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과거 아닌 지금의 해방
1) 그림자 형상들
그대는 자신의 지각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문 제기에서도 선택적이었다. 열린 마음은 이보다 더 정직하다. 에고는 시간에 대해 기이한 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그대의 의문 제기는 바로 이 관념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에고는 과거에 크게 투자하며, 결국 과거만이 시간의 유일하게 의미 있는 측면이라고 믿는다.
다음을 기억하라. 에고는 죄책감을 강조함으로써 미래를 과거처럼 만들고 현재를 피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자신의 존속을 보장할 수 있다.
미래에 과거의 대가를 치른다는 관념 때문에 과거가 미래를 결정하게 되고, 과거와 미래는 그 사이에 현재가 끼어들지 못한 채 연속된다. 에고는 현재를 오직 미래로 넘어가는 짧은 이행 과정으로만 여기며, 그 안에서 현재를 과거의 관점으로 해석함으로써 과거를 미래로 가져오기 때문이다. "지금"은 에고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현재는 그저 에고에게 지나간 상처를 상기시킬 뿐이며, 에고는 마치 현재가 과거인 것처럼 현재에 반응한다. 에고는 과거로부터의 해방을 견디지 못하며, 과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과거가 현재인 것처럼 반응함으로써 과거의 이미지를 보존하려 한다.
에고는 과거의 기준점으로부터 그대가 현재 만나는 이들에 대한 그대의 반응을 지시하여, 이들의 현재 실재를 가린다. 결국 그대가 에고의 지시를 따른다면, 그대는 마치 형제가 다른 누군가인 것처럼 형제에게 반응하게 될 것이며, 이는 분명 그대가 형제를 있는 그대로 알아보지 못하게 막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자신의 과거로부터 나온 메시지를 그에게서 받게 될 것이다.
과거를 현재에 실재하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그대는 자신이 과거를 놓아 버리는 것을 스스로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모든 형제가 지금 그대에게 주는 해방의 메시지를 스스로 부인한다. 과거로부터 온 그림자 같은 형상들이야말로 그대가 벗어나야 할 바로 그것이다. 그림자 같은 형상들은 실재하지 않으며, 그대가 그림자 같은 형상들을 함께 데려오지 않는 한 그대를 붙들어 둘 힘이 없다.
그림자 같은 형상들은 그대의 마음속 고통의 자리들을 지니고 다니면서, 더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에 대한 보복으로 현재에 공격하도록 그대를 몰아간다. 그리고 이 결정은 미래의 고통을 택하는 결정이다. 지나간 고통이 환영이라는 것을 배우지 않는 한, 그대는 환영들로 이루어진 미래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며, 현재 안에서 찾을 수 있는 해방의 수많은 기회를 잃고 있는 것이다.
에고는 그대의 악몽을 보존하려 하며, 그대가 깨어나 그 악몽들이 지나간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게 막으려 한다. 그대가 거룩한 만남을 단지 자신의 과거와의 만남으로만 지각한다면, 그대가 거룩한 만남을 거룩한 만남으로 알아볼 수 있겠는가? 그대는 아무도 만나고 있지 않은 것이며, 그 만남을 거룩하게 만드는 구원의 나눔은 그대의 시야에서 배제될 것이기 때문이다.
2) 성령과 에고의 시간
성령은 그대가 언제나 자기 자신을 만난다고 가르치며, 그대가 거룩하기에 그 만남도 거룩하다고 가르친다. 에고는 그대가 언제나 자신의 과거를 만난다고 가르치며, 그대의 꿈들이 거룩하지 않았기에 미래도 거룩할 수 없고 현재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가르친다. 성령의 시간 지각이 에고의 시간 지각과 정반대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도 똑같이 분명하다. 성령과 에고는 시간의 목적을 정반대로 지각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시간의 목적을, 시간에 대한 필요 자체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으로 해석한다. 성령은 시간의 역할이 일시적이라고 여기며, 그 역할은 성령 자신의 가르치는 역할에만 이바지하는데, 이 가르치는 역할 또한 정의상 일시적이다. 따라서 성령의 강조점은 무한으로 확장될 수 있는 시간의 유일한 측면, 곧 지금에 있다.
지금이야말로 이 세상이 제공하는 영원에 가장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지금"의 실재 안에, 영원을 헤아리기 시작하는 그 시작점이 있다. 오직 "지금"만이 여기에 있으며, 오직 "지금"만이 구원을 찾을 수 있는 거룩한 만남의 기회를 내놓기 때문이다.
반면에 에고는 시간의 역할을, 영원 대신 에고 자신을 확장하는 것으로 여긴다. 성령과 마찬가지로 에고도 시간의 목적을 에고의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에고의 지휘 아래 과거와 미래의 연속성은 에고가 시간 안에서 지각하는 유일한 목적이며, 에고는 자신의 연속성에 어떤 틈도 생기지 않도록 현재를 덮어 버린다.
그러므로 에고의 연속성은 그대를 시간 안에 붙들어 두려 하는 반면, 성령은 그대를 시간으로부터 해방시키려 한다. 그대를 위한 성령의 구원 목표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면, 그대가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은 바로 구원의 수단에 대한 성령의 해석이다.
3) 치유는 현재 안에서
그대 역시, 자신의 역할을 해석하는 대로 시간의 역할을 해석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시간의 세상에서 자신의 역할을 치유로 받아들인다면, 그대는 치유가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의 측면만을 강조하게 될 것이다. 치유는 과거 안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치유는 미래를 해방시키기 위해 현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 해석은 미래를 현재에 연결시키며,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확장한다.
그러나 그대가 자신의 역할을 파괴로 해석한다면, 그대는 현재를 놓치고 파괴적인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과거를 붙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그대가 해석하는 대로일 것이다. 시간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