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희생이 아닌 자유의 인도
1) 고통과 기쁨의 구별
성령은 오직 고통을 피하도록 그대를 인도할 것이다. 누구든 이 목표를 알아본다면 분명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성령이 하는 말이 참인가가 아니라, 그대가 성령이 하는 말을 들으려 하는가다. 그대는 무엇이 고통스러운지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엇이 기쁜지도 알지 못하며, 실제로 이 둘을 혼동하기 쉽다. 성령의 주된 역할은 그대에게 고통과 기쁨을 구별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그대에게 기쁜 것은 에고에게는 고통스러운 것이며, 그대가 그대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심하는 한, 그대는 기쁨과 고통에 대해 혼동할 것이다. 이 혼동이 희생이라는 관념 전체의 원인이다. 성령에게 순종하라, 그러면 그대는 에고를 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대는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 그대가 이것을 믿는다면 아무 갈등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이 명백한 사실을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여야 한다. 그 사실은 그대에게 명백하지 않다. 그대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일을 하는 것이 그대에게 더 나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대는 또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그대는 불가능한 선택이, 그것도 두려우면서 동시에 바람직한 선택이 그대에게 열려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뜻한다. 하나님은 바라지 않는다. 그대의 뜻은 하나님의 뜻만큼 강력하다. 그대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에고의 바람은 아무 의미도 없다. 에고는 불가능한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대는 불가능한 것을 바랄 수는 있지만, 오직 하나님과 함께여야만 뜻할 수 있다. 이것이 에고의 약점이자 그대의 강점이다.
성령은 언제나 그대의 편에, 그대의 강점의 편에 선다. 그대가 어떤 식으로든 성령의 인도를 피하는 한, 그대는 약해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약함은 무섭다. 그렇다면 이 결정이 그대가 두려워지기를 원한다는 것 말고 다른 무엇을 의미할 수 있겠는가?
성령은 결코 희생을 요구하지 않지만, 에고는 언제나 희생을 요구한다. 이 동기의 구별에 대해 그대가 혼동한다면, 그것은 오직 투사 때문일 수밖에 없다. 투사는 동기에 대한 혼동이며, 이 혼동이 있는 한 신뢰는 불가능해진다. 누구든 자신이 신뢰하지 않는 안내자에게는 기꺼이 순종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안내자가 신뢰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 경우 그런 불신은 언제나 따르는 자가 신뢰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역시 그 자신의 믿음의 문제일 뿐이다. 자신이 배신할 수 있다고 믿기에, 그 따르는 자는 모든 것이 자신을 배신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는 오직 그가 거짓된 인도를 따르기로 선택했기 때문일 뿐이다. 두려움 없이 이 인도를 따를 수 없기에, 그는 두려움을 인도와 연결시키고, 그 어떤 인도도 따르기를 거부한다.
성령은 그대만큼이나 완전히 신뢰할 수 있다. 하나님은 친히 그대를 신뢰하며, 따라서 그대의 신뢰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대가 아무리 그대의 신뢰성을 의심하더라도 그 신뢰성은 언제나 의심의 여지 없이 남을 것이다.
나는 전에 그대가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뜻은 헛된 바람이 아니며, 하나님의 뜻과 그대의 동일시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곧 그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나와 나누는 것은 선택할 수 있는 일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분리 전체가 바로 이 오류 안에 있다. 그 오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그대가 아무것도 결정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결정으로 그대에게 이미 주어졌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대는 그 뜻을 되돌릴 수 없다.
그대의 그릇된 결정 권한을 에고는 그토록 철저히 지키지만, 그 권한을 내려놓는 일조차 그대의 바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은 그대를 위로 없이 버려두지 않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그대를 위해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음성은 고통과 기쁨을 구별하는 법을 그대에게 가르칠 것이며, 그대가 만든 혼동에서 그대를 이끌어 낼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마음에는 아무 혼동도 없으니, 그 아들의 뜻은 반드시 아버지의 뜻이어야 한다. 아버지의 뜻이 곧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기적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 그런데 그대는 그대가 무엇을 뜻하는지 혼동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 이는 곧 그대가 그대 자신이 무엇인지 혼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대가 하나님의 뜻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대는 기쁨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적은 기쁨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기쁨을 나누는 데 대한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기적은 곧 기쁨인 사랑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모든 기적은 진리에 대한 가르침이며, 진리를 나눔으로써 그대는 고통과 기쁨의 차이를 배우게 된다.
성령은 언제나 그대를 참되게 인도할 것이니, 그대의 기쁨이 곧 성령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이를 위한 성령의 뜻이다. 성령은 곧 기쁨인 하나님의 나라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르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며, 유일하게 쉬운 일이니, 성령의 인도가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법칙과 조화를 이루지 않기에 그대의 본성을 거스른다. 세상은 모든 것에서 난이도의 차이를 지각한다. 이는 에고가 그 무엇도 온전히 바람직한 것으로 지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적에는 난이도의 차이가 없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임으로써, 그대는 그대의 자연스러운 상태에는 아무 어려움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 상태가 바로 은혜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모든 아들의 자연스러운 상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은혜의 상태에 있지 않을 때,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의 자연스러운 환경 밖에 있으며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는 모든 일이 부담이 된다. 그가 스스로 만든 환경을 위해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은 그 환경에 자신을 맞출 수도, 그 환경을 자신에게 맞출 수도 없다. 애써 보아야 소용없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알 때만 행복하다. 하나님과 함께 있음이 바로 그가 아무 부담도 느끼지 않을 유일한 환경이니, 그가 속한 곳이 바로 거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함께 있음은 또한 그에게 걸맞은 유일한 환경이니, 그 자신의 가치는 그가 만들 수 있는 그 무엇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대가 만든 나라를 살펴보고 그 가치를 공정하게 판단하라. 그대가 만든 나라가 하나님의 자녀에게 집이 될 만한 가치가 있는가? 그 나라가 그의 평화를 지키고 그에게 사랑을 비추는가? 그 나라가 그의 마음을 두려움에 물들지 않게 지키며, 그가 아무런 상실감 없이 언제나 줄 수 있게 하는가? 그 나라가 그에게 이 줌이 곧 그의 기쁨이며 하나님이 친히 그의 줌에 감사한다는 것을 가르치는가?
하나님과 함께 있음이 바로 그대가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환경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을 만들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대는 그 환경을 만들 수 없다. 그 환경은 그대를 위해 창조되었으며, 그대는 그 환경을 위해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부인할 때에는 이 돌봄을 알지 못한다. 이는 그들이 스스로에게서 모든 것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보고 만지고 기억하는 모든 것에 하나님의 사랑을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대는 말 그대로 그대 자신에게서 천국을 부인하고 있다.
2) 예외 없는 가르침
나는 그대가, 내가 그대를 선택하여 그 나라에게 그 나라를 가르치게 했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요청한다. 이 가르침에는 예외가 없으니, 예외가 없다는 것 자체가 바로 그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그 나라로 돌아가는 모든 아들은 아들됨(Sonship)을 치유하고 하나님에게 감사한 것이다.
이 가르침을 배운 모든 이는 완벽한 교사가 되었으니, 그 사람이 그 가르침을 성령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다. 마음이 오직 빛만을 가질 때, 그 마음은 오직 빛만을 안다. 그 마음의 광휘는 자기 주위 전체를 비추며, 다른 마음들의 어둠 속으로 뻗어 나가 그 마음들을 위엄으로 바꾼다.
하나님의 위엄이 거기 있으니, 그대가 그 위엄을 알아보고 감사하며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대의 형제 안에서 하나님의 위엄을 알아보는 것이 곧 그대 자신의 유산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동등하게 준다. 그대가 누군가에게서 하나님의 선물을 알아본다면, 그대는 하나님이 그대에게 준 것을 인정한 것이다.
진리만큼 알아보기 쉬운 것은 없다. 이는 즉각적이고 명료하며 자연스러운 알아봄이다. 그대는 진리를 알아보지 않도록 스스로를 훈련해 왔으며, 이는 그대에게 매우 힘든 일이었다. 진리는 그대가 창조된 환경이며, 그대는 그 환경에 의해, 그 환경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래서 그대의 자연스러운 환경 밖에서는 그대가 "진리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법도 하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알지 못하니, 그대의 창조주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의 창조물을 알지 못하니, 그 창조물들을 그대와 함께 창조한 그대의 형제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오직 아들됨(Sonship) 전체만이 하나님과 함께 공동 창조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오직 아들됨 전체만이 하나님처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한 형제의 가치를 알아봄으로써 그를 치유할 때마다, 그대는 그의 창조하는 힘과 그대의 창조하는 힘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그대가 알아보는 것을 잃었을 리 없으며, 그대는 그대가 그에게서 보는 그 영광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는 그대와 더불어 하나님과 함께하는 공동 창조자다. 그의 창조하는 힘을 부인하면, 그대는 그대의 창조하는 힘과 그대를 창조한 하나님의 창조하는 힘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대는 진리의 일부를 부인할 수 없다. 그대는 그대의 창조물을 알지 못하니, 그 창조물들의 창조주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알지 못하니, 그대의 창조주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하나님의 실재를 확립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대의 창조물도 그대의 실재를 확립할 수 없다. 그러나 그대는 그 창조물과 그대 자신을 둘 다 알 수 있다.
존재함(Being)은 나눔으로써 알려진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존재함을 그대와 나누었기에, 그대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대는 또한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창조물들이 무엇을 나누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아버지 없이는 그대는 그대의 아버지됨을 알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의 모든 아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은 그 아들들이 아버지를 닮은 것만큼이나 서로 닮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을 알라, 그러면 그대는 모든 창조를 알게 될 것이다.
앎은 이 교육과정을 배우는 동기가 아니다. 평화가 그 동기다. 평화가 앎의 전제 조건인 것은 오직 갈등 속에 있는 자는 평화롭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평화가 앎의 조건인 것은 평화가 그 나라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앎은 그대가 그 조건을 충족할 때에만 회복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이 정한 거래가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거래도 정하지 않는다. 이는 그저 그대가 하나님의 것이 아닌 상상 속의 뜻을 위해 하나님의 법칙을 오용한 결과일 뿐이다. 앎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대가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고 있다면, 어떻게 앎을 가질 수 있겠는가?
나는 앎이 그대에게 무엇을 주는지 이미 말했지만, 그대는 어쩌면 아직 앎을 온전히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대가 그렇게 여긴다면 에고가 그대의 충성을 요구할 때 앎을 그토록 선뜻 내던지지는 않을 것이다. 에고의 산만함이 그대의 배움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에고에게는 그대를 산만하게 할 힘이 없다. 그대가 그 힘을 주지 않는 한 그렇다. 에고의 음성은 환각이다.
그대는 에고가 "나는 실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의 환각을 혼자서 몰아내라는 요청을 받지 않는다. 그대는 다만 그것들이 그대에게 가져오는 결과를 기준으로 그것들을 평가하라는 요청만을 받을 뿐이다. 그대가 평화를 잃는다는 근거로 그것들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그대를 위해 그대의 마음에서 제거될 것이다.
에고에 대한 모든 반응은 전쟁을 향한 부름이며, 전쟁은 정말로 그대에게서 평화를 빼앗는다. 그러나 이 전쟁에는 적수가 없다. 이것이 그대가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반드시 내려야 할 실재에 대한 재해석이며, 그대가 언제고 내려야 할 유일한 재해석이다. 그대가 적수로 지각하는 이들은 그대의 평화의 일부이며, 그대는 그들을 공격함으로써 평화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포기한 것을 어떻게 가질 수 있겠는가?
그대는 가지기 위해 나누지만, 그대 자신은 평화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대가 평화를 포기할 때, 그대는 그대 자신을 평화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이렇게 평화에서 배제된 상태는 그 나라에 너무나 낯선 조건이어서 그대는 그 나라 안에 자리한 상태를 이해할 수 없다.
그대의 지난 배움은 분명 그대에게 그릇된 것들을 가르쳤을 텐데, 그 배움이 그대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렇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배움의 가치는 의문시되어야 한다. 배움이 변화를 목표로 하며 변화가 언제나 배움의 목적이라면, 그대는 그대의 배움이 가져온 변화들에 만족하는가? 배움의 결과에 대한 불만족은 배움 실패의 표시다. 이는 그대가 원한 것을 얻지 못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속죄의 교육과정은 그대가 스스로 세운 교육과정과 정반대이며, 그 결과 또한 정반대다. 그대의 교육과정의 결과가 그대를 불행하게 만들었고 그대가 다른 결과를 원한다면, 교육과정의 변화가 분명히 필요하다. 가장 먼저 도입되어야 할 변화는 방향의 변화다.
의미 있는 교육과정은 반드시 일관되어야 한다. 만약 정반대되는 관념을 믿는 두 스승이 그 교육과정을 계획한다면, 그 교육과정은 통합될 수 없다. 만약 이 두 스승이 그 교육과정을 동시에 수행한다면, 각자는 그저 서로를 방해할 뿐이다. 이는 동요로 이어지지만 변화로는 이어지지 않는다.
동요하는 자에게는 방향이 없다. 동요하는 자는 하나를 선택할 수 없다. 다른 하나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니, 그 다른 하나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갈등하는 교육과정은 모든 방향이 존재한다고 가르치며, 선택의 근거를 전혀 주지 않는다. 그런 교육과정의 완전한 무의미함이 온전히 인식되어야만 방향의 진정한 변화가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대는 모든 것에 대해 완전히 의견이 다른 두 스승에게서 동시에 배울 수 없다. 두 스승이 함께 짠 교육과정은 불가능한 배움의 과제를 제시한다. 두 스승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완전히 다른 것들을 그대에게 가르친다. 둘 다 그대 자신에 대해 가르치는 것만 아니라면 그런 배움도 가능할지 모른다. 그대의 실재는 그 둘 어느 쪽에도 영향받지 않지만, 그대가 둘 다에게 귀 기울인다면 그대의 마음은 그대의 실재가 무엇인지를 두고 갈라질 것이다.
선택에는 근거가 있다. 오직 한 스승만이 그대의 실재가 무엇인지 안다. 그 앎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없애는 법을 배우는 것이 교육과정의 목적이라면, 그대는 그 앎을 그 스승에게서 배워야 한다. 에고는 자신이 무엇을 가르치려 하는지 알지 못한다. 에고는 그대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대가 무엇인지를 그대에게 가르치려 한다. 에고는 오직 혼란에만 능하다. 에고는 그 밖의 다른 무엇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스승으로서 에고는 완전히 혼란스러우며 완전히 혼란을 일으킨다. 설령 그대가 성령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다 해도—그것은 불가능하지만—그대는 여전히 에고에게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을 것이다. 에고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스승을 선택할 그 어떤 가능한 이유가 있겠는가? 에고가 가르치는 것을 무엇이든 완전히 무시하는 것 말고 다른 무엇이 이치에 맞겠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의지해야 할 스승인가?
에고는 그 무엇에도 이치에 맞는 답을 준 적이 없다. 단지 에고의 가르침에 대한 그대 자신의 경험만을 근거로 삼더라도, 이것만으로도 에고를 그대의 미래의 스승 자격에서 배제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에고는 이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만큼 그대의 배움에 더 큰 해를 끼쳐 왔다. 배움은 그대를 그대의 자연스러운 길을 따라 이끌고 그대가 지닌 것의 발전을 촉진한다면 기쁨을 준다.
그러나 그대의 본성에 어긋나게 배울 때, 그대는 그 배움으로 인해 손해를 볼 것이다. 그 배움이 그대를 가둘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뜻은 그대의 본성 안에 있으며, 따라서 그 본성에 어긋날 수 없다. 그대의 뜻이 자유로운 한 에고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다. 그대가 에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뜻이 자유롭기에 갇히는 것은 그대의 뜻이 아니다. 그래서 에고는 자유 의지에 대한 부인이다.
그대를 강요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대와 그대의 뜻을 나누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만 가르치지만, 그것은 성령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것이 곧 그대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가르침이 뜻하는 바는, 그대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어긋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둘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에고가 가르치려는 모든 것을 되돌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교육과정은 방향만이 아니라 내용도 일관되어야 한다. 에고는 그대가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기를 원한다고 가르치려 한다. 이 부자연스러운 가르침은 배울 수 없다. 이를 배우려는 시도는 그대 자신의 자유에 대한 위반이며, 그대의 뜻이 자유롭다는 이유로 그대가 그대의 뜻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의 뜻을 가두는 그 어떤 시도에도 반대한다. 그 아들의 뜻이 곧 아버지의 뜻임을 알기 때문이다. 성령은 그대를 자유의 길을 따라 꾸준히 인도하며, 그대를 붙들어 두려는 모든 것을 어떻게 무시하거나 넘어서 볼 것인지를 그대에게 가르친다.
우리는 성령이 그대에게 고통과 기쁨의 차이를 가르친다고 말했다. 이는 성령이 그대에게 갇힘과 자유의 차이를 가르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대는 성령 없이는 이 구별을 할 수 없다. 그대 스스로 갇힘이 곧 자유라고 배워 왔기 때문이다. 그 둘이 같다고 믿으면서, 어떻게 그것들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그대 마음의 한 부분이 그대에게 그 둘이 같다고 믿도록 가르쳤다. 그 부분에게 그것들이 어떻게 다른지 가르쳐 달라고 청할 수 있겠는가?
성령의 가르침은 오직 한 방향만을 취하며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지닌다. 성령의 방향은 자유이며 성령의 목표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성령은 그대 없는 하나님을 상상할 수 없다. 그대 없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대의 뜻이 하나님의 뜻임을 배웠을 때, 그대는 하나님 없이 있기를 뜻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도 그대 없이 있기를 뜻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것이 자유이며 이것이 기쁨이다. 이것을 그대 자신에게서 부인하면 그대는 하나님에게서 그 나라를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대를 이것을 위해 창조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