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병든 신 대신 평화
1) 공격은 자기 부인
그대가 공격할 때, 그대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구체적으로, 자신이 자신의 참모습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대의 실재 부인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대가 그 자리에 다른 무언가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자기 부인이 언제나 진리에 대한 공격이며 진리가 곧 하나님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대는 진리에 대한 공격이 왜 언제나 두려운 것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대가 하나님의 일부라는 것을 나아가 알아본다면, 그대는 왜 언제나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 공격하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그대의 마음의 평화에 얼마나 완전한 혼란을 일으키는지 깨닫는다면, 그대는 그런 미친 결정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그런 미친 결정이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얻게 해 줄 수 있다고 여전히 믿기에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대가 마음의 평화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원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그대는 그 무언가가 무엇일 수밖에 없는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대가 그저 그 무언가를 바라보기만 한다면, 그대의 결정이 낳는 논리적 결과는 완벽하게 명확하다. 자신의 실재에 반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그대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왕국에 맞서 경계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리고 바로 이 경계심이 그대를 하나님을 기억하기 두렵게 만드는 것이다.
그대는 하나님을 공격하지 않았으며, 그대는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대는 자신의 실재를 바꿀 수 있는가?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파괴하기를 뜻할 수 없다.
그대가 자기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이는 그대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미워하고 있다는 확실한 신호다. 그리고 그대가 공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그대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혐오스러울 수 있으며, 이 기이한 이미지가 그대 자신으로 하여금 하게 만드는 것은 매우 파괴적일 수 있다.
그러나 우상을 만드는 이들이 실제로 우상들을 숭배하기는 해도, 그 파괴는 그 이미지 이상으로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상들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상들을 숭배하는 이들은 병 속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의 병에서 풀려나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병든 아들들을 도울 그대의 힘을 제한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 힘을 그대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그 힘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 힘이 그대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대를 통한 하나님의 힘이 아니고서야, 병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어떤 위로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2) 에고의 우상
아들됨 안에서 하나님이 어디에서 받아들여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언제나 모두를 위해 받아들여지며, 그대의 마음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아들됨 전체에 걸쳐 깨어난다. 그저 그들을 위해 하나님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대의 형제들을 치유하라.
그대들의 마음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하나님에게는 오직 하나의 아들만이 있기에 하나님에게는 치유를 위한 오직 하나의 통로만이 있다. 모든 자녀와 이어진, 하나님의 남아 있는 소통의 연결은 자녀들을 서로 결합시키고, 또 자녀들을 하나님에게 결합시킨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은 그들을 치유하는 것이다. 이는 그 누구도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따라서 그 누구도 병들어 있지 않다는 인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병들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일부가 고통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사랑은 고통받을 수 없다. 공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에 대한 기억은 완전한 평화(invulnerability)를 가져다준다.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설령 그가 병을 믿더라도 병 편에 서지 말라. 그의 안에 있는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그대의 태도가 그가 잊어버린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를 하나님의 일부로 알아보는 그대의 태도는, 그가 부인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 관한 진리를 그에게 상기시킨다. 그대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부인을 강화해서 자기 자신을 놓치겠는가? 아니면 그에게 그의 온전함을 상기시키고 그와 함께 그대의 창조주를 기억하겠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병들었다고 믿는 것은 그가 숭배하는 것과 같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상숭배가 아니라 사랑을 창조했다. 우상숭배의 모든 형태는 창조의 희화화이며, 병든 마음들이 가르친 것이다. 그 마음들은 너무나 분열되어, 창조가 힘을 나누어 가질 뿐 결코 빼앗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병은 우상숭배다. 병이 힘을 그대에게서 빼앗을 수 있다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대가 전능한 하나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병든 신은 우상일 수밖에 없다. 병든 신은 그것을 만든 이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형상대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병든 신이 바로 에고가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지각하는 것이다. 스스로 창조되고 스스로 충족하며 매우 악의적이고 매우 취약한 병든 신 말이다.
병든 신이 그대가 숭배하고 싶은 우상인가? 병든 신이 그대가 지키려고 경계할 이미지인가?
에고의 사고체계가 낳는 논리적 결론을 차분히 바라보고, 에고의 사고체계가 주는 것이 정말로 그대가 원하는 것인지 판단해 보라. 그 결론이 바로 에고가 그대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가 주는 그것을 얻기 위해 그대는 형제들의 신성을 기꺼이 공격하려 하며, 그렇게 해서 그대 자신의 신성을 놓치려 한다. 그리고 그대는 그 신성을 숨겨 두려 하며, 자신을 구해 줄 것이라 생각하는 우상을 보호하려 하는데, 그 우상이 상징하는 위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3) 평화를 받아들임
왕국에는 우상숭배자가 없지만, 각자가 하나님의 일부라는 차분한 앎으로 인해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에 대한 큰 인정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상을 알지 못하지만, 자신의 아버지는 안다. 이 세상에서의 건강은 천국에서의 가치에 대응하는 것이다.
내가 그대에게 주는 것은 나의 공로가 아니라 나의 사랑이다. 그대가 자기 자신에게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가 자기 자신에게 가치를 두지 않을 때 그대는 병들지만, 그대에 대한 나의 가치 부여가 그대를 치유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의 가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의 평화를 그대에게 주노라"라고 내가 말했을 때, 나는 그것을 진심으로 말했다. 평화는 하나님으로부터 나를 통해 그대에게 온다. 그대가 평화를 요구하지 않을지라도 평화는 그대를 위한 것이다.
형제가 병들어 있을 때 이는 그가 평화를 요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는 자신이 평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평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환영의 부인이며, 병은 환영이다.
그러나 모든 하나님의 아들은, 그저 자기 자신 안에서 환영을 완전히 부인함으로써 왕국 어디에서든 환영을 부인할 힘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대를 알기에 그대를 치유할 수 있다. 나는 그대를 위해 그대의 가치를 알며, 그대를 온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가치다. 온전한 마음은 우상을 숭배하지 않으며, 서로 충돌하는 법칙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저 오직 하나의 메시지만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참되기에, 그대를 치유할 것이다. 그대가 나를 믿을 때, 메시지에 대한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온전하게 만들 것이다. 나는 속임수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져오지 않는다. 그대가 받아들이는 만큼 언제나 받는다는 것을 배울 때, 그대는 내가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에, 지금 모든 사람을 위해 평화를 받아들이고 그 사람들에게 모든 환영으로부터의 완벽한 자유를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