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유죄 아닌 결백의 가르침

1) 단순한 구원

구원은 얼마나 단순한가! 그것이 말하는 것은 다만 결코 참이었던 적이 없는 것은 지금도 참이 아니며 앞으로도 결코 참이 아닐 것이라는 것뿐이다. 불가능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아무 결과도 낳을 수 없다. 그것이 전부다.

이것이 참이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이 가르침이 배우기 어려울 수 있겠는가? 배우지 않으려는 마음만이 이토록 쉬운 가르침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거짓인 것은 참일 수 없고, 참인 것은 거짓일 수 없다는 것을 보기가 그토록 어려운가?

그대가 거짓과 참 사이의 차이를 지각하지 못한다고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다. 그대는 하나를 다른 하나로부터 정확히 구별하는 법과, 혼란스러워질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들어 왔다. 그렇다면 그대는 어찌하여 이토록 단순한 것들을 배우지 않으려고 계속 고집하는가?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 이유를 구원이 그대에게 배우라고 청하는 단순한 것들의 어려움과 혼동하지 말라. 구원은 다만 지극히 자명한 것을 가르칠 뿐이다. 그저 하나의 겉보기 가르침에서 다음 가르침으로, 아무 부담도 없이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부드럽게 이끄는 쉬운 걸음으로 나아갈 뿐이다.

이것은 혼란스러울 수가 없는데도 그대는 혼란스러워한다. 어쩐지 그대는 완전히 혼란스러운 것이 배우고 이해하기 더 쉽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대가 스스로에게 가르친 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울 만큼 엄청난 학습의 위업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을 원했기에 이루어 냈으며, 배우기 어렵다거나 파악하기에 너무 복잡하다고 판단하려고 그 근면함을 멈추지 않았다.

그대가 무엇을 배웠는지, 그것을 얼마나 세심하게 배웠는지, 그리고 그 가르침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온갖 형태로 끝없이 연습하고 되풀이하기 위해 그대가 겪은 수고를 이해하는 자라면, 그 누구도 그대의 학습 능력이 지닌 힘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큰 힘은 없다. 이 세상은 바로 그 힘으로 만들어졌고, 지금도 다른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그대가 스스로에게 가르친 가르침들은 너무나 지나치게 학습되고 고착된 나머지, 무거운 커튼처럼 솟아올라 단순하고 자명한 것을 가리고 있다.

그 가르침들을 배울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그대의 학습 능력은 그대의 뜻이 그대 자신의 것이 아니며, 그대의 생각이 그대에게 속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대 자신이 다른 누군가라는 것까지 그대에게 가르칠 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2) 두 가르침 두 세상

이런 가르침이 쉽다고 누가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대는 이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대는 그대에게 맞는 세상이 세워질 때까지, 아무리 어려워도 불평 없이 매 걸음을 계속 밟아 왔다.

그리고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가르침은 그 최초의 학습 성취에서 비롯된다. 그 성취의 거대함이 어찌나 큰지 성령의 음성마저 그 앞에서 작고 고요해 보일 정도다.

이 세상은 하나의 기이한 가르침으로 시작되었다. 그 가르침은 하나님을 잊게 하고 그의 아들을 자기 자신에게 낯선 존재로, 하나님 자신이 그를 세운 그 집에서 추방된 존재로 만들 만큼 강력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유죄라고 스스로에게 가르쳐 온 그대여, 구원이 그대에게 가르치는 그 단순한 것들을 배울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배움이란 그대가 만들어 스스로에게 준 하나의 능력이다. 배움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뜻에 맞설 수 있다는 바람과, 그 뜻과 별개인 뜻이 오히려 그 뜻보다 더 실재한다는 바람을 떠받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배움은 바로 이것을 증명하고자 해 왔고, 그대는 배움이 가르치도록 만들어진 것을 배워 왔다.

이제 그대의 오래된 과잉 학습은 진리의 음성 앞에 완강히 버티고 서서, 그 음성의 가르침이 참이 아니며 너무 배우기 어렵고 보기 어려우며 진짜 진리에 너무 맞선다고 그대에게 가르친다. 그러나 그대는 그 가르침들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 가르침들을 배우는 것이 성령이 온 세상에서 그대의 학습 능력에서 보는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용서에 대한 성령의 단순한 가르침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그대의 참자아로부터 그대에게 부르는 소리이기에 그대의 가르침보다 더 강력한 힘을 지닌다. 이 음성이 의미 없는 소음의 소란을 넘어설 수 없을 만큼 작고 고요한가?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이 자신을 잊기를 뜻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뜻이 지닌 힘은 그를 대변하는 그 음성 안에 있다.

그대는 어느 가르침을 배울 것인가? 하나님만큼이나 확실하고, 모든 의심과 물음을 훨씬 뛰어넘어 피할 수 없는 결과는 무엇인가? 결과에서 낯설고 어려움에서 믿기 힘든 그대의 하찮은 배움이, 시간이 시작되고 배움이 만들어진 이래 매일 매 순간 그대에게 가르쳐지고 있는 그 단순한 가르침들을 견뎌 낼 수 있겠는가?

배워야 할 가르침은 오직 둘뿐이다. 각각은 서로 다른 세상에서 그 결과를 맺는다. 그리고 각 세상은 반드시 그 근원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유죄라는 가르침의 확실한 결과는 그대가 보는 이 세상이다. 이 세상은 공포와 절망의 세상이다. 그 안에는 행복의 희망도 없다. 그대가 세울 수 있는 그 어떤 안전 계획도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대가 여기서 구하여 찾기를 바랄 수 있는 기쁨은 없다.

그러나 이것이 그대의 배움이 낳을 수 있는 유일한 결과는 아니다. 그대가 스스로 선택한 과업을 아무리 지나치게 학습했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비추는 가르침이 여전히 더 강하다. 그리고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이 결백함을 배우고, 또 다른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결백하다는 가르침의 결과는 두려움이 없고 모든 것이 희망으로 빛나며 부드러운 다정함으로 반짝이는 세상이다.

3) 더 깊은 부름 듣기

그대의 친구가 되어 그대와 결합하기를 부드럽게 호소하며 그대를 부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 부름이 이루어진 바로 그 언어로 들리지 않거나, 오해되거나, 응답받지 못한 채 남는 부름은 결코 없다. 그리고 그대는 이것이 이 세상 안의 모든 이와 모든 것이 언제나 해 온 부름이지만, 그대가 그 부름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지 못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대는 자신이 잘못 알고 있었음을 본다. 그대는 그 부름이 숨겨져 있던 형태에 속아 왔다. 그래서 그대는 그 부름을 듣지 못했고, 언제나 그대의 일부가 되기를 원했던 한 친구를 잃었다.

하나님의 창조의 각 부분이 전체를 향해 보내는 부드럽고 영원한 부름은, 이 두 번째 가르침이 가져오는 이 세상 곳곳에서 들린다. 자신이 온전해지기를, 그리고 그대가 자신의 부름을 듣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기를 바라는 그 보편적인 뜻을 함께 나누지 않는 살아 있는 존재는 하나도 없다.

그대의 응답이 없으면 그 부름은 죽도록 버려지지만, 그대가 그 부름을 생명을 향한 오래된 부름으로 듣고 그 부름이 곧 그대 자신의 부름임을 이해할 때 그 부름은 죽음에서 구원받는다.

그대 안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과 같은 확실함으로 하나님을 기억한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 결백할 때만 하나님은 사랑일 수 있다. 하나님이 결백하게 창조한 아들이 죄책감의 노예가 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참으로 두려움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아들은 자신의 창조를 기억한다. 그러나 죄책감 안에서 그는 자신이 실제로 무엇인지 잊어버렸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그의 아들이 유죄라는 가르침에서 확실히 생겨난다. 이는 아들이 자신의 결백을 배울 때 하나님의 사랑이 반드시 기억되는 것과 같다.

이는 미움이 반드시 두려움을 낳고, 그 아버지를 자기 자신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죽음을 향한 온갖 겉모습의 부름을 지나 메아리치는, 살인적인 온갖 공격 뒤에서 노래하며 사랑이 죽어 가는 이 세상을 회복시켜 달라고 애원하는 그 부름을 듣지 못하는 그대는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그대는 미움의 모든 형태 너머, 전쟁을 향한 모든 부름 너머에서 그대를 부르는 이가 누구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대는 그리스도가 부르는 그 언어로 그에게 응답할 때 그를 알아보게 될 것이다. 그대가 그에게 응답했을 때 그는 나타날 것이고, 그대는 그 안에서 하나님이 사랑임을 알게 될 것이다.

유혹이란 그대가 배우고자 하는 것에 대해 잘못된 결정을 내려, 원하지 않는 결과를 얻으려는 바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유혹이 원하지 않는 마음 상태임을 인식하는 것이 곧 그 선택을 다시 살펴보게 하는 수단이 되고, 더 선호할 만한 다른 결과가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대가 재난과 불화와 고통을 원한다고 믿는다면 그대는 속고 있는 것이다. 그대 안에서 이것을 향한 부름을 듣지 말라.

대신 그 너머의 더 깊은 부름, 곧 평화와 기쁨을 호소하는 그 부름에 귀 기울이라. 그러면 온 세상이 그대에게 기쁨과 평화를 줄 것이다. 그대가 그 부름을 듣는 대로 그대는 응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라! 그대의 응답이 그대가 배운 것의 증거다. 그 응답의 결과가 바로 그대가 바라보는 이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