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고통을 내려놓는 치유

1) 상처를 성령에게

성령의 눈으로부터 고통을 숨기지 말고, 오히려 기꺼이 고통을 성령에게 가져가라. 그대의 모든 상처를 성령의 영원한 제정신 앞에 내려놓고, 성령이 그대를 치유하게 하라. 고통의 어떤 자리도 성령의 빛으로부터 숨겨진 채로 남겨 두지 말고, 드러내기 두려운 생각이 있는지 자신의 마음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성령은 그대가 자신을 해치기 위해 간직해 온 그 하찮은 생각 하나하나를 치유하고 그 하찮음을 씻어 내어, 하나님의 위대함으로 되돌려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모든 과대함 아래에는 그대의 진짜 도움 요청이 있다. 아버지가 그대를 자신에게로 부르듯이, 그대도 아버지에게 사랑을 구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숨겨 놓은 그 자리에서, 그대는 오직 아버지와 하나 되기만을 뜻하며, 사랑으로 아버지를 기억한다. 그대는 형제들 안에서 이 진리의 자리를 봄으로써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형제들이 스스로를 속일지라도, 그대와 마찬가지로 형제들도 자신 안에 있는 위대함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대함을 지각함으로써 그대는 위대함을 반기게 될 것이며, 위대함은 그대의 것이 될 것이다.

위대함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리이며, 그 어떤 환영도 아들을 만족시키거나 아들의 참모습으로부터 아들을 구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아들의 사랑만이 실재하며, 아들은 오직 자신의 실재에만 만족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그의 환영들로부터 구하여, 그대가 평화와 기쁨 속에서 아버지의 위대함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라.

그러나 그 누구도 그대의 사랑에서 배제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성령을 반기지 않는 어두운 자리를 자신의 마음속에 숨겨 두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자신을 성령의 치유력에서 제외시키게 된다. 온전한 사랑을 내놓지 않음으로써 그대는 온전히 치유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치유는 두려움만큼이나 완전해야 한다. 두려움의 자리가 단 한 곳이라도 남아 사랑을 반기는 마음을 망친다면, 사랑은 그곳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제정신보다 분리를 더 좋아하는 그대는 올바른 마음 안에서는 분리를 얻을 수 없다.

2) 호의가 부순 평화

그대는 특별한 호의를 구하기 전까지는 평화로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호의를 주지 않았다. 그 요청이 하나님에게는 낯선 것이었기 때문이며, 진정으로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에게는 그런 것을 요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하나님을 사랑 없는 아버지로 만들어, 오직 그런 아버지만이 줄 수 있는 것을 그에게 요구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의 평화는 산산이 부서졌다. 그가 더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아들은 자신이 만든 것을 두려워했지만, 자신과 아버지 사이의 영광스러운 동등함을 공격했기에 자신의 참된 아버지를 훨씬 더 두려워했다.

평화 속에서 그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전쟁 속에서 그는 모든 것을 요구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사랑의 부드러움이 평화롭게 떠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 말고 어떻게 아들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었겠는가? 아들이 평화 안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다면, 그는 전혀 머물 수 없었을 것이다.

어두워진 마음은 빛 안에서 살 수 없으며, 자신이 있지 않은 곳에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어둠의 자리를 찾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이 일어나기를 요구했고, 따라서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었다. "따로 떼어 낸다"는 것은 "홀로 만든다"는 것이며, 따라서 외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대에게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

그대의 평화가 하나님과의 하나됨 안에 있음을 아는 하나님이, 그대를 따로 떼어 놓을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은 오직 고통에 대한 그대의 요청만을 거절했다. 괴로움은 하나님의 창조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대에게 창조를 주었기에, 창조를 다시 빼앗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다만 그대의 미친 요청에 제정신인 답으로 응답할 수 있었을 뿐이며, 그 답은 그대의 광기 속에서도 그대와 함께 머무를 것이다.

하나님의 답은 환영들 너머에 있는 기준점이며, 그대는 그 기준점에서 환영들을 돌아보고 그것들이 미쳤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자리를 구하라. 그러면 그대는 이 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사랑이 그대 안에 있고 그대를 그곳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3) 하늘과 죽음의 의문

이제 그대가 이 과정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분명해졌을 것이다. 이 과정은 사랑에 관한 과정이다. 이 과정이 바로 그대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 세상에서 그대의 역할이 치유이며, 하늘에서 그대의 역할은 창조라는 말을 들어 왔다. 에고는 땅에서 그대의 역할이 파괴라고 가르치며, 하늘에서는 그대에게 아무런 역할도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에고는 여기서 그대를 파괴하고 여기에 그대를 묻어, 그대가 만들어졌다고 에고가 생각하는 먼지 외에는 아무런 유산도 그대에게 남기지 않으려 한다. 에고의 논리대로, 에고가 그대에게 어느 정도 만족하는 한, 에고는 그대에게 망각을 제시한다. 에고가 노골적으로 흉포해지면, 에고는 그대에게 지옥을 제시한다. 그러나 망각도 지옥도 하늘만큼 그대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대가 정의하는 하늘은 지옥과 망각이며, 진짜 하늘은 그대가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중 가장 큰 위협이다. 지옥과 망각은 그대가 지어낸 관념이며, 그대는 자신의 실재를 세우기 위해 지옥과 망각의 실재를 입증하는 데 몰두해 있기 때문이다. 지옥과 망각의 실재가 의문시되면, 그대는 자신의 실재도 의문시된다고 믿는다. 그대는 공격이 자신의 실재라고 믿으며, 자신의 파괴가 자신이 옳았다는 최후의 증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대가 틀렸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차라리 틀렸던 편이 더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죽음이 생명이 있었음을 암시한다고 주장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죽음이 생명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죽음이 가리킬 수도 있는 지나간 생명조차, 결국 이 지경에 이를 수밖에 없다면 지나간 생명은 무익했을 것이며, 자신이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죽음을 필요로 할 뿐이다.

그대는 하늘에 의문을 품지만, 아직 죽음에는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대가 죽음에 의문을 품는다면 그대는 치유하고 치유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그대가 하늘을 알지 못하더라도, 하늘이 죽음보다 더 바람직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