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속죄의 원

1) 용서를 배우라

용서받기를 구하지 말라, 그 일은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언제나 있어 온 것을 그대의 용서하지 않는 마음에 되돌리는 법을 배우기를 구하라. 속죄를 쓰는 자들에게 속죄는 실재하고 눈에 보이는 것이 된다.

이 땅에서 용서하는 일이 그대의 유일한 역할이며, 그대는 이것이 그대가 배우고자 하는 전부임을 배워야 한다. 그대는 이 역할을 배울 때까지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이는 그대의 죄책감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결국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그대의 온 마음으로 그대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데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대가 여기서 그대의 역할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이 죄책감을 피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그 앎이 그대에게 의미 있어지기 전에 이루어져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창조를 이해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그 어떤 장벽도 부수지 않으며, 만들지도 않았다. 그대가 그것들을 놓아 버리면 그것들은 사라진다.

하나님은 그 무엇에서도 실패하지 않으며, 실패한 적도 없다. 하나님이 옳고 그대 자신에 대한 그대의 생각이 틀렸다고 결정하라. 하나님은 그대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창조했으나 여전히 자신 안에 두었다. 하나님은 그대가 무엇인지 안다.

하나님에게는 둘째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함이 없는 자는 아무도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도 아무도 있을 수 없다. 어둠과 기만으로 만들어진 사랑 없는 곳에서 사랑하는 그대의 역할에 실패하지 말라, 그렇게 함으로써 어둠과 기만이 되돌려지기 때문이다. 그대 자신에게 실패하지 말고, 대신 하나님과 그대 자신에게 하나님의 흠 없는 아들을 바치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 작은 감사의 선물을 위해, 하나님은 몸소 그대의 선물을 자신의 것과 맞바꿀 것이다.

그대 자신을 위해 어떤 결정이든 내리기 전에, 그대가 천국에서의 그대의 역할에 반하는 결정을 내렸음을 기억하고, 그런 다음 그대가 여기서 결정을 내리고 싶은지 신중히 생각해 보라. 여기서 그대의 역할은 오직, 그대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대가 원하는 것을 결정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그대가 해야 할 일을 어떻게 결정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결정을 하나님을 대변하는 그 존재(One)에게, 그리고 그가 아는 그대의 역할에 맡기라.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지 않고 그에게 사랑 대신 죄책감을 가르치려 함으로써 그대 스스로에게 지운 그 끔찍한 짐을 없애는 법을 그 존재가 그대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이 필사적이고 미친 시도를 포기하라. 이 시도는 그대의 하나님이자 아버지와 함께 사는 기쁨을, 그리고 그대 안에서 진리로 하나 되어 그대를 하나님과 하나로 만드는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함으로 기쁘게 깨어나는 그 기쁨을 그대에게서 앗아간다. 하나님과 함께 결정하는 법을 배우고 나면, 모든 결정은 숨쉬는 것만큼이나 쉽고 옳은 것이 된다.

아무 애씀도 없으며, 그대는 마치 여름날 고요한 길을 따라 옮겨지듯 부드럽게 인도될 것이다. 오직 그대 자신의 의지만이 결정을 어렵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성령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그대의 모든 물음에 답하는 것을 미루지 않을 것이다. 성령은 안다. 그리고 성령은 그대에게 말해 줄 것이고, 그런 다음 성령이 그대를 위해 그 일을 행할 것이다.

지친 그대는 이 인도가 잠보다 더 쉼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잠 속으로는 죄책감을 가져갈 수 있어도, 성령의 인도 안으로는 가져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결백하지 않으면 그대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니, 하나님의 뜻은 그대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결백해야 한다. 그러나 그대가 하나님을 알기 위한 필요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대는 하나님이 그대 주위 어디에나 있는데도 하나님을 부정하고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없이는 알려질 수 없으니, 그 아들의 결백함이 하나님을 아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지었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버지를 너무나 완전하게 부정하는 일이어서, 하나님 자신이 앎을 두었던 바로 그 마음에서 앎이 인식되지 못한 채 쓸려 가 버린다. 그대가 그저 귀 기울여, 이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배운다면! 그대가 이해하는 속성들을 하나님에게 부여하지 말라. 그대는 하나님을 만들지 않았으며, 그대가 이해하는 그 무엇도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대의 과제는 실재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실재는 그대가 만들지 않아도 여기 있지만, 그대 없이는 있지 않다. 스스로를 내던지려 하고 하나님을 너무나 하찮게 여겨 온 그대여, 내가 하나님을 대변하고 그대 자신을 대변하여 말하는 것을 들으라. 그대는 그대의 아버지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해할 수 없으니,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도록 도와줄 세상 경험 속의 그 무엇도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에 견줄 만한 것은 이 땅에 아무것도 없으며, 하나님을 벗어나 그대가 느껴 온 그 무엇도 아버지의 사랑을 아주 희미하게조차 닮지 않았다. 그대는 완전한 부드러움으로 축복 하나조차 줄 수 없다. 그대는 영원히 주기만 하며 오직 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그 존재(One)에 대해 알고자 하는가? 천국의 자녀들은 자신이 죄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의 아버지의 축복의 빛 안에서 산다.

속죄는 결백함을 부정하고 그로써 천국을 자신에게서 부정해 온 마음들에 결백함을 되돌리는 수단으로 세워졌다. 속죄는 그대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참된 상태를 가르친다. 속죄는 그대가 무엇인지, 그대의 아버지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지 않는다. 그대를 위해 이것을 기억하는 성령은 그저 그대와 그대가 아는 것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없애는 법을 그대에게 가르칠 뿐이다.

성령의 기억이 곧 그대의 기억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이 만든 것을 기억한다면, 그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실재에 대한 기억은 성령 안에 있고, 그러므로 그대 안에도 있다.

결백한 자와 죄지은 자는 서로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각자는 상대방을 자신과 같다고 지각하여, 둘 다 소통할 수 없게 만든다. 각자가 상대방을 자신이 자기 자신을 보는 방식과 다르게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그대 마음 안의 성령에게만 소통할 수 있으니, 오직 성령만이 그대가 무엇인지에 대한 앎을 하나님과 나누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직 성령만이 그대를 대신해 하나님에게 답할 수 있으니,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대의 마음 안에 둔 그 밖의 모든 것은 존재할 수 없으니, 하나님의 마음(Mind)과 소통하지 않는 것은 결코 있어 온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곧 생명이다. 하나님과의 소통 없이는 그 무엇도 전혀 있지 않다.

그대의 마음 중 실재를 지닌 유일한 부분은 그대를 여전히 하나님과 이어 주는 그 부분이다. 그대는 그 마음 전체가 하나님을 부정해 온 모든 외로운 이들과 나눌 하나님 사랑의 빛나는 메시지로 변화되기를 바라는가? 하나님은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대는 알려지고자 하는 하나님의 갈망을 부정하려 하는가? 하나님이 그대를 갈망하듯 그대도 하나님을 갈망한다. 이것은 영원히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이 변함없는 갈망을 받아들이라.

죽음의 세상을 뒤로하고 고요히 천국으로 돌아가라. 죽음의 세상에는 가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천국에는 모든 것이 가치 있다. 성령에게 귀 기울이고, 성령을 통해 하나님에게 귀 기울이라. 성령은 그대에 대해 그대에게 말한다. 그대 안에는 아무 죄책감도 없으니, 아들이 하나님 안에서 축복받는 것처럼 하나님도 자신의 아들 안에서 축복받기 때문이다.

2) 결백함의 스승

모든 사람은 속죄 안에서 맡을 특별한 역할을 지니고 있지만, 각자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는 언제나 같다. 하나님의 아들은 결백하다는 것이다. 각자는 그 메시지를 서로 다르게 가르치고 서로 다르게 배운다. 그러나 그 메시지를 가르치고 배우기 전까지, 각자는 자신의 참된 역할이 자기 안에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희미한 자각의 고통을 겪을 것이다.

죄책감의 짐은 무겁지만, 하나님은 그대가 죄책감의 짐에 묶여 있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대의 깨어남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그대의 계획이 오류에 빠지기 쉬운 만큼이나 완전하다. 그대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아는 이가 그대와 함께 있다. 아는 이의 부드러움은 그대의 것이며, 그대가 하나님과 나누는 모든 사랑을 그는 그대를 위해 맡아 간직하고 있다.

아는 이는 그대에게 오직 행복해지는 법 말고는 아무것도 가르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온전히 축복하는 아버지의 축복받은 아들이여, 기쁨은 그대를 위해 창조되었다. 하나님이 축복한 자를 누가 정죄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마음(Mind) 안에는 아들의 빛나는 결백함을 나누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창조는 완전한 순수함의 자연스러운 확장이다. 여기서 그대의 유일한 소명은 능동적인 의지를 가지고 온갖 형태의 죄책감을 부정하는 데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비난하는 것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속죄의 행복한 학습자들은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의 권리인 결백함의 스승이 된다.

결백함의 스승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부정하지 말라, 그대가 그것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그들에게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왕국의 유산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창조 안에서 부여받은 권리다. 왕국의 유산을 아들에게서 훔치려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죄책감을 구하는 것이며 그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아들의 순수함을 훔쳐서 그의 시야에서 감추려는 모든 생각으로부터 그 순수함을 지키라.

속죄의 부름에 응답하여 결백함을 빛 가운데로 가져오라. 순수함이 감추어진 채로 있게 두지 말고,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자신의 눈에서 스스로를 감추어 온 그 무거운 죄책감의 베일을 걷어 내라. 우리는 모두 여기서 속죄 안에 하나로 결합되어 있으며, 이 세상에서 그 밖의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로 만들 수 없다. 그렇게 하여 분리의 세상은 사라져 가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완전한 소통이 회복될 것이다.

기적은 결백함을 인정한다. 이 결백함은 치유의 필요를 낳기 위해 부정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이 기쁜 인정을 거두지 말라, 온갖 종류의 고통으로부터의 행복과 해방의 희망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고통에서 자유롭기를 바라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 자는 아직 죄책감을 결백함과 맞바꾸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수도 있고, 오직 이 맞바꿈 안에서만 고통으로부터의 자유가 자신의 것이 될 수 있음을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배우지 못한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격이 아니라 가르침이다. 가르침이 필요한 자들을 공격하는 것은 그들에게서 배우지 못하는 것이다. 결백함의 스승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하나가 되어, 속죄라는 통일된 교육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을 맡아 왔다. 이 교육과정을 벗어난 배움 목표의 통일성은 없다.

이 교육과정에는 아무 갈등도 없으니, 그 교육과정이 어떻게 가르쳐지든 목표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교육과정을 위해 기울이는 모든 노력은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과 그의 창조물의 영원한 영광을 위해 바쳐진다. 그리고 그 목표를 가리키는 모든 가르침은 곧장 천국과 하나님의 평화를 가리킨다.

이 속죄의 가르침이 극복하지 못할 고통도, 시련도, 두려움도 없다. 하나님 자신의 힘이 이 가르침을 뒷받침하며 그 가르침의 무한한 결과를 보장한다. 실패할 수 없고 반드시 평화로 이어질 하나님 자신의 힘에 그대 자신의 노력을 더하라. 이런 가르침에 영향받지 않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오직 이 가르침만을 가르친다면 그대는 자신이 하나님의 힘 너머에 있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오직 하나님의 창조물의 권리를 회복하고자 할 뿐인 이 지극히 거룩한 수업의 영향에서 예외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죄책감에서 풀어 주는 모든 사람에게서 그대는 반드시 그대 자신의 결백함을 배우게 될 것이다. 속죄의 원(circle)에는 끝이 없다.

그리고 그대는 갈수록 커지는 확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곧 그대가 속죄의 원의 안전과 완전한 평화 속으로 데려오는 모든 사람과 함께, 그대도 그 원 안에 안전하게 포함되어 있다는 확신이다. 그렇다면 평화가 있으라, 평화의 스승이 되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는 완전한 순수함에 대한 인정이며, 거기서 제외되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 거룩한 원 안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로 창조한 모든 사람이 있다.

기쁨은 그 원을 하나로 묶는 속성이며, 홀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도록 바깥에 남겨지는 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힘은 사랑과 합일의 그 안전한 품으로 모든 사람을 끌어당긴다. 이 원 안에 고요히 서서, 그 원의 평화와 거룩함의 안전 속에서 그대와 함께하도록 모든 고통받는 마음을 끌어당기라. 죄책감이 아니라 속죄의 스승으로서 나와 함께 이 안에 머무르라.

나와 함께 가르치는 그대에게 복이 있다. 우리의 힘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우리의 아버지에게서 나온다. 아들이 하나님 안에서 결백하게 알려지듯, 결백함 안에서 우리도 하나님을 안다. 나는 이 원 안에 서서 그대를 평화로 부른다.

나와 함께 평화를 가르치고, 나와 함께 거룩한 땅 위에 서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준 아버지의 힘을 모든 사람을 위해 기억하라. 그대가 아버지의 완전한 평화를 가르칠 수 없다고 믿지 말라. 바깥에 서지 말고, 나와 함께 안으로 들어오라.

3) 부활의 결백함

나의 가르침이 그대를 부르는 그 유일한 목적에 실패하지 말라. 하나님의 아들에게 그의 결백함을 가르침으로써, 하나님이 창조한 그대로 그를 하나님에게 되돌리라. 십자가형은 속죄 안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 오직 부활만이 속죄 안에서 나의 역할이 되었다.

부활이 바로 결백함으로 죄책감에서 해방되는 상징이다. 그대가 죄지었다고 지각하는 자를 그대는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결백하다고 보는 자에게는 그대가 결백함을 회복시켜 준다. 십자가형은 언제나 에고의 목표다. 에고는 모든 사람을 죄지은 자로 보며, 그 정죄로써 죽이려 한다.

성령은 오직 결백함만을 보며, 그 부드러움 속에서 두려움으로부터 풀어 주고 사랑의 통치를 다시 세우려 한다. 사랑의 힘은 성령의 부드러움 안에 있으며, 그 부드러움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기에 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없고 십자가형을 당할 수도 없다. 그대가 회복시킨 성전은 그대의 제단이 되니, 그 성전이 그대를 통해 다시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가 하나님에게 주는 모든 것은 그대의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창조하며, 그렇게 그대는 회복해야 한다. 그대가 보는 사람 하나하나를 그대는 속죄의 거룩한 원 안에 두거나 바깥에 남겨 두며, 그 사람을 십자가형에 합당한지 해방에 합당한지 판단한다. 그대가 그 사람을 순수함의 원 안으로 데려온다면, 그대는 그와 함께 거기서 쉬게 될 것이다. 그대가 그 사람을 바깥에 남겨 둔다면, 그대는 거기서 그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다.

그대의 것이 아닌 고요함 안에서만 판단하라. 그 누구도 속죄의 축복 밖에 있다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그 사람을 축복함으로써 그 안으로 데려오라. 거룩함은 나누어져야 하니, 바로 나눔 안에 거룩함을 거룩하게 만드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기쁘게 그 거룩한 원으로 오라, 그리고 자신이 바깥에 있다고 여기는 모든 사람을 평화 속에서 바라보라.

그 누구도 내쫓지 말라, 여기에 그 사람이 그대와 함께 찾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오라, 이 거룩한 평화의 자리에서 그 사람과 하나가 되자. 이 자리는 우리 모두를 위한 곳이며, 평화의 원인(Cause) 안에서 하나로 결합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