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한 목적이 주는 안정
1) 요동치는 지각
하나님이 이 세상의 의미를 그대의 해석에 맡겨 두었겠는가? 만약 그랬다면, 이 세상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의미가 끊임없이 바뀌면서도 참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령은 이 세상을 변함없이 확립된 하나의 목적을 지닌 것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어떤 상황도 그 목표에 영향을 줄 수 없으며, 오히려 그 목표와 일치해야만 한다. 각 상황이 그대가 생각할 때마다 달라지는 해석에 열려 있으려면, 그 목표가 상황마다 바뀔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하루의 매 순간을 위해 쓰는 각본에 어떤 요소를 더하고, 그러면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른 무언가를 의미하게 된다. 그대는 또 다른 요소를 빼내고, 그러면 모든 의미가 그에 따라 바뀐다. 그대의 각본이 그날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대의 계획 말고 무엇을 반영하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그대는 재난과 성공을, 전진과 후퇴를, 이득과 손실을 판단한다. 이 판단들은 모두 그 각본이 정해 준 역할에 따라 내려진다.
이 딱지들은 경험의 다른 측면에서 내려진 다른 판단들과 함께 매우 쉽게 바뀐다. 이것이 이 판단들 자체에는 아무 의미도 없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대는 뒤돌아보면서, 이전에 있었던 일에서 또 다른 의미를 본다고 생각한다. 그대가 실제로 한 일이, 거기에 아무 의미도 없었음을 보여 준 것 말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그대는 바뀌는 목표에 비추어 의미를 부여했고, 그 목표가 바뀌는 대로 모든 의미도 함께 바뀌었다.
오직 변함없는 목적만이 사건들에 안정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은 그 모든 사건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해야만 한다. 만약 그 사건들에 서로 다른 의미가 주어진다면, 그것들은 서로 다른 목적을 반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들이 지닌 의미란 서로 다른 목적을 반영하는 것이 전부다. 이것이 의미일 수 있겠는가? 혼란이 의미가 뜻하는 바일 수 있겠는가?
지각은 끊임없이 요동치면서 어디에서도 의미의 안정성을 허락할 수 없다. 두려움은 결코 정당화되지 않는 판단이다.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그대가 두려운 각본을 썼고 그에 따라 두려워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 말고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러나 그대가 두려워하는 그것 자체에 두려운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다.
2) 희생이 끝나는 목적
지각을 안정시키고, 이 세상과 여기서의 모든 경험에 하나의 해석을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공통된 목적이다. 이 함께 나누는 목적 안에는 그대가 보는 모든 이와 모든 것이 함께 나누는 하나의 판단이 있다. 그대는 판단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것에 하나의 의미가 주어졌음을 배웠고, 그 의미를 어디서나 보게 되어 기쁘기 때문이다.
그 의미는 바뀔 수 없다. 그대가 상황과 무관하게 변함없이 그 의미를 어디서나 지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 의미를 모든 사건에 내어 주고, 그 사건들이 그대에게 안정을 내어 주게 한다.
판단으로부터의 벗어남은 단순히 이 한 가지에 있다. 곧 모든 것은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지니며, 그대가 그 목적을 온 세상과 함께 나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 그 무엇도 그 목적에 맞설 수 없다. 그 목적이 그대에게 속하듯 모든 것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목적 안에서 희생이라는 모든 관념은 끝난다. 희생이라는 관념은 얻는 자와 잃는 자에게 서로 다른 목적이 있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목적이 있다는 가정을 떠나서는 희생이라는 생각 자체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지각을 바뀌게 하고 의미를 변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서로 다른 목표라는 관념이다. 하나로 통합된 목표 안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해진다. 그대의 합의가 해석을 안정시키고 지속시키기 때문이다.
3) 하나의 해석자
사용되는 상징들이 저마다 다른 것을 의미하는데 소통이 어떻게 참으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성령의 목표는 그대와 그대의 형제 모두에게 의미 있는 하나의 해석을 준다. 이로써 그대는 그와, 그는 그대와 소통할 수 있다. 둘 다 이해할 수 있는 상징 안에서 의미의 희생은 되돌려진다.
모든 희생은 사건들 사이의 관계를 보는 그대의 능력을 잃는 것을 동반한다. 그리고 따로 떼어 놓고 보면 그 사건들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것들을 보고 이해할 수 있게 해 줄 빛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에는 목적이 없다. 그리고 그것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보일 수 없다.
상실에 대한 그 어떤 생각에도 의미는 없다. 아무도 상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대와 합의한 적이 없다. 그것은 왜곡된 각본의 일부이며, 의미 있게 해석될 수 없다. 그것은 영원히 이해될 수 없는 채로 남아야만 한다. 이것은 소통이 아니다. 그대의 어두운 꿈들은 다만 그대가 잠 속에서 쓴 무의미하고 고립된 각본일 뿐이다.
의미를 찾으려 따로 떨어진 꿈들을 바라보지 말라. 오직 용서의 꿈만이 함께 나뉠 수 있다. 그런 꿈은 그대들 둘 모두에게 같은 것을 의미한다.
홀로 떨어져서 해석하지 말라. 그대가 보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타내는 바는 계속 바뀔 것이고, 그대는 이 세상이 위험과 불확실함 속을 걷는 불안정한 곳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안정성이 부족한 것은 다름 아닌 그대의 해석들이다. 그 해석들이 그대가 실제로 무엇인지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안정성이 없는 상태는 두려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만큼 안전하지 않아 보인다.
나의 형제여, 이렇게 계속하지 말라. 우리에게는 하나의 해석자(성령)가 있다. 그리고 그 해석자가 쓰는 상징을 통해 우리는 결합되어 있으며, 그 상징들은 우리 모두에게 같은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공통된 언어는 우리 모든 형제에게 말할 수 있게 하며, 그들과 함께 우리 모두에게 용서가 주어졌음을 이해하게 한다. 이로써 우리는 다시 소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