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음에서 위대함으로의 선택

1) 형제와 함께 구원

하나님의 뜻은 그대의 구원이다. 하나님이 구원을 찾을 수단을 그대에게 주지 않았겠는가? 하나님이 그대가 구원을 갖기를 뜻한다면, 하나님은 구원을 얻는 일을 가능하고 쉽게 만들어 놓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대의 형제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대는 구원을 찾아 멀리 갈 필요가 없다. 매 순간, 매초가 그대에게 자기 자신을 구원할 기회를 준다.

이 기회들을 놓치지 말라. 기회들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기쁨을 미루는 것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금 그대에게 완벽한 행복을 뜻한다. 이것이 그대의 뜻이기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것이 그대 형제들의 뜻이기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공동의 뜻 안에서 그대들 모두가 하나로 연합되어 있으며, 오직 이 공동의 뜻 안에서만 그렇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는 불일치가 있을 수 있지만, 이 공동의 뜻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이 공동의 뜻이 바로 평화가 머무는 곳이다. 그리고 그대가 그렇게 결정할 때 그대는 평화 안에 머문다. 그러나 그대는 속죄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평화 안에 머물 수 없다. 속죄가 평화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2) 마음속 두 평가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며, 너무나 명백해서 종종 간과된다. 에고는 명백한 것을 두려워한다. 명백함이 실재의 본질적인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보고 있지 않을 때만 명백함을 간과할 수 있다.

성령이 자신이 지각하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바라본다면, 성령은 그대를 사랑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완벽하게 명백하다. 그대에 대한 성령의 평가는 그대가 무엇인지에 대한 성령의 앎에 근거하며, 그래서 성령은 그대를 참되게 평가한다. 그리고 이 평가는 그대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성령이 그대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에고 또한 그대의 마음속에 있다. 그대가 그것을 그곳에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에 대한 에고의 평가는 성령의 평가와 정반대다. 에고는 그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고는 그대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에고 자신의 지각이 너무나 흔들리기에 에고 자신이 지각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불신한다.

따라서 에고는 잘해야 의심에, 최악의 경우 악의에 그칠 뿐이다. 의심과 악의가 에고의 범위다.

에고는 자신의 불확실성 때문에 의심과 악의의 범위를 넘어설 수 없다. 그리고 에고는 결코 확신할 수 없기에 결코 그 범위를 넘어설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의 마음속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상충하는 두 가지 평가가 있으며, 그 둘 다 참일 수는 없다. 그대는 이 두 평가가 얼마나 완전히 다른지 아직 깨닫지 못한다. 그대에 대한 성령의 지각이 실제로 얼마나 숭고한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그대가 무엇을 하든 그것에 속지 않는다. 성령은 그대가 무엇인지를 결코 잊지 않기 때문이다.

에고는 그대가 하는 모든 것에 속는다. 특히 그대가 성령에게 응답할 때 그러하다. 그런 때에 에고의 혼동이 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고는 그대가 사랑으로 반응할 때 특히 그대를 공격하기 쉽다. 에고는 그대를 사랑 없는 존재로 평가해 놓았고 그대가 그 판단에 어긋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동기가 에고의 그대에 대한 지각과 명백히 어긋나게 되는 즉시, 에고는 그대의 동기를 공격할 것이다. 이때가 바로 에고가 의심에서 악의로 갑작스럽게 옮겨 가는 때다. 에고의 불확실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되받아 공격하는 것은 분명 아무 소용이 없다. 이것이, 그대가 자신에 대한 에고의 평가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 외에 무엇을 의미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자기 자신을 사랑 없는 존재로 보기로 선택한다면, 그대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기 자신을 부적절한 존재로 여길 수밖에 없다.

그대는 에고를 바라보며 도움을 구하겠는가? 에고가 만들어 냈고 자신의 존재를 위해 유지해야만 하는 그 부적절감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말이다. 그대는 이 그림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에고의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그대에 대한 에고의 평가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그대는 미친 믿음 체계 안에서 그 체계를 평가할 수 없다. 미친 믿음 체계의 범위가 그런 평가를 막는다.

그대는 오직 미친 믿음 체계를 넘어서서, 온전한 정신이 존재하는 지점에서 되돌아보며 그 대비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오직 이 대비를 통해서만 미친 것이 미친 것으로 판단될 수 있다.

그대 안에 하나님의 위대함이 있음에도, 그대는 작은 존재가 되어 자신의 작음을 슬퍼하기로 선택했다. 이 선택을 지시한 그 체계 안에서는 그 슬픔이 불가피하다. 그곳에서는 그대의 작음이 당연하게 여겨지며, 그대는 "누가 그것을 허락했는가?"라고 묻지 않는다.

그 질문은 에고의 사고체계 안에서는 무의미한데, 그 질문이 사고체계 전체를 의문에 열어 놓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진짜 질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 바 있다.

어떤 종류든 앎이 부족한 것은 언제나 알고자 하지 않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 앎은 전체적이므로,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결국 앎이 완전히 사라진다.

따라서 그대의 작음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은 모든 앎을 부인하고 에고의 사고체계 전체를 온전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그대는 사고체계의 일부만을 유지할 수는 없다. 사고체계는 오직 그 토대에서만 의문에 부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토대는 사고체계를 넘어선 곳에서 의문에 부쳐져야 한다. 사고체계 안에서는 그 토대가 그대로 서 있기 때문이다.

3) 과대함의 해소

성령은 그저 에고의 사고체계의 토대가 참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그 사고체계의 실재성에 반하여 판단한다. 따라서 에고의 사고체계에서 비롯되는 그 무엇도 아무 의미가 없다. 성령은 그대가 지닌 모든 믿음을, 그 믿음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의 관점에서 판단한다. 그 믿음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 성령은 그 믿음이 참되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 않다면, 성령은 그 믿음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다.

그대 자신의 가치에 의문이 들 때마다 이렇게 말하라. 하나님도 나 없이는 불완전하다. 에고가 말할 때 이 말을 기억하라. 그러면 그대는 에고의 말을 듣지 않게 될 것이다.

그대에 관한 진리는 너무나 숭고해서, 하나님에게 걸맞지 않은 그 무엇도 그대에게 걸맞지 않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그대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하나님에게 온전히 걸맞은 것으로서 하나님에게 바치지 않을 그 무엇도 받아들이지 말라. 그대는 그 밖의 그 무엇도 원하지 않는다. 그대의 몫을 하나님에게 돌려주라. 그러면 하나님에게 속하며 하나님을 완전하게 하는 것을 돌려받은 대가로, 하나님은 그대에게 자신의 전부를 줄 것이다.

위대함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며,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비롯된다. 그러므로 위대함은 그대 안에 있다.

그대가 위대함을 아무리 희미하게라도 알아차릴 때마다, 그대는 자동으로 에고를 버리게 된다. 하나님의 위대함 앞에서는 에고의 무의미함이 완벽하게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에고는, 위대함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적"이 공격해 왔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대가 자신의 "보호"로 돌아오도록 유도하기 위해 선물을 주려 시도한다.

자기 팽창은 하나님의 위대함에 맞서는 에고의 대안이다. 그대는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과대함은 언제나 절망을 가리는 덮개다. 과대함은 실재하지 않기에 희망이 없다.

과대함은 그대의 작음이 실재한다는 믿음에 근거해 그 작음에 맞서려는 시도다. 이 믿음이 없다면 과대함은 무의미하며, 그대는 과대함을 결코 원할 수 없을 것이다.

과대함의 본질은 경쟁심이다. 과대함이 언제나 공격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과대함은 원상태로 되돌리려는 것이 아니라 능가하려는 망상적인 시도다.

우리는 앞서 에고가 의심과 악의 사이에서 흔들린다고 말했다. 그대가 자기 자신에게 절망하는 한, 에고는 계속 의심한다. 그대가 자기 비하를 더 이상 참지 않고 안도를 구하기로 결정할 때, 에고는 악의로 옮겨 간다. 그러면 에고는 공격이라는 환영을 "해결책"으로 그대에게 제시한다.

에고는 위대함과 과대함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기적의 충동과 자신의 것이면서도 에고에게 낯선 믿음들 사이에 아무 차이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에게 말한 바 있다. 에고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위협을 알아차리지만, 이 매우 다른 두 종류의 위협을 구별하지 못한다.

에고는 깊은 취약함을 느끼기 때문에 공격의 관점을 제외하고는 판단하지 못한다. 에고가 위협을 경험할 때, 에고의 유일한 결정은 지금 공격할 것인지 아니면 물러났다가 나중에 공격할 것인지다.

그대가 과대함이라는 에고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에고는 즉시 공격할 것이다. 그대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에고는 기다릴 것이다.

에고는 하나님의 위대함 앞에서 꼼짝 못하게 된다. 하나님의 위대함이 그대의 자유를 확립하기 때문이다. 그대 실재의 아주 희미한 기미조차 말 그대로 에고를 그대의 마음에서 몰아낸다. 그대가 에고에 대한 모든 투자를 포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위대함은 환영이 전혀 없으며, 위대함이 실재하기에 강력하게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그대가 에고로 하여금 위대함을 공격하게 두지 않을 때만, 실재에 대한 이 확신은 그대와 함께 남아 있을 것이다. 에고는 회복하여 그대의 해방에 맞서 자신의 에너지를 결집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에고는 그대가 미쳤다고 말할 것이며, 자신이 믿는 그 작음 때문에 위대함이 그대의 실재하는 일부일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위대함은 망상이 아닌데, 그대가 위대함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과대함을 만들었고 과대함이 공격의 한 형태이기에 과대함을 두려워하지만, 그대의 위대함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며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으로 창조한 것이다.

그대의 위대함으로부터 그대는 오직 축복할 수 있을 뿐이다. 그대의 위대함이 곧 그대의 풍요이기 때문이다. 축복함으로써 그대는 위대함을 그대의 마음속에 간직하며, 환영으로부터 보호하고 그대 자신을 하나님의 마음(Mind) 안에 두게 된다.

그대가 하나님의 마음(Mind) 안이 아니고서는 그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라. 이것을 잊을 때, 그대는 절망하고 공격하게 될 것이다. 에고는 오로지 에고를 참아 주려는 그대의 의향에만 의존한다. 그대가 자신의 위대함을 기꺼이 바라보고자 한다면 그대는 절망할 수 없으며, 따라서 에고를 원할 수 없다.

그대의 위대함은 에고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위대함이 참되기 때문이다. 작음과 위대함은 공존할 수 없으며, 서로 번갈아 나타나는 것도 불가능하다. 작음과 과대함은 번갈아 나타날 수 있고 또 반드시 그래야 한다. 둘 다 참되지 않기에 같은 차원에 있기 때문이다. 그 차원은 변동의 차원이기에 변동하는 것으로 경험되며, 극단이 그 차원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위대함이 곧 진리이기에, 진리와 작음은 서로를 부인한다. 진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진리는 언제나 참되다. 위대함이 그대에게서 빠져나갈 때, 그대는 위대함을 자신이 만든 무언가로 대체한 것이다. 그 무언가는 작음에 대한 믿음일 수도 있고, 과대함에 대한 믿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되지 않기에 미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대의 위대함은 결코 그대를 속이지 않을 것이지만, 그대의 환영은 언제나 그대를 속일 것이다. 환영은 속임수다. 그대는 승리할 수는 없지만, 드높여져 있다. 그리고 그대는 그 드높여진 상태에서 자신과 같은 이들을 찾아 그들과 함께 기뻐한다. 위대함을 과대함과 구별하는 것은 쉽다. 사랑은 되돌아오지만 자만심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4) 성령에게 물음

자만심은 기적을 만들어 내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그대에게서 그대 실재에 대한 참된 증인들을 빼앗을 것이다.

진리는 모호하지도 숨겨져 있지도 않다. 그러나 진리가 그대에게 명백해지는 곳은 그대가 그 증인들에게 가져다주는 기쁨 속이다. 그 증인들이 진리를 그대에게 보여 준다. 그 증인들은 그대의 위대함을 증언하지만, 자만심은 나누어지지 않기에 자만심을 증언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것을 그대가 보기를 원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대의 위대함을 증언하는데, 그 위대함이 오만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증인이 없는 것이 어떻게 실재할 수 있겠는가? 과대함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 그리고 과대함에서 아무 좋은 것도 나올 수 없다면, 성령은 과대함을 사용할 수 없다.

성령이 하나님의 뜻으로 변형시킬 수 없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과대함은 망상이다. 과대함이 그대의 위대함을 대체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한 것은 대체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대 없이는 불완전하다. 하나님의 위대함은 전체적이며 그대가 거기서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하나님의 마음(Mind) 안에서 전적으로 대체 불가능하다. 그 누구도 그 안에서 그대의 역할을 채울 수 없으며, 그대가 그 역할을 비워 두는 동안 그대의 영원한 자리는 그저 그대의 귀환을 기다릴 뿐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음성을 통해 그대의 역할을 그대에게 상기시키며, 하나님이 친히 그대의 확장물들을 그 안에서 안전하게 지킨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의 확장물들에게 돌아가기 전까지는 그 확장물들을 알지 못한다.

그대는 하나님의 나라를 대체할 수 없으며, 자기 자신을 대체할 수도 없다. 그대의 가치를 아는 하나님은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그래서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대의 가치는 하나님의 마음(Mind) 안에 있으며, 따라서 그대 자신의 마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그대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오만함일 수 없다. 그 받아들임이 오만함의 부인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작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오만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그대의 평가가 하나님의 평가보다 더 참되다고 그대가 믿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가 나뉠 수 없는 것이라면, 자기 자신에 대한 그대의 평가는 하나님의 평가일 수밖에 없다.

그대는 자신의 가치를 세우지 않았으며, 그 가치는 방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무엇도 그 가치를 공격하거나 그 가치를 이길 수 없다. 그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그 가치는 그저 존재할 뿐이다. 성령에게 그대의 가치가 무엇인지 물으라.

그러면 성령이 그대에게 말해 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응답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 응답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성령의 응답은 그 근원(Source) 때문에 드높여진 응답이지만, 그 근원은 참되며 그 응답도 참되다.

귀 기울이고 그대가 듣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지 말라. 하나님은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대가 작음에 대한 에고의 믿음을, 그대가 무엇인지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드높여진 응답으로 대체하기를 바란다. 이는 그대가 그 응답에 의문을 제기하기를 멈추고 그 응답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대 자신 너머에 있는 그 무엇도 그대를 두렵게 하거나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 그대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시간과 영원은 둘 다 그대의 마음속에 있으며, 그대가 시간을 오직 영원을 되찾는 수단으로만 지각하기 전까지는 서로 충돌할 것이다.

5) 깨어나 기억함

그대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일이든 자신 밖의 요인이 일으킨 것이라고 믿는 한, 그대는 시간을 그런 식으로 지각할 수 없다. 시간이 오직 그대의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며, 세상의 그 무엇도 이 책임을 그대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그대는 배워야 한다.

그대는 상상 속에서 하나님의 법칙을 어길 수는 있지만, 그것들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그것들은 그대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졌으며, 그대의 안전만큼이나 침해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대 외에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았으며 그대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하나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외에 무엇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 너머에서는 그 무엇도 일어날 수 없다. 하나님 외에는 그 무엇도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의 창조물들은 그대가 그러하듯 하나님에게 더해지지만, 모든 것이 언제나 존재해 왔기에 다른 그 무엇이 더해지는 것은 아니다. 덧없는 것 말고 무엇이 그대를 뒤흔들 수 있겠는가? 그대가 하나님의 유일한 창조물이고 하나님이 그대를 영원한 존재로 창조했다면 그 덧없는 것이 어떻게 실재할 수 있겠는가?

그대의 거룩한 마음이 그대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세운다. 그대가 지각하는 모든 것에 대해 그대가 보이는 모든 반응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그대의 마음이 그대가 지각하는 모든 것에 대한 그대의 지각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해 불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는 것은 알려질 수 있다. 하나님은 그것을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대를 자신을 위해 창조했지만, 그대가 하나님처럼 되도록 그대 자신을 위해 창조할 힘을 그대에게 주었다. 그대가 창조할 힘을 받은 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 거룩한 이유다.

그 무엇이 하나님의 사랑을 능가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 무엇이 그대의 뜻을 능가할 수 있겠는가? 그 무엇도 그대의 뜻 너머에서 그대에게 다다를 수 없다. 하나님 안에 있기에 그대가 모든 것을 아우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믿으라. 그러면 얼마나 많은 것이 그대에게 달려 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무엇이든 그대의 마음의 평화를 위협할 때, 스스로에게 물으라. "하나님이 나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바꾸었는가?" 그런 다음 하나님의 결정을 받아들이라. 하나님의 결정은 실로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그대의 마음을 바꾸기를 거부하라. 하나님은 결코 그대에게 불리한 결정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게 불리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저 자신의 창조물들을 알지 못한다. 그대의 마음이 분열되어 있는 한 그것들에게 불리한 결정을 내리려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창조한 것을 공격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신이 창조한 것을 공격하는 것이 하나님에게도 똑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창조의 법칙은 그대가 자신의 창조물들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대의 창조물들이 그대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조된 모든 것은 완벽하게 안전하다. 하나님의 법칙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창조된 모든 것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그대 마음의 그 어떤 부분이든 스스로를 앎으로부터 추방한 것이다. 앎의 조건을 충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아니고서야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을 기쁘게 알아보라. 이 알아봄 안에는 그대의 추방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하나님 안의 집에 있으며, 추방을 꿈꾸고 있지만 실재로 깨어날 완벽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대의 결정인가?

그대는 자기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꿈속에서 보는 것을 실재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깨어나는 순간, 그대는 꿈속에서 일어난 것처럼 보였던 모든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대가 잠들어 있는 동안 그대가 깨어나 맞이하는 세계의 모든 법칙이 어겨졌음에도, 그대는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대가 실제로 깨어난 것이 아니라 그저 한 꿈에서 다른 꿈으로 옮겨 간 것일 가능성은 없는가? 서로 충돌하는 꿈들 속에서 일어난 일을 애써 조화시키려 하겠는가, 아니면 실재가 둘 중 어느 쪽과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 둘을 함께 물리치겠는가?

그대는 깨어 있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성령의 말을 들을 때 그대는 기분이 나아질 수 있다. 그때는 사랑하는 것이 그대에게 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사랑하는 일이 한때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아직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바로 이 기억함 안에서 그대는 그 일이 다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가능한 것이 아직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때 있었던 것은, 사랑이 영원한 것이라면 지금도 그러하다. 그대가 기억할 때, 그대는 자신이 기억하는 것이 영원하며 따라서 지금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가 온전히 기억을 원하는 순간 그대는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온전히 원하는 것이 곧 창조하는 것이라면, 그대는 분리를 뜻으로 없애 버려 자신의 마음을 창조주와 자신의 창조물들에게 동시에 되돌린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 창조물들을 알기에 그대는 잠들고자 하는 바람이 없을 것이며, 오직 깨어나 기뻐하려는 열망만을 가질 것이다. 그대는 오직 진리만을 원할 것이기에 꿈은 불가능해질 것이며, 마침내 진리가 그대의 뜻이 되었기에 진리는 그대의 것이 될 것이다.

그대는 무언가를 먼저 알지 못하는 한 그것을 해리시킬 수 없다. 앎은 해리보다 먼저 있어야 하며, 그래서 해리란 잊기로 하는 결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잊힌 것은 두려운 것처럼 보인다. 이는 오직 그 해리가 진리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두려운 것은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는 자신의 해리를 두려워하는 것이지 자신이 해리시킨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기에, 자신의 앎을 꿈에 대한 인식으로 대체했다.

그대가 해리시킨 것은 받아들여지면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다. 그러나 실재의 해리를 포기하는 것은 단순한 두려움의 부재 이상을 가져다준다. 이 결정 안에는 기쁨과 평화, 그리고 창조의 영광이 있다.

성령에게 오직 기억하려는 그대의 의향만을 바치라. 성령은 하나님과 그대 자신에 대한 앎을 그대를 위해 간직한 채, 그대의 받아들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기억함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기쁘게 포기하라. 하나님이 그대의 기억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자신의 실재를 다시 알고자 할 때, 하나님의 음성은 그대가 하나님의 일부라고 그대에게 말해 줄 것이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을 지연시키지 못하게 하라. 이 기억함 안에 그대 자신에 대한 앎이 있기 때문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그저 이미 그곳에 있는 것을 그대의 마음에 회복시키는 것일 뿐이다. 그대는 자신이 기억하는 것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대는 그저 이미 그곳에 있었지만 거부되었던 것을 다시 받아들일 뿐이다.

이 세상에서 진리를 받아들이는 능력은 왕국에서 창조하는 것에 대응하는 지각적 대응물이다. 그대가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역할을 다할 것이며, 그대의 역할에 대한 하나님의 되돌려 줌은 지각과 맞바꾼 앎의 교환이다.

그대를 위한 하나님의 뜻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억하려는 그대의 뜻을 나타내 보이라. 그러면 보라! 하나님은 요구하기만 하면 그대에게 모든 것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