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두려워한 그대의 뜻, 곧 구원
하나님의 뜻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 낸 것 중 가장 기이한 믿음 가운데 하나다. 마음이 이미 깊이 분열되어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두려워할 수 있게 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재는 진리만을 떠받칠 수 있으므로, 환영이 아닌 그 무엇도 "위협"할 수 없다.
그대 자신인 하나님의 뜻이 두려운 것으로 지각된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대가 자기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그대가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대 자신의 뜻이다.
그대의 뜻은 에고의 뜻이 아니며, 그것이 바로 에고가 그대에게 맞서는 이유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실은 그대 자신의 실재에 대한 두려움이다.
공황 상태에서는 무엇이든 일관되게 배우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과정의 목적이 그대가 자신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도록 돕는 것인데, 그대가 자신이 무엇인지를 두려운 것으로 믿는다면, 그대는 이 과정을 배우지 못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과정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대가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대의 실재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어째서 그것이 두렵다고 그토록 확신하는가?
진리와 두려움을 결합하는 것은 기껏해야 매우 인위적일 뿐이며,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의 마음에서는 특히 부적절하다. 이것이 의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대가 자신의 인식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원하지 않는 무언가와 임의로 결합시키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자신이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판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대는 이 기이한 상황을 만들어 놓아서, 그대의 실재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아는 안내자 없이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 안내자의 목적은 오직 그대가 원하는 것을 그대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뿐이다. 성령은 낯선 뜻을 그대에게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그저, 그대가 성령에게 부과한 한계 안에서, 그대 자신의 뜻을 그대의 인식 속에 다시 세우려고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그대는 자신의 뜻을 자신의 인식 너머에 가두어 놓았고, 그 뜻은 거기 머물러 있지만 그대를 도울 수 없다.
성령의 역할이 그대의 마음속에서 참된 것을 거짓된 것으로부터 가려내는 것이라고 내가 말했을 때, 그것은 성령이 그대가 숨겨 놓은 것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볼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성령이 이 뜻을 알아보면, 그 뜻을 그대에게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 이는 성령이 그대의 마음속에 있고 따라서 성령이 곧 그대의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그대의 마음을 지각하는 것이 그 실재를 그대에게 가져다준다면, 성령은 그대가 자신이 무엇인지 기억하도록 돕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두려움의 유일한 원천은 그대가 잃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이 보는 것뿐이다. 성령이 그대에게 결코 무엇도 희생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여러 번 강조했다. 그러나 그대가 자기 자신에게 실재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성령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그대에게 상기시켜야 한다. 이것이 그대 자신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의 뜻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그대에게 분열된 마음이 없다면, 뜻하는 것이 곧 소통이므로 그것이 구원임을 알아볼 것이다. 낯선 언어로는 소통이 불가능하다. 그대와 창조주는 창조를 통해 소통할 수 있다. 오직 그것만이 그대와 창조주의 공동의 뜻이기 때문이다.
분열된 마음은 소통할 수 없다. 같은 마음에게 서로 다른 것들을 대변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이는 소통 능력을 잃게 만든다. 혼란스러운 소통은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메시지는 말이 되지 않으면 전달될 수 없다. 원하지 않는 것을 요구할 때, 그대의 메시지가 얼마나 말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자신의 뜻을 두려워하는 한, 그것이 바로 그대가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성령이 자신에게 응답하지 않는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그대가 어떤 부류의 질문자인지 생각해 보는 편이 더 지혜로울 것이다.
그대는 자신이 원하는 것만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는 그대가 그것을 받게 될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실제로 그대는 그것을 받게 될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대는 원하는 것을 결코 줄 수 없는 스승에게 계속 요구한다. 그 스승에게서 그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결코 배울 수 없으며, 이는 그대에게 안전하다는 환영을 준다.
그러나 그대는 진리로부터 안전할 수 없으며, 오직 진리 안에서만 안전할 수 있다. 실재만이 유일한 안전이다. 그대의 뜻은 그대의 구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같기 때문이다. 분리란 그것이 다르다는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
바른 마음은 그 어떤 것도 자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보다 강하다고 믿을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마음이 자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다르다고 믿는다면, 그 마음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정하거나 하나님의 뜻이 두렵다고 결정할 수밖에 없다. 전자는 무신론자를 낳고 후자는 하나님이 희생을 요구한다고 믿는 순교자를 낳는다.
이 두 미친 결정 중 어느 쪽이든 공황을 불러일으킨다. 무신론자는 자신이 혼자라고 믿고 순교자는 하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 둘 다를 추구할지 몰라도, 유기당함이나 보복을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대는 성령에게 이런 "선물"을 요구하면서 실제로 그것을 받으리라 기대할 수 있는가? 성령은 그대가 원하지 않는 것을 그대에게 줄 수 없다. 그대가 원하지 않는 것을 보편적 수여자(Universal Giver)에게 요구할 때, 그대는 결코 창조된 적 없기에 주어질 수 없는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은 결코 창조된 적이 없다. 그것이 그대 자신을 위한 그대의 뜻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기억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알아봄은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하나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진리 앞에서는 불신자도 없고 희생도 없다. 실재의 안전 속에서 두려움은 완전히 무의미하다. 존재하는 것을 부인하는 일은 두려운 것처럼 보일 수 있을 뿐이다.
원인 없이는 두려움이 실재할 수 없는데, 하나님만이 유일한 원인(Cause)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며, 그대는 진실로 하나님을 원한다. 이것이 그대의 뜻이다. 이것을 요구하라, 그러면 그대는 응답받을 것이다. 그대에게 속한 것만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해가 될 것을 성령에게 요구할 때 성령은 응답할 수 없다. 그 무엇도 그대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므로 그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에서 비롯되는 그 어떤 바람도 아무것도 아닌 것을 향한 바람이며,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요청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요청의 형태를 띤 부인일 뿐이다. 성령은 형태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오직 의미만을 인식한다.
에고는 성령에게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다. 둘 사이에는 완전한 소통 단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성령에게 모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성령을 향한 그대의 요청은 그대의 바른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에 실재하기 때문이다. 성령이 하나님의 뜻을 부인하겠는가? 그리고 성령이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진리를 부인하는 데 소모하는 막대한 에너지 낭비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불가능한 것을 이루는 일이 곧 성공이라고 믿으며 그것을 계속 시도하는 사람을 그대는 무엇이라 하겠는가? 행복하려면 불가능한 것을 가져야 한다는 믿음은 창조의 원리와 완전히 어긋난다. 하나님은 행복이 그대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에 달려 있기를 뜻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사실은 믿음을 요구하지 않지만, 수용을 요구한다. 그대가 사실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실로 가능하다.
그대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면 보는 것의 법칙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므로 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가 사랑을 부인하면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대의 협력이 곧 사랑이 존재하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이 만들지 않은 법칙을 바꿀 수 없으며, 행복의 법칙은 그대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 그대를 위해 창조된 것이다. 존재하는 것을 부인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두려울 수밖에 없으며, 그 시도가 강력하면 공황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실재에 맞서 뜻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대는 원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실재에 맞서 뜻하는 것)을 매우 집요한 목표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기이한 결정의 결과를 생각해 보라. 그대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에 마음을 바치고 있다. 이 헌신이 얼마나 실재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창조된 적이 없다. 그것이 결코 창조된 적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 자신을 바칠 수 있는가? 하나님은 그대를 향한 헌신 속에서 그대를 모든 것에 헌신하는 존재로 창조했고, 그대가 헌신하는 그것을 그대에게 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대는 완전한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을 것이다. 실재는 모든 것이며, 그대는 실재하기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대는 실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 수 없다. 실재의 부재는 두려운 것이며 두려움은 창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가능하다고 믿는 한, 그대는 창조하지 않을 것이다.
서로 대립하는 실재의 질서들은 실재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실재가 곧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이미 가능하며, 그 밖의 그 무엇도 결코 가능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기억하라. 이것이 실재에 대한 단순한 수용이니, 오직 그것만이 실재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실재를 왜곡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다. 그리고 실재를 왜곡한다면 그대는 불안과 침체, 그리고 궁극적으로 공황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실재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느낄 때, 진리를 자기 자신 너머에서 찾으려 하지 말라. 진리는 오직 그대 안에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라. 그리스도는 내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도 있어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