 아무것도 감추어져 있지 않으므로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공격은 사랑에게서 숨겨지지 않고 사랑에게로 가져와지기만 하면 언제나 사랑에 굴복할 것이다. 사랑의 은혜로부터 감추어지지 않는 한, 사랑의 빛이 몰아내지 못할 어둠은 없다. 사랑에게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사랑의 치유하는 힘을 나눌 수 없으니, 분리되어 어둠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어둠의 파수꾼들이 사랑에서 떼어 놓은 것을 철저히 지키고 있으며, 무(無)로 이 환영의 수호자들을 만든 그대는 이제 그것들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대는 이 안전에 대한 기이한 관념들에 계속 상상 속의 힘을 부여하려 하는가? 그것들은 안전하지도 위험하지도 않다. 그것들은 보호하지도, 공격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완전히 무(無)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어둠과 무지의 수호자인 그것들에게서는 두려움밖에 기대할 것이 없으니, 그것들이 모호하게 감추어 둔 것이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수호자들을 놓아 버리라, 그러면 두려웠던 것은 더 이상 두렵지 않을 것이다. 모호함의 보호가 없다면 오직 사랑의 빛만이 남으니, 오직 이것만이 의미를 지니고 빛 안에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사라져야 한다. 죽음은 그저 파괴가 참되지 않기 때문에 생명에 굴복한다. 결백함의 빛은 죄책감을 몰아내니, 그 둘이 함께 놓일 때 하나의 진리는 그 반대편의 거짓됨을 완전히 명료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죄책감과 결백함을 따로 떼어 놓지 말라, 그대가 그 둘을 다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죄책감과 결백함을 따로 떼어 놓음으로써 한 일은 오직 그 둘을 서로 혼동하여 그 의미를 잃어버린 것뿐이다.

그래서 그대는 오직 하나만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그 어떤 종류의 의미도 전혀 지니지 않는다. 그대는 분리를 그대의 아버지와의 소통을 끊는 수단으로 여겨 왔다. 성령은 분리를 끊어지지 않았지만 모호해진 것을 다시 세우는 수단으로 재해석한다.

그대가 만든 모든 것은 성령에게, 그 지극히 거룩한 목적을 위해 쓸모가 있다. 성령은 그대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알지만, 그대가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들을 그대의 마음 안에서 많이 지각한다. 오직 이것들만을, 그리고 이것들만을 성령은 그대에게서 분리해 내려 한다.

성령은 그대가 창조의 힘 대신 만들어 낸 결정의 힘을 그대를 위해 쓰는 법을 그대에게 가르치려 한다. 그 힘을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만든 그대는, 그 힘을 회복이라는 거룩한 대의에 적용하는 법을 성령에게서 배워야 한다.

어둡고 기만적인 상징으로 말하는 그대는 그대가 만든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 언어는 아무 의미도 없으니, 그 목적이 소통이 아니라 오히려 소통의 붕괴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목적이 소통이라면, 그 언어가 어떻게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겠는가? 그러나 소통하지 않음을 통해 소통하려는 이 기이하고 뒤틀린 시도조차도, 통역하는 이(성령)가 그 언어를 만든 이가 아니라면 그 언어를 의미 있게 만들 만큼 충분한 사랑을 담고 있다.

그 언어를 만든 그대는 그저 갈등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며, 성령은 그대를 거기서 풀어 주고자 한다. 그대가 소통하고자 하는 것을 성령에게 맡기라. 성령은 완전한 명료함으로 그대의 소통을 그대에게 통역해 줄 것이니, 성령은 그대가 누구와 완전한 소통을 하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며, 그러므로 그대에게 무슨 말이 주어지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대의 통역자는 그대의 낯선 언어 속의 의미를 지각한다. 성령은 무의미한 것을 소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의미 있는 모든 것을 가려내어, 나머지는 떨어뜨리고 그대와 진실로 소통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그대의 참된 소통을 내어 줄 것이다. 그대는 동시에 두 가지 언어로 말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반드시 이해 불가능함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언어가 아무 의미도 없고 다른 언어가 모든 의미를 지닌다면, 오직 모든 의미를 지닌 언어만이 소통의 목적에 쓰일 수 있다. 의미 없는 언어는 그저 소통을 방해할 뿐이다. 성령의 역할은 전적으로 소통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소통을 회복하기 위해 소통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제거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어떤 방해의 근원도 성령의 눈에서 감추지 말라, 성령은 그대의 파수꾼들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그 방해의 근원들을 성령에게 가져오고, 성령의 부드러움이 그대에게 이것을 가르치게 하라. 곧 빛 안에서 그것들은 두렵지 않으며, 그 뒤에 아무것도 조심스럽게 감추어져 있지 않은 그 어두운 문들을 지키는 데 쓰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문을 열고 빛이 그 안으로 흘러들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전에는 감추어진 방이 없다.

그 문은 아버지의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활짝 열려 있다. 아버지가 맞아들이려 할 때 스스로 문을 닫아걸지 않는 한, 그 누구도 하나님이 아들을 부른 곳에 이르지 못하는 일은 없다.

그대는 무엇을 원하는가? 빛이나 어둠, 앎이나 무지가 그대의 것이 될 수 있지만, 둘 다는 아니다. 반대되는 것들은 따로 떼어 놓을 것이 아니라 함께 모아야 한다. 반대되는 것들의 분리는 오직 그대의 마음 안에만 있으며, 그대가 그러하듯 반대되는 것들도 합일로써 화해되기 때문이다.

합일 안에서는 실재하지 않는 모든 것이 사라질 수밖에 없으니, 진리가 곧 합일이기 때문이다. 어둠이 빛 안에서 사라지듯, 앎이 밝아 오면 무지도 스러진다. 지각은 무지를 앎으로 데려가는 매개다. 그러나 그 지각에는 속임이 없어야 하니, 그렇지 않으면 그 지각은 진리를 찾는 데 조력자가 되기는커녕 무지의 전령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진리를 찾는 일은 다만 진리를 가로막는 모든 것을 정직하게 찾아내는 것일 뿐이다. 진리는 있다. 진리는 잃어버려질 수도, 찾아 나서질 수도, 발견될 수도 없다. 그대가 어디에 있든 진리는 거기 있으니, 그대 안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는 그대에게 알아보아지거나 알아보아지지 않을 수 있고, 실재하거나 거짓되게 보일 수 있다.

그대가 진리를 숨긴다면, 그대가 진리를 숨기고 두려움으로 에워쌌기 때문에 진리는 그대에게 실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대가 자신의 미친 믿음의 체계를 세운 두려움의 주춧돌 하나하나 밑에는, 진리가 숨겨져 있다. 그러나 그대는 이것을 알 수 없으니, 진리를 두려움 속에 숨김으로써, 그대가 두려움을 더 많이 볼수록 두려움은 덜 보이고 두려움이 감추고 있는 것은 더욱 또렷해진다는 것을 믿을 근거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성령과 함께 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들이 안다고 납득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알지 못하는 자들의 관점에서는 자신들이 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것을 알기에, 그들이 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들은 "알지 못하는 자"가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히 상반된 관점이다. 하나님에게는 알지 못함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전혀 관점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믿음일 뿐이다. 알지 못하는 자들이 지닌 것은 오직 이 믿음뿐이며, 이 믿음으로 인해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틀리게 된다.

알지 못하는 자들은 자신이 창조되지 않은 모습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해 왔다. 그들의 창조는 관점이 아니라 오히려 확실성이었다. 확실성에 데려와진 불확실성은 실재에 대한 그 어떤 확신도 지니지 못한다. 우리가 강조해 온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바람직한 것에게로, 그대가 원하지 않는 것을 그대가 원하는 것에게로 데려가는 일이었다.

그대가 해리(dissociation)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면, 구원이 이런 방식으로 그대에게 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해리란, 공존할 수 없는 두 믿음 체계가 둘 다 유지되는 왜곡된 사고 과정이다. 두 믿음 체계가 함께 모아지면, 그것들을 함께 받아들이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으면, 두 믿음 체계의 분리는 그 둘 모두를 실재 안에서 살아 있고 대등하게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두 믿음 체계의 결합은 두려움의 근원이 되니, 그것들이 만나면 둘 중 하나로부터는 받아들임이 거두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 둘 다를 가질 수 없으니, 각각이 서로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따로 떨어져 있으면 이 사실은 시야에서 사라지니, 각각이 별개의 자리에서 굳은 믿음을 부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믿음 체계를 함께 모으면, 그것들이 결코 함께 성립할 수 없다는 사실이 즉시 분명해진다. 다른 하나가 같은 자리에서 보이기 때문에, 하나는 사라질 것이다.

마음이 어둠을 믿고 놓아 버리려 하지 않을 때는, 빛이 어둠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진리는 무지에 맞서 싸우지 않으며, 사랑은 두려움을 공격하지 않는다. 보호가 필요 없는 것은 스스로를 방어하지 않는다. 방어는 그대가 만든 것이다. 하나님은 방어를 알지 못한다.

성령이 방어를 진리를 위해 쓰는 것은 오직 그대가 진리에 맞서 방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성령은 자신의 목적에 따라 방어를 지각하며, 그로써 방어는 다만 그대가 방어로 공격해 온 대상을 부르는 외침으로 바뀔 뿐이다. 그대가 만든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방어도 부드럽게 그대 자신의 유익으로 돌려져야 한다. 성령이 방어를 자기 파괴의 수단에서 보존과 해방의 수단으로 바꾼다.

성령의 과제는 막중하지만, 하나님의 힘이 성령과 함께한다. 그러므로 성령에게 그 과제는 너무나 쉬워서, 그 과제가 그대를 위해 성령에게 주어진 그 순간에 이미 이루어졌다. 하나님이 성령에게 하도록 준 것을 성령이 어떻게 이룰 수 있을지 궁금해하느라, 평화로 돌아가는 그대의 발걸음을 늦추지 말라. 그 과제는 아는 이에게 맡기라.

그대 스스로 막중한 과제를 하도록 요구받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다만 성령이 하라고 권하는 그 작은 일을 하도록 요구받을 뿐이다. 성령을 신뢰하는 것도 작은 정도면 된다. 곧 성령이 그 일을 요청한다면 그대가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정도로 충분하다. 성령이 요청하는 모든 것이 얼마나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그대는 보게 될 것이다. 성령이 그대에게 요청하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그대가 성령에게서 걸어 잠가 온 모든 비밀을 성령에게 가져오라. 성령에게 모든 문을 열고, 성령에게 그 어둠 속으로 들어와 어둠을 빛으로 몰아내 달라고 청하라. 그대의 요청이 있으면 성령은 기꺼이 들어온다. 그대가 그 어둠을 성령에게 열어 놓으면, 성령은 어둠에 빛을 가져온다. 그러나 그대가 숨기는 것은 성령이 들여다볼 수 없다.

성령은 그대를 위해 보며, 그대가 성령과 함께 보지 않으면 성령은 볼 수 없다. 그리스도의 인식(vision)은 성령 홀로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대와 함께하는 성령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어둡고 은밀한 생각을 모두 성령에게 가져와, 성령과 함께 그것들을 바라보라. 성령은 빛을 쥐고 있고, 그대는 어둠을 쥐고 있다. 그대와 성령이 함께 그것들을 바라볼 때, 빛과 어둠은 공존할 수 없다.

성령의 판단이 우세할 수밖에 없으며, 그대가 그대의 지각을 성령의 지각과 합칠 때 성령은 그 판단을 그대에게 줄 것이다. 성령과 함께 보는 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앎으로 이어지는 지각의 해석을 성령과 나누는 법을 배우는 길이다. 그대는 홀로 볼 수 없다. 하나님이 그대에게 준 성령과 함께 지각을 나누는 것이 그대가 보는 것을 알아보는 법을 그대에게 가르친다. 이는 그대가 보는 그 무엇도 홀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보는 일이다.

성령과 함께 보는 것은 그대에게 이것을 보여 줄 것이다. 그대의 의미를 포함한 모든 의미는 이중적으로 보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의 의미와 하나의 감정과 하나의 목적으로 부드럽게 융합되는 데서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하나의 목적이 있으며, 하나님은 그 목적을 그대와 나눈다.

성령이 그대에게 주는 단일한 인식은 이 하나됨을 그대의 마음에 가져온다. 그 명료함과 밝음이 너무나 또렷하고 강렬하여, 그대는 온 세상을 준다 해도 하나님이 그대가 갖기를 바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대의 의지를 보라. 그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모든 사랑을 그대의 것으로 받아들이라. 성령을 통해 그대에게 모든 영광이, 그리고 성령을 통해 하나님에게 이르기를.

어둠 속에서 그대는 하나님이 그대에게 준 영광과, 하나님이 자신의 결백한 아들에게 부여한 힘을 흐려 왔다. 이 모든 것은 어두워진 모든 자리에 감추어져 있으며, 죄책감과 결백함에 대한 어두운 부정 속에 가려져 있다. 그대가 닫아 놓은 어두운 문들 뒤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그 무엇도 하나님의 선물을 가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 안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힘을 알아보는 일을 가로막는 것은 바로 그 문들을 닫아 놓은 것이다.

힘을 그대의 마음에서 추방하지 말고, 그대의 영광을 감추려는 모든 것을 성령의 판단으로 가져와 거기서 되돌려지게 하라. 성령이 영광을 위해 구원하고자 하는 자는 영광을 위해 구원된다. 성령은 아버지에게, 성령을 통해 그대가 왜소함에서 영광으로 풀려나리라고 약속했다. 성령은 하나님에게 약속한 것에 온전히 신실하니, 그대와 나누도록 성령에게 주어진 그 약속을 성령이 하나님과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성령은 여전히 그대를 위해 그 약속을 나눈다. 성령은 그와 달리 약속하는 모든 것을, 크든 작든, 그 약속이 얼마나 소중히 여겨지든, 그 하나의 약속으로 대체할 것이다. 그 약속은 그대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에게 바치는 제단 위에 놓으라고 성령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없이는 하나님에게 바쳐진 제단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거기 가져와진 것 중 아버지와 아들 둘 다에게 똑같이 합당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와 아들 모두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선물로 대체될 것이다. 그대는 하나님에게 죄책감을 바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죄책감을 하나님의 아들에게도 바칠 수 없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으니, 하나에게 바쳐진 선물은 다른 하나에게도 바쳐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이것을 알지 못하기에 그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대는 하나님도, 그 진리도 사실은 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이 빛나는 그대 안에서 안전하다.

성령은 분리 속에서 빛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과 하나 되어 성령을 통해 자신의 아들에게 말하는 그 만남의 자리에서 빛난다. 나뉠 수 없는 것들 사이의 소통은 그칠 수 없다. 분리되지 않은 아버지와 그 아들의 거룩한 만남의 자리는 성령 안에, 그리고 그대 안에 있다.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아들과 나누고자 하는 그 소통에 대한 그 어떤 방해도 여기서는 전혀 불가능하다.

아버지와 아들 둘 다가 바라는 대로, 끊이지 않고 방해받지 않는 사랑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끊임없이 흐른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하다. 그대의 마음이 빛의 중심에서 벗어나 어두운 복도를 헤매게 하지 말라.

그대는 스스로를 잘못된 길로 이끌기를 선택할 수 있지만, 그대를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이는 오직 그대를 위해 지정된 안내자뿐이다. 안내자는 분명 하나님과 그 아들이 그대의 알아봄을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그대를 이끌 것이다. 하나님과 그 아들은 하나됨의 선물을 그대에게 주는 데 하나로 결합되어 있으며, 그 앞에서는 모든 분리가 사라진다. 그대인 것과 하나가 되라.

그대는 실재 외에는 그 무엇과도 결합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 아들의 영광은 진리 안에서 그대의 것이다. 그 영광들에는 반대되는 것이 없으며, 그대는 자기 자신에게 그 밖의 것을 부여할 수 없다.

진리를 대신할 것은 없다. 그리고 그대가 진리와 만나야 할 그 자리로 인도됨에 따라, 진리는 이것을 그대에게 분명하게 밝혀 줄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 밖의 그 어디로도 그대를 이끌 수 없는 부드러운 이해를 통해 그곳으로 인도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있는 곳에, 그대도 있다.

그것이 바로 진리다. 하나님이 그대에게 준 그 앎을, 그 무엇도 알지 못함으로 바꿀 수 없다.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은 자신의 창조주를 안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와 그의 창조물들에 의해 창조가 이루어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만남의 자리에서 아버지와 그의 창조물들이, 그리고 그 아들의 창조물들이 그들과 함께 하나로 결합된다. 그들 모두를 함께 결합하는 하나의 연결 고리가 있어, 창조가 일어나는 그 하나됨 안에 그들을 붙들어 둔다. 아버지가 창조할 힘을 준 이들에게 자기 자신을 결합하는 그 연결 고리는 결코 풀릴 수 없다. 천국 자체가 모든 창조와의, 그리고 그 유일한 창조주와의 합일이다.

그리고 천국은 여전히 그대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 외에는 그 어떤 선물도 그대의 제단 위에 두지 말라, 그 무엇도 이것과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대의 작은 봉헌물들은 하나님의 선물과 함께 모아지며, 오직 아버지에게 합당한 것만이 그 선물이 의도된 그 아들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아들에게는, 그 아들 또한 내어 주어진다. 그대의 작은 선물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것을 두어 놓은 그 제단 위에서 사라질 것이다.

3) 거룩함의 거울

속죄는 거룩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대는 거룩하게 창조되었다. 속죄는 다만 거룩하지 않음을 거룩함으로, 곧 그대가 만든 것을 그대인 것으로 데려갈 뿐이다. 환영을 진리로, 에고를 하나님으로 데려가는 것이 성령의 유일한 역할이다.

그대가 만든 것을 그대의 아버지에게서 숨기지 말라, 그것을 숨겨 온 것이 아버지에 대한 앎과 그대 자신에 대한 앎을 그대에게서 앗아갔기 때문이다. 그 앎은 안전하지만, 그 앎을 벗어난 그대의 안전은 어디에 있는가? 무시간성을 대신하도록 시간을 만든 일은, 그대인 것과 다른 존재가 되겠다는 결정에 있었다. 그렇게 하여 진리는 과거의 것이 되었고, 현재는 환영에 바쳐졌다.

그리고 과거 역시 바뀌어, 언제나 있어 온 것과 지금 사이에 끼워 넣어졌다. 그대가 기억하는 과거는 결코 있었던 적이 없으며, 언제나 있어 온 것에 대한 부정만을 나타낼 뿐이다. 에고를 하나님에게 데려가는 것은 다만 오류를 진리에게로 데려가는 것일 뿐이며, 거기서 오류는 자신이 마주하는 것과 반대되기에 바로잡힌 채로 선다. 그 모순이 더는 성립할 수 없기에 오류는 되돌려진다.

모순의 불가능한 본성이 명확히 드러날 때, 그 모순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겠는가? 빛 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공격받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참되지 않기에 다만 사라질 뿐이다. 서로 다른 실재들은 무의미하니, 실재는 하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재는 시간이나 기분이나 우연에 따라 바뀔 수 없다. 실재를 실재이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변함없음이다. 실재는 되돌려질 수 없다. 되돌림은 실재하지 않는 것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실재만으로 그대에게는 충분할 것이다. 다만 자신인 것으로 있음으로써, 진리는 자신이 아닌 모든 것에서 그대를 풀어 준다. 속죄는 너무나 부드러워서 그대는 속죄에게 속삭이기만 하면 되며, 그러면 속죄의 모든 힘이 그대를 돕고 지지하러 달려올 것이다. 하나님이 그대 곁에 있으면 그대는 연약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그대는 아무것도 아니다. 속죄는 그대에게 하나님을 준다. 그대가 거절한 그 선물은 하나님이 그대 안에 간직하고 있다. 성령이 그 선물을 그대를 위해 거기에 간직하고 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제단 위에 다른 신들을 두었을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제단을 떠나지 않았다. 성전은 여전히 거룩하니, 그 안에 머무는 임재(Presence)가 곧 거룩함이기 때문이다. 성전 안에서, 거룩함은 거룩함을 사랑하는 이들의 귀환을 조용히 기다린다. 그 임재는 그들이 순결과 은총으로 돌아올 것을 안다.

하나님의 은혜로움이 돌아오는 이들을 부드럽게 맞아들여, 그들의 고통과 상실의 모든 감각을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불멸의 확신으로 덮어 줄 것이다. 거기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생명의 기쁨으로 대체될 것이다. 하나님이 곧 생명이며, 그들은 생명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거룩함의 임재는 살아 있는 모든 것 안에 살아 있으니, 거룩함이 생명을 창조했고, 자신이 창조한 것을 자신만큼 거룩하지 않은 채로 남겨 두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그대는 티 없는 거울이 될 수 있으며, 그 거울 속에서 그대의 창조주의 거룩함이 그대를 통해 그대 주위의 모든 이에게 빛을 낸다. 그대는 여기서 천국을 비출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신들의 이미지에 대한 그 어떤 반영도, 하나님의 반영을 담고자 하는 그 거울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

땅은 천국이나 지옥을, 하나님이나 에고를 비출 수 있다. 그대는 다만 그 거울을, 그대가 그 위에 그려 놓은 감추어진 어둠의 모든 이미지에서 깨끗하고 맑게 두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은 스스로 그 위에 빛을 비출 것이다. 그 위에서는 오직 하나님 자신의 맑은 반영만이 지각될 수 있다.

반영은 빛 속에서 보인다. 어둠 속에서 반영은 흐릿하며, 그 의미는 그 자체 안이 아니라 오직 변화하는 해석들 안에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반영은 해석이 필요 없다. 그것은 명료하다. 그 거울을 깨끗하게만 하면, 그 거울이 모든 이가 보도록 내미는 것에서 빛나는 메시지를,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리 없다.

그 메시지는 성령이 자신 안에 있는 그 거울에 붙들고 있는 메시지다. 성령은 자신에게 그 메시지가 필요함을 배웠기에 그 메시지를 알아보지만, 어디를 보아야 찾을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그가 그 메시지를 그대 안에서 보고 그대와 함께 나누게 하라. 그대 안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반영은 온 세상에 치유의 힘을 가져올 수 있다. 그 힘을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대가 깨달을 수 있다면, 그대는 세상을 치유하는 그 거룩함의 형상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대 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하는 일을 한시도 미루지 못할 것이다.

그대의 마음 안에서 빛나는 거룩함의 형상은 흐릿하지 않으며,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 형상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그 의미는 흐릿하지 않으니, 모든 사람이 그 형상을 똑같은 것으로 지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다른 문제를 그 치유하는 빛으로 가져오며, 그들의 모든 문제는 거기서 오직 치유만을 찾는다. 어떤 형태의 오류에 대해서도 거룩함의 응답은 언제나 같다.

거룩함이 불러일으키는 것에는 그 어떤 모순도 없다. 거룩함의 유일한 응답은 치유이며, 거기에 무엇이 가져와지든 상관하지 않는다. 자신 안의 거룩함의 반영으로 인해 오직 치유만을 주는 법을 배운 이들은 마침내 천국을 맞을 준비가 된 것이다. 거기서는 거룩함이 반영이 아니라, 여기서는 그저 그들에게 반영되었을 뿐인 것의 실제 상태다.

하나님은 이미지가 아니며, 하나님의 창조물들은 하나님의 일부로서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자신 안에 지니고 있다. 그 창조물들은 그저 진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그의 창조물들 사이에, 또는 그의 자녀들과 그들 자신의 창조물들 사이에 아무 지각도 가로놓여 있지 않을 때, 창조에 대한 앎은 영원히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대가 시간 속에서 그대 마음의 거울에 받아들이는 반영들은 다만 영원을 더 가깝게 하거나 더 멀게 할 뿐이다. 그러나 영원 자체는 모든 시간을 넘어서 있다.

그대 안의 그 반영의 도움을 받아, 시간 밖으로 손을 뻗어 영원을 만지라. 그리고 거룩함의 반영이 모든 이를 불러 모든 죄책감을 내려놓게 하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그대는 시간에서 거룩함으로 돌아설 것이다. 천국의 평화를 여기서 비추어, 이 세상을 천국으로 데려가라.

이는 진리의 반영이 모든 이를 진리로 이끌며, 그들이 진리 안으로 들어가면 모든 반영을 뒤로하고 떠나기 때문이다. 천국에서는 실재가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진다. 여기서 실재의 반영을 나눔으로써, 실재의 진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받아들이는 유일한 지각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그에게 밝아 오고, 그는 자기 자신의 실재 외에는 그 무엇에도 더 이상 만족할 수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