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에고 너머를 보는 부활
1) 자율성이라는 꿈
환상을 바라보지 않는 한 아무도 환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바라보지 않는 것이 환상이 보호받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환상으로부터 움츠러들 필요는 없다. 환상은 위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에고의 사고 체계를 더 가까이 들여다볼 준비가 되어 있다. 함께라면 우리에게 그것을 몰아낼 등불이 있기 때문이며, 그대가 에고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그대도 준비되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에고의 "역학"이 한동안 우리의 수업이 될 것이다. 그대가 에고를 실재로 만들었으니 그것 너머를 보기 위해서는 먼저 에고를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조용히 이 오류를 풀고, 그런 다음 에고 너머의 진리를 바라볼 것이다.
치유란 앎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환상을 보호하지 않고 직접 바라보는 것 말고 달리 어떻게 환상을 몰아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가 바라보게 될 것은 두려움의 근원이며, 그대는 두려움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또한 두려움의 결과들이 그저 그 결과들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만으로도 몰아내질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다음 단계는 분명 결과가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법칙은 진공 속에서 작동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낳지 않는 것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실재를 그 확장으로 알아본다면, 아무것도 낳지 않는 것은 실재일 수 없다.
그렇다면 두려움을 바라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움은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명료함은 정의상 혼란을 풀어내며, 빛을 통해 어둠을 바라보는 것은 반드시 어둠을 몰아낸다.
"에고 역학"에 관한 이 수업을, 그 용어 자체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그 용어는 스스로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용어 자체의 모순을 담고 있다.
"역학"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하는데, 분리라는 오류 전체는 에고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는 믿음에 놓여 있다. 에고가 그대에게 두려운 것은 그대가 이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는 매우 단순하다. 모든 힘은 하나님에게서 온다.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할 힘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에고를 바라볼 때, 우리는 역학이 아니라 망상을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분명 두려움 없이 망상적 체계를 바라볼 수 있다. 그 근원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그 체계는 어떤 결과도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에고의 목표를 인식한다면 두려움은 더욱 분명히 부적절해 보인다. 그 목표는 너무나 명백히 무의미하여 그 목표를 위한 어떤 노력도 필연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 소모될 뿐이기 때문이다. 에고의 목표는 아주 명백하게 에고의 자율성이다.
그렇다면 에고의 목적은 처음부터 분리되고, 스스로 충분하며, 자기 자신의 힘 외에는 어떤 힘으로부터도 독립하는 것이다. 이것이 에고가 분리의 상징인 이유다.
모든 관념에는 목적이 있으며, 그 목적은 언제나 그 관념이 무엇인지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에고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은 에고의 핵심 믿음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그 결과들을 풀어내는 길은 다만 그 결과들의 근원이 자연스럽지 않으며 그대의 참된 본성과 어긋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뿐이다.
나는 전에 하나님에게 반하여 뜻하는 것은 희망 사항일 뿐 진정한 뜻함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다. 하나님의 뜻의 확장은 그 자체와 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대가 경험하는 진짜 갈등은 에고의 헛된 소망과, 그대가 함께 나누는 하나님의 뜻 사이의 갈등이다. 이것이 진짜 갈등일 수 있는가?
그대의 것은 자율성의 독립이 아니라 창조의 독립이다. 그대의 창조적 역할 전체는 하나님에 대한 그대의 완전한 의존 안에 있으며, 하나님은 자신의 역할을 그대와 나눈다. 그 역할을 나누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향으로 인해, 하나님은 그대가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만큼 그대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그대로부터 독립하지 않기를 뜻하는 하나님에게 에고의 오만함을 돌리지 말라. 하나님은 그대를 자신의 자율성 안에 포함시켰다. 그대는 자율성이 하나님과 별개로 의미가 있다고 믿을 수 있는가?
에고의 자율성에 대한 믿음은 그대의 자유가 놓여 있는, 하나님에 대한 그대의 의존에 관한 앎을 그대에게서 앗아가고 있다. 에고는 모든 의존을 위협으로 보며, 하나님을 향한 그대의 그리움마저도 자신을 세우는 수단으로 뒤틀어 왔다.
그러나 그대의 갈등에 대한 에고의 해석에 속지 말라. 에고는 언제나 분리를 위해 공격한다.
에고는 자신이 이것을 할 힘이 있다고 믿기에 다른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자율성이라는 그 목표가 다른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에고는 실재에 대해 완전히 혼란스러워하지만, 자신의 목표를 놓치지는 않는다. 에고는 그대보다 훨씬 더 경계하고 있다. 자신의 목적을 완전히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혼란스러운 것은 그대 자신의 목적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고가 그대로 하여금 깨닫기를 가장 바라지 않는 것이 바로 그대가 에고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임을 그대는 인식해야 한다.
에고가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에고는 그대의 독립을 줄이고 그대의 힘을 약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의 충성을 요구하는 에고의 유일한 근거는 에고가 그대에게 힘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믿음이 없다면 그대는 에고에게 전혀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에고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대가 자신을 하찮게 만들고 자신에게서 힘을 빼앗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에고의 존재가 어떻게 계속될 수 있겠는가?
에고는 그대가 자신을 거만하고, 믿지 않고, "가볍고", 냉담하고, 감정적으로 얕고, 무정하고, 무관심하며 심지어 절망적이라고 여기도록 허용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허용하지만, 정말로 두려워한다고 여기도록 허용하지는 않는다.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최소화하는 것이 에고의 끊임없는 노력이며, 참으로 에고가 매우 능란한 솜씨다.
두려움을 통해 지탱하지 않고서야 에고가 어떻게 분리를 설파할 수 있겠으며, 에고가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이것임을 알아본다면 그대가 에고에게 귀 기울이겠는가?
그대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형태가 어떠하든 에고가 그대로 하여금 어떻게 경험하기 원하든 상관없이, 그저 두려움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에고에 대한 근본적인 위협이다. 이 자각으로 인해 자율성이라는 에고의 꿈은 그 토대까지 흔들린다.
그대가 독립이라는 거짓 관념을 용인할 수는 있어도, 그 거짓 관념을 알아본다면 두려움이라는 대가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 대가이며, 에고는 그 대가를 최소화할 수 없다.
그대가 사랑을 간과한다면 그대는 자신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며, 자신을 부정했으므로 비실재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진리를 성공적으로 공격했다고 믿음으로써, 그대는 공격이 힘을 지녔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주 간단히 말해, 그대는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파괴하리라 믿는 것을 찾아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율성이라는 에고의 목표가 성취될 수 있다면 하나님의 목적이 패배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불가능하다. 두려움이 무엇인지 배움으로써만, 그대는 마침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에고의 가르침에 따르면, 에고의 목표는 성취될 수 있고 하나님의 목적은 성취될 수 없다. 성령의 가르침에 따르면, 오직 하나님의 목적만이 성취될 수 있고, 이미 성취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대가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만큼 그대에게 의존한다. 하나님의 자율성이 그대의 자율성을 아우르며, 그래서 그 자율성 없이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오직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진리 안에 존재하는 그대로의 역할을 완수함으로써만 자신의 자율성을 세울 수 있다.
에고는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할이 그대의 역할이며, 행복은 그대들이 함께하는 뜻과 별개로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그대에게 주어져 있다.
그대가 그토록 부지런히 좇아온 에고의 목표가 그저 그대에게 두려움만을 가져다주었다는 것만 인식하라. 그러면 두려움이 행복이라고 주장하기 어려워진다. 두려움으로 지탱되는 이것이 에고가 그대에게 믿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미치지 않았으며, 두려움으로 지탱되는 이것을 믿을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것을 알아보기만 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오직 미친 사람만이 사랑 대신 두려움을 택할 것이며, 오직 미친 사람만이 공격으로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정신인 사람은 오직 공격만이 두려움을 낳을 수 있음을 깨달으며, 하나님의 사랑이 제정신인 사람들을 그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보호한다.
2) 에고는 분석하고
에고는 분석하고, 성령은 받아들인다. 온전함에 대한 인정은 오직 받아들임을 통해서만 온다. 분석한다는 것은 무너뜨리거나 떼어 낸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전체를 무너뜨림으로써 전체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분명 모든 것에 대한 에고의 전형적으로 모순된 접근법이다.
에고는 힘과 이해와 진리가 분리 안에 있다고 믿으며, 이 믿음을 세우기 위해 공격해야만 한다. 에고는 그 믿음이 세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분리가 구원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자신이 지각하는 모든 것을 의미 있는 관계 없이, 그래서 의미 없이, 작고 단절된 조각들로 부수어 공격한다.
에고는 언제나 의미 대신 혼돈을 들이민다. 분리가 구원이라면 조화는 위협이기 때문이다.
지각의 법칙에 대한 에고의 해석은 성령의 해석과 정반대이며, 정반대일 수밖에 없다. 에고는 오류에 초점을 맞추고 진리를 간과한다. 에고는 자신이 지각하는 모든 잘못을 실재로 만들고, 전형적으로 순환적인 추론으로 그 잘못 때문에 일관된 진리는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짓는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분명하다. 일관된 진리가 무의미하다면, 비일관성이 진실일 수밖에 없다. 잘못을 마음속에 뚜렷이 붙들고, 자신이 실재로 만든 것을 보호하면서, 에고는 자신의 사고 체계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 오류는 실재이고 진리는 오류다.
에고는 이것(오류는 실재이고 진리는 오류라는 것)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에고는 이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온갖 방법으로 다 하며, 그 일을 끊임없이 한다. 의미를 공격하기 위해 분석하면서, 에고는 의미를 간과하는 데 성공하고, 자신을 위해 하나로 통합하는 일련의 조각난 지각들만 남는다. 그렇다면 이것이 에고가 지각하는 우주가 된다. 그리고 다시 이 우주가 에고 자신의 실재성에 대한 증명이 된다.
귀 기울이려는 이들에게 에고의 증명들이 지니는 매력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선택적 지각은 자신의 증인을 신중하게 고르며, 그 증인들은 일관되어 있다.
광기에 대한 논거는 미친 자에게 강력하다. 추론은 그 시작점에서 끝나며, 어떤 사고 체계도 자신의 근원을 초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 없는 추론은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으며, 의미 없는 추론에 설득되는 이들은 망상에 빠져 있을 수밖에 없다.
진리를 간과하는 에고가 어떻게 참되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에고가 자신이 부정한 것을 지각할 수 있겠는가? 에고는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면서도 아버지를 보지 못한다. 그 아들을 부정해 왔기 때문이다.
3) 아들을 받아들임
그대는 아버지를 기억하고 싶은가? 그 아들을 받아들이라. 그러면 그대는 아버지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 아들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거짓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에고의 눈을 통해 그대가 그 아들에 대해 보는 것은 그 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명이지만, 아들이 있는 곳에는 아버지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부정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라. 그러면 그 아들이 자신의 진리를 증명해 보일 것이다.
하나님을 위한 증인들은 하나님의 빛 안에 서서 하나님이 창조한 것을 바라본다. 그 증인들의 침묵은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다는 표시이며,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서 그들은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침묵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말하기 때문이며, 그들이 하는 말은 그리스도의 말이다.
그대가 만나는 모든 형제는, 그대가 그 형제 안에서 무엇을 지각하는가에 따라, 그리스도를 위한 증인 혹은 에고를 위한 증인이 된다. 모든 사람은 그대가 지각하고 싶어 하는 것과, 그대가 경계하기로 선택한 나라의 실재성을 그대에게 확신시켜 준다. 그대가 지각하는 모든 것은 그대가 참이기를 바라는 사고 체계에 대한 증인이다.
그대가 자유로워지기를 선택한다면, 모든 형제는 그대를 풀어 줄 힘을 지니고 있다. 그대가 그 형제에게 불리한 거짓 증인들을 불러일으켰을 때에만, 그대는 그 형제에 대한 거짓 증언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 형제가 그대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면, 그대가 그 형제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대는 오직 자신의 목소리만을 들을 뿐이니, 그리스도가 그대를 통해 말한다면, 그대는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대가 보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대가 믿지 않는 것을 보는 것도 똑같이 불가능하다. 지각은 경험을 토대로 쌓이며, 경험은 믿음으로 이어진다. 믿음이 고정되고서야 비로소 지각이 안정된다. 그렇다면 사실상, 그대는 믿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다"라고 내가 말했을 때 뜻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부활을 믿는 이들은 부활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공격이 아니라 초월을 통한, 에고에 대한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다. 그리스도는 에고와 에고의 모든 소행 위로 일어서서, 아버지와 아버지의 나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대는 부활에 동참하겠는가, 십자가 처형에 동참하겠는가? 그대는 형제들을 정죄하겠는가, 형제들을 자유롭게 하겠는가? 그대는 자신의 감옥을 초월하여 아버지에게로 올라가겠는가? 이 물음들은 모두 같은 것이며, 함께 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