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참 아버지의 회복
1) 아버지는 누구인가
하나님이거나 에고이거나, 둘 중 하나는 제정신이 아니다. 양쪽의 증거를 공정하게 검토한다면, 이것이 반드시 사실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도 에고도 부분적인 사고 체계를 제시하지 않는다. 둘 다 내적으로는 일관되지만, 모든 면에서 정반대이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충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그 결과가 그 토대만큼이나 다르다는 것을 기억하라. 근본적으로 화해할 수 없는 이 둘의 본성은 둘 사이를 오가는 동요로는 화해될 수 없다.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든 아버지가 없을 수 없다. 생명은 창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결정은 언제나 "내 아버지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며, 그대는 그대가 선택한 아버지에게 충실할 것이다. 그러나 이 물음이 실제로 갈등을 동반한다고 믿는 사람에게 그대는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대가 에고를 만들었다면, 에고가 어떻게 그대를 만들 수 있었겠는가? 권위 문제는 여전히 갈등의 유일한 원천이다. 에고는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자신의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소망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에고는 그대가 자신의 아버지를 만들어 낸 망상적 체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을 착각하지 말라. 완전히 정직하게 말하면 이는 미친 소리로 들리지만, 에고는 결코 자신이 하는 일을 완전히 정직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에고의 미친 전제이며, 이는 에고의 사고 체계의 어두운 초석 속에 조심스럽게 숨겨져 있다.
그리고 에고의 사고 체계 전체는, 그대가 만든 에고가 그대의 아버지여야만 성립한다.
그대는 투사로 만들지만, 하나님은 확장으로 창조한다. 하나님의 창조의 초석은 그대다. 하나님의 사고 체계가 빛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게 거기 있는 광선들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사고 체계의 중심에 다가갈수록 빛은 더 밝아진다. 에고의 사고 체계에 가까이 갈수록 길은 더 어둡고 모호해진다. 그러나 그대 마음속의 작은 불꽃마저도 그 길을 밝히기에 충분하다.
2) 토대에 빛을 비춤
이 빛을 두려움 없이 지니고 가서, 에고의 사고 체계의 토대에 용감하게 비추어 보라. 그것(에고의 사고 체계)을 완전히 정직하게 판단할 의향을 가지라. 그것이 놓여 있는 공포의 어두운 초석을 열어, 그 초석을 빛 속으로 끌어내라. 거기서 그대는 그것이 무의미함 위에 놓여 있었고, 그대가 두려워했던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근거하고 있었음을 보게 될 것이다.
나의 형제여, 그대는 하나님의 일부이며 나의 일부다. 마침내 위축되지 않고 에고의 토대를 바라볼 때, 그대는 또한 우리의 토대도 바라보게 될 것이다. 나는 우리 아버지로부터 그대에게 와서, 모든 것을 다시 그대에게 주고자 한다. 어두운 초석을 숨겨 두려고 내가 주려는 것을 거부하지 말라. 그 보호는 그대를 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에게 등불을 주고, 그대와 함께 갈 것이다. 그대는 이 여정을 혼자 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대를 그대의 참 아버지에게로 인도할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아버지도 그대를 필요로 한다. 그대는 기쁨으로 사랑의 부름에 답하지 않겠는가?
그대는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대 자신에게 치유가 필요함을 인식하면서도, 아들됨(Sonship)에 그 밖의 다른 무언가를 가져오려 하겠는가? 치유가 앎으로 돌아가는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 시작은 하나님이 그대와 함께 나누는 사고 체계를 다시 세우도록 도울 토대다. 그 토대 위에 그대가 놓는 돌은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 그대가 회복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거하는 거룩한 거처, 곧 하나님이 아들이 있기를 뜻하는 곳이자 하나님 자신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마음 중 어느 부분에서 이 실재를 회복하든, 그대는 그 실재를 그대 자신에게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형제와 함께 하나님의 마음(Mind) 안에 거한다. 하나님 자신이 혼자 있기를 뜻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자 있다는 것은 무한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한에 끝이 없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한계 없는 것의 너머에 있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한계가 없는 것은 반드시 어디에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하나님의 우주는 곧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 우주로부터, 곧 우주인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제외시킬 수 있는가? 나와 나의 아버지는 그대와 하나다.
그대가 우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정말로 하나님의 일부가 없어지거나 하나님에게서 상실될 수 있다고 믿는가?
그대가 하나님의 일부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뜻은 통일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있을 법한 일인가? 하나님의 마음의 일부가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그대의 자리를 그대 외에 누구도 채울 수 없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 그대의 창조였다면, 그대가 없다면 하나님의 마음(Mind)에는 빈자리가 있을 것이다. 확장은 막힐 수 없으며, 확장에는 공백이 없다.
아무리 부정되더라도 확장은 영원히 계속된다. 그대가 그 실재를 부정하는 것이 시간 안에서는 확장을 멈출 수 있을지 몰라도, 영원 안에서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그대의 창조물들은 확장되기를 멈추지 않았고, 그토록 많은 것이 그대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은 시간 안에서만 가능하지만, 시간에는 의미가 없다. 지연을 만들어낸 그대는, 영원한 존재(the Eternal)가 시작도 끝도 창조하지 않았음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시간을 뒤로할 수 있다.
영원한 존재는 자신의 창조물에도, 자신처럼 창조하는 이들에게도 아무 한계를 두지 않았다. 그대가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단지 그대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을 제한하려 해왔고, 그래서 모든 창조가 제한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한을 부정한 채로, 그대가 어떻게 그대의 창조물을 알 수 있겠는가?
3) 뜻의 하나됨
우주의 법칙은 모순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해당하는 것은 그대에게도 해당한다. 그대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재하다고 믿는다면, 그대는 하나님이 그대로부터 부재하다고 믿게 될 것이다. 그대 없이는 무한도 의미가 없고, 하나님 없이는 그대도 의미가 없다.
하나님과 그 아들에게는 끝이 없다. 우리가 곧 우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불완전하지 않으며, 자녀가 없지도 않다. 하나님은 혼자 있기를 뜻하지 않았기에, 자신과 같은 아들을 창조했다. 하나님에게서 그 아들을 부정하지 말라. 하나님의 아버지 됨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그대의 태도가 그대 자신의 아버지 됨을 그대에게서 부정해 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라. 그대의 창조물들은 하나님을 기려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우주는 그대가 그 사랑의 우주를 보지 못한다고 해서 멈추지 않으며, 그대의 감긴 눈이 보는 능력을 잃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바라보라. 그러면 하나님이 그대를 위해 간직해 온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대에게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영원히 그대의 것인 자리를 주었다. 그러나 그대는 그 자리가 그대에게 주어졌던 것처럼, 그 자리를 줌으로써만 지킬 수 있다.
하나님이 혼자 있기를 뜻하지 않았기에 그 자리가 그대에게 주어졌는데, 그대가 거기서 혼자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마음은 줄어들 수 없다. 오직 늘어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창조하는 모든 것이 창조하는 역할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제한하지 않으며, 사랑이 창조하는 것도 제한되어 있지 않다. 한계 없이 주는 것이 그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오직 한계 없이 주는 것만이 하나님의 것이자 하나님이 그대와 나누기를 뜻하는 기쁨을 그대에게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만큼 무한한 것은, 그대의 사랑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어떤 일부가 하나님의 사랑 없이 있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의 어떤 일부가 담길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그대의 유산이다. 하나님의 유일한 선물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대에게 준 선물을 알고자 한다면, 그대가 하나님처럼 주는 것 말고 달리 어떻게 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대에게 얼마나 주었는지 알기 위해, 한계 없이 끝없이 주라.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그대의 능력은 하나님이 주듯이 주려는 그대의 의향에 달려 있다. 그대의 아버지 됨과 그대의 아버지는 하나다.
하나님은 창조하기를 뜻하며, 그대의 뜻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렇다면 그대의 뜻이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되므로, 그대가 창조하기를 뜻한다는 것이 당연히 따라온다. 그리고 그대의 뜻은 하나님의 뜻의 확장이므로, 둘은 같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대는 자신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
부정한다는 것이 곧 "알지 못한다"는 것임을 깨닫는다면,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부정함으로써 그대는 자신의 뜻을 부정하며, 그래서 그대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대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그것이 그대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성령이 그대를 위해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성령에게 물으라. 그러면 성령이 그대의 뜻을 그대에게 말해 줄 것이다.
그대가 그대의 뜻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령이 그대에게 말하는 것이 강압적으로 보일 때마다, 이는 오직 그대가 자신의 뜻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에고의 투사는 하나님의 뜻이 마치 그대 바깥에 있는 것처럼, 그래서 그대의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런 해석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그대의 뜻이 충돌하는 것이 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대가 주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요구하여, 그대가 원하는 것을 빼앗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오직 그대의 뜻만을 원하는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대의 뜻은 하나님의 생명이며, 하나님은 그대의 뜻을 그대에게 주었다. 시간 안에서도 그대는 하나님과 떨어져 살 수 없다.
잠은 죽음이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것은 잠들 수 있지만 죽을 수는 없다. 불멸은 그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 자신을 향한 그 아들 자신의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에게 죽음을 뜻할 수 없다. 아들의 아버지가 생명이며 아들이 아버지와 같기 때문이다.
창조는 그대의 뜻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진정으로 뜻하는 것을 행하지 않는 한 그대는 행복할 수 없으며, 이 사실은 불변하기에 그대가 바꿀 수 없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뜻과 그대의 뜻으로 인해 불변한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뜻이 확장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것이 그대의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믿음이 그대의 병 전체이며 그대의 두려움 전체다.
병과 두려움의 모든 증상은 여기서 생겨난다. 이것이 그대로 하여금 알고 싶지 않게 만드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믿으면서 그대는 어둠 속에 숨어, 빛이 그대 안에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대가 성령을 신뢰하도록 요청받는 것은 오직 성령이 그대를 대변해 말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하나님을 대변하는 음성(Voice for God)이지만, 하나님이 혼자 있기를 뜻하지 않았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라.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그대와 나누지, 그 뜻을 그대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이 주는 것을 간직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그래서 하나님이 주는 것은 그 무엇도 하나님과 모순될 수 없다.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어 가진 그대는 그 생명을 알기 위해 그 생명을 나누어야 한다. 나누는 것이 곧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 아버지의 뜻을 듣는 것이 자신의 뜻을 아는 것임을 배우는 그대는 복되다.
그대의 뜻은 아버지와 같아지는 것이며,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 아들이 하나이며, 하나님의 하나됨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치유는 그대의 뜻이 하나님의 뜻임을 인식하는 시작이다.
4) 치유의 결정
병이 분리라면, 치유하고 치유받기로 하는 결정은 그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인식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모든 공격은 이것으로부터 멀어지는 한 걸음이며, 모든 치유의 생각은 이것을 더 가까이 가져온다.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둘 다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 아버지이자 아들이기 때문이다. 가짐과 있음을 하나로 합치는 것은 그대의 뜻을 하나님의 뜻과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대 자신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는 자신을 하나님에게 뜻한다.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하는 가운데, 오직 하나의 뜻만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어느 부분이든 공격할 때, 그대의 이해는 완전하지 않으며, 그래서 그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그대는 잃어버린다. 따라서 치유는 이해의 수업이 되며, 연습할수록 그대는 더 나은 스승이자 더 나은 학생이 된다.
그대가 진리를 부정해 왔다면, 그 진리의 실재에 대해 그 진리로 치유받은 이들보다 더 나은 증인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반드시 그대 자신도 그들 가운데 넣으라. 그들과 함께하려는 그대의 의향 안에서 그대의 치유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대가 이루는 모든 기적은 그대에게 하나님의 아버지 됨을 말해 준다. 그대의 형제로부터든 그대 자신의 마음속에서든, 그대가 받아들이는 모든 치유의 생각은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의 아버지 됨과 그대의 아들됨(Sonship)에 대한 부정은 그대가 품는 모든 상처 주는 생각 안에 놓여 있다. 그 생각을 어디서 지각하든 그렇다. 그리고 부정은 사랑만큼이나 전면적이다.
그대는 자신의 일부만 부정할 수 없다. 나머지가 분리된 것처럼, 그래서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부정이 그대에게 의미가 없기에, 그대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의미를 부정하는 것은 이해에 실패하는 것이다.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만을 치유할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이 치유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치유가 필요한 것은 그대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뜻을 잊어버렸기에, 그대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치유는 그대가 온전하게 만들고자 한다는 표시다. 그리고 이 의향이 그대의 귀를 성령의 음성에 열어 주는데, 성령의 메시지는 온전함이다. 성령은 그대가 시도하려는 치유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가게 해 줄 것이다. 온전하게 만들려는 그대의 작은 의향 곁에 성령 자신의 완전한 뜻을 놓아, 그대의 뜻을 온전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버지 됨을 자신 안에 지닌 하나님의 아들이 이루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5) 성령을 초대함
그러나 초대는 그대에게서 나와야 한다. 그대는 그대가 손님으로 초대하는 이가 그대와 함께 머물 것임을 분명 배웠기 때문이다. 성령은 자신을 반기지 않는 이에게 말할 수 없다. 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손님인 성령은 남아 있지만, 낯선 동무들 속에서 성령의 음성은 희미해진다. 성령이 그대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그대의 돌봄이 그대가 성령을 원한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아주 조금이라도 성령처럼 생각해 보라. 그러면 작은 불꽃이 타오르는 빛이 되어 그대의 마음을 채우고, 성령이 그대의 유일한 손님이 될 것이다.
에고에게 들어오라고 청할 때마다, 그대는 성령을 반기는 마음을 줄인다. 성령은 남아 있겠지만, 그대는 자신을 성령에게 맞서는 편에 두어 버린 것이다.
그대가 어떤 여정을 택하든, 성령은 기다리며 그대와 함께 갈 것이다. 그대는 안심하고 성령의 인내를 신뢰할 수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일부를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에게는 인내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그대는 자신의 역할을 알고 그것을 완수할 때까지 결코 쉬지 못할 것이다. 오직 이 안에서만 그대의 뜻과 그대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하나로 합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을 소유하는 것은 성령과 같아지는 것이며, 성령은 자기 자신을 그대에게 주었다. 하나님을 소유한 그대는 하나님과 같아야 한다. 하나님의 선물과 함께 하나님의 역할이 그대의 역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대가 하나님과 같다는 이 앎을 다시 그대의 마음 안으로 초대하고, 그 앎을 흐리게 하는 그 무엇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하나님이 그대에게 보낸 그 손님은, 그대가 그 작은 불꽃을 알아보고 그 불꽃이 자라도록 기꺼이 허락하기만 한다면, 그대에게 이를 행하는 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대의 의향이 완전할 필요는 없다. 성령의 의향이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저 작은 자리 하나만 성령에게 내어준다면, 성령은 그 자리를 크게 밝혀 주어 그대가 기꺼이 그 자리를 더 늘리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늘어남으로써, 그대는 창조를 기억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에고의 인질이 되겠는가, 하나님을 품은 이가 되겠는가?
그대는 오직 그대가 초대한 이만을 받아들일 것이다. 누가 그대의 손님이 될지, 그가 그대와 얼마나 오래 머물지를 정하는 것은 그대의 자유다. 그러나 이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여전히 그대가 이 자유를 어떻게 보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거기 있지만, 그대의 초대 없이는 그대를 도울 수 없다. 그리고 에고는, 그대가 들이든 들이지 않든, 아무것도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실재를 반기는 것에 달려 있으며, 그대의 손님들 가운데 오직 성령만이 실재한다.
그렇다면 누가 그대와 함께 머무는지 알라. 이미 거기 있는 것을 알아보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상상 속의 위로자들로 만족하지 말라. 하나님의 위로자가 그대 안에 있기 때문이다.
지칠 때, 그대가 자신을 해쳤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대의 위로자는 그대를 쉬게 해 줄 수 있지만, 그대 자신은 그럴 수 없다. 그대는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 만약 안다면 결코 지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자신을 해치지 않는 한 그대는 결코 어떤 식으로도 고통받을 수 없다. 고통이 그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공격을 알지 못하며 하나님의 평화가 고요히 그대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매우 고요하다. 하나님 안에는 갈등이 없기 때문이다.
갈등은 모든 악의 뿌리다. 눈이 멀어 있기에 갈등이 누구를 공격하는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등은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을 공격하며, 하나님의 아들은 곧 그대다.
하나님의 아들은 참으로 위로가 필요하다.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며 자신의 뜻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것이지만, 그는 집 없이 떠돈다. 하나님 안의 집에서 그는 외롭고, 그의 모든 형제 가운데서 그는 친구가 없다. 하나님 자신이 혼자 있기를 뜻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이런 일을 실재가 되도록 두겠는가? 그리고 그대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것은 그대에게 사실일 수 없다. 하나님에게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 나의 아이여, 하나님이 그대를 위해 뜻하는 것을 그대가 안다면, 그대의 기쁨은 완전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뜻하는 것은 이미 일어났다. 하나님의 뜻이 언제나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빛이 오고 그대가 "하나님의 뜻은 나의 것이다"라고 말하고 나면, 그대가 보게 될 아름다움은 너무나 대단하여, 그대는 그것이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의 기쁨으로부터 그대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할 것이다. 그대의 기쁨은 하나님의 기쁨이 그렇듯 더 이상 담길 수 없기 때문이다.
황량하고 작은 세상은 무(無) 속으로 사라질 것이며, 그대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서 천국으로, 하나님의 임재(Presence) 안으로 뛰어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