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십자가 처형의 꿈, 부활
1) 지각은 해석
지각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많은 혼란이 있었다. 이 단어가 알아차림과 알아차림의 해석 둘 다에 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해석 없이 알아차릴 수 없다. 그대가 지각하는 것이 곧 그대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완전히 명료하다. 그대가 그 과정을 명료하게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대가 그 과정에 반하여 해석하고 있고, 그래서 그 과정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이 지각을 결정하므로, 그대는 그 과정이 뜻하는 바를 지각하지 못하고 그래서 그 과정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경험은 서로 다른 믿음으로 이어지며, 경험은 참으로 가르친다.
나는 그대가 점점 더 부정하고 싶지 않게 될 새로운 종류의 경험으로 그대를 이끌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해 배우는 것은 쉬운데, 그리스도와 함께 지각하는 데는 아무런 무리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지각이 그대의 자연스러운 알아차림이며, 그대를 지치게 하는 것은 오직 그대가 끌어들이는 왜곡뿐이다.
그대 안의 그리스도가 그대를 위해 해석하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에게 걸맞지 않은 좁고 하찮은 믿음으로 그대가 보는 것을 제한하려 하지 말라. 그리스도가 자신의 것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을 아버지 없는 존재로 볼 것이기 때문이다.
2) 부활의 신을 선택
나는 그대의 부활이며 그대의 생명이다. 그대는 하나님 안에 살기에 내 안에도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모든 이 안에 살듯이, 모든 이도 그대 안에 산다.
그렇다면 그대는 형제 안에서 무가치함을 지각하면서 자신 안에서는 무가치함을 지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대는 자신 안에서 무가치함을 지각하면서 하나님 안에서는 무가치함을 지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부활을 믿으라. 부활은 이미 이루어졌고, 그대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으로도 늘 그렇듯 지금도 참이다. 부활은 시간도 예외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은 아무 예외도 두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를 위해 이루어진 부활을 지각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함께 아버지에게로 올라가는데, 처음에 그러했듯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아버지가 창조한 그대로의 하나님의 아들의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헌신의 힘도, 그가 숭배하는 신이 그에게 미치는 힘도 과소평가하지 말라. 그가 만든 신이든 그를 창조한 하나님이든, 그는 자신이 숭배하는 신의 제단에 자신을 두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노예 상태가 그의 자유만큼이나 완전한 이유다. 그는 오직 자신이 받아들인 신에게만 복종할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 처형의 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기를 요구하며, 그 신을 숭배하는 자들은 복종한다. 그 신의 이름으로 그들은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하나님의 아들의 힘이 희생과 고통에서 태어난다고 믿는다.
부활의 하나님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빼앗기를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복종을 요구하지 않는다. 복종은 굴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만 그대가 희생과 굴복의 정신이 아니라 자유의 기쁨 속에서, 자신의 뜻을 배우고 그 뜻을 따르기를 바랄 뿐이다.
부활은 기쁨의 상징이므로, 그대의 충성을 기쁘게 이끌어 낼 수밖에 없다. 부활의 강력한 힘 전체는 부활이 그대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을 나타낸다는 사실에 있다.
그대를 아프게 하고 초라하게 만들고 두렵게 하는 모든 것을 뒤로할 수 있는 자유는 그대에게 억지로 떠맡겨질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는 그대에게 주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대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자유를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님은 그 아들에게 은혜로우며, 그를 의심 없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대의 것은 누구인가? 아버지는 자신의 것 전부를 그대에게 주었으며, 그것들과 함께 아버지 자신도 그대의 것이다. 아버지가 준 그 모든 것을 그것들의 부활 안에서 지키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영원히 그대의 것인 것에 안전하게 둘러싸여 하나님 안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3) 해방을 나눔
하나님의 아들의 손에서 못을 빼내고 그의 이마에서 마지막 가시를 뽑아내기 전까지 그대는 평화를 찾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 처형의 신이 정죄하는 그 아들을 둘러싸고 있다. 내가 헛되이 죽었다고 가르치지 말라. 오히려 내가 그대 안에 살아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내가 죽지 않았다고 가르치라.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 처형을 되돌리는 것이 해방(redemption)의 과업이며, 여기서 모든 이는 동등한 가치의 역할을 지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결백한 그 아들을 심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 아들에게 자신을 주었으니, 어찌 달리 있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자신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웠다. 그러나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은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아들은 자신의 십자가 처형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하나님이 영생을 준 이를 그대가 죽음에 넘길 수는 없다.
십자가 처형의 꿈이 여전히 그대의 눈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지만, 그대가 꿈속에서 보는 것은 실재가 아니다.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힌 존재로 지각하는 동안, 그대는 잠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다고 믿는 한, 그대는 그저 악몽을 꾸고 있을 뿐이다.
깨어나기 시작하는 그대는 여전히 꿈을 의식하고 있으며, 아직 그 꿈을 잊지 않았다. 꿈을 잊는 것과 그리스도를 알아차리는 것은, 그대의 해방을 함께 나누기 위한 다른 이들의 깨어남과 함께 온다.
그대는 자신의 부름에 깨어날 것이다. 깨어나라는 그 부름이 그대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대 안에 산다면, 그대는 깨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내가 그대를 통해 하는 일들을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 일들을 그대에게 행했음을 지각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대를 통해 할 수 있다고 그대가 믿는 것에 한계를 두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이루어졌다. 그대가 받은 모든 것을 주지 않는 한, 그대는 그대의 해방자가 살아 있다는 것과 그대가 그 해방자와 함께 깨어났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해방은 오직 해방을 나눔으로써만 인식된다. 하나님의 아들은 구원받았다. 이 자각만을 아들됨(Sonship)에 가져오라. 그러면 그대는 나의 역할만큼 가치 있는 해방의 역할을 갖게 될 것이다. 그대가 나에게서 그 역할을 배운다면, 그대의 역할은 나의 역할과 같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자신의 역할이 제한되어 있다고 믿는다면, 그대는 나의 역할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기적에는 난이도의 순서가 없다. 하나님의 모든 아들이 동등한 가치를 지니며, 그 동등함이 곧 하나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힘 전체가 하나님의 모든 부분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뜻에 모순되는 것은 크든 작든 아무것도 없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크기도 척도도 없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는 아버지와 같아지는 것이 주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