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진짜 공포는 사랑
1) 빛이 없애는 비밀
이 과정은 그대를 위한 목표가 행복과 평화라고 명시적으로 밝혀 왔다. 그러나 그대는 이 과정을 두려워한다. 그대는 이 과정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을 거듭 들어 왔지만, 때로는 마치 이 과정이 그대를 가두려는 것처럼 반응한다. 그대는 흔히 에고의 사고 체계를 물리치는 것보다 더 쉽게 이 과정을 물리쳐 버린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는, 그대는 이 과정을 배우지 않음으로써 그대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의 결백함만이 그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속죄는 항상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으로 해석되어 왔으며, 이를 올바로 이해한다면 이는 옳다. 그러나 내가 그대를 위해 속죄를 해석해 줄 때조차, 그대는 속죄를 거부하고 그대 자신을 위해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대는 아마도 에고와 에고가 내놓는 것들의 무익함을 알아차렸을 것이지만, 그것들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아직 그 대안을 기쁘게 바라보지는 못할 수도 있다. 극단적으로는, 그대는 해방을 두려워하며 해방이 그대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믿는다. 이 두려움이 얼마나 깊은지 결코 오해하지 말라. 그대는 진실 앞에서 그대 자신을 향해 돌아서서 그대 자신을 파괴할지도 모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여, 그대의 "죄스러운 비밀"은 사실이 아니다. 그대의 "죄스러운 비밀"은 아무것도 아니며, 그대가 그것을 빛 앞으로 가져오기만 한다면 빛이 그것을 없애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대와 아버지에 대한 기억 사이에는 더 이상 어두운 구름이 남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아버지의 결백한 아들을 기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아들은 불멸하기에 죽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는 그대 자신이 그 아들과 함께 해방되었으며, 결코 그 아들과 분리된 적이 없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이해 안에 그대의 기억이 있다. 그대의 기억은 두려움 없는 사랑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집으로 돌아올 때 하늘에는 큰 기쁨이 있을 것이며, 그 기쁨은 그대의 것이 될 것이다. 해방된 인간의 아들이 곧 결백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 아들을 알아보는 것이 그대의 해방이기 때문이다.
2) 에고의 토대 아래
그대는 어째서 자신의 증오를 직시하고 그 증오의 전체 규모를 깨닫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지 궁금할 수도 있다. 또한 그대는 성령이 그 증오를 그대에게 보여 주고, 그대 스스로 그 증오를 의식으로 끌어올릴 필요 없이 없애 버리는 편이 훨씬 쉬우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는 자신과 속죄 사이에 한 가지 장애물을 더 세워 놓았다.
우리는 앞서 두려움을 알아차린 사람은 그 누구도 두려움을 용납하지 않으리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대는 혼란스러운 마음 상태 속에서 두려움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대는 두려움을 좋아하지 않지만, 정작 그대를 진정으로 두렵게 하는 것은 공격하려는 그대의 욕구가 아니다. 그대는 자신의 적대감으로 인해 심각하게 동요하지 않는다. 그대가 적대감을 숨겨 두는 것은, 적대감이 가리고 있는 것을 더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에고가 없으면 자신 안에서 훨씬 더 두려운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리라고 믿지만 않는다면, 그대는 두려움 없이 에고의 가장 어두운 주춧돌조차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십자가 처형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진짜 공포는 해방에 대한 것이다.
에고의 어두운 토대 아래에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있으며, 그대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기억은 그대를 즉시 그대의 본래 자리로 되돌려 놓을 것이며, 그대가 떠나려 애써 온 곳이 바로 이 자리이기 때문이다.
공격에 대한 그대의 두려움은 사랑에 대한 그대의 두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공격에 대한 두려움이 그대를 사랑으로부터 구해 준다고 믿지만 않는다면,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는 자신의 잔혹한 바람조차 기꺼이 바라보려 할 것이다. 이 바람이 분리를 일으켰으며, 그대는 분리가 치유되기를 원하지 않기에 그 바람을 지켜 왔다.
그대는 아버지를 향한 그대의 사랑을 가리고 있는 어두운 구름을 걷어 내면, 그 사랑이 그대로 하여금 아버지의 부름에 응답하여 하늘로 뛰어들게 만들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대는 공격이 사랑의 부름을 막아 주기에 공격이 곧 구원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을 향한 그대의 강렬하고 타오르는 사랑과 그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에고의 토대보다 훨씬 더 깊고, 에고가 앞으로도 결코 이르지 못할 만큼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진정으로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미워한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는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그대에게 더 어렵지 않은가? 그대는 사랑을 나약함과, 미움을 강함과 연결시키며, 그대 자신의 진짜 힘이 그대에게는 자신의 진짜 약함처럼 보인다. 사랑의 부름을 듣는다면 그대는 자신의 기쁨에 찬 반응을 통제할 수 없을 것이며, 그대가 만들었다고 생각한 세상 전체가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3) 근본 환영의 해소
그러므로 성령은 마치 그대의 요새를 공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대는 하나님을 밖으로 차단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배제되기를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자신이 무력해지리라고 생각하기에 자신의 미친 믿음 체계 전체를 세워 왔고,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을 짓눌러 무(無)로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그 사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대가 그 사랑이 그대를 자신에게서 휩쓸어 가 그대를 하찮게 만들까 봐 두려워하는 것은, 위대함은 저항 속에 있고 공격이 곧 위대함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이 하나님이 파괴할 세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대가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대는 이 세상을 내던져 버릴 것이며, 실제로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자신의 사랑을 가리기 위해 세상을 이용해 왔으며, 에고의 토대의 어둠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그대는 그곳에 숨겨진 사랑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그대를 두렵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랑이다.
그대는 광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 광기를 그대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그대가 만든 것이 아니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 그대는 해방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십자가 처형의 노예가 되려 한다. 그대의 개별적 죽음은 그대의 살아 있는 하나됨보다 더 소중해 보인다. 그대에게 주어진 것은 그대가 만든 것만큼 소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에고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며, 사랑은 반겨 주지 않는 곳에는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미움은 들어갈 수 있다. 미움은 자신의 의지로 들어오며 그대의 의지 따위는 상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의 환영들을 직시해야 하며 환영들을 숨겨 두어서는 안 된다. 환영들은 스스로의 토대 위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숨겨져 있을 때는 마치 그렇게 서 있는 것처럼 보이며, 따라서 스스로 유지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다른 모든 환영이 딛고 서 있는 근본적인 환영이다. 환영들 아래에는, 환영들이 숨겨져 있는 한 함께 숨겨진 채로, 분노 속에서 환영들을 만들었다고 생각한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마음 안의 고통은, 드러나고 나면 너무나 명백해서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대가 이 마음에 내놓는 그 어떤 속임수와 놀음도 이 마음을 치유할 수 없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아들의 진짜 십자가 처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에 처형되지 않았다. 바로 여기에 그의 고통과 그의 치유가 함께 있다. 성령의 인식(vision)은 자비로우며 그 치유책은 신속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