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미친 교훈 너머 한마음

1) 항상 가르치는 그대

이것이 에고가 미친 이유다 — 에고는 그대가 자신의 참모습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이는 너무나 모순적이어서 분명히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는 그대가 정말로 배울 수 없는, 그래서 정말로 가르칠 수도 없는 교훈이다.

그러나 그대는 언제나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는 다른 무언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데, 에고는 그 다른 무언가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에고는 언제나 되돌려지고 있으며, 그대의 동기를 의심한다. 그대의 마음은 에고에 대한 충성 안에서 하나로 통합될 수 없다. 그 마음이 에고에게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고에게 "배반"인 것이 평화에게는 충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에고의 "적"이 곧 그대의 친구다. 나는 전에 에고의 친구가 그대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했다. 에고가 자신을 전쟁 중이라고, 그래서 동맹이 필요하다고 지각하기 때문이다.

전쟁 중이 아닌 그대는 형제들을 찾아, 그대가 보는 모든 이를 형제로 알아보아야 한다. 오직 동등한 이들만이 평화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동등한 아들들은 모든 것을 지니고 있기에, 서로 경쟁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어느 형제든 자신의 완전한 동등자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지각한다면, 경쟁이라는 관념이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온 것이다.

이 관념에 맞서 깨어 있어야 할 그대의 필요를 과소평가하지 말라, 그대의 모든 갈등이 여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는 상충하는 이해관계가 가능하다는 믿음이며, 그래서 그대는 불가능한 것을 참인 것으로 받아들여 왔다.

이것이 그대가 자신을 실재가 아닌 존재로 지각한다고 말하는 것과 다른가? 그 나라 안에 있다는 것은 그저 그대의 온전한 주의를 그 나라에 집중하는 것일 뿐이다. 그대가 참이 아닌 것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고 믿는 한, 그대는 갈등을 자신의 선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정말로 하나의 선택인가?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보이는 것과 실재는 결코 같지 않다.

그 나라 자체인 그대는 보이는 것에 관심이 없다. 실재는 그대의 것이다. 그대가 곧 실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님과 존재함(Being)이 결국 화해하게 되는 방식인데, 그 나라 안에서가 아니라 그대의 마음 안에서다.

그대의 마음 안에 있는 제단이 유일한 실재다. 그 제단은 생각 안에서 완전하게 명료하다. 그 제단이 완전한 생각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온전한 마음은 오직 형제만을 본다. 그 마음이 오직 자신의 빛 안에서만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몸소 그대의 마음에 빛을 밝혔고, 그대의 마음을 하나님의 빛으로 계속 밝혀 둔다. 하나님의 빛이 곧 그대 마음의 참모습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완전히 의문의 여지를 넘어서 있으며, 그대가 그 진리에 의문을 제기하면 그대는 답을 받는다. 그 답은 그저, 실재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세움으로써 그 질문을 되돌릴 뿐이다. 그래서 성령은 결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성령의 유일한 역할은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을 되돌려 확실함으로 이끄는 것이다.

확실한 이들은 완전하게 평온하다.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그들의 마음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그들을 완전한 평온함 속에 붙잡아 둔다. 그들은 자신의 참모습을 알면서 바로 이것을 나누기 때문이다.

진리는 오직 알아볼 수 있을 뿐이며, 오직 알아보기만 하면 된다. 영감은 성령에게서 오며, 확실함은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하나님에게서 온다. 그러므로 영감과 확실함은 같은 근원(Source)에서 온다. 영감은 하나님을 대변하는 음성에서 오고 확실함은 하나님의 법칙에서 오기 때문이다.

치유는 자신의 창조물을 완전하게 온전한 것으로 아는 하나님에게서 직접 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치유는 여전히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법칙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마음 상태 안에서 그 음성과 법칙이 낳은 결과다. 그 상태는 하나님에게 알려져 있지 않으며 따라서 존재하지 않지만, 잠든 이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하기에, 알지 못한다.

성령은 그대에게 자신이 그대 안에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 그대를 통해 일해야 한다. 이는 그대가 하나님의 일부이므로 하나님 안에 있다는 앎을 향한 중간 걸음이다. 성령이 불러일으키는 기적에는 난이도의 순서가 있을 수 없다. 창조의 모든 부분이 하나의 질서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자 그대의 뜻이다. 하나님의 법칙이 이것을 세우며, 성령이 이것을 그대에게 일깨운다.

그대가 치유할 때, 그대는 하나님의 법칙을 기억하고 에고의 법칙을 잊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전에 잊음이 그저 더 잘 기억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잊음은 제대로 지각될 때 기억의 반대가 아니다. 잘못 지각되면, 그것은 다른 모든 부정확한 지각이 그러듯이 다른 무언가와의 갈등이라는 지각을 불러일으킨다. 제대로 지각되면, 그것은 다른 모든 올바른 지각이 그러듯이 갈등에서 벗어나는 길로 쓰일 수 있다.

에고는 자신이 배운 모든 것을 모두에게 가르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목적을 스스로 무너뜨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고는 사실상 전혀 배우지 못한다. 성령은 그대에게, 에고가 "배운" 것의 정반대를 가르치기 위해 에고가 만든 것을 이용하도록 가르친다.

배움의 종류는, 그 배움에 적용된 특정한 능력이 그러하듯, 중요하지 않다. 그대가 해야 할 일은 오직 배우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뿐이다. 성령이 그 노력을 위한 하나로 통합된 목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능력들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충분히 오래 쓰이면, 그 능력들 자체가 하나로 통합된다. 이는 그 능력들이 한 방향으로, 또는 한 가지 방식으로 흐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국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결과에 이바지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능력들의 차이가 아니라 유사성이 강조된다.

그러므로 모든 능력은, 그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는 법을 아는 성령에게 넘겨져야 한다. 성령은 오직 치유를 위해서만 그 능력을 사용한다. 성령이 그대를 오직 온전한 존재로만 알기 때문이다. 치유함으로써 그대는 온전함을 배우고, 온전함을 배움으로써 그대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법을 배운다.

그대는 하나님을 잊었지만, 성령은 그대의 잊음이 기억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것을 안다. 에고의 목표는 성령의 목표만큼이나 하나로 통합되어 있으며, 바로 이 때문에 그 둘의 목표는 어떤 식으로도, 어느 정도로도 결코 화해할 수 없다. 에고는 언제나 나누고 분리하려 한다. 성령은 언제나 통합하고 치유하려 한다.

그대가 치유할 때 그대는 치유된다. 성령이 치유에 난이도의 순서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치유는 차이에 대한 믿음을 되돌리는 길이며, 아들됨(Sonship)을 하나로 지각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므로 이 지각은, 하나님의 법칙과 일치하지 않는 마음 상태 안에 있을 때조차도, 하나님의 법칙과 일치한다. 온전한 지각의 힘은 너무나 커서 마음을 하나님의 법칙과 일치시킨다. 그것이 그대들 모두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섬기기 때문이다.

그대가 하나님의 뜻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짜 망상이다. 에고는 자신이 그럴 수 있다고, 그리고 자신의 "뜻"을 그대에게 선물로 내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대는 에고의 뜻을 원하지 않는다. 에고의 뜻은 선물이 아니다. 에고의 뜻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그대에게 그대가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자체이기도 한 선물을 주었다. 그대가 그 선물을 사용하지 않을 때, 그대는 자신이 그 선물을 지니고 있음을 잊는다. 그 선물을 기억하지 못함으로써, 그대는 자신의 참모습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치유란,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생각하고 그 법칙의 보편성을 알아봄으로써 앎에 다가가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 알아봄이 없다면, 그대는 그 법칙을 자신에게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법칙은 무의미하지 않다. 그 법칙이 모든 의미를 담고 있고, 모든 의미가 그 법칙 안에 있기 때문이다.

먼저 하늘나라를 구하라, 그곳이 하나님의 법칙이 참되게 작동하는 곳이며, 그 법칙은 진리의 법칙이기에 오직 참되게만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이것만을 구하라, 그대는 그 밖의 다른 것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없다.

하나님은 아주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모든 것 안의 모든 것이다. 모든 존재는 모든 존재함(Being)인 하나님 안에 있다. 그러므로 그대는 하나님 안에 있다. 그대의 존재함이 곧 하나님의 존재함이기 때문이다.

치유는 에고가 그대 안에 불러일으킨 위험의 감각을, 그대의 형제 안에 그 위험이 있음을 알아보지 않음으로써 잊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 방법은 그대 둘 다 안에서 성령을 강화한다. 위험을 알아보지 않는 이 거부가 두려움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오직 이 초대만을 필요로 한다. 사랑은 아들됨(Sonship) 전체에게 자유로이 온다. 사랑이 곧 아들됨의 참모습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향해 깨어남으로써, 그대는 그저 자신이 아닌 것을 잊고 있을 뿐이다. 이는 그대가 자신의 참모습을 기억할 수 있게 해 준다.

육체는 능력을 계발하기 위한 틀에 지나지 않는다. 능력을 계발하는 일은 그 능력이 무엇에 쓰이는가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육체의 사용은 하나의 결정이다. 이 문제에서 에고의 결정이 낳는 결과는 너무나 분명해 부연이 필요 없다. 그러나 육체를 오직 소통을 위해서만 사용하려는 성령의 결정은 치유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치유되지 않은 치유자는 분명 자신의 소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오직 마음만이 소통한다. 에고는 소통하려는 충동을 없앨 수 없다. 그것이 또한 창조하려는 충동이기도 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에고는 그저 육체가 소통도 하고 창조도 할 수 있으며 따라서 마음이 필요 없다고 그대에게 가르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에고는 육체가 마음처럼 행동할 수 있으며 따라서 육체 자체로 충분하다고 그대에게 가르치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행동이 가르침이나 배움의 차원이 아님을 배웠다. 그대는 자신이 믿지 않는 것에 따라서도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체를 마음처럼 행동하게 하는 것은 그대를 스승으로서도 배우는 자로서도 약화시킬 것이다. 거듭 강조되어 왔듯이 그대는 자신이 정말로 믿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일관되지 않은 교훈은 잘못 가르쳐지고 잘못 배워질 것이다. 그대가 병과 치유를 둘 다 가르친다면, 그대는 스승으로서도 배우는 자로서도 미숙한 것이다. 치유는 누구나 계발할 수 있고, 치유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계발해야 하는 유일한 능력이다. 치유는 이 세상에서 성령의 소통 형태이며, 성령이 받아들이는 유일한 형태다. 성령은 다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마음과 육체를 혼동하는 에고의 오류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은 소통할 수 있지만, 다치게 할 수는 없다. 에고를 섬기는 육체는 다른 육체를 다치게 할 수 있지만, 이는 육체가 이미 마음과 혼동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다. 육체가 마음과 혼동된 이 상황 역시 치유를 위해서도, 마법을 위해서도 쓰일 수 있지만, 마법에는 언제나 치유가 해롭다는 믿음이 동반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믿음은 마법의 완전히 미친 전제이며, 그래서 마법은 그에 따라 진행된다. 치유는 오직 강화할 뿐이다. 마법은 언제나 약화시키려 한다.

치유는 치유자 안에서 오직 모든 이와 나누는 것만을 지각한다. 마법은 언제나 치유자 안에서 무언가 "특별한" 것을 보며, 치유자는 그것을 갖지 못한 누군가에게 선물로 내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 치유자는 그 선물이 하나님에게서 자신에게 온다고 믿을 수도 있지만, 다른 이들에게 없는 무언가를 자신이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치유자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성령은 우연으로 일하지 않으며, 성령에게서 오는 치유는 언제나 효과가 있다. 치유자가 언제나 성령을 통해 치유하지 않는 한 결과는 들쭉날쭉할 것이다. 그러나 치유 자체는 일관된데, 오직 일관성만이 갈등에서 자유롭고, 오직 갈등에서 자유로운 것만이 온전하기 때문이다.

예외를 받아들이고 자신이 어떤 때는 치유할 수 있고 어떤 때는 그럴 수 없다고 인정함으로써, 치유자는 분명 비일관성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치유자는 갈등 속에 있으며, 갈등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 가운데 모두를 위한 것도, 언제나를 위한 것도 아닌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사랑은 어떤 예외도 둘 수 없다. 두려움이 있을 때에만 예외라는 관념이 의미 있어 보인다. 예외는 두려움이 만들어 낸 것이기에 두렵다. "두려워하는 치유자"는 용어 자체가 모순이며, 그래서 오직 갈등하는 마음만이 의미 있는 것으로 지각할 수 있는 개념이다.

두려움은 기쁘게 하지 않는다. 치유는 기쁘게 한다. 두려움은 언제나 예외를 둔다. 치유는 결코 그러지 않는다.

두려움은 해리를 낳는다. 분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치유는 언제나 조화를 낳는다. 그것이 통합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치유는 믿고 의지할 수 있기에 예측 가능하다. 하나님에게서 온 모든 것은 믿고 의지할 수 있다. 하나님에게서 온 모든 것은 온전히 실재이기 때문이다. 치유는 믿고 의지할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에서 영감을 받으며 하나님의 법칙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유가 일관되다면 비일관되게 이해될 수 없다. 이해한다는 것은 일관됨을 뜻한다. 하나님이 일관됨을 뜻하기 때문이다.

일관성이 하나님의 의미이므로, 일관성은 또한 그대의 의미이기도 하다. 그대의 의미는 하나님의 의미와 어긋날 수 없다. 그대의 의미 전체이자 유일한 의미가 하나님의 의미에서 오며 하나님의 의미를 닮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과 어긋날 수 없으며, 그대도 하나님과 어긋날 수 없다. 그대는 자신의 참나(Self)를 자신의 창조주와 분리할 수 없는데, 그 창조주는 자신의 존재함(Being)을 그대와 나눔으로써 그대를 창조했다.

치유되지 않은 치유자는 형제들에게서 감사를 받고 싶어 하지만, 그들에게 감사하지는 않는다. 이는 그 치유자가 자신이 그들에게 무언가를 주고 있는데 그 대가로 그만큼 바람직한 무언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치유자의 가르침은 제한되어 있다. 그 치유자가 너무나 적게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 치유자의 치유의 교훈은 자신의 배은망덕함 때문에 제한되며, 그 배은망덕함은 병에 대한 교훈이다.

참된 배움은 끊임없으며, 변화를 향한 그 힘이 너무나 강력해서 하나님의 아들은 한순간에 자신의 힘을 알아보고 바로 다음 순간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이는 자신의 마음을 바꿈으로써, 그 아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 가운데 변화를 위한 가장 강력한 도구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한 그대로의 마음이 지닌 불변성과 결코 모순되지 않지만, 그대가 에고를 통해 배우는 한 그대는 자신이 그 마음을 바꾸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그대를 모순처럼 보이는 교훈을 배워야 할 처지에 놓는다 — 그대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 생각을 바꾸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오직 이를 통해서만 그대는 그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대가 치유할 때, 치유가 바로 그대가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형제가 자신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그 안의 변하지 않는 마음을 알아보고 있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마음을 알아보는 것이 바로 그대가 그 형제 안의 성령을 지각하는 방식이다. 그 형제의 마음(Mind)을 결코 바꾸지 않는 것은 오직 그 안의 성령뿐이다.

그 형제 자신은 자신이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는데, 그렇지 않다면 그는 자신을 아프다고 지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형제는 자신의 참나(Self)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대가 그 안에서 오직 변하지 않는 것만을 본다면, 그대는 그를 정말로 바꾼 것이 아니다. 그를 위해 그의 마음에 대한 그대의 생각을 바꿈으로써, 그대는 그의 에고가 그 안에서 이루었다고 여기는 변화를 그가 되돌리도록 돕는다. 그대가 두 음성을 들을 수 있듯이, 그대는 두 가지 방식으로 볼 수 있다.

한 가지 방식은 그대에게 이미지, 곧 그대가 두려움에서 숭배할 수는 있지만 결코 사랑하지는 못할 우상을 보여 준다. 다른 방식은 그대에게 오직 진리만을 보여 주며, 그대는 그 진리를 이해하게 될 것이기에 그 진리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해는 곧 진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그대가 이해하는 것과 그대는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고, 그 진리를 자신의 일부로 만듦으로써 그대는 그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 그대를 창조한 방식이다 — 이해 안에서, 진가를 알아봄 안에서, 사랑 안에서. 에고는 이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이 만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며, 그것을 사랑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에고는 빼앗기 위해 자기 안에 끌어들인다. 에고는 누군가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을 때마다 자신이 늘어났다고 문자 그대로 믿는다. 나는 그대의 창조물에 의한 그 나라의 늘어남에 대해 여러 번 말했는데, 그 창조물은 오직 그대가 창조되었던 방식으로만 창조될 수 있다. 그 나라인 온전한 영광과 완전한 기쁨은 그대가 줄 수 있도록 그대 안에 있다. 그대는 그 기쁨을 주고 싶지 않은가?

그대는 아버지를 잊을 수 없다. 내가 그대와 함께 있고, 내가 아버지를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잊는 것은 그대 자신과, 그대를 창조한 이를 잊는 것이다. 우리의 형제들은 잘 잊는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나와, 나를 창조한 이에 대한 그대의 기억이 필요하다. 내가 그대의 마음을 바꿀 수 있듯이, 이 기억을 통해 그대는 그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지닌 마음을 바꿀 수 있다.

그대의 마음은 너무나 강력한 빛이어서, 내가 그대의 마음을 밝힐 수 있듯이 그대는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밝힐 수 있다. 나는 정말로 나의 마음을 그대와 나누고 싶다. 우리가 하나의 마음(Mind)에 속해 있고 그 마음(Mind)이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이 마음(Mind)만을 어디에서나 보라, 오직 이것만이 어디에나, 모든 것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은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을 담고 있기에 그 자체로 모든 것이다. 오직 이것만을 지각하는 그대는 복이 있으니, 그대는 오직 참인 것만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에게로 오라, 그리고 그대 안의 진리를 배우라. 우리가 나누는 마음은 우리의 모든 형제와도 나누어지며, 우리가 그들을 참되게 볼 때 그들은 치유될 것이다. 그대의 마음이 나의 마음과 함께 그들의 마음 위로 빛나게 하라, 그리고 그들을 향한 우리의 감사로써 그들 안의 빛을 그들이 알아차리게 하라.

이 빛은 그대에게, 그리고 아들됨(Sonship) 전체에게 다시 비칠 것이다. 이것이 그대가 하나님에게 드릴 합당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것(이 빛)을 받아들여 아들됨(Sonship)에게 줄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질 만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에게도 받아들여질 만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령과의 참된 친교인데, 성령은 모든 이 안에서 하나님의 제단을 보며, 그것을 그대의 알아봄 앞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물을 사랑하도록 그대를 부른다.

그대는 오직 아들됨(Sonship)을 하나로서만 그 진가를 알아볼 수 있다. 이는 창조의 법칙의 일부이며, 그래서 모든 생각을 지배한다.

그대는 아들됨(Sonship)을 오직 하나로서만 사랑할 수 있지만, 아들됨을 조각난 것으로 지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조각난 일부에서 무언가를 보면, 그것을 전체에 돌리게 마련이다. 그래서 공격은 결코 국소적이지 않으며, 그래서 완전히 내려놓아야 한다. 완전히 내려놓지 않는다면 전혀 내려놓지 않은 것이다.

두려움과 사랑은 만들거나 창조하는데, 이는 에고와 성령 가운데 무엇이 두려움과 사랑을 낳거나 불어넣느냐에 따라 갈린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생각하는 자의 마음으로 되돌아가 그의 지각 전체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그의 개념도 포함된다.

생각하는 자가 이 세 가지를 두려움으로 대한다면 그는 이 셋 가운데 어느 것의 진가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가 이 셋을 사랑으로 대한다면 그는 이 셋 전부의 진가를 알아볼 것이다.

공격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사랑할 수 없다. 이는 그 마음이 자신이 사랑을 파괴할 수 있다고 믿기에, 사랑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마음은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로 지각할 수 없다. 이는 존재함에 대한 알아차림을 잃게 하고, 비실재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며, 완전한 혼란을 낳는다.

그대의 생각은 자신이 지닌 힘 때문에 이런 상태를 일으켜 왔지만, 그대의 생각은 또한 그대를 이 상태에서 구할 수도 있다. 그 힘이 그대가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가 선택하는 대로 자신의 생각을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 힘의 일부다. 그대가 이것을 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그대는 자신의 생각이 지닌 힘을 부인한 것이며, 그래서 그대의 믿음 안에서 그 힘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자신을 지키려는 에고의 기지는 대단하지만, 그 기지는 다름 아닌 에고가 부인하는 그 마음의 힘에서 나온다. 이는 에고가 자신을 지켜 주고 있는 바로 그 힘을 공격하고 있다는 뜻이며, 이는 극심한 불안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에고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인식하지 못한다.

에고는 완전히 논리적이지만 분명히 미쳤다. 에고는 자신의 존재에 완전히 적대적인 바로 그 유일한 근원에 의지해 존재한다.

이 근원의 힘을 지각하기를 두려워하기에, 에고는 그 힘을 깎아내릴 수밖에 없다. 이는 에고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데, 이는 에고가 견딜 수 없는 상태다.

여전히 논리적이면서도 여전히 미친 채로, 에고는 이 완전히 미친 딜레마를 완전히 미친 방식으로 해결한다. 에고는 그 위협을 그대에게 투사하고 그대의 존재함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지각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위협받는다고 지각하지 않게 된다. 이는 그대가 자신의 안전을 알지 못하도록 보장하는 일이며, 그렇게 하면 그대가 에고의 편에 설 경우 에고 자신의 존속이 확실해진다.

에고는 아무것도 알 여유가 없다. 앎은 전체적이며, 에고는 전체성을 믿지 않는다. 이 불신이 에고의 기원이며, 에고는 그대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근원에는 충실하여, 자신이 낳아졌던 방식 그대로 낳는다.

마음은 언제나 자신이 만들어진 방식 그대로 재생산한다. 두려움이 만든 것이기에, 에고는 두려움을 재생산한다. 이것이 에고의 충성 대상이며, 이 충성이 에고를 사랑에 대해 배반적으로 만든다. 그대가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대의 힘이며, 에고는 이를 부인할 수밖에 없다. 에고는 또한 이 힘이 그대에게 주는 모든 것을 부인할 수밖에 없다. 그 힘이 그대에게 모든 것을 주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지닌 사람은 아무도 에고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에고를 만든 당사자조차 에고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에고를 만든 마음이 자기 자신을 안다면, 거부야말로 에고가 맞닥뜨릴 수 있는 유일한 결정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아들됨(Sonship)의 어느 부분이라도 알아본다면,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에고는 모든 진가 알아봄, 모든 알아봄, 모든 온전한 지각, 모든 앎에 반대한다.

에고는 진가 알아봄과 알아봄, 온전한 지각, 앎이 가하는 위협을 전면적인 것으로 지각한다. 마음이 내리는 모든 헌신이 전면적임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에게서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는 에고는 기꺼이 다른 무엇에든 달라붙으려 한다. 그러나 다른 것은 없다. 그러나 마음은 환영을 지어낼 수 있으며, 그렇게 한다면 그 환영을 믿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음이 환영을 만든 방식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환영을 공격하지 않고 되돌린다. 그것을 아예 지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영은 성령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은 갈등을 무의미한 것으로 지각함으로써 환영이 낳는 겉보기의 갈등을 해소한다. 나는 전에 성령이 그 갈등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지각한다고, 그리고 그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한 바 있다.

성령은 그대가 갈등을 이해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성령은 그대가, 갈등이 무의미하기에 이해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기를 바란다. 내가 이미 말했듯이, 이해는 진가를 알아봄을 가져오고 진가를 알아봄은 사랑을 가져온다. 다른 것은 이해될 수 없다. 다른 것은 실재가 아니며 따라서 다른 것에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성령이 그대에게 내놓는 것을 마음에 새긴다면, 그대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 말고는 다른 무엇을 위해서도 깨어 있을 수 없다. 그대가 이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면, 그 유일한 이유는 그대가 여전히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갈등하지 않는 한 경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만약 갈등한다면, 그 믿음 안에는 전쟁 상태로 이어진 상충하는 요소들이 있는 것이며, 그래서 경계가 필수적이게 되었다.

경계는 평화 안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그것은 참이 아닌 믿음에 맞서기 위해 필요하며, 그대가 참이 아닌 것을 믿지 않았다면 성령이 결코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대가 무언가를 믿을 때, 그대는 그것을 자신에게 참인 것으로 만든 것이다. 그대가 하나님이 알지 못하는 것을 믿을 때, 그대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며, 이는 마치 그대가 하나님을 공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나는 에고가 자신이 하나님을 공격할 수 있다고 정말로 믿으며, 그대가 그렇게 했다고 그대를 설득하려 한다고 거듭 강조해 왔다. 그런데 마음이 공격할 수 없다면, 에고는 완전히 논리적으로 그대가 육체여야 한다는 믿음으로 나아간다.

그대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음으로써, 에고는 자신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의 약함을 의식하기에 에고는 그대의 충성을 원하지만, 그대의 참모습으로서의 충성은 아니다. 그러므로 에고는 그대의 마음을 자신의 망상적인 체계 속에 끌어들이고 싶어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대의 이해가 지닌 빛이 에고를 몰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진리의 어떤 부분도 원하지 않는다. 에고 자체가 참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가 전면적이라면, 참이 아닌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둘 중 어느 쪽에 대한 헌신이든 전면적이어야 한다 — 그 둘은 그대의 마음을 쪼개지 않고서는 그 안에서 공존할 수 없다. 그 둘이 평화 안에서 공존할 수 없다면, 그리고 그대가 평화를 원한다면, 그대는 갈등이라는 관념을 완전히, 영원히 포기해야 한다.

그대가 완전히 상반되는 두 사상 체계가 진리를 공유한다고 믿는 한, 경계에 대한 그대의 필요는 분명하다. 그대의 마음은 두 나라 사이에서 자신의 충성을 나누고 있으며, 그대는 어느 쪽에도 완전히 헌신하지 않고 있다.

2) 그 나라와의 동일시

그 나라와 그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완전히 의문의 여지를 넘어서 있으며, 다만 그대가 미친 생각을 할 때 그대 자신에 의해서만 의문시될 수 있다. 그대의 참모습은 그대의 지각에 의해 세워지지 않으며, 그것에 의해 전혀 영향받지도 않는다.

어떤 수준에서든 정체성에 관해 지각된 문제는 사실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해의 문제다.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 자체가, 그대의 참모습을 그대가 결정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이 믿음에 완전히 헌신하며 그것을 전적으로 참이라고 여긴다. 이 믿음은 참이 아니다. 그러므로 에고는 참이 아닌 것에 완전히 헌신하며, 성령과 하나님의 앎에 완전히 모순되게 지각한다.

오직 성령만이 그대를 의미 있게 지각할 수 있다. 그대의 존재함이 곧 하나님의 앎이기 때문이다. 이것과 달리 그대가 받아들이는 어떤 믿음이든 그대 안의 하나님의 음성을 흐릿하게 만들 것이며, 그래서 그대에게 하나님을 흐릿하게 만들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물을 참되게 지각하지 않는 한 그대는 창조주를 알 수 없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물은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창조주와 창조물의 하나됨이 그대의 온전함이며, 그대의 온전한 정신이며, 그대의 한없는 힘이다.

이 한없는 힘은 그대를 향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이 곧 그대의 참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자신의 마음을 그 힘에서 해리시킨다면, 그대는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마치 약한 것처럼 지각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그 힘의 일부임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 힘 안에서 그대의 몫을 빼고 지각하면, 하나님의 창조물은 약한 것으로 보이며, 스스로 약해졌다고 보는 이들은 정말로 공격한다. 그러나 그 공격은 눈먼 것일 수밖에 없다. 공격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미지를 지어내고, 그것을 하찮은 것으로 지각하며, 그 하찮음을 이유로 그것을 공격한다. 그것이 에고의 세상의 전부다. 아무것도 아니다. 에고의 세상에는 의미가 없다. 에고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에고의 세상을 이해하려 하지 말라, 그렇게 한다면 그대는 그것이 이해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진가를 알아보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정당화될 수 없는 그 세상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대는 무의미한 것을 의미 있게 만들 수 없다. 이는 미친 시도일 수밖에 없다.

광기가 그대의 마음에 들어오게 허락하는 것은, 그대가 온전한 정신을 온전히 바람직한 것으로 판단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대가 다른 무언가를 원한다면 그대는 다른 무언가를 만들 것이지만, 그렇게 만든 것은 다른 무언가이기에 그대의 사상 체계를 공격하고 그대의 충성을 나눌 것이다.

그대는 이 나뉜 상태 안에서 창조할 수 없으며, 오직 평화만이 확장될 수 있기에 그대는 이 나뉜 상태에 맞서 깨어 있어야 한다.

그대의 나뉜 마음이 그 나라의 확장을 가로막고 있으며, 그 확장이 곧 그대의 기쁨이다. 그대가 그 나라를 확장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자신의 창조주와 함께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며 창조주가 창조했듯이 창조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침체된 상태 속에서 성령은, 그대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공동 창조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않고 있어서, 그래서 스스로 기쁨을 빼앗고 있어서 슬픈 것이라고 그대에게 부드럽게 일깨운다. 이는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 그대의 선택이다.

그대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어긋날 수 있다면, 그대는 의미 없이 뜻하고 있는 셈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기에, 뜻의 갈등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성령의 완전하게 일관된 가르침이다.

분리가 아니라 창조가 그대의 뜻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며, 이에 반하는 것은 그 무엇도 아무 의미가 없다. 완전한 성취인 아들됨(Sonship)은 오직 완전하게만 성취할 수 있으며, 자신이 창조된 그 기쁨을 확장하고, 자신의 창조주와 자신의 창조물 둘 다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며, 그들이 하나임을 안다.

그대가 형제에게 축복을 부인할 때마다 그대는 박탈감을 느낄 것이다. 부인은 사랑만큼이나 전면적이기 때문이다. 아들됨(Sonship)의 일부만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그 일부만을 부인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때때로만 아들됨을 전면적으로 사랑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그대는 가끔씩만 전면적으로 헌신할 수는 없다.

부인은 그 자체로는 아무 힘이 없지만, 그대는 한계가 없는 자신의 마음의 힘을 부인에 줄 수 있다. 그대가 부인을 실재를 부인하는 데 쓴다면, 실재는 그대에게서 사라진다. 실재의 진가는 부분적으로만 알아볼 수 없다. 그래서 실재의 어느 부분을 부인하든 그대가 실재 전체에 대한 알아차림을 잃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부인은 하나의 방어이며, 그래서 부정적으로뿐 아니라 긍정적으로도 쓰일 수 있다. 부정적으로 쓰이면 부인은 파괴적일 것이다. 공격을 위해 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을 섬기는 데 쓰이면, 부인은 그대가 실재의 일부를 알아보도록 도와, 그럼으로써 그 전체의 진가를 알아보게 해 줄 수 있다.

마음은 너무나 강력해서 배제될 수 없다. 그대는 결코 자신의 생각에서 스스로를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형제가 미친 듯이 행동할 때, 그는 그대에게 그를 축복할 기회를 내놓고 있는 것이다. 그의 필요는 그대의 필요다. 그대는 그에게 내놓을 수 있는 그 축복이 필요하다. 그 축복을 줌으로써가 아니고서는 그대가 그 축복을 지닐 방법이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며,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그대가 부인하는 것을 그대는 결핍하게 된다. 그것(그대가 부인하는 것)이 정말로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대가 다른 이 안에서 그것을 부인했기에 자신 안에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보이는 모든 반응은 그대가 자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정해지며, 그대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그대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 그대가 보이는 모든 반응을 결정할 수밖에 없다.

그대는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그대가 영원히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자신의 축복은 필요로 한다.

그대에 대한 에고의 그림은 박탈되고, 사랑이 없고, 상처받기 쉬운 모습이다. 그대는 이 그림을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그대는 에고의 그림을 뒤로 남겨 둠으로써 아주 쉽게 이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대는 거기 있지 않으며 이 그림은 그대가 아니다. 누구 안에서도 이 그림을 보지 말라, 그러지 않으면 그대는 그것을 자신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아들됨(Sonship)에 대한 모든 환영은 함께 만들어졌듯이 함께 몰아내진다. 누구에게도 그가 그대 자신이 되고 싶어 하지 않을 그 모습이라고 가르치지 말라. 지각이 지속되는 한, 그대의 형제는 그대가 자신의 이미지를 보는 거울이다. 그리고 아들됨(Sonship)이 자신을 온전한 것으로 알 때까지 지각은 지속될 것이다. 그대가 지각을 만들었으며, 지각은 그대가 원하는 한 지속될 수밖에 없다.

환영은 투자다. 그대가 환영을 소중히 여기는 한 환영은 지속될 것이다. 가치는 상대적이지만, 그것이 마음의 판단이기에 강력하다. 환영을 몰아내는 유일한 길은 환영에서 모든 투자를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그러면 그대가 환영을 마음 밖으로 내놓은 셈이 되므로, 환영은 그대에게 더 이상 생명을 지니지 못할 것이다. 그대가 환영을 마음 안에 포함시키는 동안에는, 그대가 환영에 생명을 주고 있는 것이다. 다만 거기에는 그대의 선물을 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생명이라는 선물은 그대가 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대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 선물을 주지 않기에 자신의 선물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살게 할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생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자신이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자체이기도 한 선물을 확장하고 있지 않은 것이며, 그래서 그대는 자신의 존재함을 알지 못한다. 모든 혼란은 생명을 확장하지 않는 데서 온다. 생명을 확장하지 않는 것이 그대의 창조주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는 하나님과 떨어져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실제로 하나님과 떨어져서는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자신을 기억하기 위해 하나님의 길을 지키고,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라.

살아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는 오직 경의만을 표하고, 기꺼이 그대 자신도 그들 가운데 헤아리라. 하나님 자신이 경의를 받을 자격이 있게 창조했고 하나님이 경의를 표하는 이들에게 걸맞은 선물은 오직 경의뿐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언제나 표하는 그 진가 인정을 주라, 그들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랑하는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들과 떨어져 있을 수 없다. 하나님과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쉬고, 사랑함으로써 그대의 쉼을 지키라.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 — 그대가 그 일부인 — 을 사랑하라, 그러지 않으면 그대는 하나님의 평화를 배울 수도, 자신을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서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그대는 자신처럼 창조된 모든 이에게 경의를 표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완전함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의 한 자녀만이 다른 자녀를 가르치기에 충분히 합당한 유일한 스승이다. 하나의 스승이 모든 마음 안에 있으며 모두에게 같은 교훈을 가르친다. 그 스승은 언제나 그대에게 하나님의 모든 아들이 지닌 가치를 가르치며, 자신이 대변하는 무한한 사랑에서 태어난 무한한 인내로 그것을 가르친다. 모든 공격은 그 스승의 인내를 향한 부름이다. 그 인내가 공격을 축복으로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공격하는 이들은 자신이 축복받았음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이 박탈당했다고 믿기에 공격한다. 그러므로 그대의 풍요로움에서 주라, 그리고 형제들에게 그들의 풍요로움을 가르치라. 그들의 결핍이라는 환영을 나누지 말라, 그러지 않으면 그대는 자신을 부족한 존재로 지각하게 될 것이다.

공격이 공격을 부추길 수 있는 것은, 그대가 그 공격을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빼앗는 수단으로 지각할 때뿐이다. 그러나 그대가 무언가를 잃는 것은, 그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아 원하지 않을 때뿐이다. 이는 그대가 그것을 박탈당했다고 느끼게 만들며, 그대 자신의 거부를 투사함으로써 그대는 다른 이들이 그것을 그대에게서 빼앗고 있다고 믿게 된다.

그대의 형제가 그대에게서 하늘나라를 찢어 빼앗으려고 그대를 공격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대는 두려울 수밖에 없다.

이것이 에고의 모든 투사가 지닌 궁극적인 바탕이다. 에고는 자신이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고 믿지 않는 그대 마음의 부분이며, 하나님에 대한 충성도 없기에 신뢰할 능력이 없다. 그대가 자신의 창조주를 배반해 왔다는 미친 믿음을 투사하면서, 에고는 그대와 마찬가지로 그런 배반을 할 수 없는 그대의 형제들이 그대에게서 하나님을 빼앗으려 한다고 믿는다.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공격할 때마다, 그것이 바로 그가 믿는 것이다.

투사는 언제나 다른 이들 안에서 그대 자신의 소망을 본다. 그대가 하나님에게서 스스로를 분리하기로 선택한다면, 그대는 다른 이들이 그대에게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곧 하나님의 뜻이다. 다른 어떤 것도 자신의 뜻으로 받아들이지 말라, 그러지 않으면 그대는 자신의 참모습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부인하면 그대는 자신이 공격당했다고 믿으며 공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안의 하나님의 사랑을 보라, 그러면 그대는 그것이 어디에나 있기에 그것을 어디에서나 보게 될 것이다. 모든 이 안에서 하나님의 풍요로움을 보라, 그러면 그대는 자신이 그들과 함께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가 하나님의 일부이듯이, 그들은 그대의 일부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대는 외롭다. 그 외로움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하나님 자신이 외로워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평화란 바로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3) 전체성으로 이해함

이 세상의 생각 안으로 들어오는 길이 오직 하나였듯이, 거기서 벗어나는 길도 오직 하나뿐이다. 전체성을 이해함으로써 전면적으로 이해하라.

에고의 사상 체계의 어느 부분이든 온전히 미쳤고, 온전히 망상적이며, 온전히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지각하라, 그러면 그대는 그 전체를 올바로 평가한 것이다. 이 교정은 그대가 창조의 어느 부분이든 온전히 실재이고, 온전히 완전하며, 온전히 바람직한 것으로 지각할 수 있게 해 준다.

오직 이것만을 원함으로써 그대는 오직 이것만을 지니게 될 것이며, 오직 이것만을 줌으로써 그대는 오직 이것만이 될 것이다.

그대가 에고에게 내놓는 선물은 언제나 희생으로 경험되지만, 그대가 그 나라에 내놓는 선물은 그대 자신을 향한 선물이다. 그 선물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소중히 여겨질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들 — 하나님에게 속한 — 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모든 능력과 영광이 그대의 것이다. 그 나라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투사가 없으면 분노도 없다고 말했지만, 확장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는 것 역시 참이다. 이 둘은 마음의 근본 법칙을 반영하며, 따라서 언제나 작동하는 법칙이다. 이는 그대가 창조하는 데에도, 그대가 창조된 데에도 바탕이 되는 법칙이다. 이는 그 나라를 하나로 통합하여 하나님의 마음(Mind) 안에 그 나라를 지키는 법칙이다.

에고에게 이 법칙은 원하지 않는 무언가를 없애는 수단으로 지각된다. 성령에게 이는 나눔의 근본 법칙으로, 그대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그대의 마음(mind) 안에 간직하기 위해 그것을 주는 법칙이다. 성령에게 이는 확장의 법칙이다. 에고에게 이는 박탈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이 법칙은 그대가 그 법칙을 어떻게 적용하기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풍요를 낳기도 하고 결핍을 낳기도 한다. 이 선택은 그대에게 달려 있지만, 그대가 이 법칙을 사용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지 않다.

모든 마음은 투사하거나 확장해야 한다. 그것이 마음이 사는 방식이며 모든 마음은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고가 투사와 분노를 사용하는 일은 결국 되돌려질 수 있다.

에고는 언제나 갈등을 보존하려 한다. 에고는 갈등을 줄이는 것처럼 보이는 방법을 고안하는 데 매우 교묘하다. 그대가 갈등을 견딜 수 없다고 느껴 기어이 갈등을 버리겠다고 나서는 것을 에고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고는 자신이 그대를 갈등에서 자유롭게 해줄 수 있다고 그대를 설득하려 하는데, 이는 그대가 에고를 버리고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까 두려워서다.

에고는 하나님의 법칙을 자신의 왜곡된 방식으로 이용하여, 마음의 힘을 오직 마음의 참된 목적을 무너뜨리는 데에만 사용한다. 에고는 그대의 마음속 갈등을 다른 마음들에게 투사하여, 그대가 갈등을 없앴다고 그대를 설득하려 한다.

이 시도에는 두 가지 큰 오류가 있다. 첫째, 엄밀히 말해 갈등은 나눌 수 없기에 투사될 수 없다.

갈등의 일부는 간직하고 다른 일부만 없애려는 그 어떤 시도도 실은 아무 의미가 없다. 갈등하는 교사는 형편없는 교사이자 형편없는 학습자임을 기억하라. 그 교사의 가르침은 혼란스러우며, 그 전달 가치는 그의 혼란으로 인해 제한된다.

두 번째 오류는 원하지 않는 것을 내주어 버림으로써 없앨 수 있다는 생각이다. 무언가를 내주는 것이야말로 그것을 간직하는 방법이다. 무언가를 바깥에서 봄으로써 그것을 안에서 몰아냈다고 믿는다면, 이는 확장의 힘을 완전히 왜곡한 것이다.

그래서 투사하는 이들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늘 경계한다. 그들은 자신이 투사한 것이 되돌아와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한다. 자신의 마음에서 투사물을 지워버렸다고 믿으면서도, 동시에 그 투사물이 다시 기어들어 오려 한다고 믿는다. 그 투사물이 실제로는 투사하는 이들의 마음을 떠난 적이 없으므로, 그들은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분주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대가 다른 사람에 대한 환영을 지속시키면, 자기 자신에 대한 환영도 반드시 지속시키게 된다. 여기서 벗어날 길은 없다. 마음을 조각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조각낸다는 것은 산산이 부순다는 뜻이며, 마음은 공격할 수도 공격받을 수도 없다. 마음이 그럴 수 있다는 믿음은 에고가 언제나 저지르는 오류이며, 에고가 투사를 사용하는 방식 전체의 바탕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