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성령이라는 유일한 치료자

1) 병든 치유자

용서에 대한 에고의 계획은 하나님의 계획보다 훨씬 더 널리 사용된다. 이는 치유되지 않은 치유자들이 에고의 계획을 수행하며, 따라서 그 계획이 에고에게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제 치유되지 않은 치유자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정의상, 치유되지 않은 치유자는 자신이 받지 않은 것을 주려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치유되지 않은 치유자가 신학자라면, 그는 "나는 비참한 죄인이며, 그대도 그렇다"라는 전제로 시작할 수 있다. 치유되지 않은 치유자가 심리치료사라면, 공격이 자기 자신과 환자 양쪽 모두에게 실재하지만 어느 쪽에게도 중요하지 않다는, 똑같이 믿기 어려운 믿음으로 시작할 가능성이 더 크다.

에고의 믿음은 공유될 수 없다고 나는 거듭 말해 왔으며, 이것이 바로 그것들이 실재하지 않는 이유다. 그렇다면 에고의 믿음들을 "드러내는" 것이 어떻게 그것들을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진리를 찾아 환상을 뒤지는 치유자는 누구든 치유되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그 치유자는 진리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며 따라서 치유의 문제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악몽을 인식 속으로 가져오는 데는 이점이 있지만, 오직 그것들이 실재하지 않으며 그것들이 담고 있는 그 무엇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일 때만 그렇다. 치유되지 않은 치유자는 악몽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지 않기에 이렇게 할 수 없다.

치유되지 않은 치유자들은 모두 어떤 형태로든 용서에 대한 에고의 계획을 따른다. 치유되지 않은 치유자들이 신학자라면,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정죄를 가르치며 두려운 해법을 옹호할 가능성이 크다. 정죄를 하나님에게 투사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이 보복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하나님의 응징을 두려워한다. 치유되지 않은 치유자들은 그저 에고와 동일시했을 뿐이다. 에고가 하는 일을 지각함으로써, 이 혼동 때문에 자기 자신을 정죄한 것이다.

이 개념에 맞선 반발이 있어 온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그 개념에 맞서 반발하는 것도 여전히 그 개념을 믿는 것이다. 에고의 계획 중 더 새로운 형태들도 더 오래된 것들만큼이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형태는 중요하지 않으며 내용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더 새로운 형태 중 하나에서, 심리치료사는 악몽 속 에고의 상징들을 해석한 다음 그것들을 사용해 그 악몽이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악몽을 실재하는 것으로 만든 후, 심리치료사는 꿈꾸는 이의 중요성을 깎아내림으로써 그 결과를 없애려 시도한다. 꿈꾸는 이 또한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된다면, 이것은 치유적인 접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꿈꾸는 이가 마음과 동일시된다면, 성령을 통한 마음의 교정력은 부인된다. 이는 에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모순이며, 에고조차도 그 혼동 속에서 대체로 알아차리는 모순이다.

두려움에 맞서는 방법이 마음의 중요성을 줄이는 것이라면, 이것이 어떻게 에고의 힘을 키울 수 있겠는가? 이런 명백한 모순들이 바로, 심리치료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무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이유를 말해 준다.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치유되지 않은 치유자에게는 실재하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는 자기 자신의 가르침에서 배워야 한다.

그 치유자의 에고는 언제나 그 상황에서 무언가를 얻어 내려 할 것이다. 따라서 치유되지 않은 치유자는 주는 법을 알지 못하며, 그 결과 나눌 수 없다.

치유되지 않은 치유자는 교정적으로 작업하고 있지 않기에 교정할 수 없다. 치유되지 않은 치유자는 무엇이 실재인지 환자에게 가르치는 것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믿지만, 정작 자기 자신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했을 때, 빛이 있었다. 심리치료사가 하듯 어둠을 분석함으로써, 혹은 신학자처럼 자신 안의 어둠을 인정하고 그 어둠을 없애 줄 먼 곳의 빛을 찾음으로써, 그대는 빛을 찾을 수 있는가?

치유는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 이해되지 않는 한 그 무엇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빛이 곧 이해이기 때문이다. "비참한 죄인"은 마법 없이는 치유될 수 없고, "중요하지 않은 마음" 또한 마법 없이는 자기 자신을 존중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에고의 접근 방식은 두 형태 모두 막다른 길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이는 에고가 언제나 이끄는 그 특유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누군가가 향하고 있는 곳을 짚어 주는 것이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이 방향을 바꾸도록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그 요점은 소용이 없어진다.

치유되지 않은 치유자는 자기 자신도 방향을 바꾸지 못하기에, 환자가 방향을 바꾸도록 도울 수도 없다.

2) 본보기를 보여 줌

치유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의미 있는 기여는, 자신을 위해 방향이 바뀌어 더 이상 그 어떤 종류의 악몽도 믿지 않게 된 이의 본보기를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치유자의 마음속 빛이 질문하는 이에게 응답할 것이다. 그 질문하는 이는 빛을 보기에 빛이 있다고 하나님과 더불어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하는 이의 인정을 통해 치유자는 빛이 거기 있음을 안다.

이것이 바로 지각이 궁극적으로 앎으로 옮겨지는 방식이다. 기적을 일으키는 이는 빛을 지각하는 것으로 시작하며, 빛을 계속 확장하고 그것에 대한 인정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지각을 확신으로 옮겨 간다.

그 결과들이 빛이 거기 있다는 것을 기적을 일으키는 이에게 확신시켜 준다. 치료자는 치유하지 않는다. 치료자는 그저 치유가 일어나게 할 뿐이다. 치료자는 어둠을 가리킬 수는 있지만 스스로 빛을 가져올 수는 없다. 빛은 그에게서 비롯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빛이 그를 위한 것이기에, 빛은 그의 환자를 위한 것이기도 해야 한다.

성령이야말로 유일한 치료자(Therapist)다. 성령이 안내자인 그 어떤 상황에서든, 성령은 치유를 명확하게 만들어 준다. 그대는 그저 성령이 자신의 역할을 완수하게 둘 수 있을 뿐이다. 성령은 이를 위해 어떤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령이 도움을 위해 그대에게 보내는 사람이 누구든, 성령은 그 사람을 돕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그대에게 말해 줄 것이다. 그대가 방해하지 않는다면 성령은 그대를 통해 그 사람에게 말할 것이다. 돕기 위한 안내자를 선택하는 것은 그대라는 것과, 잘못된 선택은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나 옳은 선택은 도움이 되리라는 것도 함께 기억하라.

성령을 신뢰하라. 돕는 것이 성령의 역할이며, 성령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대 자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다른 마음들을 성령에게로 일깨울 때, 그대는 자신이 이 세상의 법칙을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따르고 있는 법칙은 통한다. "좋은 것은 통하는 것이다"라는 말은 타당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은 진술이다. 오직 좋은 것만이 통할 수 있다. 그 밖의 그 무엇도 전혀 통하지 않는다.

이 과정은 매우 직접적이고 매우 단순한 배움의 상황을 제공하며, 무엇을 해야 할지 그대에게 말해 주는 안내자를 제공한다.

그대가 안내자의 지시를 행한다면, 그것이 통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이 과정의 말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그 결과들은 그 말이 참되다는 것을 그대에게 확신시켜 줄 것이다.

옳은 안내자를 따름으로써, 그대는 모든 배움 중 가장 단순한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 열매로 안내자들을 알게 되리니, 안내자들도 자기 자신을 알게 되리라.

3) 줌으로써 성령을 봄

성령의 결과들을 통하지 않고서야, 그대는 어떻게 자기 안의 성령을 점점 더 많이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그대는 눈으로 성령을 볼 수도 없고 귀로 성령의 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대는 대체 어떻게 성령을 지각할 수 있는가?

그대가 기쁨을 불어넣어 다른 이들이 그대에게 기쁨으로 반응한다면, 설령 그대 자신은 기쁨을 경험하고 있지 않더라도 기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무언가가 그대 안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 무언가가 그대 안에 있어 기쁨을 만들어 낼 수 있고, 그 무언가가 실제로 다른 이들 안에 기쁨을 만들어 내는 것을 그대가 본다면, 그대는 그 무언가를 자기 자신 안에서 해리시키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대에게는 성령이 그대 안에서 기쁨을 일관되게 만들어 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오직 그대가 다른 이들 안에 기쁨을 일관되게 불러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대에게 보이는 반응이 곧 성령의 일관성에 대한 그대의 평가다. 그대가 일관되지 않을 때 그대는 항상 기쁨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할 것이며, 그래서 그대는 성령의 일관성을 항상 알아보지는 못할 것이다.

그대가 형제에게 주는 것을 그대는 성령에게 주는 것이다. 성령은 줄 때 그대가 준 것 이상으로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성령이 자신의 줌을 제한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대가 자신의 받음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받기로 하는 결정은 받아들이기로 하는 결정이다. 그대의 형제들이 그대의 일부라면, 그대는 그 형제들을 받아들이겠는가?

오직 그 형제들만이 그대가 무엇인지 그대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 그대의 배움은 그대가 그들에게 가르친 것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들 안에서 불러내는 것을 그대는 자기 자신 안에서 불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그것을 그들 안에서 불러낼 때 그것은 그대에게 실재하는 것이 된다.

4) 공동 창조자 회복

하나님에게는 오직 하나의 아들만이 있으며,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하나로 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들보다 더하지만, 그들은 하나님보다 덜하지 않다.

그대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은가? 그대가 나의 형제에게 하는 것을 그대가 나에게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그대의 일부이기에 그대가 하는 모든 것을 그대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 또한 그대에게 속한다.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이는 그대의 일부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와 나눈다. 그 영광은 하나님에게 속하지만, 그 영광은 그대에게도 똑같이 속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하나님보다 덜 영광스러울 수 없다. 하나님이 그대보다 더한 것은 오직 그대를 창조했기 때문일 뿐이며, 하나님은 이것조차 그대에게서 거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하나님이 창조했듯이 창조할 수 있으며, 그대의 해리는 이것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빛도 그대의 빛도 흐려지지 않는다. 아들됨(Sonship)은 하나로서 창조해야 하기에, 그대는 창조의 일부를 알아볼 때마다 창조를 기억한다. 그대가 기억하는 각 부분은 그대의 온전함을 더한다. 각 부분이 온전하기 때문이다. 온전함은 나뉠 수 없지만, 그대는 온전함을 모든 곳에서 볼 때까지 자신의 온전함을 배울 수 없다.

그대는 오직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방식으로만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다. 앎은 하나님과 공유되기 때문이다. 그대가 하나님 안에서 깨어날 때, 그대는 하나님의 무한함을 그대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위대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그대는 형제의 위대함을 판단하듯이 자신의 위대함을 판단할 것이고, 형제의 위대함을 받아들이듯이 자신의 위대함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대는 아직 깨어 있지 않지만, 깨어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매우 단순하게 말해, 성령은 다른 이들을 깨우는 법을 그대에게 가르친다. 그 다른 이들이 깨어나는 것을 볼 때 그대는 깨어남이 무엇을 뜻하는지 배우게 될 것이며, 그대가 그 다른 이들을 깨우기로 선택했기에, 그대가 그 다른 이들에게 준 것에 대한 그들의 감사와 인정이 그 가치를 그대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그대가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증인으로 창조되었듯이, 그대가 깨운 이들은 그대의 실재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들됨이 함께 모여 자신의 하나됨을 받아들일 때, 아들됨은 자신의 창조물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 창조물들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증언하듯 아들됨의 실재를 증언한다.

기적은 영원 안에 있을 자리가 없다. 기적은 회복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여전히 치유를 필요로 하는 동안에는, 그대의 기적이 그대가 알아볼 수 있는 그대 실재에 대한 유일한 증인이다.

그대는 자기 자신을 위해 기적을 행할 수 없다. 기적은 받아들임을 주고 그 받아들임을 받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시간 안에서는 주는 것이 먼저 오지만, 영원 안에서는 그 둘이 동시적이며 그곳에서는 나뉠 수 없다. 주는 것과 받는 것이 같다는 것을 그대가 배웠을 때, 시간의 필요는 끝난다.

영원은 하나의 시간이며, 영원의 유일한 차원은 "언제나"이다. 이것은 그대가 하나님의 열린 팔을 기억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열린 마음을 알기 전까지는 그대에게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처럼 그대도 "언제나"이다.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대의 열린 마음 안에는 그대의 창조물들이 있으며, 그 창조물들은 완벽한 이해에서 태어난 완벽한 소통 안에 있다. 그대가 자신의 창조물 중 하나만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대는 세상이 줄 수 있는 그 무엇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완전히 무의미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의미는 그대 없이는 불완전하며, 그대는 자신의 창조물 없이는 불완전하다.

이 세상에서 그대의 형제를 받아들이고 그 밖의 그 무엇도 받아들이지 말라. 그 형제 안에서 그대는 자신의 창조물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형제가 그 창조물들을 그대와 함께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대의 형제가 그대와 함께 공동 창조자라는 것을 배우기 전까지, 그대는 그대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공동 창조자라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