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다시 선택하라
1) 육체와 영의 선택
그대는 육신을 보거나 영을 알아본다. 이 둘 사이에는 타협이 없다. 하나가 실재라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어야만 한다. 실재는 자신의 반대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봄에는 오직 이 하나의 선택만이 있다. 이 하나의 선택 안에서 그대가 결정하는 것이 그대가 보고 실재라고 생각하며 참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을 정한다. 그대의 온 세상은 바로 이 하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대는 바로 이 선택에서, 자신의 믿음 안에서 자신이 육신인지 영인지, 곧 자신이 무엇인지를 정했기 때문이다.
그대가 육신을 선택하면, 그대는 육체를 자신의 실재로 여기는 데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대가 그렇게 되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을 선택하면, 온 천국이 그대의 눈에 닿아 그대의 거룩한 봄을 축복하려 몸을 굽힌다. 그래서 그대는 치유하고 위로하고 축복하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더 이상 육신의 세상을 보지 않게 될 것이다.
구원은 무효화다. 그대가 육체를 보기로 선택하면, 그대는 분리와 서로 무관한 것들,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보게 된다. 어떤 것은 나타났다가 죽음 속에서 사라지고, 또 어떤 것은 고통과 상실에 처해 있다. 그리고 그 누구도 한순간 전과 정확히 같지 않으며, 한순간 후에도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다. 이토록 많은 변화가 보이는 곳에서 누가 신뢰를 가질 수 있겠는가? 다만 먼지일 뿐이라면 누가 가치 있겠는가?
구원은 이 모든 것의 무효화다. 구원이 눈을 풀어 준 이들의 봄 안에서 항상성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들의 눈은 죄책감을 간직하는 대가를 바라보는 일에서 풀려났다. 이들이 대신 죄책감을 놓아 버리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구원은 그대가 영을 보고 육체를 지각하지 말라고 청하지 않는다. 구원은 다만 영을 보는 일이 그대 자신의 선택이어야 한다고 청할 뿐이다. 그대는 도움 없이도 육체를 볼 수 있지만, 육체와 별개인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원이 무효화할 것은 바로 그대의 세상이며, 구원은 그대의 눈이 결코 찾을 수 없었던 또 다른 세상을 그대가 보게 해 줄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걱정하지 말라. 그대는 자신이 보는 것이 어떻게 그대의 시야에 맞추어 생겨났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그대가 이해했다면 그대가 보는 것은 이미 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지의 베일이 악과 선 위에 드리워져 있으며, 그 둘 다 사라지고 지각이 숨을 곳을 찾지 못하도록 그 베일을 지나가야만 한다.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 무효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우주 안에 여전히 이루어져야 할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오직 오만함 속에서만 그대는 천국으로 가는 길을 스스로 닦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대가 만든 세상을 대신할 세상을 볼 수 있는 수단은 이미 그대에게 주어져 있다.
그대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천국에서도 이 땅에서도 이것은 영원히 참이다. 그대가 어디에 있다고 믿든, 자신에 대한 진리가 실제로 무엇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든 상관없다. 그대가 무엇을 바라보든, 무엇을 느끼거나 생각하거나 바라기로 선택하든 아무 차이가 없다. 하나님 자신이 "그대의 뜻이 이루어지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의 뜻은 그대로 그대에게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아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보기로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 그대여, 그대에 대한 어떤 개념도 그대인 것의 진리에 맞서지 못하리라는 것을 잊지 말라. 진리를 무효화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개념은 바꾸기 어렵지 않다. 전에 지각되었던 그림에 맞지 않는 봄 하나가 분명하게 보이면, 그 봄은 보는 법을 배우는 눈을 위해 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자아개념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상처받을 수 없는 존재인가? 그렇다면 그대의 시야 속 세상은 해롭지 않다. 그대는 용서하는가? 그렇다면 이 세상은 용서한다. 그대가 세상의 잘못을 용서했고, 그래서 세상이 그대가 보는 것과 같은 눈으로 그대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대는 육체인가? 그렇다면 온 세상이 배신하며 죽이려 드는 것으로 지각된다. 그대는 죽지 않는 영이며, 부패의 약속도 죄의 얼룩도 그대 위에 없는 존재인가? 그렇다면 이 세상은 안정되고 완전히 신뢰할 만한 곳으로,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사랑만 있는, 잠시 쉬어 갈 행복한 곳으로 보인다. 마음이 다정한 이에게 반갑지 않을 자가 누구이겠는가? 그리고 참으로 결백한 이를 무엇이 해칠 수 있겠는가?
그대, 하나님의 거룩한 아이여, 그대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대가 자신이 땅에 있다고 생각하든 천국에 있다고 생각하든 상관없다. 그대의 아버지가 그대에게 뜻하는 것은 결코 변할 수 없다. 그대 안의 진리는 별처럼 빛나고, 빛처럼 순수하며, 사랑 자체처럼 결백한 채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대는 그대의 뜻이 이루어질 자격이 있다!
2) 배움은 변화
배움은 변화다. 구원은 그대의 사고에 아직 너무 낯설어 도움이 되지 않을 수단을 쓰려 하지 않으며, 그대가 알아볼 수 없는 종류의 변화를 일으키려 하지도 않는다. 지각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개념이 필요하며, 개념을 바꾸는 것이 구원의 과제다. 구원은 진리가 아니라 대비 안에서 다루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진리에는 반대가 없고 변할 수 없다. 이 세상의 개념 안에서 "나쁜" 것은 유죄이고, "좋은" 것은 결백하다. 그리고 여기서는 누구나 "나쁜" 것을 용서받기 위해 "좋은" 것을 헤아리는 자아개념을 지닌다.
그리고 그 누구도 다른 이 안의 "좋은" 것도 신뢰하지 않는다. "나쁜" 것이 "좋은" 것 뒤에 도사리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배신을 강조하며, 신뢰는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그대 안의 "나쁜" 것을 지각하는 동안에는 그 "나쁜" 것이 바뀔 수도 없다.
공격에서 가치를 보는 한, 그대는 자신의 "악한" 생각을 알아볼 수 없다. 그대는 때때로 그 악한 생각을 지각하겠지만, 그것을 무의미한 것으로는 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 악한 생각은 내용은 여전히 감추어진 채 두려운 형태로 다가와, 자신에 대한 그대의 서글픈 개념을 뒤흔들고 또 다른 "범죄"로 그 개념을 더욱 검게 물들인다.
그대는 자신에게 스스로 결백을 줄 수 없다. 그대는 자신에 대해 너무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형제가 온전히 용서받아 마땅한 존재로 그대의 시야에 떠오른다면, 그대의 자아개념은 완전히 바뀐다.
그대의 "악한" 생각들은 그의 것과 함께 용서받았다. 그대가 그 악한 생각들 모두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두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더 이상 그의 안에 있는 악과 죄책감의 표징이 되기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대가 그의 안의 선한 것에 신뢰를 줄 때, 그대는 그 선함을 그대 안의 선한 것에도 주는 것이다.
개념의 관점에서, 이렇게 그대는 그를 단순한 육체 이상으로 본다. 선함은 결코 육체가 보이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육체의 행동은 그대의 "더 저급한" 부분에서, 따라서 그의 저급한 부분에서도 나오는 것으로 지각된다.
그의 안의 선함에 집중함으로써, 육체는 그대의 시야에서 점점 덜 끈질기게 자리하게 된다. 그러다 마침내 육체는 선함을 둘러싸고 도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대의 눈만으로 볼 수 있는 것 너머의 세상에 이르렀을 때, 이 선함이 그대의 자아개념이 될 것이다.
이는 그대가 하나님이 그대에게 준 도움 없이는 자신이 보는 것을 해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봄 안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 그대는 이 세상에서 사는 만큼 그 다른 세상에서도 산다. 둘 다 그대의 자아개념이며, 서로 바뀔 수는 있지만 결코 동시에 지닐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대비는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그대는 이 자아개념을 사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자아개념은 그대 혼자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서 그렇다. 그대 자신으로 지각되지 않는 어떤 이를 위한 선물로 태어나, 그대에게 주어졌다. 그에게 베풀어진 그대의 용서가 이제 그대들 둘 모두를 위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대와 함께 걷는 그를 신뢰하라. 그러면 그대의 두려운 자아개념이 바뀔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안의 선함을 바라보라. 그대의 "악한" 생각들이 그에 대한 그대의 시야를 흐리지 않으니, 그 악한 생각들로 인해 겁먹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이 모든 전환에 필요한 것은 다만 그대가 이 행복한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꺼워하는 것뿐이다. 그 이상은 청해지지 않는다.
이를 위해, 지금 그대가 지닌 자아개념이 그 여파로 그대에게 무엇을 가져왔는지 기억하고, 그대에게 주어진 반가운 대비를 맞아들이라. 손을 내밀라. 그러면 그대는 다정한 용서라는 선물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선물은 그대만큼이나 용서가 필요한 이에게 그대가 베푸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의 잔인한 자아개념이 하나님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으로 바뀌게 하라.
지금 그대가 지닌 자아개념은 그대의 기능이 여기서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고 미완인 채로 남으리라는 것을 보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자아개념은 깊은 낙담과 헛됨이라는 쓰라린 느낌 속으로 그대를 몰아넣는다.
그러나 그대가 변화의 희망 너머까지 그 자아개념을 붙들고 그대의 마음속에 고정되고 감추어진 채로 두기로 선택하지 않는 한, 그 자아개념이 고정되어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대신 그 자아개념을, 그대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도록 주어진 기능을 섬기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이해하는 이에게 내어 주라. 그러면 그대는 평화를 그대의 것으로 갖기 위해 평화를 내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쓸 수 있는 대안들이 그대의 마음 안에 있으며, 그대는 자신을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다. 그대는 자신을 구원의 적으로 보는 대신,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존재로 바라보고 싶지 않은가?
3) 두려움이 곧 지옥
자아개념은 진리 앞에 세워진 방패처럼, 소리 없는 방벽처럼 서서 진리를 그대의 시야로부터 가린다. 그대가 보는 모든 것은 이미지다. 그대는 그대의 시야를 흐리고 봄을 뒤틀어 그대가 아무것도 명료하게 보지 못하게 하는 장벽을 통해 그 이미지들을 보기 때문이다.
빛은 그대가 보는 모든 것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다. 잘해야 그대는 그 너머에 있는 것의 그림자를 언뜻 볼 뿐이다. 못하면 그대는 다만 어둠을 바라보며, 죄책감 어린 생각과 두려움에서 태어난 개념에서 오는 공포에 질린 상상들을 지각한다. 그리고 그대가 보는 것은 지옥이다. 두려움이 곧 지옥이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풀려남을 위한 것이다. 봄과 인식(vision)과 내면의 안내자 모두가 그대가 사랑하는 이들을 곁에, 그리고 온 우주를 그들과 함께 데리고 지옥에서 벗어나도록 이끈다.
이 우주 안에서 그대의 역할을 보라! 사랑과 생명의 주는 참된 창조의 모든 부분에게 지옥의 비참함으로부터의 모든 구원을 맡겼다. 그리고 그는 각자에게 자신의 돌봄에 특별히 맡겨진 거룩한 이들의 구원자가 되는 은총을 허락했다.
그리고 각자는 처음으로 한 형제를 자기 자신을 보듯 바라보고 그 형제 안에서 자기 자신의 거울을 볼 때 구원자가 되는 법을 배운다. 이렇게 하여 그 사람의 자아개념은 내려놓인다. 그가 바라보는 것을 판단할 그 무엇도 그의 봄과 그가 바라보는 것 사이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단일한 봄 안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자신이 이 한 사람을 바라보듯 모든 이를 바라본다는 것을 이해한다.
전에 어둠이 있던 곳에 빛이 있고, 이제 베일이 그의 시야에서 걷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얼굴을 가린 베일, 하나님과 구원에 대한 두려움, 죄책감과 죽음에 대한 사랑, 이 이름들은 모두 단 하나의 오류에 붙여진 서로 다른 이름들이다. 그 오류란, 그대와 그대의 형제 사이에 공간이 있으며 그대 자신에 대한 환상이 그 형제를 그대에게서, 그대를 그에게서 떼어 놓아 둘이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판단의 검은 그대가 그대 자신에 대한 환상에게 주는 무기다. 이 환상은 그 검으로, 그대의 형제를 떼어 놓는 공간을 사랑이 차지하지 못하게 지키려 싸운다. 그러나 그대가 이 검을 쥐고 있는 동안에는, 그대는 육체를 자기 자신으로 지각해야만 한다. 그대는 분리에 묶여 그 형제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형제는 또 다른 관점을 비추는 거울을 쥐고 있다. 그 관점은 형제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며, 따라서 그대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유혹이란 지옥과 비참함 속에 머무르고 싶은 바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그 바람이 비참할 수 있고 지옥과 고통 속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 말고 무엇을 낳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형제를 이렇게 보지 않는 법을 배운 이는 자기 자신을 구원한 것이며, 이로써 그 이는 나머지 모두에게 구원자가 된다. 하나님은 모두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부분적인 구원자는 다만 부분적으로만 구원받은 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대에게 구원하라고 맡긴 거룩한 이들은 다름 아닌 그대가 만나거나 바라보는 모든 이다. 그대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대가 한순간 보고 잊어버린 모든 이, 오래전부터 알아 온 이들, 앞으로 만나게 될 이들, 기억되지 않는 이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그 아들이 지녔던 모든 개념에서 구원하도록 그대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지옥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동안 그대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의 구원자일 수 있겠는가? 거룩함은 내면의 결백함을 바라보고 그래서 그 결백함을 어디서나 보리라 기대하는 거룩한 눈을 통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룩한 이들은 자신이 바라보는 모든 이 안에서 그 결백함을 불러일으켜, 그 사람이 자신들이 기대하는 그런 존재가 되게 한다.
이것이 구원자의 봄이다. 곧 자신이 바라보는 모든 이 안에서 자신의 결백함을 보고, 어디서나 자신의 구원을 보는 것이다. 구원자는 자신의 고요하고 열린 눈과 자신이 보는 것 사이에 어떤 자아개념도 두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바라보는 것에 빛을 가져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한다.
4) 나약함 넘어선 힘
유혹이 어떤 형태를 취하는 것처럼 보이든, 그것은 언제나 다만 그대가 아닌 자아가 되고 싶은 바람을 반영할 뿐이다. 그리고 그 바람에서 하나의 개념이 일어난다. 이 개념은 그대가 되고 싶은 바로 그 자아가 그대라고 가르친다.
그 개념을 낳은 그 바람이 더 이상 소중히 여겨지지 않을 때까지 그 개념은 그대의 자아개념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 바람을 소중히 여기는 동안, 그대는 그 바람이 그대 안에서 낳은 이미지를 지닌 자아의 모습으로 그대의 형제를 보게 될 것이다.
봄은 다만 바람을 나타낼 수 있을 뿐이다. 봄에는 창조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봄은 사랑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 미움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이는 오직 그대가 보는 것과 결합할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떨어져 분리된 채로 있을 것인지에 대한 단순한 선택에 달려 있을 뿐이다.
구원자의 봄은 그대의 형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 판단도 품지 않으며, 그만큼 그대 자신에 대해 내려진 그 어떤 판단으로부터도 자유롭다. 그것은 그 누구 안에서도 과거를 전혀 보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그것은 오래된 개념에 흐려지지 않은 완전히 열린 마음을 섬기며, 오직 현재가 담고 있는 것만을 바라볼 준비가 되어 있다.
구원자의 봄은 알지 못하기에 판단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을 인식하며, 그것은 다만 이렇게 물을 뿐이다. "내가 바라보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러면 답이 주어진다. 그리고 그대 안의 그리스도의 봄에 맞서 그토록 오래 소중히 간직해 온 오래된 관념과 낡은 개념의 베일 너머를 보고자 결백하게 청하는 이에게 그리스도의 얼굴이 빛나도록 문이 열려 있다.
그러므로 유혹이 다만 그대가 아닌 무언가가 되려는, 미치고 무의미한 바람일 뿐임을 기억하며 유혹에 맞서 깨어 있으라. 그리고 그 대신 그대가 되려는 그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라. 그것은 광기와 고통과 죽음의 것이며, 배신과 캄캄한 절망의 것이고, 무너지는 꿈의 것이며, 죽어서 두려움의 꿈을 끝내는 것 말고는 남은 희망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유혹이다. 유혹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것에 맞서 선택하기가 어려울 수 있겠는가? 유혹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그대가 그 사이에서 선택하는 진짜 대안들을 보라.
오직 둘뿐이다. 많은 선택처럼 보이는 것에 속지 말라. 지옥이거나 천국이며, 이 둘 중 그대는 오직 하나만을 선택한다.
그대에게 주어진 이 세상의 빛이 이 세상으로부터 감추어지지 않게 하라. 이 세상에는 그 빛이 필요하다. 이 세상은 참으로 어둡고, 구원자의 봄이 거두어져 사람들이 보는 것이 죽음이기에 그들은 절망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구원자는 알지도 알려지지도 않은 채, 뜨이지 않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서 있다. 그리고 그가 보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자신의 용서를 그들에게 베풀 때까지 그들은 볼 수 없다.
하나님이 "내 아들을 놓아 주라!"고 말하는 그대가, 하나님이 풀려남을 청하는 대상이 바로 그대임을 알게 되었을 때, 듣지 않으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것 말고 이 과정이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이것 말고 그대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유혹은 어떤 형태를 취하든, 어디서 일어나든 오직 하나의 가르침만을 가르치려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에게 그가 죽어야만 하는 것 안에서 태어난 육체이며, 육체의 연약함에서 벗어날 수 없고, 육체가 명령하는 대로 느끼도록 묶여 있다고 설득하려 한다. 육체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에 한계를 세운다. 육체의 힘이 그가 지닌 유일한 힘이며, 그의 손이 닿는 범위는 육체가 닿는 작은 범위를 넘어설 수 없다.
만약 그리스도가 자신의 온 영광 속에 그대에게 나타나 다만 이것을 그대에게 청한다고 하자. 이 세상의 구원자들 사이에 자리를 잡을지, 아니면 지옥에 남아 그대의 형제들을 그곳에 붙들어 둘지 다시 한번 선택하라는 청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이런 존재이고 싶은가? 그리스도가 왔고, 이것을 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어떻게 그 선택을 내리는가? 이것은 얼마나 쉽게 설명되는가!
그대는 언제나 그대의 나약함과 그대 안의 그리스도의 힘 사이에서 선택한다. 그리고 그대가 선택하는 것이 그대가 실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약함이 그대의 행동을 이끌게 결코 내버려 두지 않기만 해도, 그대는 나약함에 아무 힘도 주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대 안의 그리스도의 빛이 그대가 하는 모든 일을 맡게 된다. 그대가 자신의 나약함을 그에게 가져왔고, 그가 대신 자신의 힘을 그대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시련은 다만 그대가 배우지 못한 가르침이 다시 한번 제시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전에 그릇된 선택을 했던 곳에서 이제 그대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고, 이로써 전에 선택한 것이 그대에게 가져온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모든 어려움 속에서, 모든 고통 속에서, 온갖 당혹감 속에서 그리스도는 그대에게 부르며 부드럽게 말한다. "나의 형제여, 다시 선택하라." 그는 고통의 근원을 하나도 남김없이 치유하고, 진리를 가리는 이미지를 하나도 남겨 두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대를 위로도 없이, 지옥의 꿈 속에 홀로 남겨 두지 않고, 오히려 그의 얼굴을 그대에게서 가리는 모든 것에서 그대의 마음을 풀어 줄 것이다.
그리스도의 거룩함은 그대의 것이다. 그가 그대 안에서 실재하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힘은 그대의 것이다. 그가 하나님이 자신의 유일한 아들로 창조한 참자아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만드는 이미지들은 하나님 자신이 그대이기를 뜻하는 것에 맞서 이길 수 없다.
그러므로 유혹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다시 선택할 또 하나의 기회로 보라. 그리고 전에 그대가 자신의 이미지를 세웠던 모든 상황과 모든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힘이 이기게 하라. 그리스도의 얼굴을 가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의 위엄 앞에서 무력하며, 그의 거룩한 봄 앞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구원자들은 그리스도와 똑같이 본다. 이들은 다만 그와 별개로 보이는 자기 자신의 나약함 대신 그의 힘을 선택할 뿐이다. 이들은 이 세상을 해방할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이 지닌 모든 힘 안에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뜻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뜻하는 것뿐이다.
5) 하나님이 창조한 나
그러므로 자신이 나약하고 비참하다고 지각하려는 온갖 유혹에 대해, 이 말로 응답하는 행복한 습관을 배우라. 나는 하나님이 창조한 그대로다. 하나님의 아들은 아무것도 겪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힘이 이기도록 초대받는다. 그 힘은 그대의 모든 나약함을 하나님에게서 오는, 결코 실패할 수 없는 힘으로 대신한다. 그리고 이렇게 거룩함을 향한 선택이 내려지기 전 두려움과 고통이 자연스러워 보였던 만큼이나 기적도 자연스러워진다. 그 선택 안에서 거짓된 구별은 사라지고, 환상 속 대안들은 내려놓이며, 진리를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하나님이 창조한 그대로이며, 그대가 보는 이미지가 무엇이든 그대가 바라보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도 마찬가지다. 병과 고통으로, 나약함과 고난과 상실로 그대가 보는 것은 다만 자신을 무방비하고 지옥에 있는 존재로 지각하려는 유혹일 뿐이다. 이 유혹에 굴복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어떤 형태로든, 어디서 일어나든 모든 고통이 태양 앞의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기적이 하나님의 아들을 치유하고 그의 나약함의 꿈에 문을 닫아, 그의 구원과 해방으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왔다. 그대가 만드는 모든 선택이 그대가 보고 믿는 대로 그대 자신의 정체성을 세운다는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이기를 그대가 바라는지 다시 한번 선택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