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마법이 아닌 마음의 치유
1) 수단·원리·결과
이제 우리의 중점은 치유에 있다. 기적은 수단이고, 속죄는 원리이며, 치유는 그 결과다.
"치유의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른 두 차원의 실재를 부적절하게 뒤섞는 것이다. 치유는 기적이 아니다. 속죄, 곧 최후의 기적은 처방이며, 어떤 형태의 치유든 그 결과다.
속죄가 적용되는 잘못의 종류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모든 치유는 본질적으로 두려움으로부터의 풀려남이다.
치유를 맡으려면 그대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대는 자신의 두려움 때문에 치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속죄 계획의 중요한 한 단계는 모든 차원에서 잘못을 되돌리는 것이다. 병 또는 "바르지 않은 마음 상태"는 차원의 혼동에서 비롯된다. 이는 언제나 한 차원에서 잘못된 것이 다른 차원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믿음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적을 차원의 혼동을 바로잡는 수단이라고 말해 왔다. 모든 잘못은 그 잘못이 일어난 바로 그 차원에서 바로잡혀야 하기 때문이다.
2) 육체는 배움의 도구
오직 마음만이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육체는 잘못된 생각에 반응할 때만 잘못 행동할 수 있다.
육체는 창조할 수 없으며, 육체가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 이 근본적인 잘못이 모든 신체 증상을 만들어 낸다. 신체의 병은 마법에 대한 믿음을 나타낸다. 마법을 만들어 낸 그 전체적인 왜곡은, 마음이 통제할 수 없는 창조력이 물질 안에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이 잘못은 두 가지 형태를 띨 수 있다. 마음이 육체 안에서 그릇되게 창조할 수 있다고 믿거나, 육체가 마음 안에서 그릇되게 창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유일한 창조의 차원인 마음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는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면, 두 형태의 혼동 모두 일어날 필요가 없다.
영은 이미 창조되었으므로 오직 마음만이 창조할 수 있으며, 육체는 마음을 위한 배움의 도구다. 배움의 도구는 그 자체로 배움의 내용이 아니다. 그 목적은 다만 배움을 촉진하는 것뿐이다. 배움의 도구를 잘못 쓸 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배움을 촉진하는 데 실패하는 것뿐이다. 배움의 도구 자체에는 실제로 배움의 오류를 일으킬 힘이 없다.
육체는, 제대로 이해하기만 하면, 속죄가 양날의 적용에 대해 지니는 그 상처받지 않는 성질을 공유한다. 이는 육체가 기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육체가 본래 오해에 열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육체는 그저 물리적 세계에서 그대가 경험하는 것의 일부일 뿐이다. 육체의 능력은 과대평가될 수 있고, 실제로 자주 과대평가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육체의 존재를 부인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특히 가치 없는 형태의 부인에 빠져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가치 없다"는 말은 다만, 마음이 없는 것을 부인함으로써 마음을 보호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마음의 능력이 지닌 이 불행한 측면을 부인한다면 곧 그 능력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대가 신체의 병에 대한 처방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물질적 수단은 마법의 원리를 다시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육체가 스스로 자신의 병을 만들어 낸다고 믿는 첫걸음이다. 그 육체를 창조력 없는 매개물을 통해 치유하려는 것은 두 번째 잘못된 걸음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런 매개물을 교정의 목적으로 쓰는 것이 악하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때로는 병이 마음을 충분히 강하게 사로잡아 그 사람을 일시적으로 속죄에 다가갈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는 마음과 육체에 절충적인 접근법을 쓰는 것이 지혜로울 수 있다. 이 접근법은 바깥에서 온 무언가에 일시적으로 치유의 믿음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바른 마음을 잃은 사람, 곧 아픈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것이 두려움의 증가이기 때문이다. 아픈 사람들은 이미 두려움으로 약해진 상태에 있다. 아픈 사람들이 너무 이르게 기적에 노출되면 공황에 빠질 수도 있다. 이런 일은 뒤집힌 지각이 기적은 무서운 것이라는 믿음을 불러일으켰을 때 일어나기 쉽다.
속죄의 가치는 표현되는 방식에 있지 않다. 실제로 속죄가 참되게 쓰인다면 반드시 받는 사람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표현될 것이다. 이는 기적이 온전한 효력을 지니려면 받는 사람이 두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반드시 받는 사람이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소통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지금 받는 사람이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소통이라는 뜻이기는 하다. 기적의 전체 목표는 소통의 수준을 두려움을 늘림으로써 낮추는 것이 아니라 높이는 것이다.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역할을 맡을 준비가 되기 전에 반드시 풀려남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풀려남이 곧 감금이라는 이미 매우 널리 퍼진 믿음을 부추길 수도 있다.
풀려남이 감금이라는 이 잘못된 지각은 다시, 해로움이 육체에 국한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이는 마음이 자기 자신을 해칠 수 있다는 근원적인 두려움 때문이다.
이런 잘못 가운데 어느 것도 의미가 없다. 마음의 그릇된 창조물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릇된 창조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알아차림은 그 어떤 형태의 차원 혼동보다 훨씬 나은 보호 장치다. 이는 잘못이 일어난 바로 그 차원에서 교정을 도입하기 때문이다. 오직 마음만이 창조할 수 있으며, 교정은 생각의 차원에 속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앞서 한 말을 좀 더 짚어 보면, 영은 이미 완전하므로 교정이 필요하지 않다. 육체는 마음을 위한 배움의 도구로서가 아니고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배움의 도구는 그 자체로는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 그것이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음이 자신의 그릇된 창조물을 내려놓게 이끄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의미 있는 창조력의 유일한 쓰임임이 분명해진다.
마법은 마음이 없는, 또는 그릇되게 창조하는 마음의 쓰임이다.
물리적인 약물은 "주문"의 한 형태이지만, 그대가 마음을 써서 치유하기를 두려워한다면 마음으로 치유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대가 두려워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대의 마음을 그릇된 창조에 취약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대는 어떤 치유가 일어나든 그 치유를 오해하기 쉽다. 또한 자기중심성과 두려움은 대개 함께 일어나므로 그대는 치유의 참된 근원(Source)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조건 아래서는, 그대가 물리적인 치유 장치에 일시적으로 의지하는 편이 더 안전하다. 그런 장치는 그대 자신의 창조물로 잘못 지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 안에 취약하다는 느낌이 남아 있는 한, 그대는 기적을 행하려 해서는 안 된다.
3) 육안에서 돌아섬
나는 이미 기적이 기적적인 마음 상태의 표현이며, 기적적인 마음 상태란 곧 바른 마음 상태를 뜻한다고 말했다. 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의 마음이든 기적을 받는 사람의 마음이든 떠받들지도 깎아내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교정으로서 기적은 받는 사람이 바른 마음 상태가 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실제로 기적의 목적은 그 사람을 바른 마음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도, 바른 마음 상태에 있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다른 사람 안에 바른 마음 상태를 되세울 수 없다.
자기 자신의 준비됨에 의지하는 치유자는 자신의 이해를 위태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준비됨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으면서도 나에 대한 한결같은 신뢰를 유지하는 한, 그대는 완전히 안전하다.
그대의 기적을 행하려는 성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언제나 두려움이 그대의 바른 마음 상태에 끼어들어 그 상태를 거꾸로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바르지 않은 마음 상태의 모든 형태는 그대 자신을 위한 속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결과다. 그대가 속죄를 받아들인다면, 그대는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 그저 바른 마음 상태가 곧 치유임을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일 뿐임을 알아볼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다.
기적을 행하는 사람의 유일한 책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속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마음이 유일한 창조의 차원이며, 마음의 잘못은 속죄로 치유된다는 것을 그대가 알아본다는 뜻이다.
일단 이것을 받아들이면, 그대의 마음은 오직 치유할 수만 있다. 그대의 마음에서 그 어떤 파괴적인 가능성도 부인하고 순전히 건설적인 힘만을 되세움으로써, 그대는 다른 사람들의 차원 혼동을 되돌릴 수 있는 자리에 자신을 두게 된다.
그때 그대가 그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그들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건설적이며 그들의 그릇된 창조물이 그들을 해칠 수 없다는 진리다. 이를 확언함으로써 그대는 마음을 자신의 배움의 도구를 과대평가하는 데서 풀어내고, 마음을 배우는 주체라는 참된 자리로 회복시킨다.
육체는 창조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배우지도 못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해야 한다. 배움의 도구로서 육체는 그저 배우는 주체를 따를 뿐이지만, 만약 육체에 그릇되게 자기 주도성이 부여된다면, 육체는 자신이 촉진해야 할 바로 그 배움을 심각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오직 마음만이 밝게 빛날 수 있다. 영은 이미 빛나고 있으며, 육체 자체는 너무 둔탁하다.
그러나 마음은 육체가 배우는 주체가 아니며 따라서 배움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봄으로써, 자신의 빛을 육체에 가져다줄 수 있다. 그러나 육체는, 육체 너머로 빛을 바라보는 법을 배운 마음과 쉽게 나란히 맞춰질 수 있다.
교정하는 배움은 언제나 영의 깨어남과 더불어, 육안의 봄에 대한 믿음에서 돌아서는 데서 시작된다.
이는 흔히 두려움을 동반한다. 그대가 자신의 영적 봄이 그대에게 무엇을 보여 줄지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나는 앞서 성령이 잘못을 볼 수 없으며, 오직 잘못을 넘어 속죄라는 방어만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잘못 너머를 바라보는 일이 불편함을 낳을 수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 불편함이 그 지각의 최종 결과는 아니다. 성령이 제단이 더럽혀진 것을 바라보도록 허락받으면, 성령은 즉시 속죄를 향해서도 바라본다.
성령이 지각하는 그 무엇도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영적 자각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은 다만 교정을 향해 흘러갈 뿐이다. 불편함은 오직 교정의 필요를 자각시키기 위해서만 일어난다.
치유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육안이 보는 것은 교정하는 힘이 없으며,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그 어떤 장치로도 잘못을 바로잡을 수 없다. 그대가 자신의 육안이 말해 주는 것을 믿는 한, 그대의 교정 시도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참된 봄은 가려져 있다. 이는 그대가 자기 자신의 더럽혀진 제단을 차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단이 더럽혀진 이상, 그 더럽혀짐을 지각하지 않으면 그대의 상태는 갑절로 위태로워진다.
치유는 분리 이후에 생겨난 능력이며, 그 이전에는 필요하지 않았다. 시공간에 대한 믿음의 다른 모든 측면과 마찬가지로 치유도 일시적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속되는 한, 치유는 보호의 수단으로서 필요하다. 이는 치유가 자비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자비란 설령 그대 자신 안에서는 완전함을 지각할 수 없더라도 다른 사람 안의 완전함을 지각하는 한 방식이다.
지금 그대가 다다를 수 있는 더 숭고한 개념들 대부분은 시간에 의존한다.
자비는 실은, 그대가 아직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형태의 자비보다 훨씬 강력한 사랑의 포용을 더 약하게 비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비는 지금 이를 수 있는 제한된 의미에서 바른 마음 상태에 반드시 필요하다.
자비는 다른 사람을, 마치 그가 시간 안에서 이룬 실제 성취를 이미 훨씬 뛰어넘은 것처럼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 사람의 생각 자체가 잘못되어 있으므로 그 사람은 스스로 속죄를 볼 수 없으며, 그렇지 않다면 자비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베풀어지는 자비는, 그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인정인 동시에 그가 그 도움을 받아들이리라는 인식이기도 하다.
인정과 인식이라는 이 두 가지 지각은 모두 분명히 시간에 의존한다는 의미이며, 이는 자비가 여전히 이 세상의 한계 안에 있음을 드러낸다.
나는 앞서 오직 계시만이 시간을 초월한다고 말했다. 자비의 표현인 기적은 다만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대가 다른 사람에게 기적을 베풀 때마다, 그대는 두 사람 모두의 고통을 단축하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기적을 베푸는 일은 소급해서도, 앞으로도 작용하며 바로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