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류 너머를 보는 용서
1) 교정이라는 착각
다른 에고들의 오류에 대한 에고의 경계심은 성령이 그대에게 유지하기를 바라는 종류의 경계심이 아니다. 에고들은 자신들이 내세우는 종류의 "말이 됨"을 기준으로 비판한다. 에고들은 이런 종류의 말이 됨을 이해한다. 그것이 에고들에게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성령에게 이런 말이 됨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에고에게는 오류를 지적하고 그것을 "교정"하는 것이 친절하고 옳고 좋은 일이다. 이것은 에고에게 완벽하게 말이 된다. 에고는 오류가 무엇이고 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류는 에고에게서 비롯되며, 오류의 교정은 에고를 내려놓는 데 있다. 그대가 형제를 교정할 때, 그대는 그 형제가 틀렸다고 그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형제는 그 순간 말이 안 되는 말을 하고 있을 수 있으며, 그가 에고에서 말하고 있다면 말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대의 과제는 여전히 그 형제가 옳다고 그에게 말해 주는 것이다. 그 형제가 어리석게 말하고 있다면, 그대는 이것을 말로 그에게 말하지는 않는다. 그 형제는 다른 차원에서 교정을 필요로 한다. 그의 오류가 다른 차원에 있기 때문이다.
그 형제는 여전히 옳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에고는 무엇을 말하거나 행하든 언제나 틀리다. 그대가 형제의 에고가 지닌 오류를 지적한다면, 그대는 자신의 에고를 통해 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성령은 그의 오류를 지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일 수밖에 없다. 에고와 성령 사이에는 소통이 없기 때문이다.
에고는 말이 되지 않으며, 성령은 에고에게서 비롯되는 그 무엇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성령은 에고의 말을 이해하지 않기에 그것을 판단하지 않으며, 에고가 만드는 그 무엇도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안다.
그대가 오류에 조금이라도 반응한다면, 그대는 성령의 말을 듣고 있지 않은 것이다. 성령은 그저 그 오류들을 무시했을 뿐이며, 그대가 오류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성령의 말을 듣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대가 성령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대는 자신의 에고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며 그대가 오류를 지각하는 그 형제만큼이나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오류에 반응하는 것은 교정일 수 없다. 그러나 이는 단지 그 형제를 교정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다.
이 반응은 그대 자신 안의 교정을 포기하는 것이다.
형제가 미친 듯이 행동할 때, 그대는 오직 그의 안에 있는 온전한 정신을 지각함으로써만 그를 치유할 수 있다. 그대가 형제의 오류를 지각하고 그 오류를 받아들인다면, 그대는 자신의 오류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오류를 성령에게 넘기고 싶다면, 그대는 형제의 오류에 대해서도 이렇게 해야 한다. 이것이 그대가 모든 오류를 다루는 유일한 방식이 되지 않는 한, 그대는 모든 오류가 어떻게 원상태로 돌려지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이, 그대가 가르치는 것을 그대가 배운다고 그대에게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대의 형제는 그대만큼이나 옳으며, 그대가 형제를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자기 자신을 교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대가 다른 사람을 교정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그대는 형제를 참되게 볼 수 있다. 그대가 자기 자신을 참되게 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2) 성령의 역할
그대의 형제를 바꾸는 것은 그대에게 달린 일이 아니며, 그저 형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그대에게 달려 있다. 형제의 오류는 그의 안에 있는 진리에서 비롯되지 않으며, 오직 이 진리만이 그대의 것이다. 형제의 오류는 이것을 바꿀 수 없으며, 그대 안에 있는 진리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
누구에게서든 오류를 지각하고 그 오류가 실재인 것처럼 반응하는 것은, 그 오류를 그대에게 실재하는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대는 이 일의 대가를 치르는 것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그대가 그 일로 벌을 받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릇된 안내자를 따르고 있어서 길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오류가 그대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그대 형제의 오류도 형제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형제의 오류를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대는 자기 자신을 공격한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길을 찾아 지키고자 한다면, 함께 걷는 그대 곁에서 오직 진리만을 보라.
그대 안의 성령은 그대 안에 있는 모든 것과 그대 형제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 형제의 오류는 그대의 오류와 함께 용서받는다.
속죄는 사랑이 분리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리되지 않는다. 속죄는 분리될 수 없다. 속죄가 사랑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대가 형제를 교정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그대에 의한 교정이 가능하다고 그대가 믿는다는 것을 뜻하며, 이는 에고의 오만함일 수밖에 없다.
교정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며, 하나님은 오만함을 알지 못한다. 성령은 모든 것을 용서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할을 떠맡지 말라. 그러지 않으면 그대는 자신의 역할을 잊게 될 것이다. 시간 안에서는 오직 치유의 역할만을 받아들이라. 그것이 시간이 존재하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대에게 영원 속에서 창조하는 역할을 주었다. 그대는 그것(창조하는 역할)을 배울 필요가 없지만, 그것을 원하는 법은 배워야 한다. 그것을 위해 모든 배움이 만들어졌다.
성령은 그대가 필요로 하지 않지만 그대가 만들어 낸 능력을 이렇게 사용한다.
그 능력을 성령에게 주라! 그대는 그것을 사용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성령은 그대가 모든 것을 정죄 없이 바라보는 법을 배움으로써, 자기 자신을 정죄 없이 보는 법을 그대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그러면 정죄는 그대에게 실재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대의 모든 오류는 용서받을 것이다.
속죄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속죄가 무언가가 오직 그대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라는 믿음을 원상태로 돌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눈감아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류 너머를 보고, 그대의 지각이 그 위에 머무르게 하지 말라. 그대는 자신의 지각이 담고 있는 것을 믿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 자신을 알고자 한다면, 오직 그대 형제의 참모습만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라. 그대 형제가 아닌 것을 지각한다면 그대는 자신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를 거짓되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정체성이 공유된다는 것과, 그 공유됨이 곧 그 정체성의 실재라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라.
그대는 속죄 안에서 맡은 역할이 있지만, 속죄의 계획은 그대의 이해를 넘어선다.
그대는 오류를 눈감아 주는 법을 알지 못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오류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오류를 만들지 않는다고 믿거나, 교정을 이끄는 안내자 없이 오류를 교정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그저 또 다른 오류일 뿐이다.
그리고 그대가 이 안내자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대의 오류는 교정되지 않을 것이다.
속죄의 계획이 그대의 것이 아닌 것은, 그대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그대의 제한된 생각 때문이다. 이 제한의 감각이 바로 모든 오류가 일어나는 곳이다. 따라서 모든 오류를 원상태로 돌리는 길은 그대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를 위한 것이다.
속죄는 공유에 관한 배움이며, 그대가 공유하는 법을 잊어버렸기에 그대에게 주어진 것이다. 성령은 그저 그대의 능력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법을 그대에게 상기시켜 줄 뿐이다. 공격하는 능력을 공유하는 능력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성령은 그대가 만든 것을 하나님이 창조한 것으로 옮겨 준다. 그대가 성령을 통해 이것을 이루고자 한다면, 그대는 에고의 눈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바라볼 수 없다.
그러지 않으면 그대는 자신의 능력을 에고가 판단하는 대로 판단하게 될 것이다. 그 능력들의 모든 해로움은 에고의 판단에 있다. 그 능력들의 모든 유익함은 성령의 판단에 있다. 에고 또한 용서의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대가 하나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대는 옳은 스승에게 요구하고 있지 않다. 물론 에고의 계획은 말이 되지 않으며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 계획을 따름으로써 그대는 그저 불가능한 상황에 자신을 놓아두게 될 뿐이다. 에고는 언제나 그대를 그런 상황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3) 에고의 용서 계획
에고의 계획은 그대가 먼저 오류를 명확하게 보게 한 다음 그 오류를 눈감아 주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실재하는 것으로 만든 오류를 어떻게 눈감아 줄 수 있겠는가? 그 오류를 명확하게 봄으로써, 그대는 그 오류를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었고 그 오류를 눈감아 줄 수 없게 되었다.
오류를 눈감아 줄 수 없게 된 바로 이 지점에서 에고는 "신비"에 호소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자신을 구원하려면 그대가 무의미한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많은 이들이 내 이름으로 무의미한 것을 받아들이라고 하려 했지만, 나의 말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기에 완벽하게 말이 된다는 것을 잊었다. 나의 말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말이 된다. 영원한 관념들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서 배운 용서는 두려움을 원상태로 돌리기 위해 두려움을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그 용서는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만든 다음 그것을 파괴하지도 않는다.
성령을 통한 용서는 단순히 처음부터 오류 너머를 바라봄으로써 그 오류를 그대에게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유지하는 데 있다. 그 오류가 실재한다는 그 어떤 믿음도 그대의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그런 믿음이 마음에 들어오면 그대는 또한 용서받기 위해 자신이 만든 오류를 원상태로 돌려야 한다고 믿게 될 것이다.
결과가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성령에게 오류의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곳에서 모든 면에서 그 모든 결과를 꾸준하고 일관되게 무효화함으로써, 성령은 에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용서에 관한 성령의 가르침을 따르라. 용서는 성령의 역할이며 성령은 그 용서를 완벽하게 완수하는 법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