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심판이라는 꿈
1) 더 많이 위한 우상
그렇다면 우상은 무슨 목적을 지니는가?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것이 여러 답을 지닌 유일한 질문이며, 그 답은 그 질문을 받는 자에 따라 저마다 다르다.
세상은 우상을 믿는다. 이곳에 오는 사람은 누구나 우상을 숭배했던 사람이며, 그러면서도 여전히 실재가 담고 있지 않은 선물을 자신에게 줄 만한 우상을 찾으려 한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마다 자신의 특별한 신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자신에게 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그 선물은 반드시 더 많아야 한다.
무엇이 더 많은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더 많은 아름다움, 더 많은 지성, 더 많은 부, 심지어 더 많은 고통과 더 많은 아픔이라도 상관없다.
그러나 우상은 무언가를 더 많이 얻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가 실패하면 다른 하나가 그 자리를 대신하며, 또 다른 무언가를 더 많이 찾으려는 희망을 품는다.
그 '무언가'가 취하는 형태에 속지 말라. 우상은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더 많이 얻으려는 바로 이 일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 하나님에게는 많은 아들이 있지 않고, 오직 하나뿐이다.
누가 더 많이 가질 수 있고, 누가 더 적게 받을 수 있겠는가? 성령이 말하는 것은 바로 하나뿐인 그 아들을 위해서이며, 성령은 그대에게 우상이 여기서는 아무 목적도 없다고 말한다.
그대는 결코 천국보다 더한 것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천국이 내면에 있다면, 하나님이 그대의 형제와 그대에게, 하나님과 하나인 존재로서 베푼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대에게 주려고, 천국을 줄어들게 할 우상을 어째서 찾겠는가?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대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대가 그것을 결코 잃지 않도록, 그는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도 똑같은 것을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 자신의 일부이듯 그대의 일부이기도 하다. 어떤 우상도 그대를 하나님보다 더한 존재로 세울 수 없다.
그러나 그대는 결코 하나님보다 덜한 존재로 있는 데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우상의 노예는 자발적인 노예다. 생명 없는 것 앞에 스스로 엎드려 숭배하고, 힘없는 것 안에서 힘을 구하도록 스스로를 내맡기려면 반드시 자발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스스로 땅 위의 돌보다 낮게 떨어져 우상들이 자신을 일으켜 세워 주기를 바라보는 일이 그의 소망이 될 수 있었는가?
2) 심판하지 말라
그렇다면 그대가 만든 그 꿈 속에서 그대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라. 그리고 그 꿈이 꿈이 아니라고 그대가 믿는 것이 진실이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으라.
하나님이 자신처럼 완전하게 창조한 그 마음 안으로 심판의 꿈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꿈 안에서 천국은 지옥으로 바뀌었고,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의 적으로 만들어졌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그 꿈에서 깨어날 수 있는가? 그 꿈은 심판의 꿈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은 심판하지 말아야 하며, 그러면 그는 깨어날 것이다.
그가 그 꿈의 일부인 동안에는 그 꿈이 계속되는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심판하지 말라.
심판하는 자는 우상을 필요로 할 것이며, 그 우상들이 심판이 자신에게 내려앉지 못하게 막아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또한 자신이 단죄한 그 참나(Self)를 알 수 없다.
심판하지 말라. 그대가 자신을 악한 꿈들의 일부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 악한 꿈들 안에서 우상들은 그대의 '참' 정체성이며, 공포와 죄책감 속에서 자신에게 내려진 심판으로부터 그대를 구원하는 것이다. 꿈속의 모든 등장인물은 그 꿈으로부터 그대를 구원하도록 만들어진 우상들이다.
그러나 이 우상들은 자신이 그대를 구원하도록 만들어진 바로 그 꿈의 일부다. 그렇게 우상은 그 꿈을 살아 있고 두려운 것으로 유지한다.
공포와 절망 속에 있지 않고서야 누가 우상을 바라겠는가? 그리고 우상이 나타내는 것은 바로 이 공포와 절망이며, 그래서 우상 숭배는 절망과 공포에 대한 숭배이자, 그것들이 나오는 그 꿈에 대한 숭배다.
심판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가해지는 불의이며, 그를 심판하는 자가 자신이 만든 그 꿈 안에서 스스로에게 내린 형벌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정의다. 하나님은 정의를 알 뿐, 형벌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심판의 꿈 안에서 그대는 공격하고 단죄받으며, 우상의 노예가 되기를 바란다. 그 우상들은 그대의 심판과 그것이 가져오는 형벌 사이에 끼어들어 있다.
그대가 지금 꾸고 있는 그대로의 그 꿈 안에는 어떤 구원도 있을 수 없다. 우상들이 반드시 그 꿈의 일부여야 하기 때문이다.
우상들이 그 꿈의 일부여야 하는 것은, 그대가 자신이 이루었다고 믿는 일, 곧 자신을 죄 있게 만들고 자신 안의 빛을 꺼뜨렸다고 믿는 그 일로부터 그대를 구원하기 위해서다.
3) 아이의 장난감
어린아이여, 빛은 거기에 있다. 그대는 다만 꿈을 꿀 뿐이며, 우상은 그대가 자신과 함께 논다고 꿈꾸는 장난감들이다. 아이들 말고 누가 장난감을 필요로 하겠는가? 아이들은 자신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가장하며, 자신의 장난감에게 움직이고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자신을 대신해 말할 힘을 부여한다. 그러나 그들의 장난감이 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일은 그것들과 노는 자들의 마음속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신이 그 꿈을 만들었다는 것, 그 안에서 자신의 장난감이 실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고 싶어 한다. 자신의 소망이 자신의 것임도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악몽은 유치한 꿈이다.
장난감들이, 자기가 그것들을 실재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 그 아이에게 등을 돌린다. 그러나 꿈이 공격할 수 있는가?
아니면 장난감이 크고 위험하고 사납고 거칠게 자랄 수 있는가? 아이는 그렇다고 믿는다.
아이가 그렇게 믿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두려워하여 대신 그것들을 장난감에게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난감들의 실재성이 자신의 것이 된다.
장난감들이 자신을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구해 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난감들은 아이의 생각을 살아 있고 실재하는 것으로 유지하되, 그 생각이 아이 밖에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면 그 생각은 아이가 그 생각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등을 돌릴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생각들이 실재한다고 생각하기에, 그 생각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무엇이든 장난감으로 만들어, 자신의 세상을 자신 밖에 남겨 두고, 자신이 다만 세상의 일부인 척 논다.
어린 시절이 지나가 영원히 사라져야 할 때가 있다. 아이들의 장난감을 붙들어 두려 하지 말라.
장난감들을 모두 치워 버리라. 그대는 더 이상 그것들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심판의 꿈은 아이들의 게임이며, 그 안에서 아이는 힘 있는 아버지가 되지만 아이의 작은 지혜만을 지닌다. 그를 아프게 하는 것은 파괴되고, 그를 돕는 것은 축복받는다.
다만 그는 무엇이 아프게 하고 무엇이 낫게 할지 알지 못하는 아이처럼 이 둘을 판단한다. 그리고 나쁜 일들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고, 그는 자신이 만든 법칙이 다스린다고 생각하는 세상 속의 온갖 혼돈을 두려워한다.
4) 용서하는 꿈
그러나 실재 세계는 아이가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법칙들이 바뀐 것도 아니다.
실재 세계는 여전히 하나의 꿈일 뿐이다. 다만 그 등장인물들이 바뀌었을 뿐이다.
등장인물들은 배신하는 우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꿈에서는 아무도 다른 무언가의 대용으로 쓰이지 않고, 마음이 품는 생각과 마음이 보는 것 사이에 끼워지지도 않는다.
아무도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쓰이지 않는다. 유치한 것들이 모두 치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때 심판의 꿈이었던 것이 이제 모든 것이 기쁨인 꿈으로 바뀌었다. 기쁨이 이제 그 꿈이 지닌 목적이기 때문이다.
오직 용서하는 꿈들만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다. 시간이 거의 끝나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꿈 안으로 들어오는 형상들은 이제 심판 속에서가 아니라 사랑 속에서 형제로 지각된다. 용서하는 꿈들은 오래 지속될 필요가 거의 없다.
용서하는 꿈들은 마음을 그 생각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 꿈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꾸어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꿈들 안에서는, 모든 시간이 시작되기 전부터 들어 본 적이 없음에도 모두가 기억하는 어떤 선율이 들린다. 용서는, 온전히 이루어지면, 무시간성을 아주 가까이 가져와 천국의 노래가 들리게 한다.
그 노래는 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안 깊은 곳에서 영원히 머무는 그 제단을 결코 떠난 적 없는 거룩함으로 들린다. 그리고 그가 다시 이 노래를 들을 때, 그는 자신이 이 노래를 늘 들어 왔음을 안다.
심판의 꿈들이 치워졌을 때, 시간은 어디에 있는가? 그대가 어떤 형태로든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그대가 우상 하나를 만들었으며 그것이 그대를 배신하리라고 믿고 있음을 확신하라. 깊은 만족과, 도움에 대한 확신과, 천국이 그대와 함께한다는 고요한 확신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대는 두려운 것이다.
그 우상이 자신을 구해 줄 것이라는 그대의 희망 아래에는 자기 배신의 죄책감과 고통, 그리고 불확실함이 놓여 있다. 이 모두가 너무나 깊고 쓰라려서 그 꿈은 그대의 파멸의 예감을 완전히 감추지 못한다. 그대의 자기 배신은 반드시 두려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두려움이 곧 심판이며, 우상과 죽음을 미친 듯이 찾아 헤매는 데로 확실히 이어지기 때문이다. 용서하는 꿈들은 그대가 안전 속에 살고 있으며 자기 자신을 공격하지 않았음을 그대에게 일깨운다.
그렇게 그대의 유치한 공포들이 녹아 사라지고, 꿈들은 그대가 우상을 숭배하고 공격을 지속하려는 또 다른 시도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이루었다는 표시가 된다. 용서하는 꿈들은 그 꿈에 등장하는 모든 이에게 친절하다.
그래서 용서하는 꿈들은 꿈꾸는 자에게 두려움의 꿈들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가져다준다. 그는 자신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가 아무도 심판하지 않았고, 심판이 부과할 수밖에 없는 그것으로부터 심판을 통해 벗어나려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는 내내 그는, 심판이 자신을 그 형벌로부터 구해 줄 방법처럼 보였을 때 잊어버렸던 것을 기억해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