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동등한 형제들의 기적

1) 계시에 남은 경외

계시는 완전하지만 일시적으로 의심과 두려움을 멈추게 한다. 계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물 사이에 있던 본래의 소통 방식을 반영하며, 때로 육체적 관계에서 추구되는 지극히 개인적인 창조의 감각을 담고 있다. 육체적 가까움으로는 그 창조의 감각에 이를 수 없다.

그러나 기적은 진정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며, 다른 사람과의 참된 가까움을 낳는다. 계시는 그대를 하나님과 직접 하나로 묶는다. 기적은 그대를 그대의 형제와 직접 하나로 묶는다.

계시와 기적 둘 다 의식에서 나오지는 않지만, 둘 다 의식 안에서 경험된다. 의식은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상태이지만, 행동에 영감을 주지는 않는다. 그대는 스스로 선택한 것을 믿을 자유가 있으며, 그대가 하는 행동이 그대가 무엇을 믿는지 증언한다.

계시는 지극히 개인적이어서 의미 있게 번역될 수 없다. 그래서 계시를 말로 묘사하려는 어떤 시도도 불가능하다. 계시는 오직 경험만을 불러일으킨다. 반면에 기적은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기적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는 그 본질 때문에 지금 더 쓸모가 있다. 배움의 이 단계에서는 기적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는 억지로 떠안길 수 없기 때문이다.

계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의 경험이므로 말 그대로 이루 말할 수 없다.

경외는 계시를 위해 남겨 두어야 하며, 경외는 계시에 완전하고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경외는 기적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는 경외의 상태가 경배하는 것이며, 더 낮은 존재가 자신의 창조주 앞에 서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완전한 창조물이므로, 오직 완전함의 창조주가 임재할 때만 경외를 경험해야 한다.

그러므로 기적은 동등한 존재들 사이의 사랑의 표징이다. 동등한 존재들은 서로에게 경외를 느껴서는 안 된다. 경외는 불평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외는 나에 대한 반응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형인 형제는 자신의 더 큰 경험 때문에 존중받을 자격이 있고, 자신의 더 큰 지혜 때문에 순종받을 자격이 있다. 형제이기에 사랑받을 자격도 있고, 헌신하고 있다면 헌신을 받을 자격도 있다. 오직 나의 헌신만이 그대의 헌신을 받을 자격을 나에게 준다.

나에 관한 것 중에 그대가 이를 수 없는 것은 없다. 나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지금 그대와 나 사이의 차이는, 나에게는 그 밖의 다른 것이 없다는 점뿐이다. 이 때문에 나는 그대 안에서는 아직 가능성으로만 있는 상태에 있게 된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에게 이르지 못한다"는 말은, 내가 어떤 식으로든 그대와 분리되어 있거나 다르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시간이라는 점에서만 그러하며, 시간은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수평축이 아니라 수직축의 관점에서 더 뜻이 통한다. 그대는 나보다 아래에 서 있고, 나는 하나님보다 아래에 서 있다.

"올라가는" 과정에서 내가 더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은, 내가 없다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그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멀기 때문이다. 나는 한편으로는 그대의 형인 형제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거리를 잇는다.

형제들에 대한 나의 헌신이 나를 아들됨(Sonship)을 책임지는 자리에 두었으며, 나는 아들됨을 함께 나눔으로써 아들됨을 온전하게 만든다. 이 나눔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는 말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는 이 말에는 아버지가 더 크다는 것을 인정하는 두 부분이 있다.

계시는 나를 통해 간접적으로 영감을 받는다. 내가 성령과 가깝고, 형제들이 계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에 깨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형제들이 스스로 끌어내릴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들에게 가져다줄 수 있다. 성령은 더 높은 데서 더 낮은 데로 향하는 소통을 중개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그대에게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통로를 계시를 위해 열어 둔다.

계시는 상호적이지 않다.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대에게로 나아가지만, 그대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기적은 시간에 대한 필요를 최소화한다. 횡적인, 곧 수평적인 차원에서 보면 아들됨의 구성원들이 서로 동등함을 알아보는 데는 거의 끝없는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적은 수평적 지각에서 수직적 지각으로의 갑작스러운 전환을 동반한다. 이 전환은 하나의 간격을 만들어 내며, 그 간격을 지나면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시간상 더 앞으로 나아간 지점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기적에는 독특한 속성이 있는데, 시간을 소멸시켜 기적이 걸쳐 있는 시간의 간격 자체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다. 기적이 걸리는 시간과 기적이 아우르는 시간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기적은 수천 년이 걸렸을 배움을 대신한다. 기적은 그 바탕에 있는,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완전히 동등하다는 인식으로 그렇게 한다. 기적은 시간을 접어 줄임으로써 그 안의 특정 간격들을 없앤다. 다만 이 일은 더 큰 시간의 흐름 안에서 일어난다.

2) 속죄의 책임과 소명

나는 속죄의 과정을 책임지고 있으며, 그 시작을 내가 맡았다. 그대가 나의 형제 가운데 누구에게든 기적을 베풀 때, 그대는 그 기적을 그대 자신과 나에게 베푸는 것이다. 그대가 내 앞에 나아오는 이유는 내가 나 자신의 속죄를 위해 기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대가 일시적으로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내가 끝자리에 서 있기 때문이다. 속죄에서 나의 역할은, 그대가 달리 바로잡을 수 없었던 모든 잘못을 지워 없애는 것이다.

그대가 본래의 상태를 자각하는 데로 회복되면, 그대는 자연스럽게 그 자체로 속죄의 일부가 된다. 그대 자신과 다른 사람 안의 잘못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나의 마음을 그대가 함께 나누는 이상, 그대는 그 잘못을 바로잡는 위대한 대의에 함께해야 한다.

나의 음성을 들으라. 잘못을 되돌리는 법을 배우고,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행동하라.

기적을 행할 힘은 그대의 것이다. 나는 기적을 행할 기회를 마련해 줄 것이지만, 그대는 준비되어 있고 기꺼이 나서야 한다. 기적을 행하는 것이 그 기적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줄 것이다. 확신은 성취를 통해 오기 때문이다. 능력은 잠재력이고, 성취는 그 능력의 표현이며, 하나님의 자녀에게 자연스러운 소명인 속죄가 그 목적이다.

"하늘과 땅은 없어질 것이다"라는 말은, 하늘과 땅이 분리된 상태로 계속 존재하지는 않으리라는 뜻이다.

부활이요 생명인 나의 말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생명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하나님의 작품이며, 하나님의 작품은 온전히 사랑스럽고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마음속에서 자기 자신을 생각해야 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참모습이기 때문이다. 용서받은 자는 속죄의 수단이다. 용서받은 자는 영으로 채워져, 그 답례로 용서한다. 풀려난 자는 자기 형제를 풀어 주는 일에 함께해야 한다. 이것이 속죄의 계획이기 때문이다.

3) 비인격적 베풂

기적은 성령을 섬기는 마음들이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을 구원하거나 풀어 주기 위해 나와 하나가 되는 방식이다. 나는 무차별적으로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내가 바로 속죄이기 때문이다. 그대에게는 속죄 안에서 내가 지시할 역할이 있다. 어떤 기적을 행해야 할지 나에게 물으라. 이렇게 묻는 것은 그대에게 불필요한 수고를 덜어 준다. 그대가 직접적인 소통 아래에서 행동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적의 비인격적인 본성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는 비인격성 덕분에 내가 기적의 적용을 지시할 수 있고, 나의 인도 아래에서 기적이 지극히 인격적인 계시의 경험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안내자는 통제하지 않지만 방향은 제시하며, 따를지는 그대에게 맡긴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라는 말은 "그대의 잘못을 알아차리고 나의 인도를 따름으로써 그 잘못을 버리기로 선택하라"는 뜻이다.

잘못은 진리를 실제로 위협할 수 없으며, 진리는 언제나 그 잘못을 견뎌 낼 수 있다. 오직 잘못만이 실제로 취약하다. 그대는 그대가 적절하다고 보는 곳에 그대의 왕국을 세울 자유가 있지만, 다음을 기억한다면 올바른 선택은 필연적이다. 영은 영원히 은총의 상태에 있다. 그대의 실재는 오직 영뿐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영원히 은총의 상태에 있다. 속죄는 이런 점에서 모든 잘못을 되돌리며, 그럼으로써 두려움의 근원을 뿌리 뽑는다.

하나님의 확신 주심을 위협으로 경험할 때마다, 그 까닭은 언제나 그대가 잘못 놓인 또는 잘못 향한 충성을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 충성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면 그대는 그 사람들을 가둔다. 다만 이 구속은 그들이 이미 저지른 잘못을 그대가 강화하는 정도까지만 그러하다. 이 투사는 그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의 왜곡에 취약하게 만든다. 그 사람들 자신의 지각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적을 행하는 사람은 그렇게 갇힌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을 뿐이며, 이 축복은 그들의 왜곡을 되돌리고 그들을 감옥에서 풀어 준다.

그대는 그대가 지각하는 대로 반응하며, 그대가 지각하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

황금률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요구한다. 이 요구는 둘 다의 지각이 정확해야 한다는 뜻이다. 황금률은 적절한 행동을 위한 규칙이다. 올바르게 지각하지 않고서는 적절하게 행동할 수 없다.

그대와 그대의 이웃은 한 가족의 동등한 구성원이므로, 그대가 둘을 지각하는 대로 그대는 둘 모두에게 행동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거룩함에 대한 지각에서 시작하여 다른 사람의 거룩함을 바라보아야 한다.

기적은 기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마음에서 일어난다. 하나로 통합됨으로써 이 마음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 자신의 자각조차 없이도 모든 사람에게 뻗어 나간다. 기적이 비인격적인 것은 속죄 자체가 하나이며, 모든 창조물을 그들의 창조주와 하나로 묶기 때문이다.

그대의 참모습의 표현으로서, 기적은 마음을 은총의 상태에 둔다. 그러면 마음은 자연스럽게 안에 품은 이와 밖의 낯선 이를 맞아들인다. 그대가 낯선 이를 안으로 들일 때, 그 낯선 이는 그대의 형제가 된다.

기적이 그대가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는 영향을 그대의 형제들에게 미칠 수 있다는 것은 그대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기적은 언제나 그대를 축복할 것이다. 그대가 행하라고 요청받지 않은 기적도 그 가치를 잃지 않는다.

그런 기적도 여전히 그대 자신의 은총 상태의 표현이다. 다만 기적의 행동적 측면은 내가 통제해야 한다. 이렇게 통제하는 것은 내가 전체 계획을 완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적을 행하려는 마음의 비인격적인 본성이 그대의 은총을 보장하지만, 기적을 어디에 베풀 수 있는지 아는 자리에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다.

기적이 선별적인 것은 오직,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사람들을 향한다는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이 선별성이 그들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그 기적을 다른 사람에게 확장하게 만들기에, 속죄의 강한 사슬이 이어져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선별성은 기적 자체의 규모를 고려하지 않는다. 크기라는 개념 자체가 실재하지 않는 차원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적은 실재에 대한 자각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므로, 기적이 바로잡고자 하는 그 잘못을 지배하는 법칙에 얽매인다면 쓸모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