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두려움 아닌 사랑
결핍은 하나님의 창조 안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대가 만든 것 안에서는 매우 뚜렷하게 나타난다. 사실 이것이 바로 그 둘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다.
결핍은 그대가 지금과는 어떤 식으로든 다른 상태에 있으면 더 나으리라는 의미다. "타락"의 의미인 "분리"가 있기 전까지는,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필요라는 것 자체가 전혀 없었다. 필요는 오직 그대가 스스로를 박탈할 때만 생겨난다.
그대는 자신이 세운 특정한 필요의 순서에 따라 행동한다. 그리고 이는 다시, 그대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그대의 지각에 달려 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감이야말로 그대가 정말로 바로잡아야 할 유일한 결핍이다. 이 분리감은, 그대가 진리에 대한 지각을 왜곡하여 자신을 결핍된 존재로 지각하지 않았다면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필요의 순서라는 관념은, 이 근본적인 잘못을 저지른 뒤 그대가 이미 서로 다른 필요를 가진 여러 차원으로 자신을 조각냈기 때문에 생겨났다.
그대가 통합될수록 그대는 하나가 되고, 그에 따라 그대의 필요도 하나가 된다. 통합된 필요는 통합된 행동으로 이어진다. 이는 갈등이 없는 상태를 낳기 때문이다.
필요의 순서라는 관념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는 원초적 잘못에서 비롯되었다. 이 관념은, 애초에 차원을 지각한다는 잘못이 바로잡히기 전에 먼저 그 자체의 차원에서 바로잡혀야 한다. 서로 다른 차원에서 기능하는 동안에는 효과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기능하는 동안에는, 바로잡음이 아래에서 위로, 수직으로 도입되어야 한다. 바로잡음이 아래에서 위로 이루어지는 것은, 그대가 "위"와 "아래" 같은 개념이 의미를 갖는 공간 안에 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공간은 시간만큼이나 무의미하다. 둘 다 그저 믿음일 뿐이다.
이 세상의 진짜 목적은 그대의 불신을 바로잡는 데 쓰이는 것이다.
그대는 두려움의 결과를 결코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 그대가 두려움을 만들었고 그대는 자신이 만든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용에서는 아니어도 태도에서는, 그대는 그대의 창조주를 닮았다. 창조주는 자신의 창조물을 창조했기에 그 창조물에 완전한 신뢰를 갖고 있다. 믿음은 존재에 대한 받아들임을 낳는다.
그래서 그대는 다른 어느 누구도 참되다고 여기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다. 그 믿음은 그대에게 참이다. 그대가 그것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두려움의 모든 측면은 참되지 않다. 그 측면들이 창조적 차원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가 자신의 믿음을 이 시험에 얼마나 기꺼이 맡기느냐, 그만큼 그대의 지각은 바로잡힌다.
거짓을 참에서 가려낼 때, 기적은 다음과 같은 노선을 따라 나아간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낸다.
두려움이 존재한다면, 완전한 사랑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완전한 사랑만이 존재한다. 두려움이 있다면,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을 믿으라. 그러면 그대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해법을 세울 수 있으며,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대의 왜곡된 지각은 기적 충동 위에 짙은 덮개를 만들어, 그 기적 충동이 그대 자신의 자각에 이르기 어렵게 만든다.
기적 충동을 육체적 충동과 혼동하는 것은 주요한 지각의 왜곡이다. 육체적 충동은 잘못 향한 기적 충동이다.
진정한 즐거움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서 온다. 이는 그 뜻을 행하지 않는 것이 자기 부인이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은 환영을 낳는 반면, 그 잘못을 바로잡는 것은 그 잘못으로부터의 풀려남을 가져온다.
외적인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이나 그대의 형제와 평화 안에서 관계 맺을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을 속이지 말라.
하나님의 자녀여, 그대는 선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것을 창조하도록 창조되었다. 이것을 잊지 말라. 하나님의 사랑은 잠시 동안은, 봄(vision)이 아직도 너무 흐릿하기에 여전히 한 육체에서 다른 육체를 통해 표현되어야 한다. 그대는 육안으로는 이룰 수 없는 참된 봄(vision)을 성취할 수 있도록 지각을 넓히는 데에 그대의 육체를 가장 잘 쓸 수 있다. 이렇게 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육체가 지닌 유일하게 참된 쓸모다.
환상은 봄이 왜곡된 형태다. 어떤 종류든 환상은 왜곡이다. 언제나 지각을 비실재로 비트는 일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왜곡에서 비롯되는 행동은 문자 그대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환상은 그릇된 필요에 따라 실재를 통제하려는 시도다. 어떤 식으로든 실재를 비틀면, 그대는 파괴적으로 지각하고 있는 것이다.
환상은 그릇된 연상을 만들어 내고 거기서 즐거움을 얻으려는 수단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릇된 연상을 지각할 수는 있어도, 그 연상을 결코 실재로 만들 수는 없다. 그 연상은 그대 자신에게만 실재일 뿐이다.
그대는 그대가 만든 것을 믿는다. 그대가 기적을 베풀면, 그대는 그 기적에 대한 믿음에서도 똑같이 강할 것이다. 그러면 그대의 확신의 힘이 기적을 받는 사람의 믿음을 지탱해 줄 것이다.
실재는 찬탈을 통해 "상실"되며, 찬탈은 폭정을 낳는다. 단 한 명의 "노예"라도 이 땅을 걷는 한, 그대의 풀려남은 완전하지 않다. 아들됨의 완전한 회복이 기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의 유일한 목표다.
이것은 마음 훈련에 관한 과정이다. 모든 배움은 어느 수준에서든 주의와 학습을 동반한다. 이 과정의 뒷부분 가운데 일부는 앞부분의 이 절들에 매우 크게 의존하고 있어서 앞부분을 반드시 세심하게 공부해야 한다. 그대는 준비를 위해서도 앞부분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그대는 앞으로 다가올 것을 건설적으로 활용하기에는 너무나 두려워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가 이 앞부분을 공부해 나가면, 나중에 더 크게 확장될 몇 가지 의미를 알아보기 시작할 것이다. 탄탄한 토대가 필요하다. 내가 이미 언급했듯이 두려움과 경외 사이의 혼동이 흔히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는 경외가 하나님의 아들들과 관련해서는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대는 그대와 동등한 존재 앞에서 경외를 경험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외가 그대의 창조주의 임재 안에서는 적절하다는 것도 강조되었다.
나는 속죄에서 나의 역할을 과장하지도 축소하지도 않도록 신중을 기해 밝혀 왔다. 나는 그대의 역할에 대해서도 똑같이 하려고 애쓰고 있다. 나는 우리가 본래 동등하기에 경외가 나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 아님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이 과정의 뒷부분에 나오는 몇몇 단계는 하나님 자신에게 더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것을 동반한다.
세심한 준비 없이 이런 단계를 시작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경외가 두려움과 혼동될 것이고, 그 경험은 축복이라기보다는 큰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결국 치유는 하나님에게서 온다. 그 수단은 그대에게 세심하게 설명되고 있다. 계시는 이따금 그대에게 그 결말을 드러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결말에 이르려면 수단이 필요하다.
확장은 하나님의 근본적인 속성이며, 하나님은 확장을 자신의 아들에게 주었다. 창조 안에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자신의 창조물들에게로 확장했고, 창조하려는 그 사랑의 뜻을 창조물에게 똑같이 불어넣었다.
그대는 온전히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완전하게 창조되었다. 그대 안에는 공허함이 없다. 그대는 그대의 창조주를 닮았기에 창조적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도 이 능력을 잃을 수 없다. 이는 그 능력이 그 자녀의 존재 자체에 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자녀는 투사를 통해 이 능력을 부적절하게 쓸 수는 있다. 확장, 곧 투사를 부적절하게 쓰는 일은 두 가지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대 안에 어떤 공허함이나 결핍이 있다는 믿음, 그리고 진리 대신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 그 공허함을 채울 수 있다는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