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소통이 곧 창조

특정 에고 환영의 내용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 환영을 바로잡을 때는 구체적인 맥락 안에서 하는 편이 더 도움이 된다. 이는 분명하다.

에고의 환영은 매우 구체적이지만, 마음은 본래 추상적이다. 그러나 마음이 쪼개지면 마음의 일부는 구체적인 것이 된다. 구체적인 마음의 부분은 에고를 믿는다. 에고가 구체적인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에고는 그대의 존재가 분리에 의해 정의된다고 믿는 마음의 부분이다. 에고가 지각하는 모든 것은 분리된 하나의 전체일 뿐이며, 존재를 의미하는 관계가 없다.

따라서 에고는, 소통이 분리를 없애는 데가 아니라 분리를 확립하는 데 쓰이는 경우를 제외하면, 소통에 반대한다.

에고의 소통 체계는 에고가 지시하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에고 자신의 사고 체계에 기반한다. 에고의 소통은 자신을 보호해야 할 필요에 의해 통제되며, 위협을 경험할 때 에고는 소통을 방해할 것이다.

에고의 소통 방해는 특정한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에 대한 반응이다. 그러므로 에고의 사고는 구체적이어서 거짓된 일반화로 이어지며, 이 일반화는 실제로는 전혀 추상적이지 않다. 에고는 자신이 관련이 있다고 지각하는 모든 것에 그저 특정한 방식들로 반응할 뿐이다.

에고의 사고와 달리 영은 참되다고 아는 모든 것에 동일한 방식으로 반응하며, 그 밖의 어떤 것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또한 영은 무엇이 참된지를 확립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영은 참된 것이 곧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임을 안다. 영은 창조의 모든 측면과 완전하고 직접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자신의 창조주와 완전하고 직접적으로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의 소통이 곧 하나님의 뜻이다. 창조와 소통은 동의어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각 마음에 전함으로써 모든 마음을 창조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마음을 영원히 자신의 마음과 뜻을 받아들이는 통로로 세웠다.

같은 층위에 속한 존재만이 참으로 소통할 수 있으므로, 하나님의 창조물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소통하고 하나님처럼 소통한다.

하나님의 소통은 완전히 추상적이다. 그 성질이 적용에 있어 보편적이며, 그 어떤 판단이나 예외나 변경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소통에 의해, 그리고 이 소통을 위해 그대를 창조했다.

마음은 자신의 역할을 왜곡할 수는 있지만, 주어지지 않은 역할을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마음은 존재를 위해 소통 능력을 쓰기를 거부할 수는 있어도, 그 능력을 완전히 잃을 수는 없다.

실존함(Existence)뿐 아니라 존재함(Being)도 소통에 근거한다. 그러나 실존함(Existence)은 소통을 시도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방식과 대상과 상대에 있어 구체적이다. 존재함(Being)에는 이러한 구별이 전혀 없다. 존재함은 마음이 참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과 소통하고 있는 상태다.

그대가 존재함의 상태를 축소시키도록 허용하는 만큼, 그대는 자신이 실재한다는 감각을 제한하는 것이다. 실재한다는 감각은 오직 모든 실재를 그대와의 참된 관계라는 영광스러운 맥락 안에서 알아볼 때에만 온전해진다. 모든 실재를 아는 이것이 그대의 실재다. 그대의 실재를 더럽히거나 그대의 실재로부터 움츠러들지 말라. 그대의 실재는 그대의 참된 집이며, 그대의 참된 성전이며, 그대의 참된 자아다.

모든 존재함(Being)을 아우르는 하나님은, 저마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기쁨을 늘리기 위해 그것을 나누고 싶어 하는 존재들을 창조했다. 참으로 실재하는 것은 나눔을 통해서만 늘어날 수 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그대를 창조했다. 신성한 추상성은 나눔 속에서 기쁨을 얻는다. 나눔이 창조가 의미하는 바다.

"어떻게", "무엇을", "누구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참된 창조는 모든 것을 주기 때문이다. 참된 창조가 모든 것을 주는 것은, 창조가 오직 자신과 같은 것만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 안에는, 실존함(Existence) 안에서와 달리, 가지는 것과 존재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없음을 기억하라. 존재함의 상태 안에서 마음은 언제나 모든 것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