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좋아하는 꿈도 두려움의 꿈
진리가 그저 몇몇 환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고 그대는 믿는가? 그 환영들은 참되지 않기 때문에 꿈이다.
꿈들이 똑같이 참되지 않다는 사실이 기적의 근거가 된다. 이는 그대가 꿈은 꿈이라는 것을 이해했으며 탈출은 꿈이 아니라 오직 깨어남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는 뜻이다. 어떤 꿈들은 간직하고 다른 꿈들에서는 깨어날 수 있는 것일까?
선택은 어느 꿈을 간직할 것인가에 있지 않고, 오직 그대가 꿈속에서 살고 싶은지 아니면 꿈에서 깨어나고 싶은지에만 있다. 그렇게 기적은 자신의 은혜가 닿지 않은 채 남겨 둘 몇몇 꿈을 골라내지 않는다.
그대는 몇몇 꿈은 꾸고 몇몇 꿈에서는 깨어날 수 없다. 그대는 자고 있거나 깨어 있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꿈꾸기는 오직 그 둘 중 하나에만 속한다. 그대가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꿈들도 두려움이 드러난 꿈들만큼이나 그대를 붙들어 둔다.
어떤 형태를 취하는 것처럼 보이든, 모든 꿈은 두려움의 꿈일 뿐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안에서, 밖에서, 혹은 둘 다에서 드러난다.
또는 두려움은 유쾌한 형태로 위장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꿈에서 없어지는 일은 결코 없다.
두려움이 모든 꿈을 만드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꿈들의 형태는 바뀔 수 있지만, 다른 무언가로 만들어질 수는 없다.
그대가 두려움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기적이 그대를 여전히 두려워하게 내버려 둔다면, 참으로 배신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깨어나려 하지 않을 것인데, 기적은 바로 그 깨어남을 위한 길을 예비한다.
가장 단순한 형태로 말하자면, 공격은 그대가 지각하는 그 역할이 채워지지 않은 데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대 안에 있을 수도, 다른 누군가 안에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지각되는 곳이 바로 공격받는 곳이 될 것이다.
낙심이나 습격이 모든 꿈의 주제일 수밖에 없다. 그 꿈들이 두려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 꿈들이 감싸일 수 있는 즐거움과 기쁨의 얇은 위장은, 그것들의 중심에 있는 두려움이라는 무거운 덩어리를 조금 가릴 뿐이다. 그리고 기적이 지각하는 것은 바로 이 두려움이지, 그 꿈을 감싸고 있는 포장이 아니다.
그대가 화가 날 때, 그것은 누군가가 그대가 그에게 할당한 역할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리고 이것이 그대의 공격이 정당하다는 '이유'가 되지 않는가?
그대가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꿈들은, 그대가 부여한 역할들이 채워진 꿈들이다. 그대가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는 필요들이 충족된 것이다.
그 필요들이 충족되었는지 그저 바랐을 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 필요들이 존재한다는 관념이다.
꿈들은 더 많이 바라거나 더 적게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바라거나 바라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각각의 꿈은 그대가 부여한 어떤 역할을 나타낸다. 어떤 사건이나 육체나 사물이 나타내야 하고 그대를 위해 이루어야 할 어떤 목표를 나타낸다.
그 역할이 성공하면 그대는 그 꿈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실패하면 그대는 그 꿈이 슬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역할의 성공이나 실패는 꿈의 핵심이 아니라 그저 얄팍한 포장일 뿐이다. 그대가 꿈에 담긴 모든 등장인물에게 '적절한' 역할을 부여하는 자가 아니었다면, 그대의 꿈들은 얼마나 행복해졌을까. 실패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그대의 관념뿐이며, 배신도 오직 이 관념에 대해서만 있을 뿐이다.