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죄책감 아닌 영원한 결백
1) 단죄와 십자가 그림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공격할 수 없다. 단죄가 공격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단죄는 한 마음이 다른 마음을 사랑받을 자격이 없고 벌받아 마땅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분열이 있다. 판단하는 마음은 자신을 판단받는 마음과 분리된 것으로 지각하며, 다른 이를 벌함으로써 자신은 벌을 피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마음이 자신을 부정하고 그 부정의 대가를 피하려는 망상적 시도일 뿐이다.
그 망상은 부정을 내려놓으려는 시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붙잡으려는 시도다. 그대에게서 아버지를 가린 것은 죄책감이며, 그대를 미치게 만든 것도 죄책감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마음이 죄책감을 받아들인 것이 분리의 시작이었듯이, 속죄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 분리의 끝이다.
그대가 보는 세상은 죄책감으로 미쳐 버린 이들의 망상 체계다. 이 세상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것이 사실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은 벌의 상징이며, 이 세상을 다스리는 듯 보이는 모든 법칙은 죽음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고통을 통해, 고통 속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 아이들의 성장에는 괴로움이 따르며, 그들은 슬픔과 분리와 죽음을 배운다. 그들의 마음은 뇌에 갇힌 것처럼 보이며, 몸이 다치면 그 능력도 쇠퇴하는 듯 보인다.
아이들은 사랑하는 듯 보이지만, 버리기도 하고 버림받기도 한다. 그들은 사랑하는 것을 잃는 듯 보이는데, 이는 아마 모든 믿음 중 가장 미친 믿음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몸은 시들고 숨을 헐떡이다가 땅에 묻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잔인하다고 생각해 보지 않은 이는 없다.
이것이 실재하는 세상이라면 하나님은 잔인할 것이다. 어떤 아버지도 구원의 대가로 자녀에게 이런 일을 겪게 하면서 동시에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구하기 위해 죽이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공격이 곧 구원이 될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해석이 아니라 에고의 해석이다. 죄책감의 세상만이 이것을 요구할 수 있다. 죄책감 있는 자만이 그 세상을 생각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담이 자신을 낙원에서 몰아낸 것이 아버지라고 믿지 않았더라면, 아담의 "죄"는 그 누구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믿음 속에서 아버지에 대한 앎이 사라졌다.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만이 그 믿음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 처형을 그린 그림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에 처형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 그대는 이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죄가 없다는 영원한 사실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이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오직 사랑만 주었기에 오직 사랑만 받아 마땅하다. 그는 결코 단죄한 적이 없기에 단죄받을 수 없다.
속죄는 하나님의 아들이 배워야 할 마지막 가르침이다. 속죄는 그가 결코 죄를 지은 적이 없으므로 구원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에게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2) 성령이 되돌려 놓음
앞서 나는 성령이 모든 훌륭한 교사들의 목표를 공유한다고 말했다. 훌륭한 교사들의 궁극적 목적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가르쳐 스스로를 불필요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성령이 원하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함께 나누기에, 성령은 아들이 평화 속에서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도록 아들의 마음에서 모든 죄책감을 제거하려 한다. 평화와 죄책감은 서로 대립하며, 아버지는 오직 평화 속에서만 기억될 수 있다.
사랑과 죄책감은 공존할 수 없으며, 하나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하나를 부정하는 것이다. 죄책감은 그대의 눈에서 그리스도를 가린다. 죄책감은 하나님의 아들의 결백함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만든 이 기이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죄를 지었다. 그렇다면 그대가 어떻게 아들을 볼 수 있겠는가?
아들을 보이지 않게 만듦으로써, 그대가 받아들인 죄책감의 검은 구름 속에서 응징의 세상이 일어났고, 그대는 응징의 세상을 소중히 여긴다.
그리스도의 결백함은 에고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수 없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죄책감이 없으면 에고는 생명을 지닐 수 없는데,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죄책감이 없다.
그대가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이 하는 일을 정직하게 판단할 때, 어떻게 자신이 결백할 수 있는지 의아해하고 싶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생각해 보라.
그대는 시간 안에서 결백한 것이 아니라 영원 안에서 결백하다. 그대는 과거에 "죄를 지었지만", 과거란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에는 방향이 없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 보이지만, 그대가 시간의 끝에 이르면 시간은 그대 뒤편 과거를 따라 펼쳐진 긴 카펫처럼 말려 올라가 사라질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죄가 있다고 믿는 한, 그대는 이 카펫이 죽음으로 이어진다고 믿으며 그 위를 걸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카펫 위의 여정은 길고 잔인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질 것이다. 실제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 정한 여정은 참으로 무익하지만,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정한 여정은 해방과 기쁨의 여정이다. 아버지는 잔인하지 않으며, 아들은 자신을 해칠 수 없다. 아들이 두려워하고 아들이 보는 보복은 결코 그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아들이 보복을 믿는다 해도, 성령은 보복이 사실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성령은 시간의 끝에 서 있으며, 성령이 그대와 함께 있기에 그대도 시간의 끝에 있어야 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모든 것을 이미 되돌려 놓았다. 그것이 하나님이 성령에게 준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는 것은 항상 존재해 왔다. 하나님의 아들이 결백하다는 것을 배울 때 그대는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항상 자신의 결백함을 찾아왔고, 그것을 찾아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만든 감옥에서 벗어나기를 구하고 있으며, 해방을 찾는 길은 그에게서 거부되지 않는다. 해방의 길이 그 사람 안에 있기에, 그 사람은 이미 해방을 찾아냈다. 그가 언제 해방을 찾을지는 오직 시간문제일 뿐이며, 시간은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지금 결백하며, 그의 순수함의 광채가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영원히 손상되지 않은 채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언제나 창조된 그대로일 것이다.
그대의 세상을 부정하라. 그리고 아들을 판단하지 말라. 아들의 영원한 결백함은 아버지의 마음 안에 있으며 아들을 영원히 지켜 주기 때문이다. 그대가 자신을 위해 속죄를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아들에게 죄책감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직 아들을 결백한 존재로 바라볼 때만 그대는 아들의 하나됨을 이해할 수 있다.
죄책감이라는 관념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단죄한다는 믿음을 불러오며, 하나됨 대신 분리를 투사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오직 자신만을 단죄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 수 없게 된다. 그대는 아들의 존재 조건, 즉 아들의 완전한 결백함을 부정해 왔다. 하나님의 아들은 사랑으로부터 창조되었고, 사랑 안에 머문다.
선함과 자비는 항상 그를 따라왔다. 하나님의 아들이 항상 아버지의 사랑을 확장해 왔기 때문이다. 그대와 함께 여행하는 거룩한 동반자들을 지각할 때, 그대는 여정이란 없으며 오직 깨어남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잠들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은 그대를 위해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지켜 왔다. 걸어갈 길도 없고, 지나갈 시간도 없다.
하나님은 시간 안에서 아들을 기다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 없이 있기를 결코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항상 그러했다. 하나님의 아들의 거룩함이 그대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죄책감의 구름을 빛으로 몰아내게 하라. 그리고 그의 순수함을 그대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이 그대의 것임을 그에게서 배우라.
3) 시간의 사슬과 속죄
그대는 결백하기에 완전한 평화(invulnerability) 안에 있다. 그대는 오직 죄책감을 통해서만 과거를 붙잡을 수 있다. 죄책감은 그대가 행한 일에 대해 벌받게 되리라는 것을 확립하며, 따라서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일차원적 시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항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으며, 따라서 죄책감은 반드시 그대에게서 영원을 헤아리는 능력을 빼앗아 간다.
그대는 영원하기에 불멸하며, '항상'은 반드시 지금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죄책감은 에고의 존속을 보장하기 위해 과거와 미래를 그대의 마음속에 붙들어 두는 방법이다. 지나간 일이 벌받게 된다면 에고의 존속은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의 존속을 보장하는 것은 에고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리고 불멸은 시간의 반대다. 시간은 지나가지만 불멸은 변함없기 때문이다.
속죄를 받아들이는 것은 불멸이 무엇인지 그대에게 가르쳐 준다. 그대의 결백함을 받아들임으로써 과거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음을 배우게 되고, 따라서 미래도 필요 없으며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 안에서 미래는 항상 죗값을 치르는 일과 연결되며, 오직 죄책감만이 그런 죗값을 치를 필요가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의 결백함을 그대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이 그대에게 자신의 아들을 일깨워 주고 그가 진실로 어떤 존재인지 일깨워 주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아들을 단죄한 적이 없으며, 아들은 결백하기에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죄책감을 실재하는 것으로 만든 다음 죄책감을 속죄함으로써 없앨 수는 없다. 이런 방식이 에고의 계획이며, 에고는 죄책감을 없애는 대신 이 계획을 내놓는다. 에고는 공격을 통한 속죄를 믿으며, 공격이 곧 구원이라는 미친 관념에 전적으로 몰두해 있다. 죄책감을 소중히 여기는 그대 역시 이 계획을 믿어야만 한다.
에고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서야 원하지도 않는 것을 어떻게 소중히 여길 수 있겠는가? 에고는 그대가 죄가 있으니 자신을 공격하라고 가르치며, 이는 죄책감을 반드시 증가시킨다. 죄책감은 공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고의 가르침 안에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공격은 죄책감을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며, 죄책감이 실재한다면 죄책감을 극복할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성령은 죄책감이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는 조용한 인식을 통해 죄책감을 간단히 없애 버린다. 성령은 결백한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며 이것이 사실임을 안다. 그리고 이것이 그대에게도 사실이므로, 그대는 자신을 공격할 수 없다. 죄책감이 없으면 공격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이 결백하기에 구원받는다. 그리고 온전히 순수하기에, 그대는 완전한 평화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