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정죄 아닌 진리와의 화해

1) 에고의 처벌 법칙

죄책감은 아버지를 가리는 유일한 것으로 남아 있으니, 죄책감은 아버지의 아들을 향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죄지은 자는 언제나 정죄하며, 정죄하고 나서도 계속 정죄한다. 이렇게 죄지은 자는 에고의 법칙대로 미래를 과거에 묶어 놓는다. 이 법칙에 대한 충실함은 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니, 그 법칙은 어둠에 대한 충실함을 요구하고 깨어남을 금하기 때문이다.

에고의 법칙은 엄격하며, 위반하면 가혹하게 처벌받는다. 그러므로 에고의 법칙에 복종하지 말라, 에고의 법칙은 처벌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에고의 법칙을 따르는 자는 자신이 죄지었다고 믿으며, 그래서 반드시 정죄하게 된다. 그대가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려면, 미래와 과거 사이에 하나님의 법칙이 개입해야 한다.

속죄는 그 둘 사이에 서서, 그대가 스스로를 묶어 놓은 어둠의 사슬이 사라질 만큼 밝게 빛나는 등불과 같다.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은 에고 전체를 무너뜨린다.

누구도 두려움에 떨게 하지 말라. 그 사람의 죄책감은 그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의 가혹한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그대는 그 정죄를 스스로에게 가져오고, 복종하는 자에게 에고가 내리는 처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에고는 자신에 대한 충실함을 고통으로 보상하니, 에고에 대한 믿음이 곧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은 오직 그것이 놓인 신념의 조건대로만 보상받을 수 있다.

믿음은 신념의 힘을 만들어내며, 믿음이 어디에 투입되는가가 그 보상을 결정한다. 믿음은 언제나 소중히 여기는 것에 주어지며,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대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대가 세상에 준 것만을 그대에게 줄 수 있다. 세상은 그대 자신의 투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대가 그 안에서 찾아내어 믿음을 둔 것 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어둠에 충실하라, 그러면 그대는 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의 믿음은 그대가 준 대로 보상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의 보물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며, 과거에 믿음을 둔다면 미래도 그와 같아질 것이다. 그대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무엇이든 그대의 것이라고 그대는 생각한다. 그대가 가치를 부여하는 힘이 그것을 그렇게 만든다. 속죄는 그대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에 대한 재평가를 가져오니, 속죄는 성령이 거짓과 진실을 분리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거짓과 진실을 구별 없이 그대의 마음에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그대는 둘 중 하나만 가치 있게 여길 수 없으며, 죄책감은 그대에게 결백함만큼이나 참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이 결백하다고 믿지 못하는 것은 그대가 과거를 보고 그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형제를 정죄할 때 그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죄지었던 나는 계속 그렇게 남아 있기를 선택한다."

그대는 그 사람의 자유를 부정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 자신의 자유에 대한 증언도 부정한 것이다. 그대는 얼마든지 그 사람을 과거에서 자유롭게 하고, 그를 과거에 묶어 두는 죄책감의 구름을 그의 마음에서 걷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자유 안에 그대 자신의 자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 사람에게 그의 죄책감을 씌우지 말라, 그의 죄책감은 자신이 그대에게 이런 짓을 했다는 은밀한 생각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그 사람에게 그의 망상이 옳다고 가르치겠는가? 결백한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자신을 공격하여 스스로를 죄지은 존재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미친 것이다. 어떤 형태로도, 누구 안에서도, 이것을 믿지 말라. 죄와 정죄는 같은 것이니, 하나를 믿는 것은 곧 다른 하나에 대한 믿음이며, 이는 사랑 대신 처벌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광기를 정당화할 수 없으며, 그대 자신에게 처벌을 요구하는 것은 분명 미친 짓이다.

그렇다면 누구도 죄지은 자로 보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자기 자신에게 결백함의 진리를 확언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에게 내리는 모든 정죄 속에는 그대 자신의 죄책감에 대한 확신이 들어 있다. 성령이 그대를 그것에서 자유롭게 해 주기를 원한다면, 그대의 모든 형제를 위한 속죄의 제안을 받아들이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속죄가 그대에게도 참되다는 것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부분적으로 정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라. 그대가 죄지은 자로 보는 이들은 그대 안의 죄책감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며, 그대는 그 죄책감을 그대 안에서 보게 될 것이다. 그 죄책감이 되돌려지기 전까지는 그대 안에 있기 때문이다. 죄책감은 언제나 그대의 마음 안에 있으며, 그 마음은 스스로를 정죄해 왔다.

죄책감을 투사하지 말라, 투사하는 동안에는 죄책감이 되돌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죄책감에서 풀어 주는 사람 하나하나에 대해 천국에서는 큰 기쁨이 일어나며, 그곳에서 그대의 아버지 됨을 증언하는 이들이 기뻐한다. 죄책감은 그대를 눈멀게 하니, 그대 안에서 한 점의 죄책감이라도 보는 동안에는 빛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책감을 투사함으로써 세상은 어두워 보이고, 그대의 죄책감에 뒤덮인 것처럼 보인다.

그대는 세상 위에 어두운 베일을 던지고, 안을 들여다볼 수 없기에 세상을 보지 못한다. 그대는 그 안에서 보게 될 것을 두려워하지만, 죄책감은 거기에 없다. 그대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대가 안을 들여다본다면, 그대의 아버지에게 바친 제단 위에서 고요하고 평화롭게 빛나는 속죄만을 보게 될 것이다.

2) 안을 보는 결백

안을 들여다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에고는 그대 안이 죄책감으로 온통 검다고 말하며, 들여다보지 말라고 명한다. 대신 에고는 그대에게 형제들을 바라보며 그들 안의 죄책감을 보라고 명한다. 그러나 형제들 안의 죄책감을 보는 한, 그대는 눈먼 채로 남는다. 형제를 어둠 속에서 보고, 그들을 뒤덮은 그 어둠 속에서 죄지은 자로 보는 이들은 안의 빛을 바라보기를 너무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대 안에 있는 것은 그대가 마음에 있다고 믿는 것, 그대가 믿음을 둔 그것이 아니다. 그대 안에는 그대의 아버지가 그대에게 갖는 완전한 믿음의 거룩한 표식이 있다. 아버지는 그대가 그대 자신을 평가하는 방식으로 그대를 평가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알고, 그대 안의 진리를 안다.

아버지는 차이가 없음을 안다. 아버지는 차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완전한 결백함이 있음을 아는 그 자리에서, 그대는 죄책감을 볼 수 있겠는가? 그대는 하나님의 앎을 부정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앎을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대 안에 둔 빛을 바라보고, 그대가 거기 있다고 두려워하던 것이 사랑으로 대체되었음을 배우라.

그대는 마음이 고통의 근원을 실제로 있지 않은 곳에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다. 그런 전가(轉嫁)가 하는 미덥지 못한 역할은 죄책감의 진짜 근원을 감추고, 죄책감이 미친 것이라는 온전한 지각을 그대의 의식에서 떼어놓는 것이다. 전가는 언제나, 주의가 다른 곳으로 돌려진 그 죄책감의 근원이 참되어야 하고 두려운 것이어야 한다는 착각에 의해 유지된다 —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덜 두렵다고 믿는 것 위로 죄책감을 전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온갖 종류의 "근원"을 기꺼이 바라보려 하지만, 그것들이 실재하는 관계를 전혀 갖지 않는 더 깊은 근원이 아닌 한에서만 그렇다. 미친 생각은 실재하는 관계를 갖지 않으니, 그것이 바로 그 생각이 미친 이유다. 실재하는 관계는 죄책감 위에 놓일 수 없고, 그 순수함을 흠집 낼 한 점의 죄책감조차 담을 수 없다. 죄책감이 닿은 모든 관계는 그 사람과 그 죄책감을 피하기 위해서만 쓰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런 이상한 목적을 위해 얼마나 이상한 관계들을 만들어 왔는가! 그리고 그대는 실재하는 관계가 거룩하며 그대가 결코 이용할 수 없는 것임을 잊어버렸다. 실재하는 관계는 오직 성령만이 쓸 수 있으며, 바로 그 점이 그 관계를 순수하게 만든다.

그대가 성령에게 주어야 할 것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가로챈다면, 성령은 그것을 그대의 해방을 위해 쓸 수 없다. 자신의 개별적 구원을 위해 누구와든 어떤 식으로든 결합하려는 사람은 그 이상한 관계 안에서 구원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 이상한 관계는 나누어진 것이 아니므로 실재하지 않는다. 형제에게 그대의 죄책감을 씌우거나, 그 죄책감을 형제와 나누거나, 형제 자신의 죄책감을 지각하려 하는 그 어떤 결합 안에서도 그대는 죄책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사람과 함께 만족과 평화를 찾지도 못할 것이니, 그 사람과의 결합이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 관계 안에서 죄책감을 보게 될 것이다, 그대가 죄책감을 거기에 두었기 때문이다.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자들이 그것을 전가하려 드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니, 그들이 실제로 그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괴로워하면서도 안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놓아 버리려 하지 않는다.

괴로워하는 자들은 자신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없고,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죄책감의 근원을 자기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바깥에서 지각하는 것이다. 그대가 자신이 죄지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죄책감의 근원이 과거에 있다고 한다면, 그대는 안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은 것이다.

과거는 그대 안에 있지 않다. 과거에 대한 그대의 기이한 연결는 현재에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런데도 그대는 과거에 대한 연결를 그대와 형제들 사이에 세워 두며, 그들과는 실재하는 관계를 전혀 찾지 못한다. 그대는 형제들을 과거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쓰면서도, 여전히 그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구원은 형제를 이용해 실재하지 않는 문제를 풀려는 자들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대는 과거에 구원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대의 헛된 소망을 현재에 강요하면서 이제 구원을 찾기를 바라겠는가?

그렇다면 예전의 그대와는 다르게 있기로 결심하라. 어떤 관계도 그대를 과거에 묶어 두는 데 쓰지 말고, 날마다 각 사람과 새로 태어나라. 단 일 분, 아니 그보다 짧은 시간으로도 그대를 과거에서 자유롭게 하고 그대의 마음을 평화 속에서 속죄에 온전히 내맡기기에 충분하다.

그대의 아버지가 그대를 반기기를 바라는 만큼 그대가 모든 사람을 반길 때, 그대는 자기 안에서 어떤 죄책감도 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대가 죄책감을 꿈꾸는 동안 내내 그대 안에서 빛나고 있었으나 그대가 안을 들여다보고 보려 하지 않았던 속죄를 마침내 받아들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어떤 식으로든, 누구 안에서든,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했든 죄책감이 정당하다고 믿는 한, 그대는 언제나 속죄를 발견할 수 있는 그 안을 들여다보지 않을 것이다. 죄책감에 이유가 있다고 믿는 한 죄책감의 끝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죄책감은 언제나 완전히 미친 것이며 아무 이유도 없다는 것을 그대는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실재를 몰아내려 하지 않는다. 죄책감이 실재한다면 속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속죄의 목적은 환영을 몰아내는 것이지, 환영을 실재하는 것으로 세워 놓았다가 나중에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그대를 위협하려고 그대의 마음에 환영을 남겨 두지 않으며, 그대가 무엇에서 구원받았는지를 보여 주려고 그 환영을 두려운 모습으로 그대에게 보여 주지도 않는다.

성령이 그대를 구해 낸 그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죄책감에 실재성을 부여하지 말고, 그것에 이유가 있다고 여기지 말라. 성령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기를 바라는 것을 행하며, 언제나 그렇게 해 왔다. 성령은 분리를 보아 왔지만, 합일을 안다.

성령은 치유를 가르치지만, 창조도 안다. 성령은 그대가 자신이 보고 가르치는 대로 보고 가르치기를, 그리고 자신을 통해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성령이 아는 것을 그대는 알지 못하니, 성령의 앎이 그대의 것인데도 그러하다. 이제 그대에게 치유하고 가르치는 것이, 지금이 될 것을 만드는 것이 주어졌다.

아직은 그것이 지금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이 죄책감 속에서 길을 잃었으며, 고통이 사방에서 바깥으로부터 자신을 짓누르는 어두운 세상에 홀로 있다고 믿는다. 그 아들이 안을 들여다보고 그 안의 광휘를 보게 될 때,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자신을 정죄받은 자로 여긴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을 것이다.

죄책감이 미친 것이며, 전적으로 부당하고 전적으로 이유 없는 것임을 그대가 깨닫는 순간, 그대는 속죄를 바라보고 속죄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무자비했던 그대는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형제들을 무자비하게 바라보면서, 그대는 자신이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은 영원히 참되다. 그대 안의 빛나는 평화 속에는 그대가 창조될 때 지녔던 완전한 순수함이 있다. 그대 안의 사랑스러운 진리를 바라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의 인식(vision)을 흐리게 하는 죄책감의 구름을 꿰뚫어 보고, 어둠을 지나 그대가 빛을 보게 될 거룩한 곳을 바라보라.

그대의 아버지에게 바친 제단은 그 제단을 자신에게 세운 하나님만큼이나 순수하다. 그리스도가 그대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을 그 무엇도 그대에게서 감출 수 없다. 그리스도의 뜻은 아버지의 뜻과 같으며, 그리스도는 그대도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대로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자비를 베푼다. 그대가 풀려나고 싶은 대로 죄책감에서 풀려나라.

안을 들여다보고 사랑의 빛을 보는 데는 다른 길이 없으니, 그 빛은 하나님 자신이 언제나 자신의 아들을 사랑해 온 것만큼이나 한결같고 확실하게 빛난다. 그리고 그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으니, 사랑은 결백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대의 아버지를 사랑해 온 그대는 어떤 이유로도 안을 들여다보고 그대의 거룩함을 보기를 두려워할 수 없다.

그대는 스스로 믿어 온 그런 존재일 수 없다. 그대의 죄책감에는 이유가 없으니,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Mind) — 그대가 있는 그 마음 —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성(理性)이며, 성령은 그대에게 이 이성을 되돌려 주고자 한다. 성령은 오직 환영만을 제거하고자 한다.

성령은 환영 외의 나머지는 모두 그대가 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식(vision) 안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 안에 영원히 있는 완전한 순수함을 그대에게 보여 주고자 한다.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들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지 않는 한 그들 중 누구와도 실재하는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사랑은 특별하지 않다.

그대가 아들됨(Sonship)의 일부만을 골라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대의 모든 관계 위에 죄책감을 지우고 그것들을 실재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그대는 오직 하나님이 사랑하는 방식으로만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과 다르게 사랑하려 하지 말라, 하나님의 사랑을 벗어난 사랑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참임을 알아차리기 전까지 그대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형제를 정죄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결백하고 하나님의 평화 안에 있는 존재로 볼 수 없다. 그 사람이 결백하고 평화 안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는 망상에 빠진 것이며 자기 자신을 바라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나는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보라, 그의 순수함을 바라보고 고요히 있으라. 고요한 가운데 그의 거룩함을 바라보고, 그에게 죄책감이 결코 닿은 적이 없음에 대해 그의 아버지에게 감사를 드리라.

그대가 그에게 품었던 그 어떤 환영도 그의 결백함을 조금도 건드리지 못했다. 죄책감에 전혀 물들지 않고 온전히 사랑으로 가득한 그의 빛나는 순수함이 그대 안에서 밝게 빛난다. 우리 함께 그를 바라보고 그를 사랑하자. 그를 사랑하는 가운데 그대의 결백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바라보라, 그러면 그대가 보는 것에 대한 기쁨과 감사가 죄책감을 영원히 몰아낼 것이다.

아버지, 당신이 영원히 죄 없이 창조한 지극히 거룩한 당신의 아들의 순수함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대와 마찬가지로, 나의 믿음과 확신도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오직 하나님이 나와 함께 사랑하는 것만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그대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가치를 넘어, 하나님이 그대에게 둔 그 가치에 이르기까지 그대를 소중히 여긴다.

나는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을 사랑하며, 나의 모든 믿음과 확신을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에 바친다. 그대에 대한 나의 믿음은 내가 아버지에게 바치는 사랑 전체만큼이나 굳건하다. 그대에 대한 나의 신뢰는 한계가 없으며, 그대가 나의 말을 듣지 않으리라는 두려움도 없다. 하나님에게 속한 왕국의 온전함을 기려, 나는 그대의 사랑스러움과 그대가 나로 하여금 왕국에 바치도록 허락할 그 많은 선물들에 대해 아버지에게 감사한다.

아버지를 자신의 아들과 하나 되게 하는 그대에게 찬양이 있기를. 홀로 있을 때 우리는 모두 하잘것없지만, 함께할 때 우리는 우리 중 누구도 홀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밝음으로 빛난다. 왕국의 영광스러운 광휘 앞에서 죄책감은 녹아 사라지고, 친절함으로 변화되어 다시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경험하는 모든 반응은 그대의 아버지에게 바치는 찬양의 노래에 걸맞을 만큼 정화될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것 안에서 오직 하나님에 대한 찬양만을 보라, 하나님은 결코 그대에 대한 찬양을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찬양 안에서 하나 되어 우리는 천국의 문 앞에 서며, 그곳에서 우리는 반드시 죄 없는 상태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대를 사랑한다. 그렇다면 내가 어찌 그대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채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겠는가?

3) 전쟁의 종말

망각과 잠, 그리고 죽음마저도 죄책감이 평화를 거칠게 침범한다고 지각되는 것에 대처하는 에고의 최선의 조언이 된다. 그러나 전쟁 속의 두 적대자가 모두 실재한다고 믿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자신이 잔혹한 전쟁에 갈가리 찢긴 채 갈등하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두 적대자가 모두 실재한다고 믿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도피해야 하니, 그런 전쟁은 분명 그의 마음의 평화를 끝장내고 그를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쟁이 실재하는 힘과 실재하지 않는 힘 사이의 것임을 깨닫기만 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의 자유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끝없는 전투들이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스스로 지각한다면, 그 누구도 자신이 갈가리 찢긴 채 파괴되어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이 전투에 휘말리기를 바라지 않으니, 그러므로 그 아들이 상상해 낸 "적"은 전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그저 그대가 이미 벗어난 쓰라린 전쟁에서 도망치려 하고 있을 뿐이다. 그 전쟁은 이미 사라졌다.

그대는 천국을 향해 솟아오르는 자유의 찬가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대의 해방에 대해 기쁨과 즐거움은 하나님의 것이니, 그대가 그 해방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자유를 만들어 내지 않았듯이, 그대는 자유를 위태롭게 할 전쟁도 만들어 내지 않았다. 파괴적인 것은 그 무엇도 존재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전쟁도, 죄책감도, 과거도 하나가 되어 그것들이 나온 그 비실재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 모두가 천국에서 하나로 결합할 때, 그대는 여기서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아무것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여기서 가치 있게 여기는 어떤 것도 온전히 가치 있게 여기지 않으며, 그러므로 사실은 그것을 전혀 가치 있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가치는 하나님이 그것을 둔 곳에 있으며,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것의 가치는 판단될 수 없으니, 그 가치는 이미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가치는 온전히 가치 있다. 그저 인정되거나 인정되지 않을 수 있을 뿐이다. 그 가치를 부분적으로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그 가치를 아는 것이 아니다.

천국에는 하나님이 가치 있게 여기는 모든 것이 있고,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천국은 완전히 모호하지 않다. 모든 것이 맑고 밝으며, 하나의 반응만을 불러일으킨다. 어둠도 없고 대조도 없다. 변화도 없다. 중단도 없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꿈도 그 평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희미한 상상조차 가져다준 적이 없을 만큼 깊은 평화의 느낌이 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이 평화를 줄 수 없으니,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온전히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완전한 지각은 그저 온전히 나눌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대에게 보여 줄 수 있을 뿐이다. 완전한 지각은 또한 나눔의 결과를 그대에게 보여 줄 수 있으며, 그러는 동안 그대는 여전히 나누지 않음의 결과도 기억하고 있다.

성령은 나눔과 나누지 않음의 대조를 조용히 가리키며, 그대가 마침내 성령이 그 차이를 그대 대신 판단하게 하고, 무엇이 참일 수밖에 없는지를 성령이 밝혀 보이도록 허락하리라는 것을 안다. 성령은 그대의 최종 판단에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자신이 그대를 대신해 그 판단을 내리게 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성령이 그대 대신 그 판단을 내리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것은 성령의 사명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성령의 사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의심과 죄책감으로 마음이 어두워진 그대여, 이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성령을 그대에게 주었고, 사랑하는 그 아들이 스스로에게 지운 모든 의심과 죄책감의 흔적을 남김없이 없애는 사명을 성령에게 주었다. 이 사명이 실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다.

성령의 음성(Voice)에 대한 그대의 반응이 무엇이든, 그대가 어떤 음성을 듣기로 선택하든, 그대에게 어떤 낯선 생각이 떠오르든,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진다. 그대는 성령이 그대를 세워 둔 그 평화를 찾게 될 것이니, 성령은 자신의 마음을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은 그대가 머무는 평화만큼이나, 그리고 성령이 그대에게 일깨워 주는 그 평화만큼이나 변함이 없다. 그대는 천국에서 변화와 이동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대조가 필요한 것은 오직 여기뿐이다. 대조와 차이는 필요한 가르침의 도구이니, 그 대조와 차이를 통해 그대는 무엇을 피하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배우기 때문이다.

이것을 배우고 나면, 그대는 어떤 차이에 대한 필요도 사라지게 만드는 답을 찾게 될 것이다. 진리는 스스로의 뜻에 따라 자신에게 속한 것에게로 온다.

그대가 자신이 진리에 속해 있음을 배우고 나면, 진리는 그 어떤 차이도 없이 가볍게 그대 위로 흘러갈 것이다. 그대는 이것이, 오직 이것만이 그대가 원하는 것임을 깨닫는 데 어떤 대조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그대의 아버지가 자신에게 맡긴 일을 해내지 못할까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의 뜻은 그 무엇에도 실패할 수 없다. 오직 이 한 가지만을 믿으라, 그 한 가지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 하나님은 그대가 천국에 있기를 뜻하며, 그 무엇도 그대를 천국에서, 또는 천국을 그대에게서 갈라놓을 수 없다.

그대의 가장 거친 잘못된 지각도, 가장 기이한 상상도, 가장 캄캄한 악몽도 전부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그대를 위해 뜻하는 평화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성령은 그대의 온전한 정신을 회복시킬 것이니, 광기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성령에게 충분하다면, 그대에게도 충분하다. 그대는 하나님이 없애고자 하는 것을 붙들고 있지 않을 것이니, 그런 것이 하나님과의 소통을 끊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그대와 소통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음성은 들릴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그대 안에 두어 그대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과 이어 준 그 소통의 끈은 끊어질 수 없다. 그대는 그 소통의 끈이 끊어지기를 바란다고 믿을 수도 있으며, 이 믿음은 하나님이 그대와 나누고자 하는 달콤하고 한결같은 소통이 알려지는 그 깊은 평화를 실제로 방해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뻗어 오는 통로는 결코 완전히 닫혀 하나님에게서 분리될 수 없다.

평화는 그대의 것이 될 것이니, 뜻이 곧 평화인 하나님으로부터 그 평화가 여전히 그대에게로 흘러오기 때문이다. 그대는 지금 그 평화를 가지고 있다. 성령은 그 평화를 어떻게 쓰는지 가르쳐 줄 것이며, 그 평화를 확장함으로써 그 평화가 그대 안에 있음을 배우게 해 줄 것이다. 하나님은 그대에게 천국을 뜻했고, 언제나 그 밖의 다른 것은 결코 뜻하지 않을 것이다.

성령은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안다. 천국이 그대의 것이 되지 않을 가능성은 없으니, 하나님은 확실하며 하나님이 뜻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만큼이나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구원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므로 구원을 배우게 될 것이다.

성령이 그대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에서 스스로를 예외로 둘 수는 없을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만큼이나 확실하다. 하나님의 확실함으로 충분하다.

하나님의 잠든 아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가장 캄캄한 악몽조차 그 사람에게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다는 것을 배우라. 그는 깨어남의 교훈을 배우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지켜보고 빛이 그를 둘러싼다. 하나님이 그의 안에 깨어나 기뻐하라는 기쁜 부름을 두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꿈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겠는가?

그 아들은 자기 안에 있는 것에서 스스로를 분리할 수 없다. 그의 잠은 깨어나라는 부름을 견뎌 내지 못할 것이다. 해방의 사명은 창조가 영원토록 변함없이 남아 있으리라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천국이 그대의 것이 되게 하려고 그 사실을 그대가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천국은 이미 그대의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그대 자신의 뜻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성령은 그대가 배운 것 가운데, 참되지 않은 것이 진리와 화해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모든 것을 그대를 위해 되돌릴 것이다.

참되지 않은 것을 진리와 화해시키는 그 일이 바로 에고가 온전한 정신과 평화로 향하는 그대의 화해 대신 갖다 놓으려는 화해다. 성령은 그대를 위해 아주 다른 종류의 화해를 마음에 품고 있으며, 에고가 시도하는 것을 결코 이루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그 화해를 이룰 것이다. 실패는 에고의 것이지 하나님의 것이 아니다. 그대는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방황할 수 없으며, 성령이 모든 이에게,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내놓는 그 계획이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은 없다.

그대는 풀려날 것이며, 그대를 위해, 그리고 그 보답으로 그대에 의해 창조되지 않은 것으로서 그대가 만들어 낸 그 어떤 것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한 번도 참되었던 적이 없는 것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으며, 언제나 있어 온 것을 어떻게 기억하지 못할 수 있겠는가? 천국의 평화는 바로 이 화해, 오직 진리와의 화해 안에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