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별 없는 길

1) 이미지를 내려놓음

잠시 고요히 머물며, 우리가 배웠던 모든 것과, 우리가 지녔던 모든 생각과, 사물이 무엇을 의미하고 그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가 지닌 온갖 선입견을 잊자. 이 세상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우리 자신의 관념을 기억하지 말자. 우리는 알지 못한다.

모든 이에 대해 품고 있는 모든 이미지가 우리 마음에서 풀려나 씻겨 나가게 하라. 판단에서 결백하라. 그 누구에 대해서도 그대의 마음을 스쳐 간 악하거나 선한 그 어떤 생각도 자각하지 말라.

이제 그대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대는 그를 알 수 있고, 그를 새롭게 알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이제 그는 그대에게 다시 태어나고, 그대는 그에게 다시 태어난다. 그를 죽음으로 선고했던 과거도, 그대를 그와 함께 선고했던 과거도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는 그대가 자유로운 만큼 자유롭게 살 수 있다. 오래된 배움이 사라지고, 진리가 다시 태어날 자리를 남겼기 때문이다.

오래된 가르침은 새것과 옛것을 맞세운다고 극복되지 않는다. 이 오래된 가르침은 진리가 알려지기 위해 정복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진리의 호소 앞에 패배하도록 맞서 싸워야 하는 것도 아니다. 준비해야 할 전투도 없고, 써야 할 시간도 없으며, 새것을 들여오기 위해 세워야 할 계획도 없다.

진리에 맞선 오래된 전투가 벌어지고 있지만, 진리는 그 전투에 응답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 전쟁에서 누가 상처를 입을 수 있겠는가? 그대에게는 진리 안에 적이 없다. 그런데 꿈이 그대를 공격할 수 있겠는가?

그대와 그대의 진리 사이에 가로놓인 듯 보이는 것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그 장애물을 내려놓는 데는 단계들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그대가 내리는 결정이다. 그러나 그 후에 진리가 그대에게 주어진다.

그대는 진리를 세우려 한다. 그리고 그대의 바람으로 그대는 무엇이든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내려야 할 두 가지 선택을 세운다. 둘 다 참이 아니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 다르지도 않다. 그러나 그대가 그 둘을 넘어 다른 선택인 하나의 대안을 바라볼 수 있으려면 먼저 그 둘 다를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 대안이 그대에게 가려지도록 그대가 만든 꿈 속에서는 아니다.

그대가 그 사이에서 선택하려는 것은 선택이 아니며, 다만 자유로운 것 같은 환상을 줄 뿐이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사실 전혀 선택이 아니다.

지도자와 추종자는 서로 별개의 역할로 나타나며, 각각은 그대가 잃고 싶지 않을 이점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 둘이 하나로 합쳐지면 만족과 평화의 희망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대는 자기 자신이 이 두 역할로 나뉘어 영원히 그 두 역할 사이에서 갈라져 있다고 본다. 그리고 모든 친구나 적은 그대가 이 분열에서 자신을 구하도록 돕는 수단이 된다.

어쩌면 그대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대는 그것이 마침내 정당화된 살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대는 그대가 지도자의 역할을 원할 때 그 역할을 주었던 자를 미워하고, 그대 안의 추종자가 일어나 지도자의 역할을 넘겨주고 싶을 때 그가 그 역할을 맡지 않는 것도 미워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대가 그대의 형제를 만든 이유이며, 이것이 그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도록 배워 온 것이다. 그가 그 목적을 섬기지 않는 한, 그는 그대가 그에게 준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는 죽음을 받아 마땅하다. 그에게는 그대에게 아무 목적도 아무 쓸모도 없기 때문이다.

2) 함께 걷는 길

그런데 그 형제는 어떤가? 그는 그대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그대가 그에게 원하는 것 말고 그가 무엇을 원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죽음만큼이나 쉽게 생명이 있다. 그대가 선택하는 것을 그대는 그를 위해서도 똑같이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에게 두 가지 부름을 하고, 그도 그대에게 두 가지 부름을 한다. 이 둘 사이에 선택이 있다. 그 둘에서 서로 다른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가 그대에게 지도자이든 추종자이든 상관없다. 그대는 이미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죽음을 청하는지 생명을 청하는지, 미움을 청하는지 용서와 도움을 청하는지는 결과에서 결코 같지 않다. 하나를 들으면 그대는 그와 분리되어 길을 잃는다. 그러나 다른 하나를 들으면 그대는 그와 결합하고, 그대의 응답 안에서 구원이 발견된다.

그대가 그 형제 안에서 듣는 목소리는 다름 아닌 그대 자신의 목소리다. 그는 그대에게 무엇을 청하는가? 잘 들으라! 그는 바로 그대에게 다가올 것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보고, 그대 자신의 목소리가 원하는 것을 청하는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응답하기 전에, 잠시 멈추어 이것을 생각해 보라:

내가 형제에게 주는 답이 바로 내가 청하고 있는 것이며, 내가 그에게서 배우는 것이 곧 나 자신에 대해 배우는 것이다.

이제 잠시 멈추어 고요히 머물며, 우리가 들었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잊고, 우리가 얼마나 알지 못하는지를 기억하자. 이 형제는 우리를 이끌지도 따르지도 않으며, 다만 우리와 나란히 같은 길을 걷는다. 그는 우리와 같은 존재이며, 우리가 허락하는 만큼 우리가 원하는 것에 가깝거나 멀리 있다. 우리는 그가 우리와 함께 얻지 않는 것을 얻지 않으며, 그가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도 물러선다.

분노가 아니라 사랑으로 그의 손을 잡으라. 그의 나아감 안에서 그대는 그대 자신의 나아감을 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가 그를 곁에 안전하게 붙들어 두지 않으면 우리는 각자 따로 그 길을 간다. 그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대와 동등하기에, 그대는 모든 겉모습에서 구원받아 그대를 부르는 그리스도에게 응답하게 될 것이다.

고요히 머물며 들으라. 오래된 생각을 하지 말라. 그대를 부르는 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그대가 배운 암울한 가르침들을 잊으라.

그리스도는 지도자도 추종자도 보지 않고, 모두에게 오직 하나의 응답만을 들으며, 모두에게 똑같은 다정함으로 부른다. 그리스도는 하나의 음성만을 듣기에, 하나님이 그를 자신의 유일한 아들로 임명했을 때 자신이 낸 응답과 다른 응답을 들을 수 없다.

아주 잠시 고요히 머물라. 전에 배운 그 어떤 생각도 없이 오라. 그리고 그대가 만든 모든 이미지를 내려놓으라.

오래된 것은 그대의 저항이나 의도 없이도 새것 앞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대가 소중하고 돌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공격은 없을 것이다. 결코 이루어진 적 없는 부름을 듣고 싶어 하는 그대의 바람에 대한 공격도 없을 것이다. 이 거룩한 곳, 그대가 고요히 귀 기울이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의 진리를 배우러 오는 이곳에서는 그 무엇도 그대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그대에게 배우라고 청해지는 것은 이것뿐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 부름을 들을 때, 그대는 자신이 원하지 않았고 결코 참이었던 적도 없는 생각들을 그저 내려놓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대의 형제를 모든 겉모습에서 용서하라. 그 겉모습들은 다만 그대 안의 죄스러움에 대해 그대가 스스로에게 가르쳐 온 오래된 가르침일 뿐이다. 다만 그가 자신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대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품은 그 모든 두려운 이미지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자비와 해방을 향한 그의 부름을 들으라.

이 형제는 그대와 함께 걷기를 두려워하며, 어쩌면 자신에게는 조금 뒤처지거나 조금 앞서는 것이 더 안전한 자리라고 생각한다. 그가 물러설 때만 나아가고 그가 앞서 나아갈 때 물러선다면, 그대도 그와 똑같이 생각하면서 나아갈 수 있겠는가? 그렇게 그대는 여정의 목표를 잊는다. 그 목표란 다만 그와 함께 걷기로 결정하여 아무도 이끌지도 따르지도 않는 것뿐이다.

이렇게 그 길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가는 길이 된다. 그리고 이 선택 안에서 배움의 결과는 바뀐다. 그리스도가 그대들 둘 모두에게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대의 위대한 동반자가 누구이며 이 형제가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대의 오래된 관념 없이 보내는 한순간이면 이 일이 일어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이 형제의 목적이 그대의 목적과 같음을 지각하게 될 것이다. 그는 그대가 원하는 것을 청하며, 그대와 똑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 어쩌면 그 청은 그에게서 다른 형태를 취할지도 모르지만, 그대가 응답하는 것은 그 형태가 아니다. 그가 청하면 그대가 받는다. 그대가 오직 하나의 목적, 곧 형제의 사랑으로 그대의 형제를 사랑함을 배우려는 목적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제로서, 이 형제의 아버지는 그대의 아버지와 같아야만 한다. 그가 진리 안에서 그대 자신과 같기 때문이다. 함께할 때 그대들의 공동 유산은 그대들 둘 모두에게 기억되고 받아들여진다. 홀로일 때 그 공동 유산은 그대들 둘 모두에게 거부된다.

그대가 여전히 이끌기를, 또는 따르기를 고집하는 동안에는 그대가 곁에 아무도 없이 홀로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이는 아무 데도 이르지 못하는 길이다. 홀로 걷는 동안에는 빛이 주어질 수 없어, 그대가 어느 길로 가는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란이 있고, 어둠 속에서 홀로 앞뒤로 비틀거리는 그대에게 끝없는 의심의 느낌이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다만 그 여정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겉모습일 뿐이다.

그대 곁에는 그대 앞에 빛을 들고 있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걸음이 그 길에 대한 확신과 확실함 속에서 내디뎌진다. 눈가리개는 참으로 그대의 시야를 가릴 수 있지만, 그 길 자체를 어둡게 만들 수는 없다. 그리고 그대와 함께 걷는 이는 빛을 지니고 있다.

3) 죄의 감옥에서 풀려남

오직 자신을 고발하는 자만이 단죄한다. 서로 다른 결과를 낳을 선택을 내릴 준비를 하면서, 먼저 몸에 배도록 익혀 두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이 한 가지는 그대가 하는 모든 일에 너무나 전형적인 반응의 습관이 되어, 모든 유혹과 일어나는 모든 상황에 대한 그대의 첫 반응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배우라, 그리고 잘 배우라. 바로 여기서 행복의 지연이 그대가 가늠할 수 없는 만큼의 시간만큼 단축되기 때문이다.

그대는 형제의 죄 때문에 그를 미워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그대 자신의 죄 때문에 그를 미워한다. 그의 죄가 어떤 형태를 띠는 것처럼 보이든, 그 형태는 다만 그대가 그 죄를 자신의 죄라고 믿으며 그래서 "정당한" 공격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긴다는 사실을 가릴 뿐이다.

그대 안에서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믿지 않았다면, 어찌하여 그의 죄가 죄여야 하겠는가? 그 죄들이 그대의 실재라고 믿지 않았다면, 어찌하여 그것들이 그 안에서 실재하겠는가? 그리고 어찌하여 그대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 말고는 그것들을 도처에서 공격하는가?

그대가 죄인가? 그대는 공격할 때마다 "그렇다"고 답한다. 공격함으로써 그대는 자신이 유죄이며 마땅한 만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 자신 말고 그대가 마땅히 받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대 자신이 공격받아 마땅하다고 믿지 않았다면, 누구에게든 공격을 가한다는 생각은 결코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하여 그래야 하는가? 그대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그대가 원할 만한 결과가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살인이 어떻게 그대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겠는가?

죄는 육체 안에 있다. 죄는 마음 안에서 지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인다. 육체는 행동하고, 마음은 행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육체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육체에 잘못이 있어야만 한다.

육체는 그대의 명령에 따르며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대가 죄라면 그대는 육체다. 마음은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적은 마음이 아니라 육체 안에 있어야만 한다. 육체는 스스로 행동하고 스스로 동기를 부여해야만 한다.

그대가 죄라면 그대는 마음을 육체 안에 가두고, 마음을 대신해 행동하는 그 감옥에 마음의 목적을 넘겨준다. 간수는 명령을 따르지 않고 죄수에게 명령을 강요한다. 그러나 죄수는 육체이지 마음이 아니다.

육체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것에는 배우거나 용서하거나 노예로 삼을 힘이 없다. 그것은 마음이 따라야 할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으며, 마음이 지켜야 할 어떤 조건도 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그 안에 머물고자 하는 기꺼운 마음을 가둘 뿐이다. 육체는 자신의 죄수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병든다. 그리고 그 마음이 그 자체로 병들어 있기에 육체는 늙고 죽는다.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오직 배움뿐이다. 그러므로 육체에는 아무 배움도 일어날 수 없다. 마음이 부여한 목적에 맞추어 육체의 겉모습이 바뀌기를 마음이 선호하지 않는 한, 육체는 결코 바뀔 수 없다. 마음은 배울 수 있고, 모든 변화는 거기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자신이 죄라고 생각하는 마음에는 오직 하나의 목적이 있다. 육체가 죄의 근원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선택하고 지키며 스스로를 가두어 둔 그 감옥 안에, 미움과 악, 병과 공격, 고통과 노화, 슬픔과 고난이라는 으르렁대는 개들 앞의 잠든 죄수로 자신을 붙들어 두는 것이다.

여기에 희생이라는 생각이 보존되어 있다. 여기서는 죄책감이 지배하며, 죄책감이 세상에게 자기 자신처럼 되라고 명령하기 때문이다. 그 세상은 그 무엇도 자비를 찾을 수 없고, 살인과 죽음 안에서가 아니고서는 두려움의 파괴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다.

여기서 그대는 죄가 되며, 죄는 기쁘고 자유로운 이들과 함께할 수 없다. 그들이 죄가 반드시 죽여야 할 적이기 때문이다. 죽음 안에서 죄는 보존되며, 자신이 죄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그것 때문에 죽어야만 한다.

그대가 자신이 믿는 것을 보게 되고, 그 믿는 바를 바꿀 수 있는 힘이 그대에게 주어졌음을 기뻐하자. 육체는 다만 따를 뿐이다. 그것은 결코 그대가 있고 싶지 않은 곳으로 그대를 이끌 수 없다. 그것은 그대의 잠을 지키지도, 그대의 깨어남을 방해하지도 않는다.

그대의 육체를 감금에서 풀어 주라. 그러면 그대는 그 누구도 그대가 벗어난 것의 죄수로 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선택한 적들을 죄책감 안에 가두어 두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며, 그대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이들을 변하는 사랑이라는 환상의 사슬에 묶어 두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결백한 이들은 자신이 풀려난 데 대한 감사 속에서 다른 이들을 풀어 준다. 그리고 이들이 보는 것은 감금과 죽음으로부터의 자신들의 자유를 떠받친다.

그대의 마음을 변화에 열라. 그러면 그대의 형제나 그대 자신에게서 치러지는 오래된 형벌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요구될 수 있는 희생이란 없으며, 치러질 수 있는 희생도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4) 선택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위안을 줄 수 있고, 이 세상이 유지하려는 바로 그 문제들로부터의 탈출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찌하여 그런가? 이 세상은 환상들 사이의 선택이 유일한 선택인 것처럼 보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는 자신이 선택한 결과를 통제하고 있다. 그래서 그대는 태어남에서 죽음에 이르는 그 좁은 띠 안에서, 오직 자신만을 위해 쓸 약간의 시간이 그대에게 주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대에게 그 시간은 모두가 그대와 부딪히는 시간이다. 그러나 그대는 갈등에서 벗어나 자신과 상관없는 어려움에서 멀어지게 해 줄 길을 고를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 문제들은 그대의 관심사다. 그렇다면 그 문제들을 뒤에 남겨 두고 떠난다고 해서 그대가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대와 함께 가야만 하는 것은, 그대가 어느 길을 걷기로 선택하든 그 길을 따라 그대와 함께 갈 것이다.

진짜 선택은 환상이 아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내놓을 것이 없다. 이 세상의 모든 길은 다만 실망과 허무와 죽음으로 이어질 뿐이다. 이 세상의 대안들 사이에는 선택이 없다. 여기서 문제로부터의 탈출을 구하지 말라. 이 세상은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이 세상의 길에 붙여진 온갖 다른 이름들에 속지 말라. 그 길들에는 오직 하나의 끝만이 있다. 그리고 각각은 다만 그 끝에 이르는 수단일 뿐이다. 그 길들이 아무리 다르게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든, 아무리 다르게 가는 것처럼 보이든, 결국 같은 곳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 끝은 확실하다. 그 길들 사이에는 선택이 없기 때문이다.

그 길들 모두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어떤 길에서는 황량함이 찾아오기 전 잠시 즐겁게 여행한다. 그리고 어떤 길에서는 곧바로 가시가 느껴진다. 선택은 끝이 무엇일지가 아니라 언제 오는지일 뿐이다. 모든 끝이 확실한 곳에는 선택이 없다.

어쩌면 그대는 그 길들이 다만 하나임을 정말로 배우기 전에 그 길들을 모두 시도해 보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이 세상이 내놓을 수 있는 길은 수가 상당히 많아 보이지만, 그 길들이 서로 얼마나 비슷한지를 모두가 보기 시작할 때가 반드시 온다.

사람들은 그 길들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보고 죽었다. 이 세상이 내놓는 길들 말고는 다른 길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들이 아무 데도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서 그들은 희망을 잃었다. 그러나 이때가 바로 그들이 가장 위대한 가르침을 배울 수 있었던 때였다.

모두가 이 지점에 이르러 이 지점을 넘어서야 한다. 이 세상 안에는 전혀 선택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그 가르침 자체는 아니다. 그 가르침에는 목적이 있으며, 이 가르침 안에서 그대는 그 가르침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이해하게 된다.

그 가르침이 시작되는 방식은 배웠지만 아직 무엇을 위한 것인지 지각하지 못했을 때, 그대는 어찌하여 또 다른 길, 또 다른 사람, 또 다른 장소를 시도하려 하겠는가? 그 목적은 여전히 찾아야 할 다른 답이 있다고 믿는 모든 이가 떠맡아야 할 탐색에 대한 답이다.

이제 절망하지 말고 배우라. 이 세상에는 답에 대한 아무 희망도 없다. 그러나 이것으로 겨우 시작된 그 가르침을 판단하지 말라. 또 다른 길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는 또 다른 이정표를 이 세상에서 찾지 말라. 더 이상 없는 곳에서 희망을 찾지 말라.

이제 그대의 배움을 굳게 하고, 그대가 배운 것을 넘어 아직 배워야 할 것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그저 시간을 낭비할 뿐임을 이해하라. 바로 이 가장 낮은 지점에서부터 배움은 그대를 행복의 높이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대는 그 가르침의 목적이 환히 빛나며 그대의 이해 안에 완전히 들어와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지닌 참된 헛됨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 모든 길에서 기꺼이 돌아설 자가 어디 있겠는가? 대신 다른 길을 찾기 위해서라도, 그대가 이것부터 시작해야 함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선택이 없는 곳에서 선택을 보는 동안, 그대가 무슨 결정의 힘을 쓸 수 있겠는가? 힘의 위대한 해방은 힘이 실제로 쓸모 있는 곳을 배우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선택이 없는 상황에 적용된다면 그 어떤 결정에 힘이 있겠는가?

이 세상이 그 형태가 무엇이든 오직 하나의 선택만을 내놓을 수 있음을 배우는 것이, 대신 진짜 대안이 있다는 받아들임의 시작이다.

이 단계, 곧 선택이 하나뿐임을 배우는 일에 맞서 싸우는 것은 여기서 그대의 목적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대는 이 세상이 담고 있지 않은 길을 찾는 법을 배우러 온 것이 아니다. 이 세상 안에서 다른 길들을 찾는 것은 다만 다른 형태의 진리를 찾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진리에 이르지 못하게 막을 것이다.

행복에서 벗어난 길을 따라가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는 말이 되지 않으며 그런 길일 수 없다. 이 과정을 배우기에 너무 어렵다고 여기는 그대에게 다시 한번 말하니, 목표를 이루려면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목표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모든 길은 찾아야 할 목적을 진전시키지 못할 것이다.

만약 이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면, 이 과정은 배우기 불가능한 것이 된다. 그러나 오직 그럴 때만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이는 자명한 것에 대한 단순한 가르침이다.

그대가 진짜 대안들을 보았을 때 그대에게는 내릴 힘이 있는 하나의 선택이 있다. 그 지점에 이르기 전까지 그대에게는 선택이 없으며, 그대는 다만 자신을 다시 속이는 더 나은 방법을 어떻게 선택할지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과정이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다만 결정의 힘이 여전히 같은 환상과 같은 실수의 다른 형태들 사이에서 선택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뿐이다.

5) 하나님은 떠난 적 없음

이 세상의 모든 선택은 다음에 달려 있다. 그대는 그대의 형제와 그대 자신 사이에서 선택하며, 그 형제가 잃는 만큼 그대는 얻을 것이고, 그대가 잃는 것은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와 얼마나 완전히 어긋나는가. 그 가르침의 목적 전체는 그대의 형제가 잃는 것을 그대도 잃었으며 그 형제가 얻는 것이 그대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가르치는 데 있는데도 말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각들을 떠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대는 그의 현존을 잊었고 그의 사랑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길도 하나님에게 이를 수 없으며, 이 세상의 그 어떤 목표도 그의 목표와 하나가 될 수 없다. 그 여정이 헛된 방황이 아니려면 반드시 지녀야 할 목적에서 그 여정을 떼어 놓기 위해 모든 길이 만들어졌다면, 이 세상의 어떤 길이 안으로 이어지겠는가? 그대인 것에서 멀어지는 모든 길은 그대를 혼란과 절망으로 이끌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생각들이 그 근원 없이 영원히 그 자체로 죽도록 결코 내버려 둔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생각들을 떠난 적이 없다! 그가 그 생각들에서 떠날 수 없는 것은 그 생각들이 그를 들어오지 못하게 막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것들은 그와 하나로 결합되어 있으며, 그 하나됨 안에서 둘 다 온전하게 지켜진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길은 없다. 그대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여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목표를 지닌 길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미친 일인가! 그런 길이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대 자신의 실재와 하나가 되지 않은 채 그 위를 걸어가도록 그대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겠는가?

그대의 광기를 용서하고, 무의미한 모든 여정과 목표 없는 모든 목적을 잊으라. 그 여정들과 목적들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대는 자신인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은 자비로우며 자신의 아들이 자신을 저버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감사하라. 그 안에 광기와 죽음으로부터의 그대의 탈출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있는 곳이 아니고서는 그대는 그 어디에서도 발견될 수 없다. 그에게로 이어지지 않는 길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