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형 선고 너머의 기억

1) 안을 들여다봄

결정의 힘은 이 세상의 죄수로서 그대에게 남아 있는 단 하나의 자유다. 그대는 이 세상을 올바르게 보기로 결정할 수 있다. 그대가 세상으로 만든 것은 세상의 실재가 아니다. 세상의 실재는 오직 그대가 세상에 주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게도 사랑 외에는 그 무엇도 참으로 줄 수 없으며, 그들에게서 사랑 외에는 그 무엇도 참으로 받을 수 없다.

그대가 그 밖의 다른 무언가를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대가 안을 들여다보고 자기 자신 안에서 다른 무언가를 줄 힘을 보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대가 찾은 것을 결정한 것은 오직 이 결정뿐이었다. 그것이 그대가 구한 것에 대한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대가 나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대가 안을 들여다보았고 자신이 본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실재를 본 것일 수 없다. 그대 마음의 실재는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실재는 오직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기에, 그대가 정말로 그 실재를 바라본다면 그 힘과 장엄함은 그대에게 오직 평화만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두렵다면, 그것은 그대가 거기 없는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안을 들여다본 바로 그 자리에서, 그대는 우리를 창조한 마음(Mind)의 완전한 안전함 속에서 나와 그대의 모든 형제를 바라볼 수도 있었다. 우리는 거기, 자신의 평화를 그대를 통해 확장하기를 뜻하는 아버지의 평화 안에 있기 때문이다.

평화를 확장하려는 그대의 사명을 받아들일 때, 그대는 평화를 찾게 될 것이다. 그것을 드러냄으로써 그대는 그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의 거룩한 증인들이 그대를 둘러쌀 것이다. 그대가 그들을 불렀기에, 그들이 그대에게 올 것이다.

나는 그대의 부름을 들었고 그것에 답했지만, 그대는 나를 바라보지도 않고 자신이 구한 답을 듣지도 않을 것이다. 이는 그대가 아직 오직 그 답만을 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그대에게 더 실재가 됨에 따라, 그대는 자신이 참으로 오직 그 답만을 원한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안을 들여다볼 때 그대는 나를 보게 될 것이며, 우리는 함께 실재 세계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눈을 통해서는, 오직 실재 세계만이 존재하며 오직 실재 세계만이 보일 수 있다.

그대가 결정하는 대로 그대는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보는 모든 것은 그저 그대의 결정을 증언할 뿐이다. 그대가 안을 들여다보고 나를 볼 때, 그것은 그대가 진리를 드러내기로 결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진리를 드러냄에 따라 그대는 진리를 바깥에서도 안에서도 보게 될 것이다. 그대가 바깥에서 보는 모든 것은 그대가 안에서 본 것에 대한 판단이다.

2) 죽음의 두려움

그 판단이 그대의 판단이라면 틀릴 것이다. 판단은 그대의 역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판단이 성령의 판단이라면 옳을 것이다. 판단은 성령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오직 성령이 판단하듯 판단함으로써만,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판단도 남겨 두지 않음으로써만 성령의 역할을 함께 나눈다. 그대는 자신에게 불리하게 판단하겠지만, 성령은 그대를 위해 판단할 것이다.

그렇다면 기억하라. 그대가 밖을 볼 때마다 자신이 보는 것에 부정적으로 반응한다면, 그대는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판단했으며 자신을 죽음에 처한 것이다. 사형은 에고의 궁극적인 목표다. 에고는 하나님이 그대가 생명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아는 만큼이나 확고하게, 그대가 죽음을 받을 자격이 있는 범죄자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형은 결코 에고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에고는 결국 언제나 그대를 위해 사형을 남겨 두기 때문이다. 그대를 향한 자신의 감정의 최종적 표현으로서 그대를 죽이고 싶어 하기에, 에고는 다만 죽음을 기다리도록 그대를 살아 있게 둔다.

에고는 그대가 살아 있는 동안 그대를 괴롭히겠지만, 그대가 죽기 전까지는 그 증오가 만족되지 않는다. 그대의 파괴가 에고가 향해 애쓰는 유일한 끝이며, 에고가 만족할 유일한 끝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하나님에 대한 배신자가 아닌데, 하나님에게는 배신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고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배신을 저질렀다고 믿는 그대에게는 배신자다.

이 때문에 죄책감을 풀어내는 것이 성령의 가르침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그대가 죄책감을 느끼는 한, 그대는 자신이 하나님에게 배신을 저질렀으며 그래서 죽음을 받아 마땅하다고 말하는 에고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을 에고와 혼동함으로써 자신이 죽음을 원한다고 믿기에, 죽음이 에고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원하는 것으로부터는 하나님도 그대를 구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욕구에 굴복하려는 유혹을 받을 때, 내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라. 안을 들여다보고 나를 볼 때, 그대는 이것이 참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가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 죽음을 극복했겠는가? 그리고 아버지가 그대에게도 영생을 주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나에게 영생을 주었겠는가?

나를 드러내는 법을 배울 때, 그대는 결코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자기 안의 죽지 않는 것을 바라본 것이 될 것이며, 죽을 수 없는 세상을 내다볼 때 그대는 오직 영원한 것만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수 있다고 정말로 믿는가? 아버지는 그 아들을 자신 안에 안전하게 숨겨 놓았고, 그대의 파괴적인 생각들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두었지만, 그 생각들 때문에 그대는 아버지도 아들도 알지 못한다. 그대는 매일, 매시간, 매분 실재 세계를 공격하면서도, 실재 세계를 보지 못한다는 것에 놀란다.

사랑을 공격하기 위해 사랑을 찾는다면, 그대는 결코 사랑을 찾지 못할 것이다. 사랑이 나눔이라면, 사랑 자체를 통하지 않고서 그대가 어떻게 사랑을 찾을 수 있겠는가?

사랑을 주라. 그러면 사랑이 그대에게 올 것이다. 사랑은 그 자체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격을 준다면 사랑은 숨겨진 채로 남을 것이다. 사랑은 오직 평화 안에서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만큼이나 안전하다. 아들은 아버지의 보호를 알기에 두려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을 완전한 평화 속에 붙들고 있으며,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기에 아들은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은 그대의 참나(Self)이면서도, 그대로부터 멀리 있다. 그대가 그를 공격하기로 택했고 그가 그대의 시야에서 아버지 안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변하지 않았지만, 그대는 변했다.

이는 분열된 마음과 그 모든 소행이 아버지가 창조한 것이 아니며, 아버지에 대한 앎 안에서는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참이 아닌 것을 그대가 보이게 만들었을 때, 참인 것은 그대에게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참인 것은 그 자체로는 언제나 보인다. 성령은 참인 것을 완전히 명료하게 보기 때문이다. 참인 것이 그대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그대가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보이지 않는지 결정하는 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지 않다. 이는 무엇이 실재인지 결정하는 것이 그대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보일 수 있는 것은 성령이 보는 것이다. 실재의 정의는 하나님의 것이지 그대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실재를 창조했으며, 하나님이 실재가 무엇인지 안다.

3) 실재 세계로의 복귀

그대는 알았으나 잊었다. 하나님이 기억할 방법을 그대에게 주지 않았다면, 그대는 자신을 망각에 처했을 것이다. 그대의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그대는 결코 아버지를 잊을 수 없다. 하나님 자신이 그의 기억 안에 둔 것을 아무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하나님이 둔 그것을 부정할 수는 있어도, 잃을 수는 없다.

음성이 그대가 묻는 모든 질문에 답할 것이며, 인식(vision)이 그대가 보는 모든 것에 대한 지각을 교정할 것이다. 그대가 보이지 않게 만든 것이 유일한 진리이며, 그대가 듣지 않은 것이 유일한 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대를 자기 자신과 재결합시키고자 하며, 그대의 고통 속에서 그대를 버리지 않았다.

그대는 오직 하나님만을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기억은 그대의 마음 안에서 빛나며 지워질 수 없다. 그 기억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며, 영원히 언제나다.

그대는 그저 이 기억을 구하기만 하면 되며, 그러면 그대는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기억은, 그 기억을 지워 버렸고 지워진 채로 두고 싶어 하는 마음 안에서는 빛날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기억은 오직 기억하기로 선택하고 실재를 통제하려는 미친 욕구를 내려놓은 마음 안에서만 밝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조차 통제할 수 없는 그대가 우주를 통제하기를 바라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우주로 무엇을 만들었는지 바라보고, 우주가 그대가 만든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에 기뻐하라.

하나님의 아들이여, 아무것도 아닌 것에 만족하지 말라! 실재하지 않는 것은 보일 수 없으며 아무 가치도 없다. 하나님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을 그 아들에게 줄 수 없었으며, 그 아들도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대는 자신이 하나님을 저버렸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에 해방되었다.

그대가 만든 모든 것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으며, 성령이 그 모든 것을 보지 않기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이 참으로 보는 것은 그대도 바라볼 수 있는 그대의 것이며, 성령의 인식(vision)을 통해 그대의 지각은 치유된다. 그대는 이 세상이 담고 있는 유일한 진리를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가치 있게 여기지 않기에, 그대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

무(無)를 그대에게 실재로 만듦으로써, 그대는 무(無)를 보았다. 그러나 무(無)는 거기 없다. 그리고 그대가 자신에게 보이게 만든 것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대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가 자신의 알아차림과 진리 사이에 얼마나 많은 거리를 두려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아들은 보일 수 있다. 그 아들의 인식(vision)이 함께 나뉘기 때문이다. 성령은 그 아들을 바라보며, 그대 안에서 그 밖의 다른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그대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성령의 봄 안에서는 완전하며, 그 전부를 아우른다. 성령은 아버지를 잊지 않았기에 그대를 기억해 왔다.

그대는 실재하지 않는 것을 바라보고 절망을 찾았다. 그러나 실재하지 않는 것을 구함으로써, 그대가 그 밖에 무엇을 찾을 수 있었겠는가?

실재하지 않는 세상은 절망의 것이다. 그 세상은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존재함(Being)을 나누는 그대는 실재 없이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하나님이 그대에게 주지 않은 것은 그대에 대해 아무 힘도 없으며, 사랑을 향한 사랑의 끌림은 여전히 거부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자기 자신에게로 하나로 모으고, 자신의 온전함을 확장함으로써 모든 것을 함께 붙드는 것이 사랑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대가 만든 세상과 그대가 보는 세상 대신, 사랑으로 교환하여 실재 세계를 그대에게 주었다. 그저 그리스도의 손에서 실재 세계를 받아 그것을 바라보라. 실재 세계의 실재성은 그 밖의 모든 것을 보이지 않게 만들 것이다. 실재 세계를 목격하는 것이 온전한 지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재 세계를 바라보면서, 그대는 그것이 언제나 그러했음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무(無)는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대가 마침내 참되게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해방된 지각은 쉽게 앎으로 옮겨진다. 오직 지각만이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지각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교정됨으로써 지각은 영원히 유일한 실재인 앎에 자리를 내준다.

속죄는 그저 결코 잃어버린 적 없는 것으로 돌아가는 길일 뿐이다. 그대의 아버지는 그 아들을 사랑하기를 멈출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