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오직 실재 세계
1) 지각에서 앎으로
그대가 지각하는 대로의 세상은 아버지가 창조한 것일 수 없다. 세상은 그대가 보는 그대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영원한 것만을 창조했으며, 그대가 보는 모든 것은 소멸한다. 그러므로 그대가 보지 못하는 또 다른 세상이 있을 수밖에 없다.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말하지만, 이것이 문자 그대로 참일 수는 없다. 영원한 것은 다시 창조되지 않기 때문이다. 새롭게 지각한다는 것은 그저 다시 지각한다는 것일 뿐이다. 이는 그 이전에는, 혹은 그 사이의 간격 동안에는, 그대가 전혀 지각하고 있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그대가 볼 때 그대의 지각을 기다리고 있는 그 세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지금까지 품었던 모든 사랑의 생각은 영원하다. 그 아들의 마음이 이 세상에서 지각하는 사랑의 생각들이 이 세상의 유일한 실재다.
그 사랑의 생각들은 여전히 지각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여전히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랑의 생각들은 사랑이기에 영원하다. 그리고 사랑이기에 그것들은 아버지와 같으며, 그래서 죽을 수 없다.
실재 세계는 실제로 지각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오직 그 밖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지각하지 않으려는 의향뿐이다. 그대가 선과 악을 둘 다 지각한다면, 그대는 거짓과 참을 둘 다 받아들이며 그 둘 사이에 아무 구분도 짓지 않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어느 정도의 선은 볼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선만을 보지는 못한다. 그것이 에고의 지각이 그토록 가변적인 이유다. 에고는 선함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대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고는 언제나 실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실재에 덧붙여, 그렇게 환상과 실재를 혼동시킨다.
이는 지각이 부분적으로만 참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진리와 환상 둘 다를 믿는다면, 그대는 어느 것이 참인지 구별할 수 없다.
자신의 개인적 자율성을 세우기 위해 그대는 아버지와 다르게 창조하려 했고, 자신이 만든 것이 아버지와 다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참인 모든 것은 아버지와 같다.
실재 세계만을 지각하는 것은 그대를 참된 천국으로 이끌 것이다. 그 지각이 그대로 하여금 천국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선함에 대한 지각은 앎이 아니지만, 선함의 반대를 부정하는 것은 반대되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그대가 인식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이것이 앎의 조건이다. 이 자각 없이는 그대는 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것이며, 그 조건을 충족하기 전까지는 앎이 이미 그대의 것임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자신과 자신의 창조주 사이에 두었던 많은 관념을 만들었으며, 이 믿음들이 그대가 지각하는 대로의 세상이다. 여기에 진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진리는 흐릿하다. 그대는 자신이 만든 것과 자신이 창조한 것 사이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실재 세계를 지각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대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알려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실재 세계는 그대가 만든 것 가운데서 성령이 그대를 위해 간직해 온 전부이며, 오직 이것만을 지각하는 것이 구원이다. 그 지각이 실재란 오직 참인 것뿐이라는 인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단순한 과정이다. 그대는 아마 결국 오직 실재만이 참이라고 가르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실재 세계를 믿는가? 실재 세계를 지각할 때, 그대는 자신이 실재 세계를 믿지 않았음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새롭고 유일하게 실재하는 지각은 너무나 신속하게 앎으로 옮겨져서, 그대에게는 오직 이것만이 참임을 깨달을 순간 하나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대가 만든 모든 것, 선한 것과 악한 것, 거짓과 참인 것 모두가 잊힐 것이다. 천국과 땅이 하나가 됨에 따라, 실재 세계마저도 그대의 시야에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끝은 세상의 파괴가 아니라 천국으로의 이행이다. 세상의 재해석은 모든 지각을 앎으로 옮기는 것이다.
2) 어린아이처럼 구함
성경은 그대에게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말한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이 지각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묻는다. 그대가 지각하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라. 그 의미는 그대에게서 사라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이 그대를 위해 그 의미를 간직해 왔으니, 그대가 성령이 그 의미를 해석하게 한다면, 성령은 그대가 던져 버린 것을 그대에게 회복시켜 줄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 의미를 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그 의미를 성령에게 물을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자신이 지각하는 그 무엇의 의미도 알지 못한다. 그대가 품고 있는 그 어떤 생각도 온전히 참되지 않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그대의 확고한 출발점이다. 지각에 대한 가르침이 그대에게 절실히 필요한데, 그대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되 받아들이지는 말라. 이해는 그대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지각은 학습되는 것이며, 그대에게는 스승이 있다. 그러나 스승에게서 배우려는 그대의 의향은, 자신에게서 배운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하려는 그대의 의향에 달려 있다. 잘못 배운 그대가 자기 자신의 스승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기 자신 외에는 진리를 억누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준 답을 그대에게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의 것을 구하고, 진리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지 말라.
그대는 하나님이 이미 답한 문제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단 하나의 단순한 질문만을 던지라. 나는 문제를 원하는가, 답을 원하는가? 답을 택하라. 그러면 답을 갖게 될 것이다. 그대는 답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이며, 그것은 이미 그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 과정이 그대가 이해하고 쓰기에 충분히 구체적이지 않다고 불평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마 그대는 이 과정이 구체적으로 권하는 것을 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관념의 유희에 관한 과정이 아니라 그것들의 실제 적용에 관한 과정이다.
그대가 구하면 받을 것이라는 말보다 더 구체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그대가 문제들이 구체적이라고 믿는 한, 성령은 모든 구체적인 문제에 답할 것이다. 그대가 하나가 여럿이라고 믿는 한, 성령의 답은 여럿이면서 동시에 하나다.
그대는 성령의 답이 그대에게 요구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성령의 구체성을 두려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직 구함으로써만, 그대는 하나님에게 속한 그 무엇도 그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울 것이다. 하나님은 준다. 빼앗지 않는다. 그대가 구하기를 거부할 때, 그 이유는 구하는 일이 나눔이 아니라 빼앗음이라고 그대가 믿기 때문이다.
성령은 오직 그대의 것만을 그대에게 줄 것이며, 그 대가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것은 모든 것이며, 그대는 그것을 하나님과 나누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눈다는 것이 그대의 것이 지닌 실재다.
오직 회복하기만을 뜻하는 성령이, 그 답을 배우기 위해 그대가 물어야 할 질문을 잘못 해석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답을 들었지만, 질문을 잘못 이해했다. 그대는 성령에게 인도를 구하는 것이 결핍을 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어린 자녀여, 그대는 자신의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대는 빼앗음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믿기에, 빼앗는 세상을 믿는다. 그리고 그 지각으로 인해 그대는 실재 세계를 시야에서 놓쳐 버렸다.
그대는 자신이 보는 대로의 세상을 두려워하지만, 실재 세계는 여전히 구하기만 하면 그대의 것이다. 실재 세계를 자신에게서 부정하지 말라. 실재 세계는 그대를 자유롭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 속한 그 무엇도 하나님의 아들을 노예로 삼지 않을 것이다. 그 아들은 하나님이 자유롭게 창조했으며, 그 자유는 하나님의 존재함(being)으로 보호받는다.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진리를 구하려는 그대는 복되다. 오직 그렇게 해야만 그대는 하나님의 답이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임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자녀여, 그대는 다만 내가 그대에게 약속한 것을 구하고 있을 뿐이다. 그대는 내가 그대를 속이리라고 믿는가? 천국은 그대 안에 있다. 진리가 내 안에 있음을 믿으라. 나는 진리가 그대 안에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나누지 않는 것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나님의 어느 아들에게든 진리를 구하라. 그러면 그대는 진리를 나에게 구한 것이다. 우리 가운데 자신 안에 답을 지니지 않은 이는 하나도 없으며, 답을 자신에게 구하는 누구에게든 줄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무엇이든 구하라. 그러면 그의 아버지가 그대에게 답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아버지를 오해하지 않고, 그의 아버지도 그를 오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3) 형제의 실재만 보기
그러므로 그대의 형제에 대해 속지 말고, 오직 그의 사랑의 생각들만을 그의 실재로 보라. 그의 마음이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함으로써 그대는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받아들이듯 그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 안으로 그를 치유하라. 그리스도가 그의 치유이자 그대의 치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어떤 식으로도 분리되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의 모든 생각은 그가 창조된 근원인 아버지의 생각만큼이나 사랑으로 가득하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속지 말라. 그렇게 되면 그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속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속으면, 그대는 어떤 속임도 불가능한 그대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속게 된다.
실재 세계에는 병이 없다. 거기에는 분리도 분열도 없기 때문이다. 오직 사랑의 생각들만이 인식되며, 모든 이가 그대의 도움을 받고 있기에, 하나님의 도움이 어디서나 그대와 함께한다.
그대가 이 도움을 구함으로써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될 때, 그대는 도움을 원하기 때문에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그 무엇도 그대의 치유하는 힘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단순한 요청이 거부되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답의 임재 안에서 사라지지 않을 문제가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그대의 형제의 실재를 알기 위해 구하라. 그대가 형제 안에서 지각하게 될 것이 바로 그 실재이며, 그대는 자신의 아름다움이 그의 아름다움 안에 비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형제가 자신에 대해 지니는 변덕스러운 지각을 받아들이지 말라. 형제의 분열된 마음이 곧 그대의 마음이며, 그대는 그의 치유 없이는 자신의 치유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천국을 나누듯 실재 세계도 나누며, 그의 치유는 곧 그대의 치유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치유하는 것이며, 그대는 자신의 일부를 병든 것으로 지각하면서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는 없다. 형제여, 우리는 함께 살고 함께 사랑하듯 함께 치유한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속지 말라. 그 아들은 자기 자신과 하나이며 자신의 아버지와도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그를 사랑하라. 그러면 그대는 그대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될 것이다.
형제 안에서 모욕을 지각한다면 그대의 마음에서 그 모욕을 뽑아내라. 그대는 그리스도에게 모욕당한 것이며 그리스도에 대해 속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치유하고 그에게 모욕당하지 말라. 그리스도 안에는 아무 모욕도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지각하는 것이 그대를 모욕한다면, 그대는 자기 자신에게 모욕당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이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에게 가하는 모든 모욕을 제거하게 하고, 오직 성령의 인도를 통해서만 누구든 지각하라. 성령은 그대를 모든 정죄로부터 구하려 하기 때문이다.
성령의 치유하는 힘을 받아들이고, 성령이 그대에게 보내는 모든 이를 위해 성령의 치유하는 힘을 쓰라. 성령은 자신이 속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을 치유하기를 뜻하기 때문이다.
4) 두려움을 보고 웃음
어린아이들은 무서운 유령과 괴물과 용을 지각하고, 겁에 질린다. 그러나 그들이 신뢰하는 누군가에게 자신이 지각한 것의 의미를 묻고, 실재를 위해 자신의 해석을 기꺼이 내려놓는다면, 어린아이들의 두려움은 사라진다. 어린아이가 자신의 "유령"을 커튼으로, 자신의 "괴물"을 그림자로, 자신의 "용"을 꿈으로 옮겨 이해하도록 도움을 받으면, 그 아이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두려움을 보고 즐겁게 웃는다.
나의 아이여, 그대는 그대의 형제들과 그대의 아버지와 그대 자신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대는 그저 형제들과 아버지와 자신에 대해 속고 있을 뿐이다. 실재의 스승에게 형제들과 아버지와 자신이 무엇인지 물으라. 그러면 스승의 답을 듣고서, 그대도 자신의 두려움을 보고 웃으며 두려움을 평화로 대체하게 될 것이다.
두려움은 실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마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두렵게 하는 것은 오직 아이들의 이해 부족뿐이며, 참되게 지각하는 법을 배우면 아이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때문에, 아이들은 두려울 때 다시 진리를 구할 것이다.
그대를 두렵게 하는 것은 그대의 형제들이나 그대의 아버지나 그대 자신의 실재가 아니다. 그대는 형제들과 아버지와 자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그래서 그들을 유령과 괴물과 용으로 지각한다. 그들을 아는 이에게 형제들과 아버지와 자신의 실재가 무엇인지 물으라. 그러면 그가 그대에게 형제들과 아버지와 자신이 무엇인지 말해 줄 것이다.
그대는 형제들과 아버지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대가 보는 것에 속고 있기에, 그대의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실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진리와 맞바꾸는 일이 구하기만 하면 그대의 것이라면, 그대는 그렇게 바꾸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그대에 대해 속지 않는다면, 그대는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속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성령에게서 자기 자신에 대한 진리를 배울 수 있다. 성령은 그대가 하나님의 일부이므로 그대 안에는 속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대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속임 없이 자신을 지각할 때, 그대는 자신이 만든 거짓 세상 대신 실재 세계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대의 아버지는 그대에게 몸을 굽혀, 그대를 자신에게로 들어올림으로써 마지막 발걸음을 그대를 위해 내디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