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 마음

어둠으로부터의 탈출에는 두 단계가 있다. 첫째, 어둠은 아무것도 감출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 단계에는 대개 두려움이 따른다.

둘째,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대가 감추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 단계는 두려움으로부터의 탈출을 가져온다. 아무것도 감추지 않으려는 마음이 생기면, 그대는 기꺼이 합일에 들어갈 뿐 아니라 평화와 기쁨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거룩함은 결코 정말로 어둠 속에 감춰질 수 없지만, 그대는 그 거룩함에 관해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다. 이 속임수는 그대를 두렵게 만든다. 그대가 마음속으로는 속임수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는 그 속임수가 실재한다고 세우려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기적은 실재를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둔다. 실재는 오직 영에게만 속하며, 기적은 오직 진리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기적은 그대 자신에 관한 환영을 몰아내고, 그대를 그대 자신 그리고 하나님과의 합일 안에 둔다.

기적은 마음을 성령의 섬김 안에 둠으로써 속죄에 동참한다. 이렇게 두는 것은 마음의 올바른 기능을 세우고 마음의 잘못을 바로잡는데, 그 잘못이란 단지 사랑의 결핍일 뿐이다.

그대의 마음은 환영에 사로잡힐 수 있지만, 영은 영원히 자유롭다. 마음이 사랑 없이 지각하면, 그 마음은 빈 껍데기를 지각할 뿐 그 안의 영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나 속죄는 영을 제자리로 회복시킨다. 영을 섬기는 마음은 상처받지 않는다.

어둠이 빛의 결핍이듯, 죄는 사랑의 결핍이다. 어둠에는 그 자체의 고유한 속성이 없다. 어둠은 "결핍"이라는 믿음의 한 예이며, 그 믿음에서는 오직 잘못만이 나올 수 있다.

진리는 언제나 풍성하다. 자신이 모든 것을 가졌음을 지각하고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종류의 필요도 없다.

속죄의 목적은 그대에게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그 모든 것을 그대의 자각 속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대는 창조될 때 모든 것을 받았으며, 이는 모든 사람이 다 그러했던 것과 같다.

두려움이 낳은 공허함은 용서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죽음은 없다"고 말할 때 뜻하는 바이며, 내가 죽음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 줄 수 있었던 이유다.

나는 율법을 다시 해석함으로써 그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 율법 자체는 제대로 이해되면 오직 보호만을 제공한다. 아직 마음을 바꾸지 않은 사람들이 바로 "지옥불"이라는 개념을 그 안에 끌어들인 이들이다.

그대에게 확언한다. 누구든 허락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 사람을 위해 증언할 것이며, 그 사람이 허락하는 만큼 증언할 것이다. 그대의 증언은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며, 그럼으로써 그 믿음을 강화한다. 나를 위해 증언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적을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다. 곧 박탈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자신의 것이라고 배운 풍성함을 택했다는 것이다.

기적은 육체와 매우 비슷한데, 둘 다 자신이 불필요해지는 상태를 촉진하기 위한 배움의 도구라는 점에서 그렇다. 영의 본래 상태인 직접 소통에 이르면, 육체도 기적도 더 이상 아무 목적에도 쓸모가 없다.

그러나 그대가 자신이 육체 안에 있다고 믿는 동안에는, 사랑 없는 표현의 통로와 기적적인 표현의 통로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다.

그대는 빈 껍데기를 만들 수는 있어도, 아무것도 전혀 표현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대는 기다리거나, 미루거나, 자신을 마비시키거나, 창조성을 거의 없다시피 줄일 수는 있다. 그러나 창조성을 없앨 수는 없다. 그대는 소통의 매개체를 파괴할 수는 있어도, 그대의 잠재력을 파괴할 수는 없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창조하지 않았다.

기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의 기본 결정은, 필요 이상으로 더 오래 시간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시간은 낭비될 수도 있고, 낭비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므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은 시간을 통제하는 요인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기적을 행하는 사람은 시간이 접힐 때마다 모든 사람이 시간으로부터의 궁극적인 풀려남에 더 가까워짐을 알아본다. 그 풀려남 안에서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다.

동등함이 지금 당장의 동등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모든 것을 가졌음을 알아볼 때, 아들됨에 대한 개별적인 기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속죄가 완성되면, 하나님의 모든 아들이 모든 재능을 함께 나눌 것이다.

하나님은 편애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의 모든 선물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값없이 주어진다.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이라는 말은, 그대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완전한 의존을 온전히 알아차리지 못하면, 아버지와의 참된 관계 안에서 아들이 지닌 진짜 힘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지닌 특별함은 배제가 아니라 포용에서 비롯된다. 나의 모든 형제는 특별하다.

나의 모든 형제가 자신이 무언가를 박탈당했다고 믿으면, 그들의 지각은 왜곡된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가족 전체, 곧 아들됨은 그 관계 안에서 손상된다.

궁극적으로 하나님 가족의 모든 구성원은 돌아와야 한다. 기적은 각 구성원이 돌아오도록 부른다. 비록 영으로는 부재할지라도, 기적이 그 구성원을 축복하고 공경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경고가 아니라 확신을 주는 말이다.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거룩함이 없다면 하나님은 조롱당하는 셈이 될 것이다. 창조물은 온전하며, 온전함의 표식은 거룩함이다. 기적은 아들됨의 확인이며, 아들됨은 완성과 풍성함의 상태다. 참된 것은 무엇이든 영원하며, 바뀔 수도 바뀌게 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영은 이미 완전하기에 변할 수 없지만, 마음은 자신이 무엇을 섬길지 선택할 수 있다. 그 선택에 놓인 유일한 한계는,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마음이 영을 섬기기로 선택하면, 마음은 영이 자신의 창조 노선을 따라 창조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 마음이 자유롭게 그렇게 선택하지 않으면, 마음은 창조적인 잠재력을 그대로 지니지만 권위 있는 통제가 아니라 폭압적인 통제 아래 자신을 둔다. 그 결과 마음은 가두는 일을 하게 된다. 폭군의 명령이란 바로 그렇게 가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마음을 참된 권위의 처분에 맡긴다는 뜻이다.

기적은 마음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가운데 나의 인도를 받기로 선택했다는 표징이다. 그리스도의 풍성함은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선택한 자연스러운 결과다.

얕은 뿌리는 모두 뽑혀야 한다. 그 뿌리가 그대를 지탱할 만큼 깊지 않기 때문이다. 얕은 뿌리를 더 깊게 만들어 붙들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은 환영일 뿐이다. 이 환영은 황금률을 거꾸로 뒤집은 왜곡에 기대고 있다. 이 거짓 토대가 버려질 때, 균형은 일시적으로 불안정하게 경험된다. 그러나 거꾸로 뒤집힌 방향보다 덜 안정된 것은 없다. 또한 그 거짓 토대를 거꾸로 붙들고 있는 무엇도 안정성을 더 키우는 데 도움이 될 수 없다.

평화를 원하는 그대는 오직 완전한 용서를 통해서만 평화를 찾을 수 있다. 누구든 배우기를 원하고 어떤 식으로든 그 배움이 필요하다고 믿을 때에만 무언가를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