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언제나 정당한 용서
1) 공격에 근거가 없음
형제들이 결합하기 전까지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결합하여 목적을 함께 나누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뜻이 하나임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은 그들의 자각에 이르러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다름 아닌 자신들의 뜻임을 오래 잊을 수 없다.
분노는 결코 정당화되지 않는다. 공격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바로 여기서 두려움으로부터의 탈출이 시작되며, 이곳에서 완성될 것이다. 여기에 공포의 꿈 대신 주어지는 실재 세계가 있다. 바로 이것 위에 용서가 서 있으며, 다만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청해지는 것은 공격이 마땅하고 정당화될 만한 곳에서 용서를 베풀라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실제로 있는 것을 눈감아 줌으로써 죄를 용서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용서가 아니다. 정당화되지 않는 방식으로 응답하면서, 그대의 용서가 이미 저질러진 공격에 대한 답이 되리라고 가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용서는 마땅하지 않은 곳에 베풀어짐으로써 부적절한 것이 되어 버린다.
용서는 언제나 정당하다. 그것에는 확실한 근거가 있다. 그대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거나, 벌을 요구하는 실제 공격을 눈감아 주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실재하는 것에 어울리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응답을 하라고 청하는 데 있지 않다. 대신 구원은 다만, 일어나지 않은 것을 지각하지 않음으로써 실재하지 않는 것에 적절하게 응답하라고 청할 뿐이다.
용서가 정당하지 않다면, 그대는 공격에 용서로 되갚을 때 자신의 권리를 희생하라고 청해지는 셈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에게 청해지는 것은 다만 용서를, 오류 위에 놓여 있기에 도움을 청하는 고통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보라는 것뿐이다. 용서는 유일하게 온전한 응답이다. 그것은 그대의 권리가 희생되지 않게 지켜 준다.
이 이해야말로 공포의 꿈 대신 실재 세계가 떠오르게 하는 유일한 변화다. 공격이 정당화되지 않는 한 두려움은 일어날 수 없으며, 만약 공격에 실제 근거가 있다면 용서에는 아무 근거도 없을 것이다. 실재 세계는 그대가 용서의 근거가 참으로 실재하며 완전히 정당함을 지각할 때 이루어진다.
그대가 용서를 부당한 선물로 여기는 동안에는, 용서는 그대가 "용서하려는" 죄책감을 오히려 떠받쳐야만 한다. 정당화되지 않은 용서는 공격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전부다.
이 세상은 때로 "죄인"을 용서하지만, 여전히 그들이 죄를 지었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 죄인들은 이 세상이 베푸는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이 죄의식을 계속 살려 두기 위해 쓰는 거짓 용서다.
그리고 하나님이 공정하다는 것을 인식하면, 하나님의 용서가 실재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이렇게 하여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보는 것에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확실한 결과가 나온다. 자신을 죄인으로 보는 자는 그 누구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용서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은 이 딜레마에서 구원받는다.
마음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대로 자신의 창조주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대가 그대의 형제가 용서받을 자격이 있음을 볼 수 있다면, 그대는 용서가 그의 권리인 만큼 그대의 권리이기도 함을 배운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하나님이 그대의 형제가 받을 자격이 없는 두려운 심판을 그대에게 의도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그보다 더도 덜도 아닌 자격을 지녔다는 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자격이 있다고 인정된 용서는 치유한다. 용서는 기적에게 환상을 눈감아 줄 힘을 준다. 이것이 바로 그대 자신도 용서받아야만 함을 그대가 배우는 방식이다.
2) 부분 없는 용서
눈감아 줄 수 없는 겉모습이란 있을 수 없다. 만약 그런 겉모습이 있다면, 먼저 용서 너머에 서 있는 어떤 죄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단순한 실수보다 더한 오류, 곧 변하지 않고 영원하며 교정이나 벗어남을 넘어선 특별한 형태의 오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창조를 무효로 하고, 창조를 대신할 세상을 만들어 하나님의 뜻을 파괴할 힘을 지닌 하나의 실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오직 그런 실수가 가능할 때만 기적을 견뎌 내고 기적으로도 치유되지 않는 어떤 겉모습들이 있을 수 있다.
우상숭배가 그대의 바람임을 가장 확실히 증명하는 것은, 용서가 치유할 수 없는 어떤 형태의 병과 기쁨 없음이 있다는 믿음이다. 이는 그대가 몇몇 우상을 간직하기를 더 원하며, 아직은 모든 우상을 놓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여 그대는 몇몇 겉모습은 실재하며 전혀 겉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겉모습들은 다른 것들보다 지나쳐 보기가 더 어렵다는 고정된 믿음의 의미에 대해 속지 말라.
부분적인 용서는 언제나 그대가 용서는 한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대는 부분적인 용서와 죄책감으로부터의 제한된 탈출이라는 목표를 자신을 위해 세워 두었다. 이 목표가 그대 자신과, 그대와 별개로 보이는 모든 이에 대한 거짓 용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기적은 모든 형태의 병을 치유할 수 있거나, 아니면 아예 치유할 수 없거나 둘 중 하나여야만 한다. 그것의 목적이 어떤 형태가 실재이고 어떤 겉모습이 참인지를 판단하는 것일 수는 없다. 만약 어떤 하나의 겉모습이 치유에서 벗어나 있어야만 한다면, 하나의 환상이 진리의 일부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그대는 모든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고, 죄책감의 일부에서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을 완전히 용서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온전하지 않은 자신의 이미지를 간직하게 되고, 자기 안을 들여다보고 그곳의 모든 우상에서 벗어나기를 두려워하는 채로 남을 것이다. 구원은 그대가 용서할 수 없는 어떤 형태의 죄책감도 있을 수 없다는 믿음 위에 서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진리를 대신해 버린 겉모습이란 있을 수 없다.
그대의 형제를 있는 그대로 보려는 의지로 바라보라. 그리고 그가 치유되기를 바라는 그대의 의지 밖에 그의 일부를 남겨 두지 말라. 치유한다는 것은 온전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온전한 것은 밖에 남겨진 빠진 부분을 가질 수 없다.
용서는 이 사실을 인식하는 데, 그리고 기적이 치유할 힘을 갖지 못할 어떤 형태의 병도 있을 수 없음을 기뻐하는 데 서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완전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
3) 기쁜 선언
그리고 그대는 그대의 형제가 그 모든 결과와 형태 안에서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대가 자신에 대한 진리를 알고자 한다면, 그를 이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아버지, 당신의 완전한 아들에 대해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그의 영광 안에서 나는 나 자신의 영광을 보겠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을 이길 수 있는 어떤 형태의 악도 없다는 기쁜 선언이 있다. 그대가 환상을 실재로 만들려고 바랐지만 죄책감은 성공하지 못했다는 반가운 인정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진리에 대한 단순한 선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대 안에 이 희망을 품고 그대의 형제를 바라보라. 그러면 그대는 그가 자신 안의 진리를 바꿀 수 있는 오류를 만들어 낼 수 없었음을 이해할 것이다. 아무 결과도 낳지 않은 실수를 눈감아 주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을 우상으로 만들 힘이 있다고 그대가 보는 것을 그대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형제가 그대에게 새겨진 형상이자 죽음의 표징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대의 구원자인가?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가? 아니면 그대의 구원과 해방을 위해 그대에게 치유하도록 주어진 그를 두고 그대가 속아 온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