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육체를 넘어 확장하는 마음

성경은 "말씀(또는 생각)이 육신이 되셨다"라고 말한다. 엄밀히 말하면 이는 불가능한데, 이는 한 실재의 질서를 다른 질서로 옮기는 일을 동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실재의 질서는 서로 다른 기적의 질서가 그러하듯 그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생각은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고서는 육신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 생각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은 소통이며, 이를 위해 육체가 쓰일 수 있다. 이것이 육체가 쓰일 수 있는 유일하게 자연스러운 용도다.

육체를 부자연스럽게 쓰는 것은 성령의 목적을 잃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성령의 교육과정의 목표를 혼동하는 것이다.

배우는 자에게 자신이 배울 수 없는 교육과정만큼 좌절스러운 것은 없다. 그 배우는 자의 적절함에 대한 감각이 손상되며, 그는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 불가능한 배움의 상황에 놓이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일이다. 사실, 이것이 결국 세상 자체가 우울한 이유다. 성령의 교육과정은 결코 우울하지 않은데, 성령의 교육과정이 기쁨의 교육과정이기 때문이다. 배움에 대한 반응이 우울일 때마다, 그 반응은 교육과정의 참된 목표를 놓쳤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는 육체조차 온전한 것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육체의 목적은 서로 거의 또는 전혀 관계없는 여러 기능으로 조각난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육체는 혼돈에 지배되는 것처럼 보인다.

에고에게 인도된다면, 정말로 그러하다. 성령에게 인도된다면, 그렇지 않다.

육체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 그대가 영에게서 분리시키려 했던 마음의 부분이 이 수단을 통해 자신의 왜곡을 넘어 영에게 돌아갈 수 있다. 그럼으로써 에고의 신전은 성령의 신전이 되며, 그곳에서 에고에 대한 헌신은 성령에 대한 헌신으로 대체된다.

이런 의미에서 육체는 실로 하나님의 신전이 된다. 하나님의 음성이 육체가 쓰이는 용도를 인도함으로써 그 안에 머문다.

치유는 육체를 오직 소통을 위해서만 쓴 결과다. 육체를 소통에만 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래서 치유는 온전하게 만듦으로써 이루어진다. 온전하게 만드는 일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모든 마음은 온전하며, 마음의 일부가 물리적이라거나 마음이 아니라는 믿음은 조각나거나 병든 해석이다.

마음은 물리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지만, 마음이 육체를 써서 자기 자신을 넘어선다면 물리적인 것을 통해 드러날 수는 있다. 뻗어 나감으로써, 마음은 자기 자신을 확장한다. 마음은 육체에서 멈추지 않는데, 만약 멈춘다면 마음은 자신의 목적에서 가로막힌 것이다.

가로막힌 마음은 스스로 공격에 취약해지도록 놓아둔 것이다. 그 마음이 자기 자신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로막힘을 없애는 것이 도움과 치유를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다.

도움과 치유는 육체를 통해 일하되 육체 안에서 일하지 않는 마음의 정상적인 표현이다.

마음이 육체를 자신의 목표로 믿는다면 마음은 육체에 대한 자신의 지각을 왜곡할 것이며, 육체를 넘어서는 자신의 확장을 가로막음으로써 분리를 조장해 병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육체를 분리된 실체로 지각하는 것은 병을 조장할 수밖에 없다. 그 지각이 참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통의 매개는 다른 그 무엇을 위해 쓰이면 그 쓸모를 잃는다. 소통의 매개를 공격의 매개로 쓰는 것은 명백한 목적의 혼동이다.

소통한다는 것은 하나로 잇는 것이며 공격한다는 것은 분리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대는 같은 것으로 이 둘을 동시에 하면서도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육체에 대한 지각은 오직 하나의 목적으로만 통합될 수 있다. 이렇게 통합된 지각은 마음을 육체를 여러 관점으로 보려는 유혹에서 풀어 주며, 마음을 온전히 하나의 빛에게 넘겨주어 그 빛 안에서 마음이 참으로 이해될 수 있게 한다.

배움의 도구를 교육과정의 목표와 혼동하는 것은 둘 다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근본적인 혼동이다. 배움은 반드시 육체를 넘어 그 안에 있는 마음의 힘을 다시 세우는 데로 이어져야 한다. 이는 오직 마음이 다른 마음들에게로 확장되고 자신의 확장을 스스로 멈추지 않을 때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 멈춤이 모든 병의 원인이다. 오직 확장만이 마음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기쁨의 반대는 우울이다. 그대의 배움이 기쁨 대신 우울을 조장할 때, 그대는 하나님의 기쁨에 찬 스승의 말을 듣고 그 가르침을 배우고 있는 것일 수 없다. 육체를 소통의 수단 말고 다른 무엇으로 보는 것은 그대의 마음을 제한하고 그대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강은 통합된 목적일 뿐이다. 육체가 마음의 목적 아래 놓이면, 육체는 온전해진다. 마음의 목적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공격은 오직 육체에 가정된 목적일 수밖에 없다. 마음을 떠나서는 육체에 아무 목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육체에 의해 제한되지 않으며, 생각은 육신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 그러나 마음이 육체를 넘어서고 그것을 제한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마음은 육체를 통해 드러날 수 있다.

그대가 다른 이를 육체에 갇히거나 육체로 제한된 존재로 볼 때마다, 그대는 이 제한을 그대 자신에게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의 배움의 목적 전체가 제한에서 벗어나는 것이어야 한다면, 그대는 이 제한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는가?

육체를 공격의 수단으로 여기면서 그로부터 기쁨이 나올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형편없는 학습자의 명백한 표시다. 그 형편없는 학습자는 교육과정의 통합된 목적과 명백히 모순되는 배움의 목표를 받아들인 것이며, 이는 그 목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능력을 방해하고 있다.

기쁨은 통합된 목적이며, 통합된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다. 그대의 목적이 통합되어 있을 때 그 목적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대가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대에게는 구원이 필요하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정죄했지만, 정죄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정죄는 참이 아니다. 그 정죄의 그 어떤 겉보기 결과도 참이 아니기는 마찬가지다.

그대가 한 형제를 육체로 볼 때, 그대는 그를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을 정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정죄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것이 공격의 한 형태이기에 반드시 실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결과도 가질 수 없다.

참이 아닌 것의 상상된 결과로 그대 자신이 괴로워하도록 두지 말라. 이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에서 그대의 마음을 자유롭게 하라.

그런 괴로움의 완전한 불가능성 안에 그대의 유일한 해방의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대가 원할 다른 어떤 희망이 있겠는가?

환영으로부터의 자유는 오직 그것을 믿지 않는 데에만 있다. 공격이란 없으며, 다만 무한한 소통과 그로 인한 무한한 권능과 온전함이 있을 뿐이다. 온전함의 힘은 확장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그대의 생각을 멈추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하나님 안의 창조를 향해 그대의 마음을 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