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자아개념이라는 우상의 해소
1) 결백의 얼굴 아래
이 세상의 배움은 이 세상의 실재에 맞춰진 자아개념 위에 세워져 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잘 들어맞는다. 이 자아개념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는 그림자와 환상의 세상에 어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아개념은 자기 집에서처럼 걸어 다닌다. 이곳은 자신이 보는 것과 하나가 되는 곳이다.
자아개념을 세우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의 배움이 존재하는 이유다. 이것이 그 목적이다. 곧 그대가 자아 없이 와서 나아가는 동안 자아 하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성숙"에 이를 무렵이면 그대는 그것을 완성하여, 이 세상의 요구와 하나가 되어 대등한 조건으로 이 세상을 만나게 된다.
자아개념은 그대가 만든 것이다. 그것은 그대 자신과 조금도 닮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대의 실재를 대신하도록 만들어진 하나의 우상이다. 이 세상이 가르치려는 자아개념은 겉으로 보이는 그런 것이 아니다.
자아개념은 두 가지 목적을 섬기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마음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중 하나뿐이다. 첫 번째는 결백의 얼굴, 곧 겉으로 드러나 행동하는 측면을 보여 준다. 미소 짓고 매력적이며 심지어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바로 이 얼굴이다. 그것은 동무를 찾고, 때로는 연민을 담아 고통받는 이들을 바라보며, 때로는 위로를 건넨다. 그것은 자신이 악한 세상 속의 선한 존재라고 믿는다.
이 측면은 화를 낼 수도 있다. 이 세상이 사악하여 결백함이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과 보호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얼굴은 관대하고 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세상이 가하는 부당함에 자주 눈물로 젖는다.
이 측면은 결코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매일 백 가지 작은 일들이 그 결백함에 작은 공격을 가하여, 짜증에서 마침내 노골적인 모욕과 학대로까지 자극한다.
자아개념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걸치는 이 결백의 얼굴은 자기방어 안에서의 공격은 견딜 수 있다. 이 세상이 무방비한 결백을 가혹하게 대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 아닌가?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자 중 이 얼굴을 빠뜨리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 얼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른 쪽 면은 그 사람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의 배움이 겨냥해 온 것이 바로 그 다른 쪽 면이다. 그 우상이 지속되도록 이 세상의 "실재"가 세워진 곳이 바로 그 면이기 때문이다.
결백의 얼굴 아래에는 자아개념이 가르치도록 만들어진 하나의 가르침이 있다. 이 가르침은 끔찍한 자리 뒤바뀜에 관한, 그리고 그 위에서 미소 짓는 얼굴이 자신이 감추고 있는 배신을 알아차리지 않도록 영원히 시선을 돌려야만 할 만큼 참담한 두려움에 관한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은 이렇게 가르친다: "나는 네가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이며, 네가 나를 바라볼 때 너는 내가 무엇인지 때문에 단죄받은 채 서 있다." 이 자아개념에 이 세상은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이 자아개념이 이 세상의 길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고, 그 위를 걷는 이들이 벗어나지 못하게 보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대의 형제가 영원히 단죄받도록 보장하는 핵심 가르침이 있다. 그대인 것이 이제 그의 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용서가 불가능하다. 그가 무엇을 하든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대의 고발하는 손가락은 흔들림 없이, 치명적인 겨냥으로 그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 고발하는 손가락은 그대 자신도 가리키지만, 이 사실은 결백의 얼굴 아래 더 깊은 안개 속에 감춰져 있다. 그리고 이 가려진 지하 창고 안에는 그의 죄와 그대의 죄가 모두 어둠 속에 보존되어 있으며, 빛이 반드시 드러낼 오류로 지각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대는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비난받을 수도 없고, 자아개념이 그대에게 시키는 일들을 바꿀 수도 없다. 그대는 미워하는 그대 자신의 모습 때문에 조용히, 그러나 끊임없는 절박함으로 여전히 형제를 단죄한다. 그런 그대에게 그대의 형제는 그대의 죄를 나타내는 상징이다.
개념은 배워진 것이다. 그것들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배움과 별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주어진 것이 아니므로 만들어져야만 한다. 그중 어느 하나도 참이 아니며, 많은 것이 미움으로 뜨겁고 두려움에서 태어난 왜곡으로 가득한 열띤 상상에서 나온다. 개념이란 그것을 만든 자가 자신의 의미를 부여한 하나의 생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개념들은 이 세상을 지탱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이 세상이 실재임을 증명하는 데 쓰일 수는 없다. 개념은 모두 이 세상 안에서 만들어져, 그 그림자 속에서 태어나고, 그 방식대로 자라나며, 마침내 그 사고 안에서 "성숙"하기 때문이다. 개념들은 이 세상의 붓으로 그려진 우상들의 관념이며, 진리를 나타내는 그림은 단 하나도 그릴 수 없다.
자아개념은 무의미하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볼 수 없고, 따라서 그것이 무엇인지 그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이 이끄는 모든 배움은 그대에게 이 자아개념을 가르치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로 시작되고 끝난다. 이는 그대가 이 세상의 법칙을 따르기로 선택하고 결코 이 세상의 길들 너머로 나아가려 하지 않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결코 깨닫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2) 작은 물음
이제 성령은 그대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의 평화가 주어지려면 이 자아개념이 반드시 무효화되어야 함을 그대가 보도록 돕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성령은 그대가 다른 무언가임을 가르치려는 가르침을 통해서가 아니고서는 배움을 되돌릴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지금 믿는 것을 자아의 완전한 상실과 맞바꾸라고 청해지는 셈이 되어, 그대 안에 더 큰 공포가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가르침 계획은 쉬운 단계들로 짜여 있다. 그래서 때때로 약간의 불편함과 얼마간의 고통이 있더라도 이미 배운 것이 산산조각 나는 일은 없다. 다만 그 배움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이는 증거를 다시 번역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대가 형제가 그대를 만든 그대로라는 증거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그대가 형제가 만든 그대로라고 자신이 생각하고 있음을 아직 그대가 지각하지 못한다 해도, 그대는 지금쯤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자신이 행동한다는 것을 분명히 배웠을 것이다.
그 형제가 그대를 대신해 반응하는가? 그리고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 아는가? 그가 그대의 미래를 볼 수 있고, 미래가 오기 전에 모든 상황에서 그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해 둘 수 있는가? 앞으로 올 일들에 대해 그런 예지력을 가지려면 그는 그대뿐 아니라 이 세상까지도 만들었어야 할 것이다.
그대가 형제가 그대를 만든 그대로라는 것은 지극히 있음 직하지 않아 보인다. 설령 그가 그랬다 해도, 결백의 얼굴을 그대에게 준 것은 누구인가? 이것이 그대의 기여인가? 그렇다면 그 얼굴을 만든 "그대"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대의 그 모든 선함에 속아 그것을 그토록 공격하는 자는 누구인가?
이 자아개념의 어리석음은 잊고, 다만 이것을 생각해 보자. 그대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두 부분이 있다. 만약 하나를 그대의 형제가 만들었다면, 다른 하나를 만든 것은 누구였는가? 그리고 누구로부터 무언가를 숨겨야만 하는가?
이 세상이 악하다 해도, 그대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숨길 필요는 여전히 없다. 볼 자가 누가 있는가? 그리고 공격받은 것 말고 무엇이 방어를 필요로 하겠는가? 어쩌면 이 개념이 반드시 어둠 속에 갇혀 있어야 하는 이유는, 빛 속에서 그것을 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자가 바로 그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모든 토대가 걷혀 나간다면 그대가 보는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이 세상에 대한 그대의 개념은 이 자아개념에 달려 있다. 그리고 둘 중 하나라도 의심받게 되면 둘 다 사라질 것이다.
성령은 그대를 공황에 빠뜨리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다만 작은 물음 하나만이라도 던져질 수 있는지 묻는다. 그대가 무엇이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대안들이 있다. 예를 들어, 그대는 그대가 형제에게 되라고 선택한 바로 그것일 수도 있다.
이 견해는 자아개념을 완전히 수동적인 것에서 옮겨, 적어도 능동적 선택의 여지를 만들고 상호작용이 개입되었어야 한다는 어느 정도의 인정을 만든다. 그대가 그대들 둘 모두를 위해 선택했으며 그가 나타내는 것에는 그대가 부여한 의미가 있다는 어느 정도의 이해가 있다. 이 견해는 또한 그대가 보는 것이 지각하는 자의 마음 상태를 반영한다는 지각의 법칙을 어렴풋이 엿보게도 한다.
그러나 처음에 선택을 한 것은 누구였는가? 그대가 형제에게 되라고 선택한 그것이 바로 그대라면, 그 사이에서 선택할 대안들이 있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먼저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는 버리기로 결정했어야만 한다. 이 단계에 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 단계는 아직 근본적인 물음에 다가가지 못한다. 이 자아개념들보다 앞서 무언가가 있었어야만 한다. 그리고 무언가가 그것들을 일으킨 그 배움을 했어야만 한다.
이것은 어느 관점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첫 번째 견해에서 두 번째 견해로 옮겨 가는 것의 주된 이점은, 그대가 자신의 결정으로 그 선택 안에 어떻게든 개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점은 거의 같은 만큼의 손실로 치러진다.
이제 그대는 형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죄가 있다고 고발당한 채 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의 죄책감을 함께 나누어야만 한다. 그대가 자기 자신의 형상대로 그를 위해 그 자아개념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전에는 오직 그만이 배신자였지만, 이제는 그대도 그와 함께 단죄받아야만 한다.
3) 개념으로부터의 탈출
자아개념은 언제나 이 세상의 커다란 몰두거리였다. 그리고 모두가 자신이라는 물음의 답을 찾아야만 한다고 믿는다.
구원은 다름 아닌 개념들로부터의 탈출로 볼 수 있다. 구원은 마음의 내용이 아니라, 마음이 생각한다는 단순한 진술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마음에는 선택이 있으며, 서로 다른 생각이 서로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보여질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은 자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자신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무엇인지에 대해 느끼는 깊은 혼란을 반영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자아개념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답하는 것처럼 어렴풋이 보인다.
그대의 참자아를 상징 안에서 구하지 말라. 그대인 것을 나타낼 수 있는 개념은 있을 수 없다. 악과 상호작용하고 사악한 것들에 반응하는 자아를 그대가 지각하는 동안, 그대가 어떤 개념을 받아들이는지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대 자신에 대한 개념은 여전히 완전히 무의미한 채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자신이 오직 자기 자신과만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지각하지 못할 것이다.
죄 있는 세상을 보는 것은 다만 이 세상이 그대의 배움을 이끌어 왔다는 표징일 뿐이며, 그대는 이 세상을 자신을 보는 대로 바라본다. 자아개념은 그대가 바라보는 모든 것을 아우르며, 이 지각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엇이든 그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면, 그대는 자신의 은밀한 바람을 그린 그림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이상은 아니다. 그리고 그대는 어떤 형태의 고통 속에서도 죽이고 싶은 자신의 숨겨진 바람을 본다.
배움이 진행되면서 그대는 많은 자아개념을 만들게 될 것이다. 그대 자신에 대한 지각이 바뀌면서 각각의 개념은 그대 자신의 관계들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보여 줄 것이다.
변화가 있을 때마다 얼마간의 혼란이 있겠지만, 이 세상의 배움이 그대의 마음을 붙든 손아귀를 느슨히 하고 있음에 감사하라. 그리고 그 손아귀가 마침내 사라지고 그대의 마음을 평화 속에 남겨 두리라는 확신 속에서 확실하고 행복하라.
고발자의 역할은 여러 곳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 각각은 그대를 고발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고발은 무효화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가 배우고 싶어 하지 않는 한 이 세상은 그대에 대한 어떤 이미지도 가르칠 수 없다. 모든 이미지가 다 지나가고, 그대가 자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보게 될 때가 올 것이다.
진리는 방해받지 않고 얽매이지 않은 채, 바로 이 봉인되지 않은 열린 마음으로 돌아온다. 자아개념들이 내려놓인 그곳에서 진리는 있는 그대로 정확히 드러난다. 모든 개념이 의심과 물음 앞에 놓이고, 빛 앞에 설 수 없는 아무 근거 위에서 만들어졌다고 인식될 때, 그때 진리는 죄책감 없이 깨끗한 그 성소 안으로 자유로이 들어올 수 있게 된다. 이 세상이 이보다 더 듣기 두려워하는 진술은 없다:
4) 알지 못함에서 구원
나는 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이 세상이나 나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배움 안에서 구원이 태어난다. 그리고 그대인 것이 스스로 그대에게 자신을 말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