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지각을 앎으로 옮기는 다리

1) 성령을 향한 초대

이것이 성령을 향한 초대다. 나는 내가 위로 손을 뻗어 성령을 그대에게로 데려올 수 있다고 이미 말했지만, 나는 오직 그대 자신의 초대가 있어야만 성령을 그대에게 데려올 수 있다.

성령은 나의 바른 마음 안에 있었던 것처럼 그대의 바른 마음 안에도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던 그 마음이 너희 안에도 있게 하라"고 말하며, 이를 축복의 말로 쓴다. 이는 기적의 마음가짐이라는 축복이다. 이 축복은 그대가 내가 생각했던 대로 생각하기를, 곧 그리스도의 생각 안에서 나와 하나가 되기를 구한다.

성령은 성삼위 가운데 상징적 역할을 지닌 유일한 부분이다. 성령은 치유자, 위로자, 안내자로 불린다. 성령은 또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분리된" 무언가로 묘사되기도 한다. 나는 나 자신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가면 너희에게 또 다른 위로자를 보낼 것이니 그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성령의 상징적 역할은 성령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상징은 서로 다른 해석에 열려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하나로서, 성령 곧 보편적 영감에서 온 나의 바른 생각은 무엇보다 먼저 이 영감이 모두를 위한 것임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 영감이 모두를 위한 것임을 알지 못했다면 나는 이 영감을 나 자신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맥락에서는 "안다"는 말이 적절하다. 성령은 앎에 매우 가까워서 앎을 불러내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앎이 오도록 허락하기 때문이다. 나는 전에 더 높은, 즉 "참된" 지각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데, 이는 진리에 매우 가까워서 하나님 자신이 그 작은 간극을 가로질러 흐를 수 있을 정도다. 앎은 언제나 어디로든 흐를 준비가 되어 있지만, 맞서 싸울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는 앎을 결코 잃을 수는 없지만 가로막을 수는 있다.

성령은 지각 너머에 있는 앎을 아는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성령은 분리와 함께 보호 장치로서 생겨났으며, 동시에 속죄의 원리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분리 이전에는 치유가 필요 없었다. 그 누구도 위로받지 못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령의 음성은 속죄를 향한 부름, 곧 마음의 온전함을 회복하라는 부름이다. 속죄가 완성되고 아들됨 전체가 치유되면 돌아오라는 부름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는 것은 영원하다.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함께 남아, 그들의 창조물을 축복하고 그들을 기쁨의 빛 안에 있게 할 것이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그릇 창조한 것들조차, 자녀들이 만들었다는 이유로 존중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자녀들의 지각을 아주 높이 끌어올려 거의 자신에게로 되돌아올 수 있게 하는 생각의 방식으로 자녀들을 축복하기도 했다.

성령은 속죄의 마음이다. 성령은 하나 된 마음가짐에 충분히 가까운 마음 상태를 나타내어, 마침내 그 상태로의 이행이 가능해지게 한다. 지각은 앎이 아니지만, 앎으로 옮겨 가거나 앎 안으로 건너갈 수 있다. 여기서는 "옮겨진다" 또는 "건너간다"는 말의 문자 그대로의 뜻을 쓰는 것이 오히려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마지막 단계는 하나님이 밟기 때문이다.

아들됨 전체가 공유하는 영감인 성령은 일종의 지각을 이끌어 낸다. 그 지각에는 천국 자체의 요소들과 같은 요소가 여럿 있다.

첫째, 그 지각은 보편성이 완전히 명확해서, 그 지각에 이른 사람은 그것을 나누는 일이 이득 외의 다른 무언가를 동반한다고는 단 한순간도 믿을 수 없다. 둘째, 그 지각은 공격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참으로 열려 있다. 이는 그 지각이 앎을 낳지는 않지만, 그 어떤 방식으로도 앎을 가로막지 않는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그 지각은 자신이 가져오는 치유 너머의 길을 가리키며, 마음을 그 자신의 통합 너머 창조의 길들을 향해 이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참된 질적 전환을 낳기에 충분한 양적 변화가 일어난다.

치유는 창조가 아니라 회복이다. 성령은 치유 너머, 곧 치유가 필요해지기 전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떠했는지와 치유된 뒤에 어떠할 것인지를 봄으로써 치유를 북돋운다. 성령이 이렇게 시간 순서를 바꾸는 일은 상당히 익숙하게 느껴져야 한다. 기적이 가져오는 시간 지각의 전환과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기적의 마음가짐을 낳는 동기다. 분리를 놓아 버림으로써 치유하겠다는 결정이다. 그대의 뜻은 여전히 그대 안에 있다. 하나님이 그대의 뜻을 그대의 마음속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의 뜻을 잠재워 둘 수는 있어도 지워 없앨 수는 없다. 하나님 자신은 시간이 있는 한 자신의 마음에서 그대의 마음으로 그대의 뜻을 전함으로써 그대의 뜻을 살아 있게 한다. 기적 자체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이러한 뜻의 하나됨을 반영한다.

성령은 기쁨의 영이다. 성령은 돌아오라는 부름이며, 하나님은 이 부름으로 분리된 아들들의 마음을 축복했다. 이는 마음의 소명이다. 마음은 분리가 있기 전까지는 소명이 없었다. 그 전에는 오직 존재함만이 있었고, 바른 생각을 향한 부름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분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온 마음이 창조로 돌아갈 때까지 속죄가 치유하는 수단이다. 속죄의 원리와 분리는 동시에 시작되었다. 에고가 만들어졌을 때, 하나님은 마음속에 기쁨을 향한 부름을 두었다. 이 부름은 너무나 강해서 그 소리에 에고는 언제나 사라진다.

그렇기에 그대는 그대 안의 두 음성 가운데 하나를 듣기로 선택해야 한다. 하나는 그대 자신이 만든 것이며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그대에게 준 것이며, 하나님은 다만 그대가 그 음성에 귀 기울이기를 구할 뿐이다.

성령은 매우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그대 안에 있다. 성령의 음성은 그대가 전에 있었고 다시 있게 될 그곳으로 그대를 불러 돌아오게 하는 음성이다. 이 세상에서도 오직 그 음성만을 듣고 다른 음성은 듣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이는 노력과 배우려는 커다란 의지를 필요로 한다. 이는 내가 배운 마지막 과제이며, 하나님의 아들들은 아들로서 평등한 만큼 배우는 자로서도 평등하다.

그대는 천국이지만, 그대는 어둠에 대한 믿음이 그대의 마음속에 들어오도록 허락했고, 그래서 새로운 빛이 필요하다. 성령은 그대가 어둠이라는 관념을 몰아내도록 허락해야 하는 광채다. 성령의 영광 앞에서 분리는 무너져 내리고, 천국은 자신에게 속한 것 안으로 뚫고 들어온다.

분리 이전에 그대에게는 인도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대는 다시 알게 될 것처럼 알았지만, 지금 아는 방식으로는 알지 못했다. 하나님은 인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직 완전한 앎만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는 평가를 내포한다. 옳은 길과 그른 길이 있으며, 하나는 선택되고 다른 하나는 피해져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그대는 다른 하나를 포기한다.

성령을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그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하나님의 일부다. 그대가 하나님을 떠나기로 선택했을 때, 하나님은 그대에게 자신을 대변할 음성을 주었다. 더 이상 방해받지 않고는 자신의 앎을 그대와 나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대가 또 다른 음성을 만들었기에 직접적인 소통은 끊어졌다.

2) 두 음성의 선택

성령은 그대에게 기억하라고도 부르고 잊으라고도 부른다. 그대는 대립하는 것들이 가능한 대립의 상태 안에 있기로 선택했다. 그 결과, 그대가 내려야 할 선택들이 있다. 거룩한 상태 안에서는 뜻이 자유로워서, 그 창조력이 무한하고 선택은 무의미하다. 선택할 자유는 창조할 자유와 같은 힘이지만, 그 적용은 다르다. 선택은 쪼개진 마음에 달려 있다.

성령은 하나의 선택 방식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자신을 떠나기로 선택했음에도, 그들을 위로받지 못한 채 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둔 음성은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 음성이 아니었으며, 그 뜻은 성령이 대변한다.

성령의 음성은 명령하지 않는다. 성령은 오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은 요구하지 않는다. 통제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은 압도하지 않는다. 공격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은 다만 일깨울 뿐이다. 성령은 오직 그대에게 일깨우는 것 때문에 설득력을 갖는다.

성령은 그대가 만들어 낼 수 있는 혼란 한가운데서도 고요함을 유지하면서, 그대의 마음에 다른 길을 가져다준다. 하나님을 대변하는 음성은 언제나 고요하다. 평화를 말하기 때문이다. 평화는 치유하기에 전쟁보다 강하다. 전쟁은 분열이지 늘어남이 아니다. 그 누구도 다툼에서 얻는 것이 없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영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그대가 그릇된 음성에 귀 기울인다면 그대는 자신의 영혼을 놓친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영혼을 잃을 수는 없지만, 알지 못할 수는 있다. 그러므로 그대가 옳게 선택할 때까지 그것은 그대에게 "잃어버린" 것이다.

성령은 선택에 있어 그대의 안내자다. 그대 마음에는 언제나 옳은 선택을 대변하는 부분이 있으며, 성령은 그 부분에 있다. 성령이 하나님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하나님과 그대에게 남은 소통이며, 그대는 그 소통을 가로막을 수는 있어도 파괴할 수는 없다. 성령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하늘과 땅 둘 다 그대 안에 있다. 둘의 부름이 모두 그대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대변하는 음성은 하나님을 향한 그대 자신의 제단들에서 나온다. 이 제단들은 물건이 아니다. 헌신이다. 그러나 그대에게는 지금 다른 헌신들도 있다. 그대의 나뉜 헌신이 그대에게 두 음성을 주었으며, 그대는 어느 제단에서 섬기고 싶은지 선택해야 한다. 지금 그대가 응답하는 부름은 하나의 결정이기에 하나의 평가다. 그 결정은 매우 단순하다. 이는 어느 부름이 그대에게 더 가치 있는지를 근거로 내려진다.

나의 마음은 언제나 그대의 마음과 같을 것이다. 우리는 평등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준 것은 오직 나의 결정이었다. 그대에게 주는 나의 유일한 선물은 그대가 같은 결정을 내리도록 돕는 것이다. 이 결정은 나누기로 하는 선택이다. 이 결정 자체가 나누기로 하는 결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줌으로써 내려지며, 그렇기에 참된 창조를 닮은 유일한 선택이다.

나는 결정에 있어 그대의 본이다. 하나님을 선택함으로써 나는 이 결정이 내려질 수 있으며 그대도 그 결정을 내릴 수 있음을 그대에게 보여 주었다. 나는 나를 위해 결정한 그 마음이 그대 안에도 있으며, 나를 바꾸었듯 그대도 그 마음이 그대를 바꾸게 할 수 있다고 그대에게 단언했다. 이 마음은 모호함이 없다. 오직 한 음성만을 듣고 오직 한 가지 방식으로만 답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나와 함께 세상의 빛이다. 쉼은 잠에서가 아니라 깨어남에서 온다. 성령은 깨어나 기뻐하라는 부름이다. 세상은 매우 지쳐 있다. 세상은 피로라는 관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과제는 세상을 하나님을 향한 부름으로 깨우는 기쁜 과제다.

모든 이가 성령의 부름에 응답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아들됨은 하나가 될 수 없다. 그 나라의 어느 부분에게든, 그 나라를 온전하게 만들 수 있는 완전한 통합으로 회복시키는 것보다 더 나은 소명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대 안의 성령을 통해 오직 이것만을 들으라. 그리고 내가 그대를 가르치듯 그대의 형제들에게도 듣는 법을 가르치라. 그릇된 음성의 유혹을 받을 때, 나를 불러 나의 결정을 나누어 그 결정을 더 강하게 만듦으로써 치유하는 법을 그대에게 일깨우게 하라.

우리가 이 목표를 나누는 만큼, 우리는 이 목표가 지닌 힘, 곧 아들됨 전체를 끌어당겨 아들됨이 창조된 하나됨 안으로 되돌리는 힘을 키운다.

"멍에"는 "함께 결합함"을 뜻하고, "짐"은 "메시지"를 뜻함을 기억하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를 이렇게 다시 말해 보자. "함께 결합하자. 나의 메시지는 가볍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에게 내가 행동한 대로 행동하라고 명해 왔지만,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같은 마음에 응답해야 한다. 이 마음은 성령이며, 그 뜻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다. 성령은 나를 그대의 생각의 본으로 간직하는 법과, 그 결과로 나처럼 행동하는 법을 그대에게 가르친다.

우리의 공동 동기가 지닌 힘은 믿기 어려울 만큼 크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함께 이룰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없다. 하나님을 향한 부름은 무한함을 향한 부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여, 나의 메시지는 그대를 위한 것이니, 그대 안의 성령에게 응답하면서 그 메시지를 듣고 나누어 주라.

3) 에고와 영의 중재

그대의 형제를 알아보는 길은 그대 형제의 안에 있는 성령을 알아보는 것이다. 나는 성령이 지각을 앎으로 옮기는 다리라고 이미 말했으므로, 우리는 지각과 앎이라는 두 용어를 마치 서로 관련된 것처럼 쓸 수 있다. 성령의 마음 안에서는 실제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성령의 마음 안에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두 사고방식 사이의 분리는 치유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성삼위의 일부다. 성령의 마음은 부분적으로는 그대의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진술이 아니라 경험을 통한 해명이 필요하다.

성령은 치유라는 관념이다. 생각이기에, 이 관념은 나누어질수록 커진다.

하나님을 향한 부름이기에, 이 관념은 또한 하나님이라는 관념이기도 하다. 그대가 하나님의 일부이므로, 이 관념은 또한 그대 자신이라는 관념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이라는 관념이기도 하다.

성령이라는 관념은 다른 관념들의 성질을 함께 지닌다. 자신이 속한 우주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이는 주어짐으로써 강해진다. 그대가 이를 그대의 형제에게 줄 때 이는 그대 안에서 늘어난다.

이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는 데 있어, 그대의 형제가 자신 안이나 그대 안의 성령을 의식할 필요는 없다. 그대가 그렇게 해 왔듯, 그대의 형제도 하나님을 향한 부름을 분리시켰을 수 있다. 그대가 그대 형제의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부름을 의식하고 그럼으로써 그 존재함을 인정할 때, 이 분리는 그대 둘 안에서 치유된다.

그대의 형제를 보는 데는 정반대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이 두 방식은 반드시 그대의 마음속에 있어야 한다. 그대가 지각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 두 방식은 또한 그대 형제의 마음속에도 있어야 한다. 그대가 그를 지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 형제의 마음 안의 성령을 통해 그를 보라. 그러면 그대는 그대 자신의 마음 안에서 그를 알아볼 것이다. 그대가 그대의 형제 안에서 인정하는 것을 그대는 자기 자신 안에서도 인정하는 것이며, 그대가 나누는 것을 그대는 강화한다.

성령의 음성은 그대 안에서 약하다. 그렇기에 그대는 그것을 나누어야 한다. 그대가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려면 먼저 그 힘이 커져야 한다. 그대의 마음 안에서 그것이 그토록 약한 동안에는, 그대 자신 안에서 그것을 듣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령의 음성 자체는 약하지 않지만, 성령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는 그대의 의지 부족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 그대가 오직 그대 자신 안에서만 성령을 찾으려는 실수를 저지른다면, 그대의 생각은 그대를 두렵게 만들 것이다. 에고의 관점을 취함으로써, 그대는 에고를 안내자로 삼아 에고에게 낯선 여정에 나서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반드시 두려움을 낳는다.

지체는 에고에게서 온다. 시간이 에고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시간도 지체도 영원 안에서는 의미가 없다. 나는 전에 성령이 에고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성령이 그대에게 일깨우는 모든 것은 에고의 생각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참된 지각과 거짓된 지각 자체가 서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성령에게는 에고가 만든 것을 되돌리는 과제가 있다. 성령은 에고가 작동하는 층위와 같은 층위에서 에고가 만든 것을 되돌린다. 그러지 않으면 마음이 그 변화(에고가 만든 것이 되돌려지는 일)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의 한 층위가 다른 층위에게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을 거듭 강조해 왔다. 에고와 성령의 관계도, 시간과 영원의 관계도 그러하다. 영원은 하나님의 관념이므로, 성령은 영원을 완전히 이해한다. 시간은 에고의 믿음이므로, 에고의 영역인 낮은 마음은 시간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시간 가운데 영원한 유일한 측면은 지금이다.

성령은 에고의 해석과 영의 앎 사이의 중재자다. 상징을 다룰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은, 성령이 에고 자신의 언어로 에고의 믿음과 함께 작업할 수 있게 한다. 상징 너머 영원을 볼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은, 성령이 대변하는 하나님의 법칙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파괴가 아니라 이해를 통해 에고가 만든 것을 재해석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이해는 빛이지만, 그대 자신은 이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신해 그대를 재해석하는 것이 성령의 과제다. 그대는 홀로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이는 아들됨 안의 정당한 자리를 떠나서는 그대가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들됨의 정당한 자리는 하나님이다. 이것이 그대의 생명이며, 그대의 영원함이며, 그대의 참나(Self)다. 성령이 그대에게 일깨우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성령이 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4) 평화의 간직과 나눔

이 봄은 너무나 고요하기에 에고를 두렵게 한다. 평화는 에고의 가장 큰 적이다. 에고의 실재 해석에 따르면 전쟁이야말로 에고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다툼 속에서 강해진다. 그대가 다툼이 있다고 믿으면 그대는 사납게 반응할 것이다. 위험이라는 관념이 그대의 마음속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관념 자체가 에고를 향한 호소다.

성령은 위험의 부름에 대해 에고만큼이나 경계하며, 에고가 위험을 반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은 자신의 힘으로 위험의 부름에 맞선다. 성령은 평화를 반김으로써 이러한 반김에 맞선다. 영원과 평화는 시간과 전쟁이 그러한 만큼이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지각은 관계로부터 의미를 이끌어 낸다. 그대가 받아들이는 관계들이 그대의 믿음의 토대다. 분리는 쪼개진 마음을 가리키는 또 다른 말일 뿐이다. 성령이 평화의 상징이듯, 에고는 분리의 상징이다. 그대가 다른 이들 안에서 지각하는 것을 그대는 자기 자신 안에서 강화하고 있다. 그대는 그대의 마음이 잘못 지각하도록 놓아둘 수도 있지만, 성령은 그대의 마음이 자신의 잘못된 지각을 재해석하도록 한다.

성령은 완전한 스승이다. 성령은 오직 그대의 마음이 이미 이해하고 있는 것만을 써서, 그대가 성령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그대에게 가르친다.

성령은 마지못해 하는 학습자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고도 그와 함께할 수 있다. 그 마음의 일부는 여전히 하나님 편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감추려는 에고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은 여전히 에고보다 훨씬 강하다. 다만 에고가 이 부분을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성령은 이 부분을 완전히 알아본다. 이곳이 성령 자신의 거처, 곧 성령이 편안히 머무는 마음속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대도 그곳에서 편안하다. 그곳은 평화의 자리이며, 평화는 하나님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부인 그대는 하나님의 평화 안이 아니고서는 편안하지 않다. 평화가 영원한 것이라면, 그대는 오직 영원 안에서만 편안하다.

에고는 자신이 지각하는 대로 세상을 만들었지만, 에고가 만든 것을 재해석하는 성령은 세상을 그대를 집으로 데려오기 위한 가르침의 도구로 본다. 성령은 시간을 지각하고, 시간을 시간 없는 것으로 재해석해야 한다. 성령은 대립을 통해 작업해야 한다. 대립 상태에 있는 마음과 함께, 그 마음을 위해 작업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잡고 배우라. 그리고 배움에 열려 있으라.

그대는 진리를 만들지 않았지만, 진리는 그래도 그대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성령이 보듯 보고, 성령이 이해하듯 이해하라. 성령의 이해는 나를 기억하며 하나님을 돌아본다.

성령은 언제나 하나님과 하나로 이어져 있으며, 그대의 일부이기도 하다. 성령은 구원으로 이끄는 그대의 안내자다. 지나간 것과 다가올 것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그 기억을 현재로 가져오기 때문이다.

성령은 그대의 마음속에 이 기쁨을 부드럽게 간직하며, 다만 그대가 이 기쁨을 나누어 성령의 이름으로 키움으로써, 그대 안에 있는 성령의 기쁨을 키워 주기를 구할 뿐이다.

두려움이 감추어 온 것도 여전히 그대의 일부다. 속죄와 하나가 되는 것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성령은 그대가 두렵다고 지각하는 모든 것을 재해석하도록 도우며, 오직 사랑에서 나온 것만이 참되다는 것을 그대에게 가르칠 것이다.

진리는 그대가 파괴할 수 있는 능력 너머에 있지만, 그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 안에는 온전히 있다. 진리는 그대에게 속한다. 하나님의 연장으로서, 그대가 하나님과 함께 그것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진리는 그대의 것이다. 진리가 그대의 일부이기 때문이며, 이는 하나님이 그대를 창조했기에 그대가 하나님의 일부인 것과 같다.

선한 것은 그 무엇도 잃어질 수 없다. 창조를 대변하는 음성인 성령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선하지 않은 것은 그 무엇도 창조된 적이 없으며, 그렇기에 보호될 수도 없다. 속죄는 그 나라의 안전을 보증하며, 아들됨의 하나됨이 그 나라의 보호막이다. 아들됨이 하나로 뭉쳐 있기에 에고는 그 나라를 이기지 못한다. 하나가 되라는 성령의 부름을 듣는 이들 앞에서, 에고는 희미해지다 사라져 버린다.

에고는 자기가 만든 것을 자기 안에만 간직하며, 그렇기에 그것에는 힘이 없다. 에고가 만든 것의 존재는 나누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죽지 않는다. 다만 애초에 태어난 적이 없을 뿐이다. 육체의 출생은 시작이 아니다. 이어짐이다. 이어지는 모든 것은 이미 태어난 것이다. 이러한 이어짐은 그대가 그대 마음의 치유되지 않은 부분을 기꺼이 더 높은 부분으로 되돌려, 나뉘지 않은 채 창조로 되돌릴수록 늘어날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토대를 주기 위해 왔다. 그대 자신의 생각이 그대를 참으로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대는 늘어나기에는 너무 약한, 나누어지지 않은 관념들의 짐을 짊어져 왔다. 그러나 그 관념들을 만들고도 그대는 그 관념들을 되돌리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대는 혼자서 그대의 과거 오류를 지워 없앨 수 없다. 그것들은 속죄 없이는 그대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속죄는 그대가 만든 치유책이 아니다. 속죄는 순수한 나눔의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도 하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했을 때 뜻한 바다.

그대가 하나님의 일부이고 아들됨이 하나라면, 그대는 에고가 보는 자아에 갇힐 수 없다. 아들됨의 어느 부분에 있든, 사랑에서 나온 생각은 모든 부분에 속한다. 그 생각은 사랑에서 나온 것이기에 나누어진다. 나눔은 하나님이 창조하는 방식이며, 또한 그대가 창조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에고는 그대를 그 나라에서 추방된 채로 둘 수는 있지만, 그 나라 자체 안에서는 아무런 힘이 없다. 영의 관념들은 그 관념을 생각하는 마음을 떠나지 않으며, 관념들끼리 서로 충돌할 수도 없다. 그러나 에고의 관념은 충돌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층위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같은 층위 안에 상반된 생각들을 포함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상반된 생각들을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그리고 하나님이 그대를 위해 간직하는 생각만을 나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로 천국이 이루어져 있다. 나머지는 성령이 그 나라의 빛 안에서 그것들을 재해석하여 그것들 역시 나눌 만한 것으로 만들 때까지 그대에게 남아 있다. 그것들이 충분히 정화되면 성령은 그대가 그것들을 나누어 주도록 한다. 그것들을 나누기로 하는 결정이 곧 그것들의 정화다.

나는 하나의 음성을 들었다. 나 홀로는 나 자신을 위해 속죄할 수 없음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음성에 귀 기울인다는 것은 그 음성을 나누기로 결정한다는 뜻이며, 그 결정은 그대 자신이 그 음성을 듣기 위한 것이다. 나 안에 있던 그 마음은 지금도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마음에게 거스를 수 없이 이끌린다. 하나님의 온전함이 곧 하나님의 아들의 온전함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상처받을 수 없으며, 그대의 형제에게 그대의 온전함 외에는 아무것도 보여 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형제가 그대를 해칠 수 없음을 그에게 보여 주고, 그를 탓하는 마음을 조금도 품지 말라. 그러지 않으면 그 마음을 그대 자신을 향해 품는 것이다. 이것이 "다른 뺨을 돌려 대라"는 말의 의미다.

가르침은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만, 무엇보다도 본을 보임으로써 이루어진다. 가르침은 치유여야 한다. 이는 관념을 나누는 것이자, 나누는 것이 곧 관념을 강화하는 것임을 알아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배운 것을 가르쳐야 할 나의 필요를 잊을 수 없다. 그 필요는 내가 그것을 배웠기에 내 안에서 생겨났다.

나는 그대에게 그대가 배운 것을 가르치라고 요청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그 가르침을 의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나의 이름으로 그 가르침을 의지할 만한 것으로 만들라. 나의 이름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내가 배운 것을 나는 그대에게 아낌없이 준다. 그리고 나 안에 있던 그 마음은 그대가 그 음성을 듣기로 선택할 때 기뻐한다.

성령은 되돌림으로써 우리 모두 안에서 속죄하며, 그럼으로써 그대가 그대의 마음속에 두었던 짐을 들어 올린다. 성령을 따름으로써 그대는 그대가 속한 곳인 하나님에게로 다시 이끌려 간다. 그런데 그대의 형제를 데리고 가지 않고서 그대가 어떻게 그 길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대가 속죄와 하나가 되어 속죄를 나누어 주기 전까지는, 속죄 안에서 나의 역할은 끝나지 않는다. 그대가 가르치는 대로 그대는 배우게 될 것이다.

나는 결코 그대를 떠나거나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대를 저버리는 것은 나 자신과 나를 창조한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대의 형제 가운데 누구든 저버린다면, 그대는 그대 자신과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다. 그대는 형제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하며, 그들도 그대처럼 하나님에게 속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보다 더 낫게 그대의 형제를 대할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속죄는 그대에게 치유된 마음의 힘을 주지만, 창조하는 힘은 하나님에게서 온다. 그러므로 용서받은 이들은 먼저 치유에 헌신해야 한다. 치유라는 관념을 받았으니, 치유를 간직하기 위해서는 치유를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관념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그 나라에서 보류되어 있는 한, 창조의 온전한 힘은 표현될 수 없다. 아들됨의 공동의 뜻만이 아버지처럼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창조주다. 오직 온전한 것만이 온전히 생각할 수 있고, 하나님의 생각에는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 그대가 생각하는 모든 것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토록 거룩한 그대가 어떻게 고통받을 수 있겠는가? 그대의 과거는 그 아름다움을 제외하고는 전부 사라졌으며, 축복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나는 그대의 모든 친절과 그대가 가져온 사랑에서 나온 모든 생각을 간직해 왔다. 나는 그 생각들의 빛을 가리던 오류를 씻어 내고, 그 생각들 고유의 완전한 광채 안에서 그 생각들을 그대를 위해 간직해 왔다.

그 생각들은 파괴 너머에, 그리고 죄책감 너머에 있다. 그 생각들은 그대 안의 성령에게서 왔으며,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는 것이 영원함을 안다.

그대는 참으로 평화 속에서 떠날 수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듯 그대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대는 나의 축복과 함께, 그리고 나의 축복을 위해 나아간다. 그 평화를 간직하고 나누라. 그리하면 그 평화는 언제나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평화를 간직하고 나누도록 그대의 마음과 그대의 손에 둔다. 마음은 그 평화를 간직할 만큼 순수하며, 손은 그 평화를 줄 만큼 강하다. 우리는 잃을 수 없다. 나의 판단은 하나님의 지혜만큼 강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손 안에 존재한다. 하나님의 고요한 자녀들은 하나님의 축복받은 아들들이다. 하나님의 생각들이 그대와 함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