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투사 아닌 확장하는 창조

1) 분리의 지속 장치

배제와 분리는 동의어이며, 분리와 해리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전에 분리가 곧 해리였고 지금도 해리라고, 그리고 분리가 일단 일어나면 투사가 분리의 주된 방어책, 곧 분리를 계속 지속시키는 장치가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투사가 분리를 지속시키는 이유는 그대가 생각하는 것만큼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

그대가 투사하는 것을 그대는 부인하며, 따라서 투사한 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대는 자신이 투사의 대상인 그 사람과 다르다는 바로 그 판단으로 스스로를 배제하고 있다. 그대는 또한 자신이 투사하는 것에 불리한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그것을 계속 분리된 채로 두며, 그렇게 분리해 두기 때문에 계속 공격한다.

이 투사를 무의식적으로 행함으로써, 그대는 자신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림 밖에 두려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안전하게 만들었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투사는 언제나 그대를 다치게 할 것이다. 투사는 그대 자신의 분열된 마음에 대한 그대의 믿음을 강화하며, 투사의 유일한 목적은 분리를 계속 지속시키는 것이다. 투사는 오로지 그대가 형제들과 다르며 그들에게서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게 만들려는 에고의 장치일 뿐이다. 에고는 투사가 그대를 형제들보다 "더 나아" 보이게 만든다는 근거로 이를 정당화하며, 그럼으로써 형제들과의 평등을 한층 더 흐려 놓는다.

투사와 공격은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투사는 언제나 공격을 정당화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투사 없는 분노는 불가능하다. 에고는 오직 그대 자신과 형제들 둘 다에 대한 그대의 지각을 파괴하기 위해서만 투사를 사용한다. 투사 과정은 그대 안에 존재하지만 그대가 원하지 않는 무언가를 배제하는 데서 시작되어, 곧바로 그대를 형제들에게서 배제하는 데로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투사에 대한 대안이 있음을 배웠다. 에고의 모든 능력에는 더 나은 쓰임이 있다. 그 능력들은 마음이 지시하며, 그 마음에는 더 나은 음성이 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확장하고 에고는 투사한다. 성령과 에고의 목표가 상반되듯이, 그 결과도 상반된다.

성령은 그대를 완전한 존재로 지각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 완전함이 함께 나누는 것임을 알기에 성령은 다른 이들 안에서도 완전함을 알아보며, 그럼으로써 둘 다에서 완전함을 강화한다. 이는 분노 대신 둘 모두를 향한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사랑이 포함을 확립하기 때문이다. 평등을 지각하기에, 성령은 동등한 필요를 지각한다. 동등한 필요를 지각하는 것은 저절로 속죄를 불러들인다. 속죄가 이 세상에서 보편적인 유일한 필요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지각하는 것이 그대가 이 세상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는 그대가 이 세상 안에 있지 않다는 인정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불행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거기 있지 않음을 깨닫는 것 말고 달리 어떻게 기쁨 없는 곳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하나님이 두지 않은 곳 어디에도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은 그대를 자신의 일부로 창조했다. 하나님의 일부가 곧 그대가 있는 곳이자 그대의 참모습이다.

그대의 참모습은 전적으로 변경될 수 없다. 그대의 참모습은 완전한 포함이다. 그대는 지금도 앞으로도 그대의 참모습을 바꿀 수 없다. 그대의 참모습은 영원히 참이다. 그대의 참모습은 믿음이 아니라 사실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만큼이나 참이다. 그것이 참인 것은 오직, 홀로 완전한 하나님 안에 그것이 완전하게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부인하는 것은 그대 자신과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둘 중 하나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다른 하나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의 지각이 지닌 완전한 평등함은 하나님의 앎이 지닌 완전한 평등함의 반영이다. 에고의 지각에는 하나님 안에 그에 대응하는 것이 없지만, 성령은 지각과 앎 사이의 다리로 남아 있다. 그대가 앎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지각을 사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그대는 결국 앎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에고는 앎의 기억이 불가능하다고 믿고 싶어 하지만, 성령이 이끄는 것은 바로 그대의 지각이다. 그대의 지각은 지각이 시작된 곳에서 끝날 것이다.

2) 사랑만을 가르침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서 만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자신 안에서 창조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각을 확장함으로써 자신의 아들들을 창조했고, 그 생각의 확장들을 자신의 마음(Mind) 안에 간직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생각은 그 자체 안에서도, 서로 간에도 완전하게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성령은 그대가 지금 이 온전함을 지각할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은 창조하도록 그대를 창조했다. 그대는 하나님의 나라의 온전함을 알기 전에는 그 나라를 확장할 수 없다. 생각은 생각하는 자의 마음에서 시작되어, 거기서부터 바깥으로 뻗어 나간다. 이는 하나님의 생각함에도, 그대의 생각함에도 똑같이 참이다. 그대의 마음이 분열되어 있으므로, 그대는 생각할 뿐 아니라 지각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각은 마음의 기본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그대는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지각하며, 그 지각들을 바깥으로 투사한다. 어떤 종류의 지각이든 실재가 아니지만, 그대가 지각을 만들었으므로 성령은 그것을 잘 사용할 수 있다. 성령은 지각에 영감을 줄 수 있고 지각을 하나님을 향해 이끌 수 있다. 지각이 하나님을 향해 수렴하는 일이 먼 미래처럼 보이는 것은 오직 그대의 마음이 그 관념과 완전히 정렬되어 있지 않아서, 지금 지각의 수렴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은 시간을 사용하지만, 시간을 믿지는 않는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성령은 모든 것을 선을 위해 사용하지만, 참이 아닌 것은 믿지 않는다.

성령이 그대의 마음 안에 있으므로, 그대의 마음도 오직 참인 것만을 믿을 수 있다. 성령은 오직 이 참된 것만을 대변할 수 있다. 하나님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그대에게 마음 전체를 하나님에게 돌리라고 말한다. 그 마음은 결코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의 마음이 결코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다면, 그대는 그대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기만 하면 그대의 마음이 돌아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속죄에 대한 온전한 알아차림은 분리가 결코 일어난 적이 없다는 인식이다.

에고는 이 인식을 이길 수 없다. 이 인식이 에고가 결코 일어난 적이 없다는 명시적인 선언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돌아감이 필요하다는 관념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 관념을 어렵게 보이도록 아주 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은 그대에게 돌아감조차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결코 일어난 적 없는 일은 어려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돌아감이라는 관념을 필요하고도 어려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완전한 것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며, 그대는 완전함을 어려운 성취로 경험할 수 없다. 완전함이 곧 그대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이렇게 지각해야 한다. 곧 그대의 모든 지각을 성령이 보는 하나의 선 안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이 선은 하나님과의 소통의 직통선이며, 그대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수렴하게 한다. 이 지각에는 어디에도 갈등이 없다. 이는 마음(Mind)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해 있는 성령이 모든 지각을 인도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만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 오직 성령만이 갈등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성령은 그대의 마음 안에서 참인 것만을 지각하며, 다른 마음들 안에서 참인 것에게만 바깥으로 확장한다.

에고의 투사와 성령의 확장 사이의 차이는 매우 단순하다. 에고는 배제하기 위해, 그러므로 속이기 위해 투사한다.

성령은 모든 마음 안에서 자기 자신을 알아봄으로써 확장하며, 그래서 그 마음들을 하나로 지각한다. 이 지각 안에서는 아무것도 충돌하지 않는다. 성령이 지각하는 것이 모두 같기 때문이다. 성령은 어디를 보든 자기 자신을 보며, 하나이기에 언제나 온전한 그 나라 전체를 내어준다.

성령이 어디서나 자기 자신을 보며 온전한 나라 전체를 내어준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성령에게 준 유일한 메시지이며, 성령이 대변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곧 성령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평화는 그 메시지 안에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평화는 그대 안에 있다. 그 나라의 위대한 평화는 그대의 마음 안에서 영원히 빛나지만, 그대가 그것을 알아차리게 하려면 바깥으로도 비쳐야 한다. 성령은 완전한 공평함으로 그대에게 주어졌으며, 오직 공평하게 성령을 알아볼 때만 그대는 성령을 조금이라도 알아볼 수 있다.

에고는 군단이지만, 성령은 하나다. 그 나라 어디에도 어둠은 머물지 않지만, 그대의 역할은 오직 그대 자신의 마음 안에 어떤 어둠도 머물지 않게 하는 것뿐이다. 빛과의 이 정렬에는 한계가 없다. 이 정렬이 세상의 빛과의 정렬이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가 세상의 빛이며, 우리의 마음을 이 빛 안에서 하나로 합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그리고 하나로서 선포한다.

우리가 이미 강조했듯이, 모든 관념은 생각하는 자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마음에서 확장되어 나가는 것은 여전히 그 마음 안에 있으며, 마음은 자신이 확장하는 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이 맞다. 성령이 자신의 공평한 지각을 통해 그대의 마음 안에서 앎을 여전히 안전하게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공격하지 않음으로써, 성령은 하나님과의 소통에 아무 장벽도 세우지 않는다. 따라서 존재함(Being)은 결코 위협받지 않는다. 그대의 하나님을 닮은 마음은 결코 더럽혀질 수 없다. 에고는 그 마음의 일부였던 적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지만, 그대는 에고를 통해 참이 아닌 것을 듣고 가르치고 배울 수 있다.

그대는 자신이 자신의 참모습이 아니라고 믿도록 스스로를 가르쳐 왔다. 그대는 배우지 않은 것을 가르칠 수 없으며, 그대가 가르치는 것을 나눔으로써 그대는 가르치는 것을 자신 안에서 강화한다. 그대가 가르치는 모든 교훈을 그대는 배우고 있다. 그래서 그대는 오직 하나의 교훈만을 가르쳐야 한다. 그대 스스로가 갈등에서 자유롭고자 한다면, 그대는 오직 성령에게서만 배우고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르쳐야 한다.

그대는 오직 사랑일 뿐이지만, 이를 부인할 때 그대는 자신의 참모습을 기억해 내야 할 무언가로 만들어 버린다. 나는 전에 십자가형의 메시지가 "오직 사랑만을 가르치라, 그것이 곧 그대이므로"였다고 말했다.

이 메시지는 완전하게 통합된 유일한 교훈이다. 유일하게 하나인 교훈이기 때문이다. 오직 그 교훈을 가르침으로써만 그대는 그 교훈을 배울 수 있다.

"그대가 가르치는 대로 그대는 배우리라." 이것이 참이라면 — 실로 참인데 — 그대가 가르치는 것이 그대를 가르치고 있음을 잊지 말라.

그리고 그대가 투사하거나 확장하는 것을 그대는 믿는다. 유일한 안전은 성령을 확장하는 데 있다. 다른 이들 안에서 성령의 온화함을 볼 때 그대 자신의 마음은 스스로를 완전히 무해한 존재로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이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그 마음은 자신을 지킬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의 보호가 그 마음 위에 밝아 오며, 그 마음이 영원히 완전하게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완전하게 안전한 이들은 온전히 자애롭다. 그들은 자신이 축복받았음을 알기에 축복한다. 불안이 없으면 마음은 온전히 친절하며, 자애를 확장하기에 자애롭다. 안전이란 공격을 완전히 내려놓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타협도 있을 수 없다. 어떤 형태로든 공격을 가르치면 그대는 공격을 배운 것이며, 공격은 그대를 다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배움은 불멸이 아니어서, 그대는 가르치지 않음으로써 버릴 수 있다.

그대는 반드시 가르치게 되므로, 그대의 구원은 에고가 믿는 모든 것과 정반대인 것을 가르치는 데 있다. 이것이 그대를 자유롭게 할 진리를 그대가 배우는 방법이며, 다른 이들이 그대에게서 그것을 배울 때 그대도 계속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이다.

평화를 얻는 유일한 길은 평화를 가르치는 것이다. 평화를 가르침으로써 그대는 스스로 평화를 배워야 한다. 그대는 자신이 여전히 해리시키고 있는 것을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그대는 자신이 내던져 버린 앎을 되찾을 수 있다.

그대가 나누는 관념은 그대가 지니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 관념은 그 관념을 가르친다는 확신을 통해 그대의 마음 안에서 깨어난다.

그대가 가르치는 모든 것을 그대는 배우고 있다. 오직 사랑만을 가르치라, 그러면 사랑이 그대의 것이며 그대가 곧 사랑임을 배우게 될 것이다.

3) 질문이 아닌 답

성령이 질문이 아니라 답임을 기억하라. 에고는 언제나 먼저 말한다. 에고는 변덕스러우며 자신을 만든 이에게 호의를 품지 않는다. 에고는 자신을 만든 이가 언제든 에고에 대한 지지를 거둘 수 있다고 믿는데, 이는 옳은 믿음이다. 에고가 그대에게 호의를 품었다면, 성령이 그대를 집으로 데려가 그대에게 더는 성령의 인도가 필요 없게 될 때 기뻐하듯이, 에고도 기뻐할 것이다.

에고는 에고 자신을 그대의 일부로 여기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에고의 근본적인 오류, 곧 에고의 사상 체계 전체의 토대가 있다.

하나님이 그대를 창조했을 때, 하나님은 그대를 자신의 일부로 만들었다. 그렇기에 그 나라 안에서 공격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사랑 없이 에고를 만들었고, 그래서 에고는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대는 사랑 없이는 그 나라 안에 머물 수 없었을 것이며, 그 나라가 곧 사랑이므로, 그대는 자신에게 사랑이 없다고 믿는다.

이 믿음이 에고로 하여금 자신을 만든 이와 분리되어 그 바깥에 있다고 여기게 하며, 그럼으로써 그대가 하나님의 마음(Mind) 밖에서 분리되어 있다고 믿는 그대 마음의 부분을 대변하게 한다.

그래서 에고는 지금껏 던져진 최초의 질문, "너는 무엇이냐?"를 제기했지만, 그것은 에고가 결코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이 의심의 시작이었다.

그 이후로 에고는 어떤 질문에도 답한 적이 없지만, 아주 많은 질문을 제기해 왔다. 에고의 가장 기발한 활동조차 그 질문을 흐리는 것 이상은 결코 하지 못했다. 그대가 답을 지니고 있고 에고는 그대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에고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기본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전까지는 그 갈등을 이해할 수 없다.

성령은 먼저 말하지 않지만, 언제나 답한다. 누구나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성령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으며, 그때마다 답을 받았다. 성령은 참되게 답하므로 모든 시간에 대해 답하며, 이는 곧 지금 모두가 그 답을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에고는 성령의 말을 들을 수 없지만, 에고 자신을 만든 마음의 그 부분이 에고에게 적대적이라고는 믿는다. 에고는 이것을 에고 자신을 만든 이를 공격할 정당한 근거로 해석한다. 에고는 최선의 방어가 공격이라고 믿으며, 그대도 그렇게 믿기를 바란다. 그대가 그렇게 믿지 않는 한 그대는 에고 편에 서지 않을 것이다. 에고는 동맹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지만, 형제는 필요하지 않다.

그대의 마음 안에서 에고 자신에게 낯선 무언가를 지각하기에, 에고는 육체를 에고 자신의 동맹으로 삼는다. 육체는 그대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육체가 그대의 일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육체를 에고의 친구로 만든다. 이는 노골적으로 분리에 기반한 동맹이다.

그대가 이 동맹의 편에 선다면 그대는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두려움의 동맹 편에 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그대의 마음에 맞서 음모를 꾸미기 위해 육체를 이용한다. 에고는 자신의 "적"이 에고와 육체가 그대의 일부가 아님을 알아차리기만 해도 둘 다를 끝낼 수 있음을 안다. 그렇기에 에고와 육체는 함께 공격에 가담한다.

이 모든 일이 실제로 무엇을 동반하는지 생각해 보면, 이는 아마 모든 지각 가운데 가장 이상한 지각일 것이다. 실재가 아닌 에고는, 실재인 마음에게 그 마음이 에고의 배움의 도구라고, 나아가 육체가 마음보다 더 실재라고 설득하려 한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 주장을 믿을 수 없으며, 제정신인 사람 가운데 실제로 이 주장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에고가 제기하는 모든 질문에 대한 성령의 하나뿐인 답을 들으라: 그대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이 자신의 일부로서 창조한, 하나님 나라의 값을 매길 수 없는 일부다.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이것만이 실재다.

4) 깨어나라는 부름

그대는 나쁜 꿈을 꾸는 잠을 선택했지만, 그 잠은 실재가 아니며 하나님은 그대를 깨어나도록 부른다. 그대가 하나님의 부름을 들을 때 그대의 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깨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꿈에는 에고의 상징이 많이 담겨 있으며, 그것들이 그대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그대가 잠들어 있어 알지 못했기 때문일 뿐이다.

그대가 깨어나면 자신을 둘러싼 진리를 보게 될 것이며, 꿈은 그대에게 더 이상 아무 실재성도 지니지 않으므로 그대는 더 이상 꿈을 믿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와 그대가 그 안에서 창조한 모든 것은 그대에게 커다란 실재성을 지닐 것이다. 그것들이 아름답고 참되기 때문이다. 그 나라 안에서는, 그대가 있는 곳과 그대의 참모습이 완전하게 확실하다. 의심은 없다. 최초의 그 질문이 애초에 던져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침내 온전히 답을 얻고 보면, 그 질문은 애초에 있었던 적이 없다.

존재함(Being)만이 그 나라 안에 살며, 거기서는 모든 것이 의문 없이 하나님 안에서 산다. 꿈속에서 의문을 품는 데 쓰인 시간은 창조와 그 창조의 영원함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대는 하나님만큼이나 확실하다. 그대가 하나님만큼이나 참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때 그대의 마음 안에서 확실했던 것은 이제 확실할 수 있는 능력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존재 안으로 능력이 도입된 것이 불확실성의 시작이었다. 능력은 성취가 아니라 잠재력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능력은 하나님의 성취 앞에서, 또한 그대 자신의 성취 앞에서도 쓸모가 없다. 성취란 이미 이루어진 결과다. 성취가 완전할 때, 능력은 무의미하다. 완전한 것이 이제 와서 완전해져야 한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사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기억하라. 그대가 자신을 불가능한 상황에 놓을 때, 그대는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능력은 그대가 사용할 수 있기 전에 계발되어야 한다. 능력을 계발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그 무엇에도 해당하지 않지만, 그대가 만든 것에 대해서는 가능한 가장 자애로운 해결책이다.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그대는 자신의 능력을 그대를 거기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지점까지 계발할 수 있다.

그대에게는 그 능력을 어떻게 계발할지 알려 주는 안내자가 있지만, 그대 자신 말고는 어떤 지휘관도 없다. 이로써 그대는 그 나라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으면서, 그 나라를 찾아 줄 안내자와 지킬 수단을 둘 다 지니게 된다. 그대에게는 따를 본이 있으니, 이 본은 그대의 지휘를 강화할 뿐 결코 어떤 식으로도 약화시키지 않는다. 따라서 그대는 스스로 상상한 속박 안에서도 중심 자리를 유지하는데, 이 사실 자체가 그대가 속박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

그대가 불가능한 상황 속에 있는 것은 오직 그런 상황에 있는 것이 가능하다고 그대가 생각하기 때문일 뿐이다. 하나님이 그대에게 그대의 완전함을 보여 주고, 그대가 틀렸음을 증명한다면 그대는 정말로 불가능한 상황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은 완전한 이들이 자신의 완전함을 스스로 알아차리는 데는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셈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을 지닌 이들도 도움이 필요하고 그래서 무력하다는 믿음 편에 서는 셈이 된다. 이것이 바로 에고가 하는 종류의 "추론"이다.

자신의 창조물이 완전함을 아는 하나님은 그것들을 모욕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것은 에고가 하나님을 모욕했다는 관념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성령은 결코 명령하지 않는다. 명령한다는 것은 불평등을 전제하는 것인데, 성령은 그런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전제에 대한 충실함은 마음의 법칙이며,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법칙에 충실하다. 그러나 다른 법칙에 대한 충실함도 가능하다. 그 법칙이 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대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대에게 그대가 미친 생각을 해 왔음을 증명한다면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자신의 확실성을 잃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대가 가르치는 것이 곧 그대라고 여러 번 말했다. 그대는 하나님이 그대에게 그대가 죄를 지었다고 가르치기를 바라는가?

하나님이 그대가 만든 자아를 자신이 그대를 위해 창조한 진리와 마주하게 한다면, 그대는 두려움 말고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자신의 온전한 마음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 마음은 하나님이 그대에게 준 온전한 정신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자리다.

하나님은 가르치지 않는다. 가르친다는 것은 결핍을 암시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런 결핍이 거기 없음을 안다. 하나님은 갈등하지 않는다. 가르침은 변화를 목표로 하지만, 하나님은 오직 변하지 않는 것만을 창조했다.

분리는 완전함의 상실이 아니라 소통의 실패였다. 가혹하고 귀에 거슬리는 형태의 소통이 에고의 음성으로 일어났다. 그 소통은 하나님의 평화를 깨뜨릴 수 없었지만, 그대의 평화는 깨뜨릴 수 있었다. 하나님은 그 소통을 지워 없애지 않았다. 근절하는 것은 곧 공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질문받았지만, 하나님은 되묻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저 답을 주었을 뿐이다. 하나님의 그 답이 그대의 스승이다.

어떤 좋은 스승과도 마찬가지로, 성령은 지금 그대보다 더 많이 알지만, 성령은 오직 그대를 자신과 동등하게 만들기 위해서만 가르친다. 그대는 참이 아닌 것을 믿었기에 이미 스스로를 잘못 가르쳐 왔다. 그대는 자신의 완전함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대의 마음을 오직 온전한 것으로만 아는데도, 하나님이 그대에게 그대가 분열된 마음을 만들었다고 가르치겠는가? 하나님이 아는 것은 이러하다. 하나님에게로 향한 소통의 통로가 열려 있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기쁨을 나누어 주지 못하고, 자신의 자녀들이 온전히 기쁘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자신의 기쁨을 주는 것은 시간 안에서가 아니라 영원 안에서 계속되는 과정이다. 아들됨(Sonship)이 하나로서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바깥으로 확장하는 것이 막힌다. 다만 막히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함 자체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자녀들이 잠들어 있으니 깨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을 두렵게 하지 않으면서 밤이 지나고 빛이 왔음을 그저 일깨워 주는 온화한 음성보다 더 다정하게 아이들을 깨울 방법이 있겠는가?

그대는 아이들을 그토록 심하게 두렵게 한 악몽이 실재가 아니라고 알려 주지 않는다. 아이들은 마법을 믿기 때문이다. 그대는 다만 그들이 지금 안전하다고 안심시켜 줄 뿐이다. 그런 다음 그대는 그들이 잠든 것과 깨어 있는 것의 차이를 알아보도록 훈련시켜, 꿈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한다. 그래서 나쁜 꿈이 찾아올 때, 그들 스스로 빛을 불러 그것을 몰아낼 것이다.

지혜로운 스승은 회피가 아니라 다가감을 통해 가르친다. 지혜로운 스승은 해로움을 피하기 위해 그대가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기쁨을 누리기 위해 그대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강조한다.

어떤 아이가 이런 말을 듣는다면 느낄 두려움과 혼란을 생각해 보라: "이것을 하지 말라, 그것이 너를 다치게 하고 너를 위험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신 저것을 한다면, 너는 해로움에서 벗어나 안전할 것이고, 그러면 두렵지 않을 것이다."

오직 세 단어만 쓰는 편이 분명 더 낫다: "저것만 하라!" 이 단순한 말은 더없이 명료하고, 쉽게 이해되며, 아주 쉽게 기억된다.

성령은 결코 잘못을 낱낱이 열거하지 않는다. 성령은 아이들을 두렵게 하지 않으며, 지혜가 부족한 이들이 곧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은 아이들의 부름에 언제나 답하며, 성령의 그 미더움이 아이들을 더욱 확신하게 만든다.

아이들은 정말로 환상과 실재를 혼동하며, 그 차이를 알아보지 못하기에 두려워한다. 성령은 꿈들 사이에 어떤 구별도 두지 않는다. 성령은 그저 그것들을 빛으로 몰아낼 뿐이다. 성령의 빛은 그대가 무엇을 꿈꾸어 왔든 언제나 깨어나라는 부름이다. 꿈속에는 지속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하나님 자신에게서 온 빛으로 빛나는 성령은 오직 영원히 지속되는 것만을 대변한다.

그대의 육체와 에고와 꿈이 사라지면, 그대는 자신이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아마 이것이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겠지만, 죽음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생명을 통해 이루어지며, 생명은 마음의 것이고 마음 안에 있다. 육체는 살지도 죽지도 않는다. 생명인 그대를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같은 마음을 나눈다면, 내가 죽음을 극복했으므로 그대도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 죽음은 아예 결정을 내리지 않음으로써 갈등을 해결하려는 시도다. 에고가 시도하는 다른 모든 불가능한 해결책과 마찬가지로, 그 해결책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육체를 만들지 않았다. 육체가 파괴될 수 있고 따라서 그 나라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육체는 그대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상징이다. 육체는 분명히 분리의 장치이며,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은 언제나처럼 그대가 만든 것을 가져다 그 육체를 배움의 도구로 바꾼다. 또한 언제나처럼, 성령은 에고가 분리를 주장하는 논거로 사용하는 것을 그 분리에 반대되는 증명으로 재해석한다.

마음이 육체를 치유할 수 있지만 육체는 마음을 치유할 수 없다면, 마음이 육체보다 강한 것이 틀림없다. 모든 기적이 이것을 증명한다.

나는 성령이 기적의 동기라고 말한 바 있다. 성령은 언제나 그대에게 오직 마음만이 실재라고 말한다. 오직 마음만이 나누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육체는 분리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대의 일부일 수 없다. 하나의 마음이 되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하나의 육체가 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마음의 법칙에 따라, 육체는 무의미하다.

성령에게는 기적에 난이도의 순서가 없다. 이 개념은 이제 그대에게 충분히 익숙하지만, 아직 믿을 만한 것이 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대는 이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용하지도 못한다.

우리에게는 난이도의 순서가 없다는 이 결정적인 개념이 흐지부지되게 내버려 두기에는 그 나라를 위해 이루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이 개념은 내가 가르치고 그대도 가르치기를 바라는 사상 체계의 진정한 초석이다.

그대는 이 개념을 믿지 않고서는 기적을 행할 수 없다. 이 개념은 곧 완전한 평등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동등한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제공될 수 있는 동등한 선물은 오직 하나, 곧 온전한 진가 인정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정도의 폭이 없다면 난이도의 순서도 무의미하며, 그대가 형제에게 내놓는 것에는 어떤 정도의 폭도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에게 이르는 성령은, 결국 지각을 앎으로 옮기듯이, 소통을 존재함(Being)으로 옮긴다. 에고는 공격을 위해, 쾌락을 위해, 자존심을 위해 육체를 이용한다. 이 지각은 그 광기 때문에 참으로 두려운 지각이 된다. 성령은 육체를 오직 소통의 수단으로만 보며, 소통이 곧 나눔이기에 육체는 친교가 된다.

그대는 아마 두려움도 사랑과 마찬가지로 전달될 수 있고, 따라서 나누어질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겉보기만큼 실재가 아니다. 두려움을 전달하는 이들은 공격을 조장하고 있으며, 공격은 언제나 소통을 깨뜨려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에고들은 실제로 일시적인 동맹으로 뭉치지만, 그 동맹은 언제나 저마다 따로 얻어 낼 수 있는 것을 위해서다. 성령은 오직 저마다 모두에게 줄 수 있는 것만을 전달한다. 성령은 결코 아무것도 도로 가져가지 않는다. 그대가 그 선물을 간직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의 가르침은 다음 교훈으로 시작된다:

5) 모두를 위한 첫걸음

가지려면, 모두에게 모든 것을 주라.

이는 매우 예비적인 걸음이며, 그대가 스스로 내디뎌야 하는 유일한 걸음이다. 그대가 그 걸음을 스스로 완성해야 할 필요조차 없지만, 그 방향으로 돌아서야 할 필요는 있다. 그 길로 가기로 선택함으로써, 그대는 그 여정을 책임지는 자리에 서게 되며, 그 자리에는 오직 그대만이 남아 있어야 한다.

이 걸음은 갈등을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악화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 걸음이 그대의 지각을 뒤집어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이 걸음은 그대가 아직 버리지 못한 거꾸로 된 지각과 충돌한다. 그 지각을 이미 버렸다면 방향의 전환이 애초에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걸음에 오래도록 머물며 매우 극심한 갈등을 겪는다. 이 지점에서 어떤 이들은 갈등의 해소를 향한 다음 걸음을 내딛기보다 그 갈등을 받아들이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첫걸음을 내디뎠다면, 그들은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혼자서는 완성할 수 없는 것을 일단 선택하고 나면, 그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분리를 믿는 모든 이는 보복과 버림받음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 분리를 믿는 이들은 공격과 거부를 믿으며, 그래서 공격과 거부가 바로 그들이 지각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다. 이 미친 관념들은 분명 해리와 투사의 결과다.

그대가 가르치는 것이 곧 그대이지만, 그대가 잘못 가르칠 수 있고 따라서 스스로를 잘못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내가 공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했는데도, 많은 이가 내가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미친 채 배우는 자는 이상한 교훈을 배운다.

그대가 인식해야 할 것은, 그대가 어떤 사상 체계를 나누지 않으면 그 체계를 약화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상 체계를 믿는 이들은 이를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지각한다.

그런 지각이 생기는 것은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자신의 사상 체계와 동일시하며, 모든 사상 체계가 그대가 믿는 자신의 참모습을 중심으로 삼기 때문이다.

사상 체계의 중심이 참이라면, 오직 진리만이 그것에서 확장되어 나간다. 그러나 사상 체계의 중심에 거짓이 있다면, 오직 기만만이 거기서 나온다.

좋은 스승은 누구나 오직 근본적인 변화만이 지속되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 수준에서 시작하지는 않는다. 변화를 향한 동기를 강화하는 것이 좋은 스승의 첫째가는 목표다. 이는 또한 마지막이자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배우는 자 안에서 변화를 향한 동기를 높이는 것이 변화를 보장하기 위해 스승이 해야 할 전부다.

동기의 변화는 마음의 변화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낳는다. 마음이 근본이기 때문이다.

반전 혹은 되돌림 과정의 첫걸음은 얻음이라는 관념을 되돌리는 것이다. 그에 따라, 성령의 첫 번째 교훈은 "가지려면, 모두에게 모든 것을 주라"였다. 나는 이 교훈이 일시적으로 갈등을 늘리기 쉽다고 말했는데, 이제 우리는 이 교훈을 좀 더 분명히 밝힐 수 있다.

이 시점에서는 지님과 존재함(Being)의 동등함이 아직 지각되지 않는다. 동등함이 지각되기 전까지는, 지님이 줌의 반대처럼 보인다.

그래서 첫 번째 교훈은 모순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갈등하는 마음이 그 교훈을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상충하는 동기를 뜻하며, 그래서 그 교훈은 아직 일관되게 배워질 수 없다.

게다가 배우는 자의 마음은 자신의 갈등을 투사하며, 그래서 다른 이들의 마음 안에서 일관성을 지각하지 못해 다른 이들의 동기를 의심하게 된다. 이 의심이 바로, 여러 면에서 "가지려면, 모두에게 모든 것을 주라"는 첫 번째 교훈이 가장 배우기 어려운 진짜 이유다.

그대는 그대 자신 안의 에고를 여전히 강하게 의식하고, 다른 이들 안의 에고에 주로 반응하고 있다. 그러면서 정작 그대가 믿는 것이 참이 아닌 듯이 그 둘 모두에 반응하도록 배우고 있다. 언제나처럼 거꾸로, 에고는 첫 번째 교훈을 미친 것으로 지각한다. 사실 첫 번째 교훈을 미친 것으로 지각하는 것이 에고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다. 다른 가능성 — 곧 에고 자신이 미쳤다는 것 — 은 에고에게 훨씬 더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언제나처럼, 에고의 판단은 에고가 무엇인지에 따라 미리 정해져 있다.

그럼에도 근본적인 변화는 생각하는 자 안의 마음의 변화와 함께 여전히 일어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점점 더 또렷해지는 성령의 음성은 배우는 자가 반드시 듣게 만든다. 그래서 한동안 배우는 자는 상충하는 메시지들을 받으면서 그 둘 다를 받아들인다.

상반되는 두 사상 체계 사이의 갈등에서 벗어나는 길은 분명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내려놓는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사상 체계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그대가 완전히 상충하는 두 사상 체계를 받아들인다면, 마음의 평화는 불가능하다. 그대가 그 둘을 다 받아들이는 한 반드시 그 둘을 다 가르치게 된다. 그렇게 그 둘을 다 가르친다면, 그대는 갈등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며 갈등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정말로 평화를 원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평화를 위한 그 음성에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성령의 음성의 교훈이 미친 것이 아니라, 갈등이 미친 것이다.

온전한 정신과 광기 사이에는 어떤 갈등도 있을 수 없다. 오직 하나만이 참이며, 따라서 오직 하나만이 실재다.

에고는 어느 음성이 참인지 결정하는 것이 그대에게 달려 있다고 그대를 설득하려 하지만, 성령은 하나님이 진리를 창조했으며 그대의 결정이 진리를 바꿀 수 없다고 그대에게 가르친다. 그대가 성령의 음성이 지닌 조용한 힘과 그 음성의 완전한 일관성을 알아차리기 시작하면, 그대는 마음속에서 반드시 깨닫게 된다. 곧 그대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그대를 위해 내려진 결정을 되돌리려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에 그대가 성령이 그대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도록 허락할 것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라고 제안했다. 그대는 미친 결정을 내리도록 요청받지 않았지만, 미친 결정을 내리도록 요청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물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이 그대에게 달려 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미친 일임에 틀림없다. 성령은 그대의 갈등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지각한다.

6) 가르쳐 배우는 평화

그러므로 성령의 두 번째 교훈은 이것이다: 평화를 얻으려면, 평화를 배우기 위해 평화를 가르치라. 이는 여전히 예비적인 걸음이다. 지님과 존재함(Being)이 아직 동등하게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걸음은, 생각의 반전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 첫걸음보다는 더 나아간 것이다.

두 번째 걸음은 그대가 원하는 것에 대한 긍정적인 확언이다. 그래서 이는 갈등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의 걸음이다. 대안들이 고려되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더 바람직한 것으로 선택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더 바람직하다"는 표현은 여전히 바람직함에 정도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두 번째 걸음이 궁극적인 결정을 위해 필수적이기는 해도, 두 번째 걸음이 마지막 걸음이 아님은 분명하다.

기적에 난이도의 순서가 없다는 것은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온전히 바라는 것은 무엇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온전히 바라는 것이 곧 창조하는 것이며, 하나님 자신이 그대를 창조주로 창조했다면 창조하는 것이 어려울 리 없다.

그러므로 두 번째 걸음은 아직 지각의 차원에 머물러 있지만, 두 번째 걸음은 하나님의 앎을 반영하는 통합된 지각을 향한 커다란 걸음이다. 그대가 두 번째 걸음을 내딛고 이 방향을 견지할 때, 그대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그대 사상 체계의 중심을 향해 밀고 나아가게 될 것이다.

두 번째 걸음에서는 진전이 간헐적이지만, 두 번째 걸음은 첫걸음을 뒤따르는 것이기에 첫걸음보다 쉽다. 두 번째 걸음이 반드시 뒤따르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 일 자체가, 성령이 그대를 계속 이끌어 가리라는 자각이 자라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는 전에 성령이 평가하는 존재이며,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성령은 그대의 마음 안에서 참된 것을 거짓된 것에서 가려내며, 하나님이 그 마음 안에 둔 것에 비추어 그대가 들이는 모든 생각을 판단하도록 그대를 가르친다.

이 빛과 일치하는 것은 무엇이든 성령이 간직하여, 그대 안의 그 나라를 강화한다. 이 빛과 부분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성령이 받아들여 정화한다. 그러나 이 빛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것은 성령이 반대로 판단하여 물리친다.

이런 방식으로 성령은 그 나라를 완전하게 일관되고 완전하게 통합된 상태로 유지한다.

그러나 성령이 물리치는 것을 에고는 받아들인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는 그 둘이 모든 것에 대해 근본적으로 의견이 다르기 때문이며, 그 불일치는 그대의 참모습에 대한 근본적인 의견 차이에서 비롯된다. 이 결정적인 문제에 대한 에고의 믿음은 그때그때 달라지며, 그래서 에고는 서로 다른 기분들을 조장한다.

성령은 이 점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그래서 성령이 불러일으키는 단 하나의 기분은 기쁨이다. 성령은 기쁨을 북돋우지 않는 모든 것을 물리침으로써 그 기쁨을 지키며, 그래서 오직 성령만이 그대를 온전히 기쁘게 유지할 수 있다.

성령은 그대에게 다른 이들을 판단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대가 오류를 가르치고 스스로 그 오류를 배우기를 성령이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이 그대가 피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을 그대가 강화하도록 허용한다면, 성령은 결코 일관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자의 마음 안에서 성령은 판단하지만, 이는 오직 그 마음을 통합해 판단 없이 지각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이는 그 마음이 판단 없이 가르칠 수 있게 하며, 따라서 판단 없이 존재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한다.

이 되돌림은 오직 그대의 마음 안에서만 필요한데, 그대가 확장하는 대신 투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 자신이 그대가 완전히 안전하게 확장할 수 있는 것을 정해 놓았다.

7) 나라를 위한 경계

그러므로 성령의 세 번째 교훈은 이것이다: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만 깨어 있으라.

이는 근본적인 변화를 향한 커다란 걸음이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생각의 반전이라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대가 경계해야 할 무언가가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는 첫 번째 교훈에서 훨씬 더 나아간 것이다. 첫 번째 교훈은 생각의 반전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이는 본질적으로 더 바람직한 것을 가려내는 두 번째 교훈에서도 훨씬 더 나아간 것이다. 세 번째 걸음은, 두 번째 걸음이 첫 번째 걸음을 뒤따랐듯이 두 번째 걸음을 뒤따르며,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않은 것 사이의 이분법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는 궁극적인 선택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첫걸음은 갈등을 늘리는 것처럼 보이고 두 번째 걸음도 어느 정도 갈등을 동반할 수 있지만, 이 걸음은 그 갈등에 맞서는 일관된 경계를 요구한다.

나는 이미 그대에게, 그대가 에고를 위해 깨어 있을 수 있는 만큼 에고에 맞서서도 깨어 있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교훈은 그대가 그럴 수 있다는 것뿐 아니라, 그래야만 한다는 것도 가르친다. 이는 난이도의 순서에는 관심이 없으며, 다만 경계의 명확한 우선순위에 관심이 있다. 이 교훈은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는 점에서 명료하지만, 예외를 두고 싶은 유혹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여기서, 그대의 일관성은 혼돈 속에서도 요구된다. 그러나 혼돈과 일관성은 서로 배타적이므로 오래 공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대가 무언가에 맞서 계속 깨어 있어야 하는 한, 그대는 이 상호 배타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여전히 둘 중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선택할지 가르침으로써, 성령은 결국 그대에게 애초에 선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가르칠 것이다. 이는 마침내 그대의 마음을 선택에서 해방시켜, 그 나라 안의 창조를 향하도록 이끌 것이다. 성령을 통해 선택하는 것이 그대를 그 나라로 이끌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참된 존재함(Being)으로써 창조하지만, 그대의 참모습은 그대가 기억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참모습을 기억하는 방법은 세 번째 걸음 안에 내재되어 있다. 이 걸음은 다른 교훈들이 암시하는 바를 하나로 모으고, 그것들을 넘어 참된 통합을 향해 나아간다. 그대가 자신의 마음 안에 오직 하나님이 그곳에 둔 것만을 지니도록 허락한다면, 그대는 하나님이 창조한 그대로의 마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 마음이 온전하므로, 그대는 그것을 믿기에 평화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걸음은 여전히 하나님이 그대를 위해 내디딜 것이지만, 세 번째 걸음을 통해 성령은 그대가 하나님을 맞이하도록 준비시켜 왔다. 성령은 그대가 성령과 함께 내디뎌야 할 걸음들의 본질 자체를 통해, 지님을 존재함(Being)으로 옮기도록 그대를 준비시키고 있다.

그대는 먼저 지님이 얻음이 아니라 줌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배운다. 다음으로 그대는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배운다는 것과, 자신이 평화를 배우고 싶어 한다는 것을 배운다. 이 배움이 그 나라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위한 조건이다. 이 조건이 곧 그 나라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에게 그 나라가 없다고 믿어 왔으며, 그래서 자신의 믿음 안에서 스스로를 그 나라에서 배제해 왔다. 그러므로 그대에게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이 있으니, 그대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과, 그대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그 믿음이야말로 그대가 배제해야 할 유일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세 번째 걸음은 그대의 마음을 지키는 걸음이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바치는 제단을 둔 그 중심과만 그대를 동일시하게 해 준다. 제단은 믿음이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물은 믿음을 넘어서 있다. 하나님과 창조물이 의문의 여지를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대변하는 음성은 오직 의문의 여지를 넘어선 믿음만을 대변하며, 이는 의문의 여지 없는 존재함을 위한 준비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이 그대의 마음 안에서 조금이라도 의심에 시달리는 한, 하나님의 완전한 성취는 그대에게 분명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대는 하나님을 위해 깨어 있어야 한다. 에고는 하나님의 창조에 맞서 말하며, 그래서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대는 온전히 믿기 전까지는 믿음을 넘어설 수 없다.

예외 없이 아들됨(Sonship) 전체를 가르치는 것은, 그대가 그 온전함을 지각하고 그것이 하나임을 배웠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제 그대는 그 하나됨을 마음속에 지키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한다. 의심이 들어오게 두면 그대는 그 온전함에 대한 알아차림을 잃게 되어 그 온전함을 가르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 나라의 온전함은 그대의 지각에 달려 있지 않지만, 그 온전함에 대한 그대의 알아차림은 그 온전함에 달려 있다.

지켜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오직 그대의 알아차림뿐이다. 존재함(Being) 자체는 공격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자신의 참모습을 의심하는 동안에는 존재함에 대한 참된 감각이 그대의 것일 수 없다. 그래서 경계가 필수적이다.

존재함에 대한 의심이 그대의 마음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 그러지 않으면 그대는 자신의 참모습을 확실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확실함은 그대를 위해 하나님에게서 온다.

경계는 진리를 위해서는 필요하지 않지만, 환영에 맞서기 위해서는 필요하다. 진리에는 환영이 없으며 따라서 진리는 그 나라 안에 있다. 그 나라 바깥의 모든 것은 환영이다.

그대가 진리를 내던져 버렸을 때, 그대는 마치 자신에게 진리가 없는 것처럼 스스로를 보았다. 그대가 소중히 여기는 또 다른 나라를 만듦으로써, 그대는 마음 안에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을 간직하지 않았고, 그래서 마음의 일부를 그 나라 바깥에 두게 되었다. 그대가 만든 것이 그대의 의지를 가두었고, 그대에게 치유되어야 할 병든 마음을 주었다. 이 병에 맞선 그대의 경계가 치유의 길이다.

그대의 마음이 일단 치유되면 건강을 발산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치유를 가르친다. 이는 그대를 나처럼 가르치는 스승으로 세운다. 경계는 그대에게 요구되는 만큼 나에게도 요구되었으며, 같은 것을 가르치기로 택한 이들은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 서로 뜻이 맞아야 한다.

그러므로 세 번째 걸음은 그대가 믿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한 선언이며, 그 밖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려놓겠다는 뜻을 동반한다. 그대가 성령을 따른다면, 성령은 그대가 이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그대의 경계는 그대가 성령의 인도를 원한다는 표시다. 경계에는 정말로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오직 노력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것을 그대가 배우기 전까지만 그렇다.

그대는 자신이 만든 것을 지키기 위해 커다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것이 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대는 자신의 노력을 자신이 만든 것에 맞서는 쪽으로 돌려야 한다. 오직 이것만이 노력이 필요 없게 하고, 그대가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자체이기도 한 존재함을 불러낼 수 있다.

이 알아차림은 이미 참이며 어떤 보호도 필요하지 않으므로 전혀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안전 안에 있다. 그러므로 포함은 전체적이며 창조에는 한계가 없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물이 지닌 창조적 능력은 한계가 없지만, 하나님과 그대는 상호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 하나님이 그대와 온전히 소통하듯이, 그대도 하나님과 온전히 소통한다. 이는 그대가 함께 나누는 계속되는 과정이며, 그대가 그 소통을 나누기에, 그대는 하나님처럼 창조하도록 영감을 받는다.

그러나 창조에 있어서 그대는 하나님과 상호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 하나님이 그대를 창조했지만 그대는 하나님을 창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그대에게, 오직 이 점에서만 그대의 창조적 능력이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과 다르다고 말한 바 있다.

심지어 이 세상에도 이에 견줄 만한 예가 있다. 부모는 자녀를 낳지만, 자녀는 부모를 낳지 않는다. 그러나 자녀도 자신의 자녀를 낳으며, 그래서 자신의 부모가 그랬듯이 낳음을 행한다. 그대가 하나님을 창조했고 하나님이 그대를 창조했다면, 그 나라는 자신의 창조적 생각을 통해 늘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는 제한되었을 것이고, 그대는 하나님과 함께 창조하는 공동 창조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적 생각이 하나님에게서 그대에게로 나아가듯이, 그대의 창조적 생각도 그대에게서 그대의 창조물에게로 나아가야 한다. 오직 이런 방식으로만 모든 창조적 능력이 바깥으로 확장될 수 있다. 하나님의 성취는 그대의 것이 아니지만, 그대의 성취는 하나님의 성취와 같다. 하나님은 아들됨(Sonship)을 창조했고 그대는 아들됨을 늘린다. 그대에게는 그 나라를 더할 능력이 있지만, 그 나라의 창조주를 더할 능력은 없다.

그대는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만 깨어 있을 때 이 능력을 주장한다. 이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대는 자신의 참모습을 기억하는 법을 배웠다. 그대가 하나님 안에 속하듯이, 그대의 창조물은 그대 안에 속한다. 그대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일부이듯이, 그대는 하나님의 일부다.

창조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그저 담아 둘 수 없기에 바깥으로 확장된다. 한계가 없기에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 사랑은 영원히 창조하지만, 시간 안에서 창조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창조물은 언제나 있어 왔으며, 그대는 오직 하나님이 창조하는 방식으로만 창조할 수 있다. 영원은 그대의 것이다. 하나님이 그대를 영원한 존재로 창조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에고는 언제나 상호적인 권리를 요구한다. 에고가 사랑하기보다는 경쟁하기 때문이다. 에고는 언제나 거래를 하려 하지만, 다른 존재와 같아진다는 것이 어떤 거래도 불가능함을 뜻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얻으려면 그대는 거래하지 말고 주어야 한다. 거래한다는 것은 줌을 제한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과 함께 뜻한다는 것은 하나님처럼 창조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물을 어떤 식으로도 제한하지 않는다. 그대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래서 그대의 선물도 하나님의 선물과 같아야 한다. 그 나라를 향한 그대의 선물은 그대를 향한 하나님의 선물과 같아야 한다.

나는 오직 사랑만을 그 나라에 주었다. 사랑이 나의 참모습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대가 자신이라고 믿는 것이 그대의 선물을 결정하며,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확장해 그대로서 그대를 창조했다면, 그대도 오직 하나님이 그렇게 했듯이 자기 자신을 확장할 수 있을 뿐이다.

오직 기쁨만이 영원히 늘어난다. 기쁨과 영원은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계 너머로, 시간 너머로 바깥을 향해 확장하며, 하나님과 함께 창조하는 공동 창조자인 그대도 하나님의 나라를 영원히, 한계 너머로 확장한다.

영원은 창조에 새겨진 지워지지 않는 도장이다. 영원한 존재들은 언제까지나 평화와 기쁨 안에 있다.

하나님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그대의 참모습에 대한 하나님의 확신을 나누는 것이며, 하나님처럼 창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대와 나누는 완전한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