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변함없는 실재
1) 한계라는 우상
우상은 매우 구체적이다. 그러나 그대의 뜻은 보편적이며 무한하다. 그러므로 그대의 뜻은 형태가 없으며, 형태의 관점으로 표현할 내용도 없다.
우상은 한계다. 우상은 행복을 가져다줄 형태들이 있으며, 한정함으로써 모든 것을 얻는다는 믿음이다. 이는 마치 그대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나는 모든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이 작은 것을 원하며, 그것이 내게는 모든 것과 같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만족을 주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그대의 것이 되는 것이 바로 그대의 뜻이기 때문이다.
우상을 선택하면 그대는 상실을 청하는 것이다. 진리를 선택하면 모든 것이 그대의 것이 된다. 그대가 구하는 것은 형태가 아니다. 어떤 형태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어떤 형태가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 안에 있는 그 모든 사랑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어떤 우상이 하나인 것을 둘로 만들 수 있겠는가? 그리고 무한한 것이 한정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우상을 원하지 않는다. 우상을 갖는 것은 그대의 뜻이 아니다. 우상은 그대가 구하는 선물을 그대에게 주지 못할 것이다.
그대가 원하는 것의 형태를 정하는 순간, 그대는 그 목적에 대한 이해를 잃는다. 그러면 그대는 그 우상 안에서 자신의 뜻을 보게 되고, 그 뜻을 특정한 형태로 축소해 버린다. 그러나 그렇게 축소된 것은 결코 그대의 뜻일 수 없다. 모든 창조를 함께 나누는 것은 작은 관념이나 사소한 것들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상을 향한 모든 탐색의 이면에는 완성을 향한 갈망이 놓여 있다. 온전함은 무한하기에 형태가 없다. 자신을 완전하게 만들어 줄 특별한 사람이나 사물을 찾는 것은, 오직 어떤 형태가 빠져 있다고 믿는다는 뜻일 뿐이다. 그리고 그 특별한 사람이나 사물을 찾음으로써 그대는 자신이 좋아하는 형태로 완성을 이룰 것이다. 이것이 우상의 목적이다. 곧 그대가 우상 너머, 그대가 불완전하다는 믿음의 근원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대가 죄를 지었을 때만 그대가 불완전하다는 것이 사실일 수 있다. 죄란 그대가 혼자이며 온전한 것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관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전함을 향한 탐색은 그대 자신에게 지운 한계의 경계 너머에서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그대가 원하는 것은 결코 그 우상 자체가 아니다. 그러나 우상이 그대에게 준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그대가 진정으로 원하며 청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청하는 그것이 거부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온전해지고자 하는 그대의 뜻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뜻이며, 이는 그대가 하나님에게 속함으로써 그대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형태를 알지 못한다. 그는 아무 의미도 없는 말로 그대에게 답할 수 없다. 그리고 그대의 뜻은 존재하지도 않는 틈을 메우기 위해 만들어진 텅 빈 형태로는 만족될 수 없다.
그대가 원하는 것은 이런 텅 빈 형태가 아니다. 창조는 그 어떤 별개의 사람에게도, 별개의 사물에게도 하나님의 아들을 완성할 힘을 주지 않는다. 어떤 우상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그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줄 수 있다고 불려 나올 수 있겠는가?
완성은 하나님의 아들이 지닌 기능이다. 그는 완성을 구할 필요가 전혀 없다. 모든 우상 너머에는 다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고자 하는 그의 거룩한 뜻이 서 있다. 온전함보다 더한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 안에 변화가 있다면, 만약 그가 어떤 형태로 축소되고 그 자신 안에 없는 것으로 한정될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 창조한 그대로의 존재가 아닐 것이다.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그에게 어떤 우상이 필요하겠는가? 그가 자신의 일부를 내줄 수 있겠는가? 온전하지 않은 것은 온전하게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진정으로 청해진 것은 거부될 수 없다. 그대의 뜻은 허락된다. 그대를 만족시키지 못할 어떤 형태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대에 대해 품은 온전하고 완전히 사랑스러운 생각 안에서 허락된다.
하나님이 알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아는 것은 영원히, 변함없이 존재한다. 생각은 그것을 생각한 마음이 존재하는 한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 안에는 끝이 없으며, 그의 생각들이 부재했거나 변화를 겪을 수 있었던 때도 없다.
생각은 태어나지 않으며 죽을 수도 없다. 그것은 그 창조주의 속성을 함께 나누며, 그로부터 분리된 별개의 생명을 지니지 않는다. 그대가 하는 생각들이 그대의 마음 안에 있듯이, 그대는 그대를 생각한 그 마음 안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것에는 별개의 부분들이 없다. 그것은 영원히 하나이며, 영원토록 결합되어 평화롭다.
생각들은 오고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보이는 것은 다만 그대가 때로는 그 생각들을 자각하고 때로는 자각하지 못한다는 뜻일 뿐이다. 기억되지 않은 생각은 그대의 자각으로 돌아올 때 다시 그대에게 태어난다. 그러나 그대가 그 생각을 잊었을 때에도 그 생각이 죽은 것은 아니었다. 그 생각은 언제나 거기 있었지만, 그대가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하나님이 그대에 대해 품은 그 생각은 그대의 망각으로 인해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가 잊어버리기 전과 정확히 똑같을 것이며, 그대가 기억할 때도 똑같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가 잊고 있던 그 사이에도 똑같다. 하나님의 생각들은 모든 변화를 훨씬 뛰어넘으며 영원히 빛난다. 그것들은 태어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것들은 맞아들여지고 기억되기를 기다린다.
2) 변함없는 별
하나님이 그대에 대해 품은 그 생각은 영원한 하늘에 있는 변함없는 별과 같다. 그것은 천국 밖에 있는 이들이 별이 거기 있음을 알지 못할 만큼 천국 높이 자리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온 영원에 걸쳐 여전히 고요하고 희고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그것이 거기 없었던 때는 없었다. 그 빛이 조금이라도 흐려지거나 덜 완전했던 순간도 없었다.
아버지를 아는 이는 이 빛을 안다. 아버지는 이 빛을 안전하게 지키며 영원히 들어 올려 굳게 닻을 내리게 하는 영원한 하늘이기 때문이다. 그 완전한 순수함은 이 빛이 땅 위에서 보이는지 여부에 달려 있지 않다. 하늘은 그것을 품에 안고, 땅이 천국에서 떨어져 있는 만큼 먼 그 완전한 자리에 부드럽게 간직한다. 이 별을 땅에서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은 거리도 시간도 아니다.
그러나 우상을 구하는 이들은 그 별이 거기 있음을 알 수 없다. 모든 우상 너머에 하나님이 그대에 대해 품은 그 생각이 있다.
하나님이 그대에 대해 품은 그 생각은 이 세상의 혼란과 공포, 여기서 꾸는 탄생과 죽음의 꿈들, 두려움이 취할 수 있는 무수한 형태들에 조금도 영향받지 않은 채, 조금도 흔들림 없이 언제나 그랬던 그대로 남아 있다. 전투의 소리조차 조금도 가까이 다가오지 못할 만큼 완전한 고요에 둘러싸인 채, 그 생각은 확실함과 완전한 평화 속에 머문다.
여기에 그대의 유일한 실재가 안전하게 간직되어 있으며,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 온 세상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그 변함없음과 자신의 영원한 집에서의 안식에 대한 완전한 확신 속에서, 하나님이 그대에 대해 품은 그 생각은, 창조주가 자신이 거기 있음을 알듯이 자신도 그 창조주를 알며, 그 창조주의 마음을 결코 떠난 적이 없다.
하나님이 그대에 대해 품은 그 생각이 그대가 있는 곳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그대의 실재가 그대와 별개인 어떤 것이겠는가? 또 그대의 실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세상 안에 있는 것이겠는가? 그대 밖에는 영원한 하늘도, 변함없는 별도, 실재도 없다. 천국의 아들의 마음은 천국 안에 있다. 거기서 아버지의 마음과 아들의 마음이 끝날 수 없는 창조 안에서 결합했기 때문이다.
그대에게는 두 개의 실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실재만 있다. 그대는 하나 이상을 자각할 수 없다. 우상이든, 하나님이 그대에 대해 품은 그 생각이든, 둘 중 하나가 그대의 실재다.
그러므로 잊지 말라, 우상들은 그대가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가 아니라 바로 그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숨겨야만 한다는 것을. 별은 여전히 빛나고, 하늘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아들인 그대는 자신의 실재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3) 우상을 원하지 않기
그대는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을 공격할 것이고, 그럼으로써 그것을 자신이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언제나 환상과 싸운다. 그 이면의 진리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부드러움 속에 너무나 고요하여, 그대가 그 진리를 자각한다면 방어를 완전히 잊고 그 품으로 달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결코 공격받을 수 없다. 그리고 그대는 우상을 만들 때 진리가 공격받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우상은 바로 이 사실을 잊게 하려고 만들어졌다.
그대는 오직 거짓된 관념만을 공격할 뿐, 참된 관념은 결코 공격하지 않는다. 모든 우상은 그대 자신과 참된 것 사이에 생겨났다고 생각하는 틈을 메우려고 그대가 만든 거짓 관념이다. 그리고 그대는 우상들이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것들 때문에 우상들을 공격한다. 우상들 너머에 있는 것은 공격받을 수 없다.
그대가 만든, 사람을 지치게 하고 만족시키지 못하는 신들은 부풀려진 아이들의 장난감이다. 닫혀 있던 상자가 갑자기 열리며 나무 머리가 튀어나올 때, 또는 부드럽고 조용한 털인형 곰을 붙잡았는데 그것이 삑삑 소리를 낼 때, 아이는 깜짝 놀란다. 상자와 곰에 대해 그가 정해 놓은 규칙은 그를 저버렸고, 자신을 둘러싼 것에 대한 그의 "통제"를 깨뜨려 버렸다. 그리고 그는 두려워한다. 그 규칙이 자신을 지켜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아이는 상자와 곰이 자신을 속인 것도, 규칙을 깨뜨린 것도, 자신의 세상이 혼돈스럽고 안전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도 아님을 배워야 한다. 그가 잘못 알았을 뿐이다. 그는 무엇이 자신을 안전하게 하는지 오해했고, 그 안전함이 떠나 버렸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그 틈은 수많은 형태의 장난감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각각의 장난감은 그대가 정해 놓은 규칙을 깨뜨리는 것처럼 보인다. 장난감은 결코 그대가 생각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규칙이 잘못되었기에, 장난감은 안전을 위한 그대의 규칙을 깨뜨리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대는 위험에 처해 있지 않다. 장난감들이 자신에게 아무 위협도 되지 않음을 배운 아이처럼, 그대는 튀어나오는 머리와 삑삑거리는 장난감을 보고 웃을 수 있다.
그러나 아이는 장난감들과 놀기를 좋아하면서도, 여전히 그것들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정해 놓은 규칙을 따른다고 여긴다. 그래서 여전히 그것들이 깨뜨리는 것처럼 보여 그를 놀라게 할 수 있는 규칙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아이가 그 장난감들에 좌지우지되겠는가? 그것들이 그에게 위협이 될 수 있겠는가? 실재는 그대가 정한 규칙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칙을 따른다. 그대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바로 그의 법칙이다. 그대가 자신에 대해 믿는 모든 환상은 어떤 법칙도 따르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대가 정해 놓은 규칙에 따라 잠시 춤추는 듯 보인다. 그러나 곧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그 장난감들은 다만 장난감일 뿐이다, 나의 아이야, 그러니 그것들을 슬퍼하지 말라. 그것들의 춤은 결코 그대에게 기쁨을 준 적이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대를 두렵게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대의 규칙을 따랐다 해서 그대를 안전하게 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소중히 여겨져서도, 공격받아서도 안 되며, 다만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 장난감들 안에서 하나를 보면 그대는 그것들 모두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들 안에서 아무것도 보지 않으면 그것들은 그대를 조금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겉모습은 속인다. 실재가 아니라 겉모습이기 때문이다. 그 장난감들에 어떤 형태로도 머무르지 말라. 그것들은 다만 실재를 가릴 뿐이며, 진리를 감추기에 두려움을 가져온다.
그대가 속기 위해 만든 것을 공격하지 말라. 그렇게 하면 그대가 속아 왔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공격은 환상을 실재처럼 만드는 힘을 지닌다. 그러나 공격이 만드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조금의 실제 효과도 낼 수 없는 힘 때문에 두려워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힘이 사물을 자기 자신처럼 보이게 만드는 환상 말고 무엇일 수 있겠는가?
그 장난감들을 차분히 바라보고, 그것들이 다만 헛된 욕망에 맞추어 춤추는 우상임을 이해하라. 그것들에게 그대의 경배를 주지 말라. 그것들은 거기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격 안에서는 우상이 거기 없다는 사실도 똑같이 잊힌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의 꿈에 맞선 방어가 필요 없다. 그의 우상들은 그를 조금도 위협하지 못한다. 그의 유일한 잘못은 우상들을 실재라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환상의 힘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겉모습은 다만 속기를 원하는 마음을 속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대는 자신을 영원히 기만에서 훨씬 벗어난 곳에 두게 될 하나의 단순한 선택을 내릴 수 있다.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그대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 변화를 그대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아주 단순한 한 가지, 곧 우상이 준다고 믿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원하지 않기로 결정할 때, 강력한 변화가 신속히 일어났음을 그대는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이 우상에서 자유롭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써 그는 자유롭다.
4) 실재 세계로
구원은 참으로 하나의 역설이다! 그것이 행복한 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구원은 다만 아무도 저지른 적 없는 모든 일을 용서하라고 그대에게 청할 뿐이다. 곧 거기 없는 것을 눈감아 주고,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로 바라보지 말라는 것이다.
그대에게 청해지는 것은 다만 그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고, 더 이상 원하지 않는 것들을 구하지 않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대에게 청해지는 것은 자신이 결코 아니었던 것들에 대한 모든 꿈에서 자유로워지고, 헛된 소망의 힘을 하나님의 뜻의 대체물로 더 이상 구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분리의 꿈은 희미해지다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여기서 존재하지도 않는 그 틈은 그대가 만든 공포의 장난감들 없이 지각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이상은 청해지지 않는다. 구원이 많이 청하지 않고 이토록 적게만 청한다는 사실을 참으로 기뻐하라. 구원은 실재 안에서는 아무것도 청하지 않는다. 그리고 환상 안에서조차 구원은 다만 용서가 두려움의 대체물이 되기를 청할 뿐이다.
용서가 두려움을 대신하는 것, 이것이 행복한 꿈을 위한 유일한 규칙이다. 그 틈은 두려움의 장난감들에서 비워지고, 그러면 그 비실재성이 분명해진다.
꿈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은 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꿈은 그대가 결코 원할 만한 단 하나의 것도 그대에게 주지 못한다. 그대는 자신의 뜻으로 환상에서 풀려나며, 다만 자신인 그대로 회복될 뿐이다. 그대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그대를 그대 자신에게 돌려주는 수단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실재 세계란 이 세상의 유일한 목적이 용서로 보이는 마음의 상태다. 두려움은 그 목표가 아니다.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용서의 가치가 지각되어 우상들의 자리를 대신하며, 그것들은 더 이상 구해지지 않는다. 그것들의 "선물"이 더 이상 소중히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렇게나 규칙을 세우지 않으며, 두려움의 꿈에 맞추어 비틀어 끼워 넣으라고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창조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먼저 용서받은 다음에야 이해될 수 있음이 인식된다.
이 세상에서는 이해가 공격으로 얻어진다고 여겨진다. 실재 세계에서는 공격으로 인해 이해를 잃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죄책감을 목표로 추구하는 어리석음이 온전히 인식된다.
그리고 실재 세계에서는 우상이 원해지지 않는다. 죄책감이 어떤 형태로든 고통의 유일한 원인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 헛된 유혹에 이끌리지 않는다. 고통과 죽음이 원하지도, 애써 좇지도 않을 것으로 지각되기 때문이다.
자유의 가능성이 파악되고 받아들여졌으며,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법도 이제 이해될 수 있다. 이 세상은 희망의 자리가 된다. 그 유일한 목적이 행복의 희망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자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도 이 희망 밖에 서 있지 않다. 이 세상은 하나의 믿음 안에서 하나로 결합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 믿음이란, 희망이 한낱 꿈 이상의 것이 되려면 이 세상의 목적이 모두가 함께 나누어야 할 하나의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천국은 아직 온전히 기억되지 않는다. 용서의 목적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이가 자신이 용서를 넘어서리라는 것을 확신하며, 다만 용서가 자기 안에서 완전해질 때까지 머무를 뿐이다. 그 사람은 용서가 자기 안에서 완전해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두려움은 사라졌다. 그가 자신 안에서 자신의 목적과 하나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안에는 행복의 희망이 있다. 그 희망은 너무나 확실하고 한결같아서, 여전히 땅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조금 더 기다리기가 거의 힘들 정도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손이 함께 잡히고 모든 마음이 일어나 그와 함께 갈 준비가 될 때까지 기꺼이 기다린다. 그렇게 그는 모든 용서가 뒤에 남겨지는 마지막 걸음을 위해 준비된다.
마지막 걸음은 하나님의 것이다. 완전한 아들을 창조하고 자신의 아버지 됨을 그와 함께 나눌 수 있는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천국 밖의 그 누구도 하나님이 완전한 아들을 창조하고 자신의 아버지 됨을 그와 함께 나누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지 못한다.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하는 것이 곧 천국 자체이기 때문이다.
실재 세계조차 창조와 영원 아래 여전히 하나의 목적을 지닌다. 그러나 그 목적이 우상숭배가 아니라 용서이기에 두려움은 사라졌다. 이렇게 하여 천국의 아들은 자기 자신이 될 준비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가 이해하는 모든 것을 알며 아버지와 함께 완전하게 이해한다는 것을 기억할 준비가 된다.
실재 세계는 여전히 이 마지막 걸음에 미치지 못한다. 그 걸음은 하나님만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의 것이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함께 나뉘고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실재 세계란, 아직 지각되기는 하지만 더는 원해지지 않을 때 우상이 얼마나 쉽게 사라지는지를 마음이 배운 상태다. 또한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며 어디에도 없고 아무 목적도 없음을 이해했을 때, 마음이 얼마나 기꺼이 우상을 놓아 버릴 수 있는지도 배운 상태다. 그때에야 비로소 죄책감과 죄가 아무 목적도 없이, 무의미한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실재 세계의 목적은 죄와 죄책감이라는 목표를 대신하도록 부드럽게 자각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용서는 그대 자신의 모습에 대한 이미지와 그대가 실제로 무엇인지 사이에 가로놓여 있던 모든 것을 기쁘게 씻어 낸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의 것을 그에게 돌려주기 위해 그를 다시 창조할 필요가 없다. 그대의 형제와 그대 사이의 틈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창조 안에서 알았던 것을 그는 다시 알아야만 한다.
형제들이 두려움의 세상 안에서 목적으로 결합할 때, 그들은 이미 실재 세계의 경계에 서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여전히 뒤를 돌아보며 자신이 원하는 우상을 본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길은 우상에서 벗어나 실재를 향해 확실히 정해져 있다. 그들이 손을 맞잡았을 때 잡은 것은 그리스도의 손이었으며, 그들은 자신이 손을 잡고 있는 그 존재를 바라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얼굴은 아버지가 기억되기 전에 먼저 바라보인다. 아버지의 아들이 용서를 넘어 하나님의 사랑에 이를 때까지 아버지는 기억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먼저 받아들여진다. 그런 다음 아버지와 그리스도가 하나라는 앎이 찾아올 것이다.
자신이 누구의 손을 잡고 있는지 알아차렸을 때, 두려움의 세상이 지닌 좁은 경계를 건너는 걸음은 얼마나 가볍고 쉬운가! 그대의 손 안에는 두려움에서 영원히 벗어나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걸어가며, 곧장 나아가 천국의 문에 신속히 이르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 그대가 손을 잡고 있는 그 존재는 다만 그대가 자신과 결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대가 왔으니, 그리스도가 그대와 함께 걸어야 할 그 길을 그대에게 보여 주는 일을 늦추겠는가? 그의 축복은 그의 아버지의 사랑이 그에게 머물듯 확실하게 그대에게 놓여 있다. 그대를 향한 그의 감사는 그대의 이해를 넘어선다. 그대가 그를 사슬에서 일으켜 세워 그대와 함께,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갈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