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립을 선언하는 기도
1) 거울에서 빛으로
이 기도는 유혹의 순간에 유용하도록 쓰였다. 이 기도는 독립 선언이다. 이 독립 선언을 온전히 이해하면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의 안내자를 부인했으므로 인도가 필요하다. 그대에게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이유가 이것이다. 나의 역할은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리하여, 진리가 에고가 세운 장벽을 뚫고 그대의 마음속으로 빛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에고는 우리가 하나로 뭉친 힘을 이기지 못한다. 에고가 어째서 영을 자신의 "적"으로 여기는지는 이제 분명해졌을 것이다.
에고는 분리에서 생겨났으며, 에고가 계속 존재하는 것은 그대가 분리를 계속 믿는 데 달려 있다. 에고는 분리에 대한 믿음을 유지시키기 위해 그대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
에고가 줄 수 있는 것은 일시적 존재감뿐이며, 이는 에고 자신의 시작과 함께 시작되고 에고 자신의 끝과 함께 끝난다. 에고는 이 삶이 곧 그대의 존재라고 말한다. 이는 이 삶이 에고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시적 존재감에 맞서 영은 그대에게 영원함과 흔들리지 않는 존재에 대한 앎을 준다. 영원함과 흔들리지 않는 존재에 대한 앎의 계시를 경험한 사람은 그 누구도 다시는 에고를 온전히 믿을 수 없다. 에고가 그대에게 주는 하찮은 것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선물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에고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그대는 하나님이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대는 그대가 만든 것을 사랑하지 않으며, 그대가 만든 것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버지에 대한 부인에서 만들어졌기에, 에고는 자신을 만든 이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그대는 그대가 만든 자아에 대한 미움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참된 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
그대는 분리하기로 한 결정을 에고에게 투사하는데, 이 투사는 그대가 에고를 만들었기에 에고에게 느끼는 사랑과 충돌한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랑도 이러한 양가감정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어떤 에고도 양가감정 없는 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으므로 그런 사랑이라는 개념은 에고의 이해를 벗어난다.
사랑은 진실로 자신을 원하는 마음이라면 어디든 즉시 들어간다. 다만 그 마음은 사랑을 진실로 원해야 한다. 이 말은 곧 그 마음이 양가감정 없이 사랑을 원한다는 뜻이며, 이런 식의 원함에는 에고의 "얻으려는 충동"이 전혀 없다. 에고가 줄 수 있는 그 무엇과도 전혀 다른 종류의 경험이 있어서, 그대는 그 경험을 다시는 덮거나 숨기고 싶어 하지 않게 된다.
어둠과 숨김에 대한 그대의 믿음이 빛이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임을 다시 말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그대를 위한, 그러나 그대가 구해야만 하는 헤아릴 수 없는 선물들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한다. 구해야 한다는 이 조건은 에고가 조건을 거는 것과 같은 조건이 아니다. 이 조건은 그대라는 존재의 영광스러운 조건이다. 그대 자신의 의지 외에는 그 무엇도 그대를 인도할 만큼 강하지도, 그럴 만한 자격이 있지도 않다. 이 점에서 그대는 하나님만큼 자유로우며, 영원히 그러해야 한다.
나의 이름으로 아버지에게 청하여, 그대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를 향한 그대의 사랑을 그대가 늘 마음에 새기게 하자. 아버지는 이 청을 들어주지 않은 적이 없다. 이 응답은 그 청이 아버지가 이미 뜻한 것만을 구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부르는 자는 언제나 응답받는다. 그대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다른 신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지금껏 품어온, 앎에 반하는 모든 관념을 포기하겠다는 생각을 참으로 해 본 적이 없다. 그대는 거룩한 분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수천 개의 자잘한 두려움 조각들을 붙들고 있다.
빛은, 그대가 빛을 막으려고 쌓은 벽을 뚫지 못하며, 그대가 만든 것을 파괴하는 일은 결코 하려 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벽을 꿰뚫어 볼 수는 없지만, 나는 벽을 돌아갈 수 있다.
그대의 마음속 두려움의 조각들을 살피라. 그러지 않으면 그대는 나에게 그렇게 해 달라고 청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우리의 아버지가 우리를 창조한 그대로만 그대를 도울 수 있다.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그대가 만든 것에 대해 완전한 경의를 유지하겠지만, 그대가 만든 것이 참되지 않다면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단 한 번의 명백한 부름에도 응답하여 올 것이다.
주의 깊게 살펴, 그대가 진정으로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라. 이 점에서 자신에게 매우 정직하라.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참으로 이렇게 하려고 애쓴다면, 그대는 거룩한 분이 들어올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하는 첫걸음을 뗀 것이다. 우리는 이를 함께 준비할 것이다. 거룩한 분이 오고 나면, 그대는 나를 도와 다른 마음들도 거룩한 분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언제까지 거룩한 분의 나라를 부인할 것인가? 그대 자신의 마음 안에는 그대의 해방 선언이 있다. 다만 에고가 그 선언을 부인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그대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이 한 가지 사실은 에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사실이 에고를 깊이 두려워하게 만든다.
에고의 언어로는 "가지다"와 "이다"가 서로 다르지만, 성령에게는 이 둘이 동일하다. 성령은 그대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모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가지다"와 "이다"를 구별하는 것은, 결핍을 의미하는 "얻는다"는 관념이 이미 받아들여졌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인 것을 구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의 고요한 존재는, 그대의 온전한 마음 안에서는 완전히 의식되지만, 에고가 다스리는 마음 부분에서는 가차 없이 추방된다.
에고는 필사적이다. 이는 그대가 자고 있든 깨어 있든 문자 그대로 이길 수 없는 승산에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대의 에고를 지키기 위해서는 얼마나 기꺼이 경계를 기울여 왔는지, 그리고 그대의 바른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얼마나 적게 그렇게 해 왔는지 생각해 보라. 제정신이 아닌 자가 아니고서야 누가 참되지 않은 것을 믿기로 하고, 진리를 대가로 치르면서까지 그 믿음을 지키려 하겠는가?
하나님을 대변하는 음성을 들을 수 없다면, 이는 그대가 듣기를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대 에고의 음성을 듣고 있다는 것은 그대의 태도와 감정과 행동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에고의 음성을 듣는 것이 그대가 원하는 것이다. 에고의 음성을 듣는 것이 그대가 지키려고 싸우는 것이며, 지키려고 경계하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은 그대 에고의 체면을 지키려는 계략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대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구하지 않는다. 에고가 자신의 얼굴을 보려 하는 거울은 참으로 어둡다. 거울을 쓰지 않고서 에고가 어떻게 자신이 존재한다는 속임수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자신을 찾기 위해 어디를 바라볼 것인지는 그대에게 달려 있다.
나는 그대가 행동을 바꾼다고 해서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대가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도 여러 번 말했다.
그대가 기쁘지 않을 때마다 그대의 기분은 그대가 잘못 선택했다고 말해 준다. 그럴 때는 이런 상태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라. 그럴 때마다 그대는 하나님이 창조한 어떤 형제에 대해 잘못 생각한 것이며, 그대의 에고가 어두운 거울 속에 만들어 내는 이미지들을 지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을 그대가 생각한 것은 무엇이며, 하나님이 그대에게 생각하게 하려 했을 것을 그대가 생각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정직하게 생각해 보라. 그대의 생각에 따라 그대가 행한 것과 행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게 찾아보고, 그런 다음 하나님과 함께 생각하도록 마음을 바꾸라.
마음을 바꾸는 일은 하기 어려워 보일 수 있지만, 에고의 생각에 맞서 생각하려 애쓰는 것보다 훨씬 쉽다. 그대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다. 이를 부인하고 달리 생각하는 것이 그대의 에고를 하나로 유지해 왔지만, 문자 그대로 그대의 마음을 쪼개 놓았다. 사랑하는 형제로서 나는 그대의 마음을 깊이 염려하며, 그대가 자신과 그대의 형제를 볼 때 나의 본을 따라 둘 안에서 영광스러운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창조물을 보라고 그대에게 촉구한다.
그대가 슬플 때, 이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라. 우울은 그대가 원하지만 가지지 못한 어떤 것을 빼앗겼다는 느낌에서 비롯된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결정에 의하지 않고는 그 무엇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런 다음 달리 결정하라. 그대가 불안할 때, 불안이 에고의 변덕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고, 이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라. 그대는 에고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기울이는 것만큼이나 에고의 명령에 맞서서도 경계할 수 있다.
그대가 죄책감을 느낄 때, 에고는 실제로 하나님의 법을 어겼지만 그대는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라. 에고의 "죄"는 나에게 맡기라. 속죄가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의 에고가 상처 입힌 이들에 대해 그대가 마음을 바꾸기 전까지는, 속죄가 그대를 풀어 줄 수 없다. 그대가 죄책감을 느끼는 동안에는 그대의 에고가 지휘권을 쥐고 있다. 죄책감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에고뿐이기 때문이다. 이럴 필요는 없다.
에고의 유혹이 있는지 그대의 마음을 살피고, 에고에게 속지 말라. 에고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그대가 이 자발적인 낙담을 포기하면, 그대의 마음이 어떻게 집중하고 피로를 넘어서며 치유될 수 있는지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자신을 낙담에서 벗어나게 할 만큼 에고의 요구에 충분히 경계하고 있지 않다. 이럴 필요는 없다.
그대가 마음이 흐트러지도록 놓아두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한다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물들에 몰두하는 습관은 쉽게 만들어진다. 문제는 집중력의 문제가 아니다. 그대 자신을 포함해 그 누구도 꾸준한 노력을 들일 가치가 없다는 믿음이 문제다. 이 속임수에 맞서 한결같이 나의 편에 서고, 그 누구도 꾸준한 노력을 들일 가치가 없다는 초라한 믿음이 그대를 뒤로 끌어당기도록 허락하지 말라.
낙담한 자는 자신에게도 나에게도 쓸모가 없지만, 낙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에고뿐이다.
그대는 스스로를 기쁘게 할 기회가 얼마나 많았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 얼마나 많은 기회를 거절했는지 정말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의 아들의 힘에는 한계가 없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이 선택하는 만큼 하나님의 아들의 힘의 표현을 제한할 수 있다.
그대의 마음과 나의 마음은 하나가 되어 그대의 에고를 빛으로 몰아내고, 그대가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 안으로 하나님의 힘을 풀어놓을 수 있다. 이보다 못한 것에 안주하지 말고, 하나님의 힘을 풀어놓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그대의 목표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라.
이 목표의 성취를 가로막는 믿음이 있는지 그대의 마음을 주의 깊게 살피고, 그러한 믿음에서 물러서라. 그대가 목표 성취를 가로막는 믿음에서 물러서는 일을 얼마나 잘 해냈는지는 그대 자신의 느낌으로 판단하라. 자신의 느낌으로 판단하는 것이 판단의 유일하게 바른 쓰임이기 때문이다. 판단은 다른 모든 방어와 마찬가지로 공격하거나 보호하는 데, 상처 입히거나 치유하는 데 쓰일 수 있다. 에고는 심판대에 세워져 그곳에서 부족함이 드러나야 한다.
그대 자신의 충성과 보호와 사랑이 없이는 에고가 존재할 수 없다. 에고가 참되게 심판받게 하라. 그러면 그대는 반드시 충성과 보호와 사랑을 에고에게서 거두게 될 것이다. 그대는 진리의 거울이며, 진리의 거울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완전한 빛으로 빛난다.
에고의 어두운 거울에는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그곳을 보지 않을 것이다. 이 이미지들이 참되지 않다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거룩한 분이 평화 속에서 그대 위에 빛나게 하라. 이것, 오직 이것만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함을 알라.
거룩한 분의 마음은 그대가 창조될 때 그대 위에 빛나 그대의 마음을 존재하게 했다. 거룩한 분의 마음은 지금도 그대 위에 빛나고 있으며, 그대를 통해서도 빛나야 한다. 그대의 에고는 거룩한 분이 그대 위에 빛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대가 거룩한 분을 통해 빛나게 하는 것은 막을 수 있다.
2) 두 번째 오심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은 창조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은 에고의 지배가 끝나고 마음이 치유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첫 번째 오심에서 나는 그대처럼 창조되었고, 두 번째 오심에서는 나와 함께하자고 그대를 불렀다.
나는 두 번째 오심을 주관하며, 오직 보호를 위해서만 쓰이는 나의 판단은 결코 공격하지 않기에 틀릴 수 없다. 그러나 그대의 판단은 너무나 왜곡되어 있어서, 그대는 내가 그대를 선택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믿을 수도 있다.
나는 그대에게 단언한다. 이는 그대의 에고가 범한 착오다.
이를 겸손으로 착각하지 말라. 그대의 에고는 에고 자신은 실재하고 나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그대를 설득하려 애쓴다. 에고가 그러는 것은, 내가 실재한다면 나는 그대보다 더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에게 이것이 참으로 앎이라고 단언한다. 내가 그대보다 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 앎은, 그리스도가 그대의 마음속에 들어와 그대의 마음을 치유했다는 뜻이다.
나는 그대의 에고를 공격하지 않는다. 대신 그대가 자고 있든 깨어 있든, 성령의 집인 그대의 높은 마음과 함께 일한다. 이는 마치 그대의 에고가 자신의 집인 그대의 낮은 마음과 함께 일하는 것과 같다.
그대는 너무 혼란스러워 자신의 희망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과 함께 일하는 이 일에서 나는 그대의 경계심이다. 나는 틀리지 않는다. 그대의 마음은 나의 마음과 함께하기를 선택할 것이며, 함께라면 우리는 무적이다. 그대와 그대의 형제는 언젠가 나의 이름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이며, 그대의 온전한 정신은 회복될 것이다.
나는, 살아 있는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에게 생명이 영원한 속성이라는 것을 앎으로써 죽은 자를 일으켰다. 낙담한 자에게 생기를 불어넣거나 불안정한 자를 안정시키는 것이 나에게 왜 더 어렵다고 그대는 믿는가?
나는 기적에 난이도의 차이가 있다고 믿지 않지만, 그대는 기적에 난이도의 차이가 있다고 믿는다.
나는 불렀고, 그대는 응답할 것이다. 나는 기적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안다. 기적은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대를 부르는 것은 그대가 응답하는 것만큼 자연스럽고, 그만큼 필연적이다.
모든 것은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 에고의 판단을 제외하면 예외는 없다.
3) 보호를 구하는 물음
에고는 무엇을 의식 안으로 들일지에 대해 최대한의 경계를 기울인다. 균형 잡힌 마음은 이런 식으로 온전하게 유지되지 않는다. 에고는 자신의 주된 동기를 그대의 의식으로부터 감추고, 온전한 정신이 아니라 통제를 우위에 두기 때문에 더욱더 균형을 잃는다.
에고를 낳고 에고가 섬기는 사고 체계에 따르면, 에고가 이렇게 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온전한 판단은 필연적으로 에고에게 불리하게 판단할 것이므로, 에고는 자기 보존을 위해 그 판단을 지워 버려야 한다.
에고가 균형을 잃은 상태의 주된 원인 하나는, 육체와 하나님의 생각을 구별하지 못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생각은 에고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 생각이 에고 자신의 비존재를 명백히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고는 그 생각들을 왜곡하거나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에고는 그 생각들을 존재하지 않게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에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육체적 충동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도 감추려 한다. 둘 다 에고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위협 앞에서 무엇보다 자신의 보존에 몰두해 있는 에고는 이 둘을 같은 것으로 지각한다. 이 둘을 같은 것으로 지각함으로써 에고는 자신이 휩쓸려 사라지는 것을 막으려 한다. 앎 앞에서라면 에고는 틀림없이 그렇게 휩쓸려 사라질 것이다.
하나님과 육체를 혼동하는 그 어떤 사고 체계도 제정신이 아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혼동은 에고에게 필수적이다. 에고는 오직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지 아닌지의 관점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에고의 두려움이 적어도 논리적이다. 하나님이라는 관념이 실제로 에고를 몰아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고가 그토록 밀접하게 동일시하는 육체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육체는 에고 자신의 선택으로 에고의 집이 되었다. 육체는 에고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유일한 동일시다. 육체의 취약함이야말로 그대가 하나님에게 속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에고 최선의 논거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하나님에게 속할 수 없다는 이 믿음을 에고는 열렬히 지지한다. 그러나 에고는 육체를 미워한다. 육체를 자신의 집으로 삼을 만큼 좋다고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마음은 실제로 어리둥절해진다. 에고에게서 자신이 실제로 육체의 일부이며 육체가 자신의 보호자라는 말을 들은 마음은, 동시에 육체가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는 말도 듣는다.
그래서 마음은 "내가 보호를 받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고 묻고, 에고는 "나에게로 오라"고 답한다. 마음은 에고에게 다음을 상기시킨다. 에고 자신이 육체와 동일시된다고 주장해 왔으니, 보호를 받으려고 에고에게 향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마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근거 없는 일이 아니다.
에고에게는 이에 대한 진짜 답이 없다. 답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고에게는 늘 쓰는 해법이 있다. 에고는 그 질문을 마음의 의식에서 지워 버린다. 의식 밖으로 밀려난 그 질문은 불안을 일으킬 수 있고 실제로 일으키지만, 물을 수 없기에 답해질 수도 없다.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내가 보호를 받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구하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라는 말은 그대가 알아보지도 못할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필사적으로 찾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의미 있는 찾음은 의식적으로 착수되고, 의식적으로 조직되며, 의식적으로 방향이 정해진다. 목표는 명확하게 세워져 마음에 간직되어야 한다.
배움과 배우고자 하는 마음은 뗄 수 없다. 그대는 배우려는 것이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고 믿을 때 가장 잘 배운다. 그러나 그대가 배우고 싶어 하는 모든 것에 지속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대가 배우고 싶어 하는 것들 가운데 많은 것은, 그 가치가 오래가지 않기 때문에 선택된 것일 수도 있다.
에고는 영원한 것에 자신을 연결시키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영원한 것은 반드시 하나님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영원함은 에고가 개발하려고 애써 온 유일한 기능이다. 그러나 에고는 그 일을 체계적으로 이루지 못해 왔다.
에고는 영원함이라는 문제와 타협하는데, 이는 진짜 질문과 조금이라도 맞닿은 모든 문제와 타협하는 것과 같다. 에고는 곁가지 문제에 얽힘으로써 진짜 질문을 감추고 마음 밖에 두려 한다. 에고가 사소한 것들로 특유의 분주함을 보이는 것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해서다. 풀릴 수 없도록 만들어진 문제에 몰두하는 것은 배움의 진전을 가로막는 에고가 즐겨 쓰는 수법이다.
그러나 이 모든 회피 전술 가운데, 그것을 좇는 이들이 결코 묻지 않는 단 하나의 질문은 "무엇을 위해서인가?"이다. 이것이 그대가 모든 일에 대해 물을 줄 알아야 하는 질문이다. 목적이 무엇인가? 그 목적이 무엇이든 그대의 노력을 자동으로 이끌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목적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그대는 자신의 미래 노력에 대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는 그대가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계속 유효한 결정이다.
에고는 "위협"의 진짜 근원을 알아보지 못하며, 그대가 자신을 에고와 동일시한다면 그대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에고가 그대에게 어떤 힘이라도 갖는 것은 오직 그대가 에고에게 충성할 때뿐이다.
나는 에고가 마치 스스로 행동하는 별개의 존재인 것처럼 말해 왔다. 이는 그대가 에고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며, 그대의 생각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을 에고가 이끌고 있는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그대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야기를 거기서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자신이 여기 있는 한, 또는 여기 있다고 믿는 한 반드시 갈등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에고는 그대 자신에 대한 그대의 믿음 가운데 한 부분일 뿐이다. 그대의 다른 삶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왔다. 그 삶을 분리시키려는 그대의 시도가 있었어도 전혀 영향받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늘 그러할 것이다.
4) 함께 이루는 구원
환영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그대의 형제에게 진 빚은 그대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는 그대가 나에게 진 것과 같은 빚이다.
그대가 다른 이를 향해 이기적으로 행동할 때마다, 그대는 자신이 빚을 졌다는 사실의 은혜로움과, 그 사실이 낳을 거룩한 지각을 내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거룩한"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은, 그대가 나를 포함한 아들됨 전체에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 배워 감에 따라, 지각이 다다를 수 있는 한 앎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각과 앎 사이의 간극이 너무 작아져서 앎이 쉽게 그 간극을 가로질러 흘러 그 간극을 영원히 지워 버릴 수 있다.
그대는 아직 나를 거의 신뢰하지 않지만, 그대가 인도를 구하러 그대의 에고 대신 나에게 더욱더 자주 향할수록 나에 대한 그대의 신뢰는 커질 것이다. 이 선택의 결과는 이 선택이 그대가 내릴 수 있는 유일하게 온전한 선택임을 그대에게 점점 더 확신시켜 줄 것이다.
한쪽 선택은 평화와 기쁨을 가져오고 다른 쪽 선택은 혼돈과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운 사람은, 더 이상의 설득이 필요 없다.
보상을 통한 배움은 고통을 통한 배움보다 효과적이다. 고통은 에고의 환영이며, 일시적인 효과 이상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상은 즉시 영원한 것으로 알아차려진다. 이 알아차림은 에고가 아니라 그대가 하는 것이므로, 알아차림 자체가 그대와 그대의 에고가 동일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대는 자신이 이미 에고와 영의 차이를 받아들였다고 믿을 수도 있지만, 아직은 결코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대가 에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믿는다는 사실이 그대와 그대의 에고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대는 에고를 낮추거나 통제하거나 벌함으로써 에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에고와 영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
분리된 마음은 분리시킴으로써만 그 분리를 유지할 수 있다. 이렇게 분리시키고 나면 마음은 참으로 자연스러운 모든 충동을 부인한다. 이는 에고가 별개의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대가 자신이 별개의 존재라고 믿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에고는 이 믿음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이지만, 에고가 도구로 계속 쓰이는 것은 여전히 그대가 에고를 쓰기로 결정하기 때문일 뿐이다.
누군가가 일부러 내버린 것의 가치를, 그대는 어떻게 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이 그 가치 있는 것을 내버린 것은 그 가치 있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대는 다만 그 가치 있는 것 없이 그가 얼마나 비참한지 보여 주고, 그것을 서서히 가까이 가져와 그가 다가갈수록 자신의 비참함이 어떻게 줄어드는지 배우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그가 자신의 비참함을 그것의 부재와 연결 짓고, 비참함의 반대를 그것의 존재와 연결 짓도록 가르친다.
그가 그 가치 있는 것의 가치에 대해 마음을 바꾸어 감에 따라 그 가치 있는 것은 점차 바람직한 것이 된다.
나는 그대에게 비참함을 에고와, 기쁨을 영과 연결 짓도록 가르치고 있다. 그대는 스스로에게 그와 반대되는 것을 가르쳐 왔다.
그대는 여전히 선택할 자유가 있지만, 하나님의 보상이 있는데도 정말로 에고의 보상을 원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그대를 향한 나의 신뢰가 나를 향한 그대의 신뢰보다 크지만, 언제나 그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의 사명은 매우 단순하다. 그대는 자신이 에고가 아님을 드러내며 살아가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통로를 잘못 선택하지 않는다.
거룩한 분은 나의 신뢰를 함께하며, 나의 뜻이 거룩한 분의 뜻과 어긋난 적이 없기에 속죄에 대한 나의 결정을 받아들인다.
나는 전에 내가 속죄를 주관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다만 내가 한 사람으로서 속죄 안에서 나의 역할을 완수했고, 이제는 다른 이들을 통해 속죄를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한 통로들은 실패할 수 없다. 통로들 자신의 힘이 부족한 한, 내가 나의 힘을 그들에게 빌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와 함께 거룩한 분에게로 갈 것이며, 나의 지각을 통해 거룩한 분은 그대와 거룩한 분 사이의 작은 간극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
그대의 형제를 향한 그대의 감사가 내가 원하는 유일한 선물이다. 나는 그대의 감사를 그대를 위해 하나님에게 가져갈 것이다. 그대의 형제를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대의 형제에게 감사한다면, 그대는 하나님이 창조한 것에 대해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그대의 감사를 통해 그대는 그대의 형제를 알게 되며, 참된 알아봄의 한순간은 모든 이를 그대의 형제로 만든다. 그대의 형제들 각자가 그대의 아버지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정복하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그대가 하나님의 나라이기에 나는 그대를 그대 자신의 창조물들에게로 다시 이끌 수 있다. 그대는 지금은 그대 자신의 창조물들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분리되었을 뿐 그 창조물들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그대가 한 형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때 그대는 나에게 다가가는 것이며, 그대가 그에게서 물러날 때 나는 그대에게서 멀어진다.
구원은 함께 이루는 일이다. 아들됨에서 스스로를 떼어 내는 이들은 구원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없다. 아들됨에서 스스로를 떼어 내는 이들은 나에게서 스스로를 떼어 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대가 그대의 형제들에게 하나님을 내어 주는 만큼만 그대에게 올 것이다. 먼저 그들에게서 배우라. 그러면 그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될 것이다. 이는 사랑의 역할이 하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