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양날의 검이 아닌 방어
속죄는 파괴적으로 쓰일 수 없는 유일한 방어다. 이는 속죄가 그대가 만든 장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속죄의 원리는 속죄가 시작되기 오래전부터 이미 작용하고 있었다. 그 원리는 사랑이었고, 속죄는 사랑의 행위였다. 분리 이전에는 행위가 필요하지 않았다. 공간과 시간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속죄와 그 성취에 필요한 조건들이 계획된 것은 오직 분리 이후였다. 그런 다음, 오용될 수는 없지만 거부될 수는 있는, 그토록 훌륭한 방어가 필요해졌다.
그러나 속죄를 거부해도 속죄가 공격의 무기로 바뀌지는 않는다. 공격은 다른 방어들에 내재된 특성이다. 이렇게 해서 속죄는 양날의 검이 아닌 유일한 방어가 된다.
속죄는 오직 치유할 수 있을 뿐이다. 속죄는 시공간에 대한 믿음 안에 세워져, 그 믿음 자체에 대한 필요에 한계를 두고 마침내 배움을 완성한다. 속죄는 마지막 가르침이다. 배움 자체는, 배움이 일어나는 교실과 마찬가지로 일시적이다. 더 이상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 때 배우는 능력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영원히 창조적인 존재에게는 배울 것이 없다.
그대는 자신의 지각을 개선하는 법을 배울 수 있고, 점점 더 나은 배움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이는 그대를 아들됨(Sonship)과 점점 더 가까이 조화되게 하겠지만, 아들됨 자체는 완전한 창조물이며 완전함에는 정도의 차이가 없다.
배움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오직 차이에 대한 믿음이 있는 동안뿐이다.
진화란 그대가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과정이다. 그대는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이전의 잘못된 걸음을 바로잡는다. 이 과정은 사실 시간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대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동시에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속죄는 그대가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과거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해 주는 장치다. 속죄는 그대의 과거의 잘못을 되돌린다. 그래서 그대는 돌아가는 길로 나아가지도 못한 채 같은 걸음을 계속 되밟을 필요가 없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속죄는 시간을 절약하지만, 속죄가 섬기는 기적과 마찬가지로 시간을 없애지는 않는다. 속죄가 필요한 한 시간도 필요하다.
그러나 완성된 계획으로서의 속죄는 시간과 독특한 관계를 맺는다. 속죄가 완성될 때까지는 그 여러 단계가 시간 안에서 진행되지만, 속죄 전체는 시간의 끝에 서 있다. 그 지점에서 돌아가는 다리가 이미 놓인 것이다.
속죄는 전면적인 헌신이다. 그대는 여전히 이 헌신이 상실과 연관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는 분리된 하나님의 아들들이 저마다 어떤 식으로든 저지르는 잘못이다.
공격할 수 없는 방어가 최선의 방어라는 것은 믿기 어렵다. "온유한 자가 땅을 물려받으리라"는 말이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온유한 자들은 자신의 강함으로 인해 말 그대로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양날의 방어는 두 개의 날을 지녔다는 바로 그 이유로 본질적으로 약하며, 매우 예기치 않게 그대에게 되돌아올 수 있다. 이런 가능성은 기적을 통하지 않고서는 통제할 수 없다. 기적은 속죄라는 방어를 그대의 참된 보호로 바꾸어 준다. 그대가 점점 더 안전해질수록, 그대는 다른 사람을 보호하는 그대의 타고난 재능을 떠맡게 되며, 이때 자신이 형제이자 아들임을 알게 된다.
속죄는 오직 그대 안의 내면의 빛을 풀어놓음으로써만 그대 안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분리 이후로 방어는 거의 전적으로 속죄에 맞서 방어하고, 그럼으로써 분리를 유지하는 데 쓰여 왔다. 이렇게 방어를 쓰는 것은 대개 육체를 보호할 필요로 여겨진다. 마음이 빠져드는 수많은 육체에 관한 환상은, 육체를 "속죄"에 이르는 수단으로 쓸 수 있다는 왜곡된 믿음에서 비롯된다.
육체를 성전으로 지각하는 것은 이 왜곡을 바로잡는 첫걸음일 뿐이다. 이는 그 왜곡의 일부만을 바꾸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각하는 것은 물리적인 차원에서의 속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한다. 그러나 다음 단계는, 성전이란 애초에 구조물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성전의 참된 거룩함은 그 구조물이 둘러싸고 있는 내면의 제단에 있다. 아름다운 구조물을 강조하는 것은 속죄에 대한 두려움의 표징이며, 제단 자체에 이르기를 꺼리는 마음의 표징이다.
성전의 참된 아름다움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반면에 영적 봄(vision)은 그 구조물을 전혀 볼 수 없다. 이는 영적 봄이 완전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봄은 제단만큼은 완전히 또렷하게 볼 수 있다.
완전한 효과를 위해 속죄는 내면의 제단 중심에 자리해야 하는데, 그곳에서 속죄는 분리를 되돌리고 마음의 온전함을 회복시킨다. 분리 이전에는 마음이 두려움에 상처받지 않는 상태였다.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리와 두려움 둘 다 그릇된 창조이며, 성전을 회복하고 속죄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제단을 열기 위해서는 이 둘 다 되돌려져야 한다. 이렇게 되돌리는 것은 모든 분리의 생각에 맞서는 유일하고 효과적인 방어를 그대 안에 둠으로써 분리를 치유하며, 그대를 완전히 상처받지 않는 상태로 만든다.
모든 사람이 속죄를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최종 결정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이것이 자유의지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대는 미룰 수 있고, 엄청나게 꾸물거릴 수도 있지만, 그대의 창조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창조주가 그대의 그릇된 창조 능력에 한계를 두었기 때문이다.
갇힌 의지는 극단적인 경우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상황을 낳는다. 고통을 견디는 힘은 클 수 있지만,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사람은, 아무리 희미하게라도, 더 나은 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이 알아차림이 더 확고해질수록 전환점이 된다. 이 전환은 마침내 영적 봄(vision)을 다시 일깨우는 동시에 육안에 대한 투자를 약화시킨다. 지각의 두 차원 사이를 오가는 이 투자는 대개 갈등으로 경험되며, 그 갈등은 매우 격렬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하나님만큼이나 확실하다. 영적 봄은 말 그대로 잘못을 볼 수 없으며, 오직 속죄만을 찾는다. 육안이 찾는 모든 해법은 사라져 버린다. 영적 봄은 안을 들여다보고, 제단이 더럽혀졌으며 수리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린다. 올바른 방어를 완전히 알아차린 영적 봄은 다른 모든 방어를 지나쳐, 잘못을 넘어 진리를 바라본다.
영적 봄은 그 자체의 힘으로 마음을 끌어들여 영적 봄을 섬기게 한다. 이렇게 끌어들이는 것은 마음의 힘을 되세운다. 또한 미루는 일이 그저 불필요한 고통만 더한다는 것을 마음이 깨닫게 하여, 마음이 미루는 일을 점점 더 견디지 못하게 만든다. 그 결과 마음은, 한때는 아주 사소한 불편의 침입으로 여겼을 법한 일에도 점점 더 예민해진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완전한 신뢰에서 오는 완전한 평안을 누릴 자격이 있다. 이를 이루기 전까지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참된 창조력을, 부적절한 방법으로 스스로를 더 편안하게 만들려는 헛된 시도에 낭비한다. 그러나 참된 수단은 이미 마련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들 편에서 아무런 노력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속죄는 하나님의 제단에 바쳐질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선물이다. 이는 제단 자체의 가치 때문이다. 제단은 완전하게 창조되었으며 완전함을 받기에 온전히 합당하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물은 서로에게 완전히 의존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하게 창조했기에 그들에게 의존한다. 하나님은 그들이 흔들릴 수도 속을 수도 없도록 그들에게 자신의 평화를 주었다.
그대가 두려워할 때마다 그대는 속고 있는 것이며, 그대의 마음은 성령을 섬길 수 없다. 속고 있는 이 상태는 그대에게서 그날의 양식을 빼앗아 그대를 굶주리게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들 없이는 외롭고, 아들들도 하나님 없이는 외롭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세상을 분리를 치유하는 수단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속죄는 아들들이 결국 성공하리라는 보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