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두려움은 사랑을 향한 부름

두려움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그것에서 벗어나기에 충분하지 않다. 다만 벗어날 필요성을 증명하려면 그 인식이 필요하다. 성령은 여전히 두려움을 진리로 옮겨야 한다. 두려움을 인식한 뒤에도 그 두려움이 그대에게 남아 있다면, 그대는 실재를 향해서가 아니라 실재로부터 멀어지는 한 걸음을 내디딘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에고를 풀어내는 결정적인 단계로서, 두려움을 인식하고 가리지 않고 두려움을 직면할 필요성을 반복해서 강조해 왔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의 동기에 대한 성령의 해석이 그대에게 얼마나 잘 도움이 될지 생각해 보라. 다른 이들 안의 오직 사랑의 생각만을 받아들이고 그 밖의 모든 것을 도움을 향한 호소로 여기도록 그대를 가르쳐 온 성령은, 두려움 자체가 도움을 향한 호소라는 것도 그대에게 가르쳤다.

이것이 두려움을 인식한다는 것이 진정으로 뜻하는 바다. 그대가 두려움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성령은 두려움을 다시 해석해 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공격을 사랑을 향한 부름으로 지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의 궁극적 가치다.

우리는 이미 두려움과 공격이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배웠다. 오직 공격만이 두려움을 낳는다면, 그리고 그대가 공격이 실제로 도움을 향한 부름임을 알아본다면, 두려움의 비실재성이 그대에게 밝아올 수밖에 없다.

두려움은 부정되어 온 것에 대한 무의식적 인식 안에서, 사랑을 향한 부름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그대 자신의 깊은 상실감의 증상이다.

다른 이들 안에서 두려움을 지각할 때 그 상실을 채워 주는 법을 배운다면, 두려움의 근본 원인이 제거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두려움이 그대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가르치게 된다.

두려움을 제거하는 수단은 그대 안에 있으며, 그대는 그 수단을 줌으로써 이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두려움과 사랑은 그대가 지닐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거짓이다. 그 하나가 부정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며, 부정은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 부정되는 대상에 대한 믿음에 의존한다.

두려움이 가리고 있는 근원적 믿음에 대한 긍정적 확언으로 두려움을 올바르게 해석함으로써, 그대는 두려움을 쓸모없게 만들어 그 겉보기 유용성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전혀 작동하지 않는 방어는 자동으로 버려진다. 두려움이 감추고 있는 것을 명백하고 확실한 우위로 끌어올린다면, 두려움은 무의미해진다.

그대는 사랑을 감추는 두려움의 힘을 부정한 것인데, 사랑을 감추는 것이야말로 두려움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그대가 사랑의 얼굴에 드리웠던 베일은 사라졌다.

세상의 실재인 사랑을 바라보고자 한다면, 사랑에 맞선 모든 방어 안에서 사랑을 향한 근원적 호소를 알아보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겠는가? 그리고 사랑을 줌으로써 사랑을 향한 호소에 답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그 실재를 배울 수 있겠는가?

두려움에 대한 성령의 해석은 참으로 두려움을 몰아낸다. 진리에 대한 알아차림은 부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령은 두려움을 사랑으로 대체하고 오류를 진리로 옮긴다.

그리고 이렇게 그대는 분리의 꿈을 하나됨의 사실로 대체하는 법을 성령에게서 배우게 될 것이다. 분리는 오직 하나됨의 부정일 뿐이며, 올바르게 해석된다면, 하나됨이 참이라는 그대의 영원한 앎을 증언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